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사연구
'''Oral History Research'''
口述史硏究
1. 소개
질적 연구방법론의 하나로, 협의의 구술사연구는 구술자료를 생산하는 '''구술채록 활동'''을 의미하지만, 광의의 구술사연구는 그 생산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쓰기'''를 하는 행위를 말한다.
구술사연구는 역사인류학, 문화인류학, 사학, 사회학, 국어국문학, 여성학, 민속학, 문헌정보학, 기록관리학, 각종 예체능 분야 등지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받아들여져 사용되고 있는 연구방법이다.''' 사학계는 하술할 이유로 인해 주로 구술채록에만 관심을 보일 뿐, 구술사연구에는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결과 윤택림(2016)에 따르면[1] 전체 구술사연구의 단 30% 정도만이 사학계에서 수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회학 및 여성학계'''에서 크게 환영 받고 있어서, 사회학의 《세계의 비참》 같은 단행본이 그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한편 '''민주화 운동이나 저널리즘 분야'''에서도 활용되고 있는데, 예컨대 전남사회운동협의회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증언록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가 바로 구술사연구를 접목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문예창작 분야'''에서도 소설을 쓰기 위해서 먼저 구술채록을 실시하거나, 혹은 구술채록 그 자체를 소설화하기도 한다. 대표적 사례로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Alexievich)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를 들 수 있다.
구술사연구는 1945년 종전 이후부터 연구방법으로서 출현하게 되었는데, 알리스터 톰슨(A.Thomson)에 따르면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시기'''는 세계대전 피해자의 구술증언을 바탕으로 하는 민중사(people's history)의 성격으로 나타났다. '''둘째 시기'''에는 1970년대 후반 이후 실증주의를 거부하고 역사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대두되었다. '''셋째 시기'''는 1990년대 이후를 가정하는데, 디지털기술 및 매체의 발전 덕분에 구술채록에 도움을 받아 나타난 양적 성장기이다.
미국에서는 미국구술사학회(Oral History Association)가 1966년에 창립되었으며, 그 이전에 이미 1948년에는 앨런 네빈스(A.Nevins)가 세계 최초의 구술사 연구기관으로서 '구술사연구소' 를 컬럼비아 대학교에 설치한 바 있었다. 해외의 유명 학자로는 영국의 폴 톰슨(P.Thompson),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로 포르텔리(A.Portelli) 등이 있으며, 특히 포르텔리는 2019년 6월경에 국내에 방한하기도 했다.
구술사연구의 철학적 배경으로는 역사수정주의, 다문화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반-실증주의, 그리고 페미니즘 등이 거론되고 있다.
2. 설명
구술자료는 최대한 간략하게 압축해서 정의하자면 "과거에 대한 증언" 으로, 구술기록 및 구술사료로 불리기도 한다. 구술자료는 매체의 종류에 따라 음성자료, 문자자료, 영상자료로 나누어지며, 내용에 따라서는 구전(oral tradition), 구술증언(oral testimony), 구술생애사(oral life history)로 나누기도 한다. 이런 자료들은 사학계에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문헌자료를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윤택림과 함한희(2006)는[2] 구술자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구술성(orality) : 구술자료는 구어체가 기본이고, 상황에 크게 의존적이며, 별도의 녹취록(transcript)을 필요로 한다. 전통적으로 구술자료는 그저 문헌자료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한 보충물로만 이해되었으나, 구술생애사 관점이 두드러지면서 구술자의 생애적 위치와 의사결정 및 삶의 선택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구술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 주관성 : 개인적 경험이 회상되는 자료이며, 연구자는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구조 사이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구술자료의 주관성은 하술하게 될 '역사적 사실' 에 관련된 논쟁을 낳았으며, 실증주의를 지향하는 사학계에서 받아들이기에 큰 난점으로 작용한다.
- 서술성(narrativity) : 구술자료는 이야기체의 형태로, 플롯과 인과관계, 시간화(periodization)가 나타난다. 게다가 구술자료는 문화권에 따라 특유의 서사적 특징이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 중노년 여성의 구술채록을 실시할 경우, 한(恨)의 정서나 신세타령 등이 빈번히 나타난다고 한다.
- 공동작업 : 구술자료는 연구자와 구술자 공동의 생산물이다. 이는 다른 연구방법에 비해서 구술자를 단순히 피면접자 내지는 정보원 수준으로 다루지 않고, 연구의 제반 과정에 참여시키는 권력화(empowerment)를 보장했다는 장점 때문이다. 이것은 90년대 이후의 최신의 여러 질적 방법들이 권력화를 강조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 신빙성 문제 : 구술자료는 늘 그것이 "정말로 그때 그랬느냐" 는 문제에 봉착한다. 연구자는 구술자료의 사실적 진실(factual truth)을 좇기보다는, 서사적 진실(narrative truth)로서 간주하고 자료를 신뢰할 수 있다.
김귀옥(2014)에 따르면[7] '''구술사연구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소위 '''"기록 없는 사람들"''', 즉 국가폭력의 피해자, 전쟁 피해자, 사건사고의 피해자, 사회적 피억압자 등, 자신의 경험과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가는 사람들의 역사를 연구의 형태로 담아낼 수 있다. 물론 소위 "엘리트구술" 이라 하여, 피억압 엘리트들, 예컨대 반체제 운동가나 민주화 운동가, 재야 정치인, 혁명가 등의 경험을 남기는 것도 가능하며, 국내에서는 비단 피억압자들이 아니더라도 전직 대통령 참모진이나 외교관 등의 엘리트들도 많이 연구되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권력화라는 점에서 구술자의 연구참여도가 대단히 높은 '권력 평등한' 연구에 속한다는 점도 질적 연구자들에게 매력적이다. 또한 통계나 공문서와 달리, "왜?" 에 대한 대답이 용이하다는 것 역시 많은 연구자들이 구술사연구를 채택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학문적'''으로는 문화(사학), 일상(사학), 지역(사학) 등에 탁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인정되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아픈 기억으로부터 구술자를 해방시키고 이들의 문제를 의제화한다는 대의가 있다.
그렇다면 '''구술사연구의 한계'''는 없을까? 김귀옥(2014)에 따르면, 구술사연구는 구술자의 '''기억에 의존'''하므로, 기억의 정확성이 떨어지고 왜곡되는 과정에서 '사실 그 자체' 가 아닌 '사실에 대한 재현' 을 연구하는 것이 된다. 또한 구술자가 처한 맥락 속에서 사투리, 은어, 토착문화 등에 대한 사전 이해가 없으면 연구가 어렵고, '''주관성'''이 개입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논하기 위한 목적에는 적합하지 않다. 또한 비록 권력화를 보장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연구를 하는 사람은 연구자이므로, 연구자가 녹취록의 '''해석권'''을 갖고 자의적으로 해석할 힘이 있다. 이 문제 때문에 연구자는 자신의 해석을 절대화해서는 안 되며, 자신이 놓친 '더 큰 전체' 는 없는지 통찰력 있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구술자료의 수집'''은 거의 대다수가 '''구술채록 및 심층면접법'''(IDI; in-depth interview)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국내의 경우 연구 초기에는 구술채록이 다수였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IDI에 의존하는 비중이 증가했다. 물론 함한희(2010)처럼 연구의 편협함을 예방하고 포괄적인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 구술사연구에 민족지학의 연구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제안하는 등, 새로운 시도는 이루어지고는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료수집이 절대 간단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구술사연구회에서 펴낸 《구술사: 방법과 사례》 에서는 "녹음기만 들고 나서면 된다" 는 일각의 오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철저히 준비해야 하는 것이 바로 구술자료의 수집과정이라는 것이다.
구술채록이나 IDI는 구술사연구에서 쓰일 경우 좀 더 골치가 아픈데, 일단 연구 대상자 자체가 소위 말하는 "취약계층" 인 경우가 많은데다 연구주제 자체도 소위 말하는 "민감한" 것들을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료수집의 용이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물론 있지만, 거꾸로 자료수집이 더 쉬워지는 요인들도 존재한다. '''노인'''들의 경우, 우선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자료수집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8] 자기 생각을 사후에도 후손들에게 전수해 주려는 의향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경우도 있다. '''엘리트'''나 사회지도층, 명망가들 역시 증감요인이 있다. 이들의 바쁜 일정은 연구자의 발목을 잡지만, 오히려 이런 사람들일수록 회고록이나 자서전, 강연자료가 다수 있기 때문에 연구자가 사전 준비를 하기에 수월하다. '''정치인'''이나 군인의 경우, 이념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구술을 꺼릴 위험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나쁜 일은 자기합리화를 하고 좋은 일은 자기 업적으로 과장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적극 응할 수도 있다. '''사건사고 피해자'''의 경우 트라우마로 인한 감정적 탈진 때문에 연구자들을 피해다니기도 하지만,[9]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호소하고자 하는 의향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연구자를 반기게 될 수도 있다.
주혁(2012)은[10][11] 근현대 지역사의 관점에서 '''구술사 현장조사'''(field work)의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한다. 어떤 경우에도 연구자는 '맨땅에 헤딩'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요지다. 일단 지자체 공무원들과 같은 사회적 관계망 내지 인적 네트워크를 갖출 필요가 있으며, 지역의 유력자 내지는 단체의 장과 같은 영향력 있는 개인을 컨택해서 섭외하는 재간이 필요하다.[12] 구술자료에 더하여 다른 자료들을 획득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이들과 신뢰를 쌓고, 이들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현장 대응력'''에 있다. 주혁(2012)이 언급하는 몇 가지 흥미로운 팁을 여기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외로 자료소장자 및 구술자가 가장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13] '''둘째''', 현대사 자료는 고문서와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14] '''셋째''', 자료를 찾으러 가서 실패했다면, 그 실패한 지점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점점 밖으로 탐색해 나가야 한다.[15]
구술사 연구자들이 채록이나 면접을 치르다 보면 필연적으로 '''녹취록'''을 작성하고 관리하게 되는데, 이호신(2017)은[16] '''녹취록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부터 학계가 벗어나야 한다'''고 권고한다. 녹취록이라 함은 구술자료 그 자체의 원천자료(raw data)가 아니라 원천자료를 문자의 형태로 변조시킨 자료인데, 옛날이야 어쩔 수 없었다 쳐도 녹음기술과 카메라 등이 보편화되고 경제적이게 된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이상하게 관습적으로 애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녹취록은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전달하기가 어렵다. 강재성(2019)이 언급하듯[17] 녹취록만 보면 분노에 차서 빠르게 퍼붓는 듯해 보이는 말들도 막상 현장의 채록자는 울음을 삼키며 짤막짤막 말을 잇는 구술자를 목격했을 수 있다. 이런 문제의 대안으로서, 강재성(2019)은 어조나 말투, 의성어는 구술자의 심층심리를 묘사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지시문을 최소화하고, 구술자의 심정을 가장 잘 뒷받침하는 비언어적 단서는 바로 '''신체적 동작'''이므로 이 부분을 적극 묘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이호신(2017)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국회도서관에서 서비스하는 '''구술기록 영상서비스''', 그리고 민주화운동사업회에서 '''유튜브'''를 활용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유튜브의 경우 영상 재생 도중에 자막으로 녹취문을 함께 띄워줄 수 있다고.
아무튼 구술자료가 다 수집되었다면 이제는 '''구술사 글쓰기'''를 할 차례다. 김귀옥(2010)은[18] 현지조사 후 녹취를 실시하고, 녹취된 내용을 분석하여 글쓰기를 실시하며, 글쓰기가 완료되고 나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추가조사 및 보완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특히 여기서 수집해야 할 정보들 중에는 온갖 개인정보와 공적 자료들이 모두 포함되기에, 연구자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우선, 각 개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나 거주지역, 직업이 모두 표기된 '''가계도'''를 확보해야 한다. 쉽게 말해 '''구술자의 호구조사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구술자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며, 이 정보가 있다면 가계의 세대이동, 지역이동, 사회적 지위의 이동, 문화적 변화 등이 모두 추적될 수 있다. 다음으로, 구술하는 과거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지리적 지도''' 및 '''사회적 지도'''를 별도로 확보해야 한다. 예컨대, 해방기 읍내의 생활을 주제로 구술하게 되었다면, 구술자가 떠올리는 당시 거리의 모습을 지도로 그리고, 공공기관에 가서 당시 실측 지도의 복사본까지 받아와야 한다는 것. 이런 정보들까지 글쓰기 과정에서 모두 포함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구술사연구를 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완료되었다면 이제 채록 등을 통해 '''수집된 자료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이제 담당 학문은 사학이 아니라 문헌정보학 및 기록관리학으로 넘어가게 된다. 최정은(2012)은[19] 이에 대한 답변으로 '''구술 아카이브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서구에서는 1970년대부터 안드레아 힌딩(A.Hinding)의 주도로 문서화(documentation) 전략이 진행되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개인기억을 의도적으로 수집하고 기록화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초 국내 기록학은 2000년대 중반부터 국가기관에서 생산하는 공공기록물을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에만 골몰하고 있었으며, 과거사 규명운동 등이 진행되면서 구술자료가 양산되자 "우리 시스템에서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의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록학계에서 구술자료를 수용한다는 것은 이 분야에게도 가벼운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아키비스트가 '진리의 수호자',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아카이브 구축' 의 목표를 폐기하고 '아카이브의 권력성' 및 '사회적 기억 구성자' 의 '''구조적 성격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기록학의 기존의 관심이 'what', 'when', 'how' 에 그쳤다면, 이제는 'why' 까지도 확장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
이와 관련하여 김명훈(2013)은[20] 디지털 구술 아카이빙의 현실적 어려움을 제기한다. 구술자료는 더 이상 메모장이나 카세트테이프가 아닌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지는 시대가 되었는데, 현재 상태로는 기록물의 국제 표준인 ISO 15489 "진본성, 무결성, 신뢰성, 가용성" 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말인즉슨 이제 이 구술자료들은 내용의 변조, 복제, 편집이 너무 쉬워서 진본성 여부도 불투명하거니와 관리와 통제가 어렵고, 기술의존성이 지나치게 커서 특정 파일 포맷과의 호환성 여부를 늘 신경써야 하며, 아날로그보다 안정성이 떨어지는 디지털의 특성 상 영구적 보관이 불가능하고, 내용과 맥락 및 구조가 전부 따로 놀기 때문에 별도의 메타데이터가 필수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김명훈(2013)은 ISO 14721 "OAIS 참조모형" 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2.1. 구술자료의 실증 논쟁
구술사연구는 사학계에 굉장한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다. 긍정적으로 보는 논자들은[21] 구술사연구가 학계에 '열린 사관(史觀)' 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사학계의 주류 패러다임은 역시나 레오폴트 폰 랑케(L.von Rankes)의 '''역사실증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명확히 실증되고 교차검증될 수 있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전체사(total history) 및 경제사 등을 연대기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구술사연구는 이런 흐름에 있어서 거의 철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수준에서부터 일종의 '빅엿'(…)을 날리는 방법론이었기 때문.
구술사연구는 본질적으로 구술자의 구술배경과 의도를 찾아가는 데 초점을 맞출 뿐, 역사를 실증하거나, 역사적인 사실(fact)을 찾거나, 이미 확립된 역사의 일부 누락된 부분을 찾아 메우거나, 기존의 문헌과 사실관계를 비교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연구라고 볼 수 없다. 이는 구술자료 특유의 (위에서 설명했던) 주관성에 기인하는데, 많은 사학자들이 구술자료의 '왜곡', '비공식성', '불확정성', '불명확함' 을 들어서 '''사학적 가치가 없는 자료''' 내지는 '''문헌적 자료에 비해서는 2등 자료'''인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래서 90년대 즈음의 국내 구술사 연구자들도 이 문제로 고생을 많이 했으며,[22] 초기에는 "문헌적 자료의 보완적 자료", "나름대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는 자료" 라는 식으로 세일즈를 시도했지만, 구술자료가 대량으로 존재하고 KCI 등재저널도 하나 만들어낸 2010년대에는 '''주관성 자체가 단점이 아니라 하나의 장점'''이라고 차별화를 꾀하는 중이다.
구술사에 호의적인 연구자들은 물론 소위 '사실과 구술 사이의 간극' 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간극조차 '''사실의 일부'''로 봐야 한다거나, 사실로부터 변형된 부분을 사실 자체로부터 체계적으로 떼어놓으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비판한다. 또한, 구술자료가 문헌자료에 비해 더 주관적이라는 주장은, '''문헌자료의 편향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관점이라고도 비판하고 있다.[23] 또한 이들 연구자들은 일명 '''"기억투쟁"'''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기억은 비공식적이고 낮은 수준의 역사가 아니며, 역사는 공식적이고 확정된 기억이 아니고, 오히려 역사는 '''기억과 기억 사이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대문자 역사" 의 담론을 전복하자는 말도 된다.[24] 요컨대 구술사 연구자들은 '''실증될 수 있는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념적으로서가 아니라, 방법론 자체가 사실의 추구와 너무나 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술채록의 경우, 실제로 연구자가 "...지금 말씀하신 바가 사실이라는 것이죠?" 라고 질문할수록 구술자는 자신없어하거나 당혹스러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구술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 사실의 서사적 재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술사는 '''사학계의 연구방법론임에도 정작 사학계보다 사회과학계에서 더 잘 써먹는 연구방법론'''이 되었다. 사학계가 구술사연구에 대해서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문헌들이 존재하는데,[25] 상기한 바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사학계가 구술사연구를 받아들이게 되면 과거의 사실에 대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현재 시점의 복잡한 정치적 동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기록학에서의 의미와 유사하기도 하다.) 다시 말해, 사학이라는 학문적 정체성이 "과거를 논하는 학문" 인가, 아니면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 학문" 인가로 갈릴 수 있는 '''거대한 떡밥'''이 된다는 얘기다. 구술사연구의 전복적 성격, 즉 "기록 없는 사람들" 의 많고 다양한 대항기억들을 내세워서 기존에 확립된 연대기를 전복시키는 성격 때문에, 사학계는 구술의 가치를 인정한다 해도 구술채록 이상으로는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한다. 게다가 이런 대항기억이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서도 "포퓰리즘적 역사쓰기를 할 셈이냐" 면서 항의하는 중.
말이 나온 김에 '''역사와 기억의 관계'''에 대해서 윤택림(2016)이 정리한 바를 조금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기억 대립론(history or memory) : 피에르 노라(P.Nora)가 대표적이다. 대항기억, 기억의 장소(site of memory), 밑으로부터의 역사, 민중의 기억의 회복 등을 강조한다.
- 기억으로서의 역사(history as memory) : 피터 버크(P.Burke)가 대표적이다. 회상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remembering), 대중기억, 집합기억 등을 강조한다.
- 역사-기억 보완론(history and memory) : 자크 르 고프(J.Le Goff) 및 나탕 바슈텔(N.Wachtel)이 대표적이다.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 기억의 역사들, 문화적 기억 등을 강조한다.
2.2. 연구윤리 논쟁
이처럼 당초에는 "사학의 민주화", "역사의 민주화", "소외된 자들의 역사기록" 등의 찬사를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역사 연구방법이지만, 곧 구술사연구는 연구윤리라는 뜻밖의 지점에서 거센 비판에 마주치게 되었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구술사연구가 '취약한 사람들' 에게 '민감한 사건' 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요청한다는 특성에 있었다. 이는 곧 '''구술자에게 자기 트라우마를 꺼내놓으라고 하는 게 윤리적인 행동인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정혜경 연구원에 따르면 심지어 구술사는 "민주적이지도 않고 민중적이지도 않은" 방법론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구술자에 대한 연구자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맥락에서 '''약탈적 구술'''이라는 표현을 내세웠다. 간단히 말해 구술자가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라고 구술 도중에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약탈적 구술이라는 것으로, 구술자와 진정으로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구에 필요한 도구로서 '쓰고 버리는' 휴지처럼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실 잠재적으로 논란이 불거질 만한 문제들은 한도끝도 없이 튀어나온다. 아니, 오히려 답을 내놓으려 할수록 더 복잡한 질문이 튀어나오는 식이다. 예컨대, 구술자의 '말하지 않을 권리' 는 없는가? 연구자가 집요하게 유도성 질문을 던진다면 그것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항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 연구자는 '역사에 기록을 남겨야 할 의무' 를 저버려도 되는가? 양측의 권리와 의무 사이에서 가장 흔한 타협은 결국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협력이 필요하다는 논리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그것도 라포(rapport)를 깨지 않기 위해 어느 한쪽이 억지로 예, 예 하면서 맞춰주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엘리트구술은 어떨까? 엘리트들은 '취약한 사람들' 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울지도 모른다. 실제로 2013년 제4회 한국구술사네트워크 워크숍 라운드테이블에서는 엘리트구술 중에 '''연구자와 구술자 간의 권력관계가 역전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런 경우 연구자는 나이도 고령이고 사회적 지위와 권력도 어마어마한 높으신 분이 모처럼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연구에 '황송하게도' 참여해 주었는지라 이 구술자에게 질질 끌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엘리트 구술자들은 "내가 준비한 대로만 말하겠다, 넌 듣기만 해" 라는 식으로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미리 A4용지에 답변을 준비해서 눈도 안 마주치고 줄줄 읽고는 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연구자가 사전에 준비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면 버럭 역정을 내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토론에서 정혜경 연구원은 엘리트구술에 있어서도 약탈적 구술은 나타날 수 있으며, '''단지 그 정도의 경중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변하였다.
아무튼 구술자의 트라우마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김귀옥(2010; 2014)은 자료집을 만들고 끝낼 게 아닌 이상에야 반드시 '''그에 대한 후속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구술자가 자신의 고통을 객관화하도록 돕고, 연대와 공감, 지지를 표명하며, 필요하다면 사회적으로 의제화하거나 문제제기를 하고, 해결을 위한 제도적 압력을 가하는 것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귀옥(2010)은 구술사연구가 민중의 작품이 아니라 엄밀히는 지식인의 작품인 만큼, "지극히 성찰적 자세가 요구된다"(p.109)고 경고하였다.[26] 비슷한 맥락에서 이나영(2012) 역시[27] 여성학계에서 구술사연구를 활용할 때 연구의 제반 과정에서 나타나는 권력관계를 성찰하고, 결과적으로는 연구자 자신이야말로 특권적 위치에 있음을 반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트라우마를 안전하게 구술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도 제시되었는데, 김향수(2019)는[28] 구술자가 자기검열을 하지 않고 발언하는 것,[29] 구술하더라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에서 구술하는 것, 연구에 대한 충분한 사전 정보를 안내 받고 구술하는 것, 연구자는 세심한 질문자가 되고 공감적인 청자가 되는 것, 그리고 라포를 형성하는 것을 들고 있다.
그 외에도 '''구술사연구의 법적인 문제들'''도 종종 거론되어 왔다. 이호신(2010)은[30] 구술자료의 '''저작권'''에 관련한 문헌에서, 구술자료(녹음, 녹화, 녹취)는 구술자와 채록자 모두의 공동저작물로 간주되어야 하며, 자료활용이 필요할 경우 '구술자료 공개허가서' 양식을 통하여 구술자와 채록자 모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구술자료가 법적으로 어문저작물에 속하며, 저작인격권과 저작재산권이 부여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Park(2016)은[31] '''연구윤리위원회'''(IRB)가 구술사연구의 고유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심의를 진행함으로써 현장의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인류학계의 경우 구술자의 익명성을 지켜주어야 하지만, 구술사연구의 경우 오히려 구술된 자료를 최대한 공개하고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구술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라'''는 IRB의 요구는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구술사연구는 많은 경우 연구에 대한 구두동의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그 특성상 정부기관 불신자나 공문서 불신자들이 많기 때문에 연구동의서를 서면으로 받을 경우 오히려 라포가 깨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의무적으로 연구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는 IRB의 기준이 구술사연구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가능하다는 것. 아무튼 이런 문제로 인하여 1995년 이래 구술사연구를 규제대상으로 두고 있던 미국의 경우에도 2016년에 비로소 규제대상에서 제외하게 되었는데, 국내에는 자체적인 '''대안적 가이드라인'''이 아직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고.
3. 국내의 현황
국내에는 2009년부터 한국구술사학회가 설립되어, 한국구술사네트워크 학술활동 및 자료집, 증언집, 총서 등을 발간하고 있다. 관련기관으로는 한국학중앙연구원(현대한국구술자료관), 국립국어원, 역사박물관, 예술자료원, 한국영상자료원, 국가기록원, 국립여성사전시관, 국사편찬위원회, 전통문화연구소,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등이 있으며, 주로 '''관변사업의 형태'''로 구술사연구의 대다수가 진행되는 경향을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위해서도 구술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윤택림(2015)은[32]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채록사업,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등에 대해 정부가 의욕 있게 추진했기에 구술자료의 양적 팽창이 가능했다고 인정하면서도, 수집된 자료를 정리하고 활용하는 것보다는 채록과 수집 그 자체에만 더 골몰했다고 검토하고 있다. 정부는 구술채록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 위해 《현황과 방법, 구술 · 구술자료 · 구술사》 를 출간했으나, 현장에서는 채록 과정에서 대부분 사실성(factuality)에 치중하며, 연대기적 구술을 요구하고, 주제에 관련된 것이 아니면 채록자가 말을 끊는 등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자료수집 보고서가 표준화되어 있지 않아서 종종 매우 불성실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국내 구술사연구의 '''역사 및 동향'''은 다음과 같다. 최초의 구술채록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이루어진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며, 연구의 일환이기보다는 '''사회정치적 운동'''으로서 운동가, 언론인, 재야 정치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인류학계에 의해 1990년대 들어 최초로 학문적인 도입이 이루어졌지만, 이조차도 민주화 운동의 맥락에서 일종의 '기억하기 운동' 의 성격으로 접목된 것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성과로는 민중사학자들의 《한국민중구술열전》 등을 들 수 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상기했던 문헌-객관 & 구술-주관 프레임이 강하게 지배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으나, 2000년대 중엽 이후로는 구술자료가 대량 생산되고 《구술사연구》 학회지가 KCI에 등재되면서 인식이 전환되었다. 2010년대 들어 구술사연구는 일정한 지위를 차지했고, 담론적 투쟁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성과는 거두었으나, 기존의 역사담론을 해체하지는 못하고 단지 보완하는 데 그쳤다는 자성이 나오고 있다.
국내 문헌들의 동향분석을 할 때, 국내 논문 85편 중 가장 많은 비율은 방법론 논문으로 19편에 달한다. 기타 적용 분야는 순서대로 적용분야는 순서대로 '''여성'''(위안부 등), '''전쟁'''(6.25 전쟁 등), 해외한인이주, 사건사고(세월호 참사 등), 지역사회, 노동, 예체능, 민주화 등이며, 2010년대 전기에는 여성 및 전쟁이, 후기에는 사건사고 및 노동이 주요 트렌드였다. 구술사연구 논문들이 자주 등재되는 주요 저널로는 《구술사연구》 외에도 《여성과 역사》 같은 여성학 저널, 그리고 사학계에서 진보적인 사관을 가진 《역사문제연구》, 《역사비평》 이 있다. 이들 논문들은 한국현대사 분석에 있어서 실증주의, 반공주의, 국가주의적 관점의 한계를 잘 극복해냈고, 지역사 및 재외한인사 연구를 크게 촉진했다고 평가된다.
국내 구술사연구의 '''주요 문제점'''으로 거론되는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채록된 원천자료를 바탕으로 간행물을 발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발간 후 원천자료 관리를 부실하게 하는 탓에 유실(…)되거나 비체계적으로 관리되는 사례가 많다. 문제는, 원천자료는 연구자 및 편집자의 가치가 개입되지 않았기에 공적자료와는 구분되는 가치를 지닌다는 것. 이에 대해서는 채록된 자료를 정리하고 관리하는 것 자체가 추가적인 예산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른의 사정이 끼어 있다는 설명도 있다.
- 지자체에서 지역문화, 지역사 관련하여 구술채록이 빈번해지는 것까지는 좋은데, 수집된 자료의 보존 및 활용은 지자체 담당자들이 나몰라라 하는 실태가 있다. 특히 전화를 해 보면 민간연구소에 떠넘기는 사례가 많고, 민간연구소에서는 정부기관에 다시 떠넘겨서, 결과적으로 아무도 그 자료의 행적을 관리하지 않는 상황이 많다고 한다.
- 수집된 자료가 대부분 비공개로 돌려져 있다. 구술자료는 최대한 공개하는 것이 연구목적에 부합하는데, 담당공무원이 계속 바뀌다 보면 인수인계가 잘 되지 않거나, 의욕이 없거나, 전문성이 떨어지거나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심지어 학계에서도 채록 성과물을 공유하기가 어렵고, 공유할 채널도 없고, 기관들 역시 연구를 전제로 하여 채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온라인에 공개하면 되지 않겠느냐 할 수도 있는데, 온라인이 오히려 책자형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들고 더 장기사업의 형태인 경우가 많다고.
- 많은 구술사연구들이 지나치게 정부기관에 의존하고 있어서 정치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정부기관의 국책사업을 통해 구술사의 위상과 입지가 높아진 것은 부정하기 어려우나, 거꾸로 정치논리에서 연구용역이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예컨대, 민주화 구술자료의 대부분은 4.19혁명 정도를 주제로 할 뿐이며, 오늘날 의견이 분분한 여러 사건들에 대해서는 연구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 학계에서도 자꾸 구술사연구를 문헌사연구처럼 논문을 쓴다. 다시 말해, 구술의 질적 수준이 높다 낮다를 이야기한다는 것인데, 이는 IDI에서는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문제이긴 하나 구술사연구에서는 마치 "연구자가 원하는 말이 많이 나온다 = 구술의 질이 좋다" 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KCI 등재자격 유지를 위한 저널의 질적 관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라는 해명도 나온 바 있다.
[1] 윤택림 (2016). 구술사와 역사학의 어색한 관계: 그 성과와 전망. 구술사연구, 7(2), 45-84.[2] 윤택림, 함한희 (2006). 새로운 역사 쓰기를 위한 구술사 연구방법론. 서울: 아르케.[3] 함한희 (2010). 구술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 구술사연구, 1(1), 7-47.[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최종숙 연구원에 따르면, 피억압자들의 구술 및 증언을 수집하는 것은 과거사 진상규명과 같은 사회운동에 있어서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한다.[5] 구술사는 이 관점에서 역사를 "경험한 바를 글로 옮기는 것" 으로 정의하는데,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글로 쓸 권력이나 처지가 되는 사람들만이 역사를 써내려갈 붓을 독점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구술사는 그런 권력이 없었던 사람들의 기억을 문자로 옮겨서, 최종적으로는 담론의 장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연구법이라고 할 수 있다.[6] '''구술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반영한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김태우 연구원이 워크숍에서 밝힌 실제 사례로, 예컨대 어떤 예비역 장성 구술자가 "이승만 대통령 당시의 내 결정은 철저히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을 때, 이 사람은 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없었고''' 오히려 반공주의나 일민주의만이 있었을 뿐임을 도외시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란 2010년대 이후의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비로소 강조된 것이며, 따라서 이 구술자는 '''과거의 경험을 현대의 인식틀에 맞추어서 재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구술은 과거의 사실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만 현재 구술자의 인식 메커니즘을 명확히 드러내 보여준다.[7] 김귀옥 (2014). 구술사 연구: 방법과 실천. 파주: 한울.[8] 실제로 구술사연구를 위한 채록이나 면접은 최장 10시간은 우습게 찍을 정도이며 마라톤이라는 비유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학계 문헌 중에는 한여름날에 노인들을 대상으로 구술면접을 하고 나면 희한하게 몇 주 안 되어 많이들 돌아가시더라는(…) 찜찜한 느낌의 연구원 대담내용도 있다.[9] 실제로 2010년대 국내 구술사연구의 많은 수가 세월호 유가족들을 주제로 했는데, 사고 직후로부터 한참 동안은 정신건강 수준이 채록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10] 주혁 (2012). 근현대 지역자료(문헌과 구술자료)를 보는 시각과 현장조사 방법론. 구술사연구, 3(1), 47-70.[11] 참고문헌은 3개밖에 안 되지만, 현장의 노하우가 가득 담겨 있는 흥미로운 문헌이다.[12] 이때 구술자는 조사목적에 부합해야 하는데, 예컨대 지역의 문화유산이 주제라면 향토사학자를, 지역의 옛 모습이 주제라면 사진관 주인을, 지역의 발전상이 주제라면 개척교회 목사를, 지역의 권력구조가 주제라면 마을 종친회 관계자를 섭외하라고 권고하고 있다.[13] 즉 소장자료의 가치를 알기에 보존하기보다는, 자신이 보존하는 게 가치 있는 자료인지도 모를 수 있거나, 심지어 있는지도 모를 수 있다. 이를 모르면 "재건축하면서 다 버렸어" 같은 말만 듣고 그냥 돌아나올 수 있다고.[14] 즉 현대사 자료를 찾고자 해도 결국 향교나 유림촌, 집성촌 등으로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는 말이다. 이들은 보관은 함께 하긴 하지만 주로 고문서의 가치만을 인식하기 때문에 현대사 관련 자료는 없다고 응답할 수 있다고 한다.[15] 예컨대 학교에 관련된 자료가 학교에 없다면, 동창회, 기수모임, 지역 사진관, 사회단체, 종교기관 순으로 탐색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던 것이 전혀 엉뚱한 곳에 보관되어 있을 수 있으므로, 현장조사에서 "팥은 꼭 팥 심은 데서 나오지 않는다" 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한다.[16] 이호신 (2017). 구술사 연구와 기록관리, 녹취문을 넘어서. 구술사연구, 8(2), 97-129.[17] 강재성 (2019). 구술 기록에서 비언어적 행위 재현의 문제: 『4.16구술증언록』의 사례. 구술사연구, 10(1), 77-105.[18] 김귀옥 (2010). 구술사 쓰기의 방법과 절차: 사례에 기초한 이론화의 시도. 구술사연구, 1(1), 77-115.[19] 최정은 (2012). 기록학계의 구술사 연구에 대한 몇 가지 단상. 구술사연구, 3(1), 143-160.[20] 김명훈 (2013). 디지털 구술 아카이빙에 관한 연구. 구술사연구, 4(1), 7-39.[21] 김귀옥 (2016).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구술사 연구의 탄생과 역할, 과제. 구술사연구, 7(2), 11-44.[22] 워크숍이나 여러 기록물들을 보면 그때는 이딴 것도 논문이냐며 공공연히 욕을 먹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23] 예컨대 개인의 기억은 신뢰하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요즘 세상에 도는 '찌라시' 들을 보자면 문헌자료의 신뢰성 역시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의 기억이 바뀔 수 있다면, 문헌 역시 그 '해석' 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24] 이런 사학자들은 오늘날 확립된 역사, 특히 "국사" 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수많은 민족과 개인과 문화의 기억들 중에서 철저히 권력자의 기억만을 중심으로 하여 '실증 가능한 단 하나의 확립된 연대기적 사실' 을 나열하는 데 골몰하고, 나머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들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 양 무시하거나 심지어 말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단 하나의 지배적 역사를 '단수의 역사' 혹은 '대문자 역사', 영어로는 History라고 하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수많은 대항기억들을 가리켜서 '복수의 역사' 혹은 '역사들', 영어로는 histories라고 한다.[25] e.g., 윤택림, 2016; 이용기, 2009; 정지영, 2015.[26] 김귀옥(2014)은 그런데 구술사 방법론에 심리상담이 미포함되어 있으므로 진정한 치유는 어려울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보다는 거시적 의미인 '기억으로부터의 해방' 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특히 이런 분야가 개인의 심리적 안정보다는 사회적 변화와 개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27] 이나영 (2012). '과정'으로서의 구술사, 긴장과 도전의 여정. 한국여성학, 28(3), 181-217.[28] 김향수 (2019). 4.16구술증언 채록 과정 속의 윤리적 난제들. 구술사연구, 10(1), 39-76.[29] 다시 말해 구술자료의 차후 열람과 관련하여, 권력자가 의무적 열람 허가를 요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구술자가 발언을 해도 불이익이 주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호받는 것을 말한다.[30] 이호신 (2010). 구술자료의 저작권 문제에 관한 연구. 구술사연구, 1(1), 49-75.[31] Park, C. J. (2016). IRB와 구술사 연구윤리: 한민족다문화 협력적 구술생애사 연구 사례를 중심으로. 구술사연구, 7(2), 133-161.[32] 윤택림 (2015). 기관구술채록의 진단과 과제: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채록사업을 중심으로. 구술사연구, 6(1), 1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