전기연구

 



1. 전기연구
2. 자서전연구

'''Biographical research'''

1. 전기연구


전기연구란 서사연구(narrative research)의 한 종류로, 전기(傳記)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즉, 어떤 특정 개인의 삶과 그 경험을 제3자의 시선에서 정리하여 서사적인 방식으로 마치 이야기하듯이 서술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연구하는 것이다. 즉, 전기연구에는 특정 개인이 있고, 전기 작가가 있고, 연구자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전기는 인문학, 특히 문예 분야에서 창작 활동의 하나로 여겨져 오랜 세월 동안 많이 저술되어 왔다. 특정 인물에 대해 글쓰기를 하는 과정에서 문학적인 측면을 부각시킬 수 있으며, 인물의 행적을 빌어서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는 한편으로, 후배 인문학자들은 선배 문필가나 시인, 소설가들의 행적을 통해 그들의 작품세계를 더욱 잘 파악하기 위한 의미에서 전기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윤동주 시인의 시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윤동주 개인에 대한 전기연구 논문이나 평전을 독파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전기연구는 문예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전기연구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 이는 생애사(life history)와 같은 서사를 통해 사회현상의 숨겨지고 가려졌던 부분들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에 탄력을 받아 왔다. 당초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카고 지역의 사회학자들로부터 시작된 서사연구의 첫 발흥은, 이후 한동안 사그라들었다가 다시금 독일 사회학계의 해석학적인 움직임에 부응하여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전기연구(그리고 구술사연구)의 경우 스웨덴 사회학계에서 창립한 "Biography and Sociology" 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유럽의 사회학자들은 개인의 일대기 속에서 그 개인이 처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조건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이후 이를 위해 문예비평 분야의 이론들과 연계하고 페미니즘 인식론을 덧붙임으로써, 오늘날 사회과학계에 전기연구는 하나의 의미 있는 질적 연구방법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철학적으로 보아, 전기연구는 라이트 밀스(C.W.Mills)의 사회학적 상상력, 장 폴 사르트르(J.Sartre)의 《The Family Idiot》 및 《Search for a Method》, 그리고 자크 데리다(J.Derrida)의 해석 이론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과학계에서 전기라는 매체를 고스란히 연구주제로 가져다 쓰기에는 방법론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전기라는 매체가 갖는 고유의 기본 전제(basic assumption)를 먼저 파악하고 그것의 적용 가능성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와 관련하여 노먼 덴진(N.K.Denzin)은[1] 여섯 가지의 기본 전제가 잠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 전기연구는 잠재적으로 독자의 존재를 상정하고 쓰이며, 따라서 전기 작가는 자신의 관점과 독자의 관점을 모두 고려한 글쓰기를 한다. '''둘째,''' 전기 작가 본인이 가부장제중산층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상태일 수 있다.[2] '''셋째,''' 전기는 암묵적으로 그 이야기의 시작점을 주인공의 가족에 대한 내용으로부터 시작한다. '''넷째,''' 전기는 그 인물의 이야기에 명확한 시작과 끝이 존재함을 가정한다. '''다섯째,''' 전기는 모든 삶에 (그것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간에) 그 내용을 기록하고 경험에 의미를 부여할 자격을 갖춘 누군가가 존재함을 가정한다. '''마지막으로,''' 전기는 그것이 다루려는 이야기가 '실제' 세상 속에 있었던 '실제' 개인이 '실제로' 겪었던 일임을 가정한다.
문제는 여기서 불거졌다. 시카고든 유럽이든 간에 종래의 전통적인 접근에 따르면, 전기는 명백히 사실성(facticity)에 입각하며, '''객관적이고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는 매체'''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미 일찍부터 문학계에서는 전기가 문학적이고 허구적인 요소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점화시킨 인물이 바로 자크 데리다이며, 이에 영향을 받아 덴진 역시 자신의 저서에서 "해석적 전기"(interpretive biography)로의 전환을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전기의 텍스트는 실제 삶을 정확하게 '포착' 하여 '표상' 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허구적이고 서사적인 사회적 텍스트'''(social text)에 불과한 것이다. 전기는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 같은 것이 아니며, 언어와 상징, 그리고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리저리 필터링되고 해석될 뿐이다. 다시 말해, 전기 작가는 그 인물의 실제 삶에 접근할 수 없고, 단지 제 나름의 해석(interpretation)을 통해서 인물의 재창조를 할 뿐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는 그 전기를 읽는 독자의 경우에도 매한가지다.
결국, 전기의 사회과학적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이것이 얼마나 진실(truth)이냐, 얼마나 사실(fact)에 입각했느냐" 같은 종래의 기준은 크게 비판 받게 되었다. 서사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핍진성(verisimilitude)만을 보장하는, 믿을 만한 허구(trustful fiction)이자 현실의 서사적 배열(narrative arrangement of reality)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대신 자리잡았다. 전기가 개인의 삶에 있어서 연대기적으로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보고하는 것이 아닌, '''일정한 목표와 동기, 의도에 맞추어서''' 몇몇 강조점들을 제시하고, 그 삶 속의 중요한 경험이나 전환점(turningpoint)들을 거론하는 이상, 이미 그 이야기는 '''원본에서 한 차례 가공 처리된 해석본'''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개인의 생애는 본질적으로 개방되어 있고, 미결되어 있으며, 모호하고, 다수의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3] '해석적 전기' 라는 새로운 관점은 서사연구 분야에서 기존의 사실-허구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다.
그렇다면 아예 극단적으로 가서, 전기 작가가 (혹은 자서전의 작가, 즉 본인이) 아예 대놓고 '''거짓말을 친다면''' 어떨까? 어떤 사람들은 이중생활을 하면서 겉으로는 고고한 위인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추악한 면을 지녔을 수도 있는데, 이 사람의 외견만을 전기 작가가 쓴다거나 혹은 본인이 자서전을 쓴다면, 그래도 "어차피 어느 정도씩은 믿을 만한 허구" 라면서 긍정할 수 있을까? 물론 이는 극단적인 사례지만, 실제로 면접법을 진행해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조차 무엇이 명확한 사실이고 명확히 거짓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은 경우도 있고, 때로는 거짓인데도 사실이라고 믿어서 부지불식간에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주로 제시되는 답변으로는, 어차피 모든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공유되는 인식이 존재한다는 점, 이중생활조차 공적 전기(public biography)의 수준에서는 개인의 일부일 수 있다는 점, 어차피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증언들이나 기술들이 전부 혐의를 벗을 수 없다는 점 등이 있다. 덴진은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며,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이의 삶에 대해서 설명할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고 하였다.
한편 유명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Bourdieu)가 1986년에 '''전기적 허상'''(biographical illusion)이라는 엄청난 떡밥(…)을 던져서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전기라고 해 봐야 결국에는 '''단속적인 사건과 일화들이 응집력 없이 나열된 모음'''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인간의 생애를 지하철 노선에 비유했는데, 각각의 사건들은 지하철 역과 같고, 각 역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즉 역 하나만으로는 승객이 이용할 수 없지만) 비로소 노선이라는 거시적인 '구조' 수준까지 올라와야만 의미를 갖는다는 (즉 승객이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동조하는 다른 학자들은 실제로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심지어 자서전이라 할지라도) 늘 중심 인물의 자아는 불안정하고, 잠정적이며, 변화하고, 일관되지 못하게 묘사되고 있다고 거들기도 했다. 반면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사회적 수준에서의 일관성이 없을지라도 개인적 수준에서의 일관성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전기 작가는 일관성의 존재를 주장하고 연구자는 부재를 주장한다면 도대체 누가 옳은 것인가 하는 점을 들어서 비판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어째서" 개인이 전기라는 매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다.

2. 자서전연구


'''Autobiographical research'''
전기연구와 유사한 서사연구들 중 하나이다.[4] 전기연구가 3인칭 시점에서 타인의 삶을 관찰한 바를 연구하는 것이라면, 자서전연구는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 회고한 바를 연구하는 것이다.[5]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저술한 저서전인 《고백록》 을 연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기연구에 있어서 객관성을 논하는 것이 상기했듯 구식의 접근으로 취급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서전연구는 일반적인 전기연구에 비해서 좀 더 주관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존 이킨(J.P.Eakin)은 《Fictions in Autobiography》 에서, 대개 문예비평 분야보다는 역사학사회과학에서 자서전연구를 할 때 서사와 사실을 구분하려는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고 언급하였다. 대개 자서전연구의 방법론적인 논의는 위의 전기연구와 함께 묶여서 취급되므로, 여기서는 중복된 설명은 생략한다.
누차 언급했듯 사실성과 허구성의 구분이 어차피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결국 문학적 글쓰기에 있어서 전기나 자서전이라는 장르가 소설과 크게 구분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가져볼 수 있다. 즉, 이 세 가지 장르는 공히 한 개인의 삶에 대한 서사라는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소설은 다른 두 가지와는 달리 그것이 허구임을 명확하게 밝힌다는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점이 희석된다면 글쓰기의 본질에 있어 세 장르는 통합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기적 소설이나 자서전적 소설과 같은 시도는 문학계에서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며, 이미 이 장르로 세계적인 대박을 터뜨린 작품도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문헌인 최경도(2008)의 경우,[6] 전기와 자서전은 인물 분석에 좀 더 치중하는 반면 소설은 인물의 존재를 묘사하는 데 좀 더 치중하는 등의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세 장르의 공통점이 크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최경도(2008)는 세 장르의 통합이 "하나의 가정이 아닌 실질적 요구"(p.129)가 되었다고 결론을 도출한다.
[1] Denzin, N. K. (1989). Interpretive biography. CA: Sage Publications.[2] 이와 관련하여 그는 인류가 꽤 오랫동안 여성들의 삶은 전기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 왔음을 지적한다.[3] 덴진은 예술 기법인 펜티멘토(pentimento)에 삶을 비유하는데, 삶 속의 사건들은 어떤 그림 위에 새 그림을 덧그리는 것과 같아서, 시간이 지나 "새롭게" 나타난 측면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더 예전에 나타났다가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고 설명한다.[4] 노먼 덴진은 온갖 수많은 유사 용어들을 정리하면서, 이것들 각각에 대해서 구분될 수 있는 고정되고 명확한 의미의 정의를 내리려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심지어는 그것이 이성중심주의적(logocentric)이고 부적절한 과학성의 적용이라고 비판했다.[5] 필립 르쥔(P.Lejeune)은 자신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산문체로 저술하는 글쓰기 활동을 자서전이라고 정의하였다.[6] 최경도 (2008). 전기, 자서전, 소설: 자기표현 양식의 변화. 외국문학연구, 30, 117-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