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1. 개요
人文學 / Humanities, Arts, Liberal Arts
'''인문학(人文學)''', '''문학(文學)'''[1] 또는 '''인문과학(人文科學)'''[2] 은 인간의 삶, 사고 또는 인간다움 등 인간의 근원 문제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은 인간을 둘러싼 사회계와 자연계의 현상에 대해 경험적으로 접근하거나 보편적인 법칙에서 특정한 법칙을 유도하나[3] ,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변적이고 비판적이며 또한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인간 본질의 정수를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인문"이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및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말한다.
-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3조 제1호.
2. 명칭
총체로서의 인문학에 대응하는 영어 어휘는 'Arts(아츠)'이다. 마찬가지로 인문학사는 'Bachelor of Arts(B. A.)'라고 한다. 흔히 아트라 하면 '예술'만을 뜻하는 것이라 오해하기 쉬우나, 이는 예술과 인문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았던 고대의 학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인문학의 범주로 포함되는 학문들은, 중세 대학 교육의 태동기에 'Ars Liberalis[4] '라고 불렸다. "자유(혹은 순수)와 기술"이라는 의미이다.
'Arts'에 대해선 좀 더 복잡한 설명히 필요한데, 직역하면 '기술', '학문', '지식'을 뜻한다. 그리스어 technē를 번역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로, 본 의미는 원래는 Scientia(생김새를 보면 알겠지만 현재 이학을 의미하는 영단어 Science의 어원이다. 주로 "지식"을 의미하는 epistemē를 번역하기 위해 차용되었다.)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히포크라테스의 명언 "의술은 길고, 생명은 짧으며…(하략)"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이후 자연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구분이 엄밀해진 것이 오늘날에 이르러 정착하였다. 그 결과 현재는 arts와 sciences(이학)이 대중들이 보기에는 아예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예컨대, 손자병법의 영문명은 'The Art of War(전쟁의 기술)'이다. 조선시대에 어문학과 경영학을 학문의 일종으로 보지 않았듯, 분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처럼 오늘날 소위 문과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을 당시엔 학문이 아닌 '기술'로 간주하였기에 우리가 인문학, 리버럴 아츠, 아트, 순수인문학(Humanities) 따위를 구분하는데에 혼선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명칭은 오늘날에도 많은 대학교의 인문대학을 뜻하는 영어 명칭인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로 남아 있다. 그러나 소위 문,사,철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만을 묶어서 '리버럴 아츠'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는데, 리버럴 아츠는 '''수학'''과 '''순수과학''' 같은 오늘날의 인문대 과정에 포함되지 않는 기초 학문을 폭넓게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나 라부아지에나 라이프니츠를 떠올리면 쉽다. 따라서 리버럴 아츠는 인문학보다는 '''교양학''' 또는 '''자유(자율)전공학'''으로 번역하는 쪽이 더 적절하다는 의견이 있다. (###) 외국에는 리버럴 아츠만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대학이 여러 곳 있는데, 이들 대학이 모두 오늘날의 '인문학'에 해당하는 과목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문주의자의 교양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할 때는 '휴머니티스(Humanities)'라고 칭하기도 한다. 휴머니티스는 르네상스 시기 이후 인문주의자들[5] 사이에서 새롭게 재발굴된 라틴어 단어 휴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휴마니타스 역시 키케로가 수사학에서 연설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그가 생각했던 것, 즉 로마 시민의 교양지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르네상스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 Humanities가 '순수인문학'으로서의 입지를 차지하게 된 것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Rationalism[6] 의 영향이 크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통해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붕괴한 이후,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와 함께 신을 대신해 세계관의 중심에 선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대한 담론은 인간이 가진 사유 그 자체의 기능을 학문의 중심에 두게 만들었다.
자연철학이 형이상학/기하학체계의 일종에서 과학으로 분과하기 이전, 인간의 연역적 사고, 귀납적 사고, 사고 자체를 구성하는 메신저가 되는 학문들은 당시 기준으로 만학의 근간[7][8] 이자 인간의본질 그 자체였으며,Humanity(인간성)의 복수형인 Humanities가 비록 지식인의 교양일지언정 잡다한 교양 및 기술(Arts)에 불과한 분과들과 격을 달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만 근대적 담론의 붕괴 이후 학술적으로도 현장에서도 이들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지는 않다. 모든 인문대학이 전통적인 리버럴 아츠를 포기한 것도 아니며, 철학 분과에서 수학과 순수과학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하는 곳도 많다. 라틴어권 국가에서도 인문학을 일컫는 단어로 Humanities와 Liberal arts가 꽤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리버럴 아츠 컬러지' 열풍이 대단하며, 한국에서도 융합형 인재 담론과 자유전공학부를 필두로 한 간학문적 교육이 재조명되고 있다. 인문학의 범주와 실제 에 대한 논의는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에는 여러 학문들이 인문학에 속했는데, 처음 로마시대에 정립될 때에는 수학,[9] 음악, 기하학, 천문학[10] 의 4학[11] 으로 출발하여, 이후 중세 대학에 이르러 문법, 수사학, 논리학이 합쳐져 총 7개 분과학문이 운용되었다. 그러다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에 이르러 중세의 학문 체계가 붕괴됨에 따라 체계의 대대적 편집과 변화를 거쳐 자연과학을 필두로 다수의 분과학문들이 독립해 나갔다.
3. 인문학의 주제와 분과 학문
3.1.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주제들
이해를 돕기 위해 프랑스 고졸자격시험(바칼로레아)에서 출제된 문제들을 첨부한다. 대략 이런 물음들을 가지고 고민한다는 걸 알면 되겠다. 출처는 이곳[12]
프랑스 고졸 자격시험 문제로, 한국에서는 수준 높은 대학은 1학년, 일반적인 대학교는 인문사회대학 기준으로 2학년 정도 되어야 접하는 수준이며, 답도 천차만별이다. 참고로 프랑스에서 이 시험은 실업계 진학자 외에는 대부분 응시하는 시험으로 알려져 있다. 제시되는 문제 중에 하나를 골라 쓰는 방식의 시험이고, 자기 개인적인 의견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서 담고 있는 철학적인 문제 설정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바로 시험의 목적이다. 당연히 자신이 배운 지식이나 고전들을 동원하여 논거로 활용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채점하나 묻는 사람이 있을 텐데, 어느 정도 글을 형식화해서 써야 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거를 수 있다. 문제설정 발견->테제->안티테제->종합 심화->결론 순으로 써야 한다는 듯.[13]
예를 들어 4장 과학 장의 7번 질문인 '과학의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에 대해서 대한민국 인문계 대학원생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쓴다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 문제설정 발견: 이 문제는 과학은 단순히 진리 확인에 그치는 학문이어야 하는가? 공학 같은 실용학문의 발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인류 공동체의 행복을 보장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하는가?의 논란과 연관되어 있다.
- 테제: 우선 과학은 단순히 진리 확인만 하면 된다고 치고 논거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 트랜스휴머니즘 같은 사례를 예시로 들며 과학이 하는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안티테제: 그러나 당연히 이에 반하는 여러 사례들이 나올 수 있다. 우생학,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같은 사고들을 예시로 들면서 과연 진리만 추구하는 과학이 올바른 것이냐고 반문하며 논리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 종합 심화: 허나 그렇다고 과학을 잠재적 문제아로 매도하고 거부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과학이 오늘날 인간 문명을 풍요롭게 만든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이나 클레어 페터슨[14] 지구 같이 무분별한 과학적 결과물의 남용을 경계하고 조언한 사례를 들수도 있을 것이다. 예시로 든 건 약간 양비론, 양시론적 접근이긴 하지만, 종합심화는 이런 식으로 입장을 전개하는 단계이다.
- 결론: 따라서 우리 인간은 과학의 부정적 측면을 억제하고 긍정적 측면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할 수 있다.
3.2. 학문 분류
현대 한국에서는 인문학의 분과를 흔히 문사철(文史哲)로 나눈다. 일각에서는 이 중 '사'를 사회과학으로 인식하려는 시도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구분이 아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은 인문학 제분야를 설정할 때 국내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른바 文·史·哲 체계가 1950·60년대 대만 학계에서 쓰인 것으로 그 역사가 짧고 결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15] . 영미권[16] 및 독일어권[17] 의 최신 인문과학 편람과 하버드대학교에 따르면 크게 언어, 예술, 역사, 사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언어:
- 예술:
- 역사:
- 사상:
- 법학: 연구방법론은 사회과학보다는 인문학과 비슷하다. 다만 역사상 '인문정신'을 대표하는 3학4과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므로 분류가 애매하다. 단적으로 미국 학제에서의 법 관련[19] 박사학위는 J.D.(Juris Doctor)[20] 로, '철학 박사(Ph.D)'가 아니다. 또 오늘날은 과학적 방법을 들여온 법학[21] 도 있기 때문에 법학 전체가 인문학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3.3. 인문대학의 학과
4. 연구방법론
4.1. 통합적 사고
인문학은 분과 간 통합적 사고를 대단히 중요시한다는 특징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인문학의 분과학문 간 경계는 훨씬 희미하므로, 곧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더라도 다른 분야에 대해 모르면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만 하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 예를 들어 근대성(modernity) 같은 문제는 문사철 중 어느 한 학문을 탐구하든 간에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적 사고가 적용되는 부분은 본 페이지에 서술된 내용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Humanities'라고 불리는 '순수인문학' 분과이다. 대중이 받아들이기 쉬운 내용부터 설명하자면,
(1)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듯 인간이 서술하는 역사는 비록 사료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당시의 시대상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22] 하물며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문명의 쇠락과 번영이란 물적 인프라 차원의 문제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 집단이 가진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의해 벌어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만약 '풍수지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라면, 조선시대의 마을이 형성되는 원리 자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도시의 비효율성에 대해서만 주목하게 될 것이다.[23]
(2)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근친혼을 하지 말라"와 같은 일견 인류보편적으로 보이는 도덕률이라 할지라도,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보면[24]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체계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시대의 사조를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조가 발생하고 받아들여지게 된 역사적 배경 따위에 대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하다.[25]
(3) 인간의 사유가 언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관점에서, 한 시대가 가진 언어적 한계는 그 시대가 가진 사상적 한계이기도 하므로, 특정 시대, 특정 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통용되는 언어체계를 파악해야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26][27]
(4) 따라서 '하나의 정답'이 아닌 '다원화된 담론'을 결과값으로 지향하는 현대 인문학의 특성상, Humanities에 속한 학문이 특정한 시기의 역사 / 사상 / 언어에 대해 최대한 실제에 가까운 결과값을 얻기 위해서는 특정 분과만의 지식이 아닌 학제간 교차검토를 통해 만들어진 통합적 사고가 필수라 할 수 있다.[28][29]
현대의 인문학이 중세 3학4과의 직접적인 후신이라고 가정한다면[30] , 현대의 모든 분과 학문들은 인문학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도 18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자연철학으로 분류되었으며, "사회과학" 또한 19세기에 와서야 오귀스트 콩트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전통이 세계 각 대학에 남아있다. 예컨대 세계의 많은 대학에서 인문대학(college of humanities)은 항상 단과대학 리스트의 맨 앞에 오며,[31]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공식적인 학교 행사에서 최선두에 선다.
다만 인문학에만 통합적 사고를 요구하는지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있다. 물리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없이는 화학을 공부할 수 없고, 경제학에 대한 지식 없이 정치학을 깊이 논하기 어렵다.
4.2. 인문학적 감수성
인간의 삶과 사고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적 특성상 가치나 사상이 공부에 내재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같은 문과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사회과학 전공 학생들에 비해 감수성이 풍부하고 삶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사회과학은 '모든(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제도와 문화를 다루지만, 인문학은 '특정 인물'의 사고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공감적인 요소가 더 많은 것. 실제로 인문학을 동경하여 인문대학에 진학한 대학생들 중에는 문학소녀나 청년 철학도 같은 희귀종들이 꽤 있다. 하단의 시에 이와 같은 인문학적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다.
내가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증명과 숫자들이 내 앞에 줄지어 나열되었을 때,
차트와 다이어그램이 더해지고 나누어지고 측정되는 모습을 보면서,
강의실에 앉아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천문학자의 강의를 들었을 때,
이상하게도, 갑자기 지치고 싫증이 나서
슬그머니 자리를 떠 밖으로 나와 홀로 거닐며,
신비로이 촉촉한 밤 공기 속에서, 이따금씩,
깊은 고요 속에서 별들을 바라보았다.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다만 이러한 "인문학적 감수성"은 인문학 중에서 문예의 특성을 주로 대변하므로, 실제 인문학 연구와 구분하여 생각해야 한다. 당장 역사학에서 레오폴트 폰 랑케의 위치를 생각해보자. 심지어 바로 '가치' 자체를 연구하는 윤리학에서도 결국 학문적 논쟁의 향방을 가르는 것은 합리적 논증이다. 감수성에 의지했다간 감정이나 힘에 호소하는 오류 소리를 듣기 딱 좋다.
결국 인문학적 '감수성'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실은 '논리적 사고'를 기반으로하는 이공계열로부터 그와 구분되는 자신만의 가치를 주장하기 위한 차별화 전략의 일종이며, 수박 겉핥기하듯 인문학에 발을 담근 이들로부터 비롯된 인문학에 대한 몰이해의 산물이다. 소위 '인문학적 담론'이라는 것들의 중심에 있는 철학부터가 논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므로, '인문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글 한 줄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근본도 없는 '감수성'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황당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과 이공계 모두 (사실의 비중을 떠나) 추론과 논리를 기반으로 결론을 세우는 기본적인 뼈대는 같기 때문이다. 그저 상술한 대로 인문학이 '생기 넘치는(?)' 대상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간적으로 보일 뿐이다.
5. 인문학의 위기
정확히 정의하자면 "인문학계에 지원을 해주어야 하냐" 혹은 "인문대에 진학할 필요가 있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시장주의적인 관념이 퍼짐에 따라 인문학 같은 '돈이 안 되는' 분야에 투자하는 것은 돈낭비라는 인식도 함께 생겨났다. 이런 인식이 정치지도자와 대학 운영진의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고, 이에 따라 인문학에 투자할 필요가 없거나 인문대 역시 경영대화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생겼다.
이 때문에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인문학의 위기란 없다. '''이미 인문학은 위기를 넘어서 끝장이 났기 때문이다.'''"라는 자조적인 표현까지 있을 정도다.
5.1. 현황
5.1.1.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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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중략)시를 공부하겠다는/미친 제자와 앉아/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프란츠 카프카」[33]
이공계 전성시대, 인문계는 서럽다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 발췌
인문계 공급과잉, 이대로 방치할텐가
'''문과/인문계 취업률 최하위 삼대장: 문학, 사학, 철학'''[35]
한국의 인문학은 조금씩이나마 서서히 발전하고 있으며, 이는 인문학이 처한 가혹한 환경에 비추어 볼 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여전히 유수의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 중에서는 어렵고 힘든 학문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인문학도들이 결코 적지 않으며, 이들이 사실상 전력으로 한국 인문학계를 지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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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라 불리는 곳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은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기피 학문이 된 지 '''오래다'''. 인문학 대학원들 중에 그나마 순혈주의를 고수하거나 타 대학 학생들에게 거의 논문심사 수준의 면접을 요구하는 곳들[36] 은 그나마 취업에 도움이 되는 인서울, 지거국 수준이고 수도권 대학 정도만 돼도 최소한의 자질만 있다 싶으면 수업계획서 대충 보고 나서 입학시킨다.[37] 실제로 인문학 전공자들은 취업을 하려면 회사들이 기피하고, 공부를 하려고 하면 궁핍함을 감수하고 더 심화된 다음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나마 석사까지면 늦어도 30대 중반 이전에 끝이 나니까 좀 낫지만[38] 박사를 잘못 밟으면 박사 학위도 못 따고, 그냥 40대 초반 석사로 남게 되면서 그나마 취업의 기회가 남아있는 30대를 통째로 날려먹을 수 있다. 물론 40대 석사가 30대 학사나 20대 고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하다는 건 상식이다. 이렇게 되면 인생은 진짜로 헬게이트. 인문학 분야의 시간 강사들은 가뜩이나 이쪽 업계가 급여가 낮은데 생명과학같은 분야보다 수입이 적다고 한다. [39] 물론 책을 써서 인세를 받을 수도 있지만 인문학 책도 사기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많이 팔리지가 않는다.
다행히 한국에서도 소위 '인문학의 위기' 가 품은 심각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문학의 위기 혹은 가로지르기 글에 따르면, 인터넷·디지털·정보통신의 영향으로 학제간 연구가 중요해진 시대에 '필요/필요가 아닌 것, 이과/이과가 아닌 것, 인문학이 아닌 것/인문학' 같은 식으로 특정 학문을 차별하는 짓은 과거 시대의 짓이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므로 그만둬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터넷은 지식의 생산과 소비를 시공간의 제한을 건너뛰어 연결하여 순환 속도를 빠르게 만들면서 지식은 총체성을 상실하고 부분으로 분해된 다음 재결합을 통해 새로운 용도로 전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문학 측에서도 다른 학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타 학문에서도 '인문학적 감수성'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의 '좋은 점'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방송이나 일부 강연에서 인문학 콘서트 등이 우후죽순 열리면서 '인문학 열풍' 이 불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인문학 토크콘서트가 '인문학에 대한 맛보기' 수준의 이야기를 대중들이 경험하는 콘셉트로 잡고 있는 한계 때문에 사유가 동반되지 않은 요점 정리식 신변잡기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40] 그리고 사실 이런 곳에서 논하는 인문학의 수준이라 해봐야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수업보다도 낮은 수준의 내용이거나, 심지어 비전공자가 대충 알아보고 만들어 이곳저곳 오류로 가득찬 엉터리 이야기들도 허다하다. 심하면 지상파 예능과 유튜브 영상의 질적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 때문에 인문학 전공자들 중에는 오히려 저런 겉핥기식 인문학이 인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왜곡한다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기업이나 대중매체에서 조금이나마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는 있다. 이런 움직임들이 거름으로 뿌려져서 인문학의 토양이 비옥해질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문학 열풍을 기업 차원에서 후원하는 프로그램이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로는 신세계그룹에서 2014년부터 시작한 SSG 지식향연이 있는데, 무척 괜찮은 구성과 파격적인 특전 때문에 화제가 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최근 대기업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을 뽑겠다는 식으로 언플을 하는 사례가 많이 늘었는데, 취업준비생들의 소감은 기업들이 '인문학 전공자, 깊이 있게 철학 등을 연구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책 좀 읽어본 이과생, 상품을 좀 더 잘 팔 수 있도록 소비자의 마음을 끌어내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말이 인문학이지 사실상 마케팅 부문 지식을 요구하는 셈이다. 둘 다 인간의 심리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감동과 소비 중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느냐가 다르다. 물론 영화처럼 감동을 통해 소비를 이끌어내는 '문화산업'도 있지만, 여기서 요구하는 인문학은 어디까지나 제품의 판매를 위한 '이미지 메이킹'에 불과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보니 인문학 전공자들은 면접에서 '당신의 전공으로 우리 회사에 어떤 도움이 되겠냐' 는 식의 질문을 엄청나게 받는다고 한다. 상경계열이나 공학계열 출신은 거의 받지 않는 질문이다. 이런 면접관들은 공대생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게 인문학 전공자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로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여기에 인문학 특유의 "'비생산적인' 아이디어"라는 이미지까지 들어가면 더더욱 쓸모없어 보인다.
인문학 중 가장 진입장벽이 높은 것은 희귀하지만 수요가 많은 어문계열으로, 실제로 아랍어나 포르투갈어 쪽은 취업이 잘 된다. 해외와의 소통을 전담하기 때문.
5.1.2. 외국
[image]
''If your child majored in fine arts or philosophy, you have good reason to be worried. The only place where they are now really qualified to get a job is ancient Greece. Good luck with that degree.''
여러분의 자녀가 순수예술이나 철학을 전공했다면[41]
적잖이 고민하실 만도 합니다. 이제 그들이 정말로 취업할 수 있을 만한 곳은 고대 그리스밖에 없거든요. 그 학위를 활용할 수 있길 빕니다.
이러한 현상은 외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당장 시민권 부여 자격만 봐도 소위 '스템'(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 Math 직역하면 이공계)계열 전공자를 우대하지 인문학 전공자를 우대하지 않는다. 옆나라인 일본만 해도 최고대학인 도쿄대학에서 문과 1(법학/정치학), 문과 2(경제학)에 비해 문과 3(광의의 문학)은 선호도나 취업률이 떨어지며, 미국 또한 '인문학의 위기' 를 외칠 만큼 인문학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세계 최고 명문인 하버드 대학교마저 인문계열 학생 수가 감소하였고, 그나마 있던 다른 학생들도 다수가 전공을 바꾸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대학들도 인문학의 위기 세계의 모든 선진국들 중 미국, 유럽, 일본, 한국을 모두 포함한 대부분이 기술중심사회이며,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도시국가가 아닌 이상 모두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제조업이 고부가가치 기반산업으로 경제에 중요하게 작용한다.[42] 인문학의 위기 전세계적 현상 그렇기 때문에 유수의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밥벌이용으로 경제학이나 경영학 복수전공을 하는 경우가 많다.[43] 그리고 인문학으로 졸업한 학생들 중에서도 뛰어난 학생들은 많은 수가 MBA나 로스쿨로 진학한다. 그나마 졸업생에게 전부 높은 연봉의 정규직 교사/교수 직위를 보장해 주는 그랑제꼴 고등사범학교가 개설되어 있는 프랑스가 조금 나은 형편이랄까... [44]
오죽하면 "'''인문학의 위기는 전 세계적 현상"'''이라는 뉴스기사가 나올 정도이다.[45] 미국에서는 인문학 연구 자금 지원금이 2009년부터 계속 감소하고 있으며 2011년 기준으로 과학기술 분야 연구개발비의 0.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전체에서의 인문학 전공비율은 1966년부터 2010년 사이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하버드 대학교 인문학 연구소장은 인문학이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심각한 고전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했다. #, #
정치권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4년에 제너럴 일렉트릭 공장을 방문했을 때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경영학 같은 실용학문을 배우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가 인문학계가 항의하여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2011년부터 인문학 분야에 대한 정부 직접 지원을 끊어버리고 수업료로 대체하였으며, 호주 역시 1억 300만 호주 달러(한화로 약 995억 원)의 인문학 연구 자금을 의학 분야로 돌리겠다고 발표하였다. 인도 또한 인문학은 빈사 상태이며 반대로 직업학교와 경영, 기술 분야 연구는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은 말하기조차도 민망하다. 체제도 체제이거니와 1960년대에 중국 대륙의 유구하고 찬란한 문화를 싸그리 파괴와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 탓에 인문학이 말살당했기 때문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같은 유수의 학술 기관이 있다고 하지만 학자 개인의 견해를 다는 것은 물론 각주 하나, 단어 하나까지 각별히 조심해야 하고 문화대혁명 관련 공문서 및 기록들은 체제붕괴의 위험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모두 공개금지 조치가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이공계열 출신들이다. 시진핑만 해도 베이징대학 공정화학과를 졸업했고, 후진타오 전 주석도 칭화대학 수리공정과를 졸업했으며, 그 전 주석이었던 장쩌민은 자오퉁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했으니 말 다한 셈. 물론 그것은 문화대혁명이 휩쓸고 간 대륙 얘기고 홍콩 및 대만은 한족 자체의 문화 수준이 높은 관계로 인문학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문과 출신에게 그럭저럭 많은 기회를 준다. 당장 중국사 사료는 베이징이 홍콩이나 타이베이에서 수입해 오는 판. 홍콩대와 홍콩중문대가 베이징대학보다 사료 보유량이 더 많으니 말 다했다.
일본도 인문학 전공은 인기가 없다.
일본은 중소기업 사무직은 전문대학교,전문학교 출신이 선택하는 것을 권고 하고 있기에. 쓸데없는 4년제 대학교 진학을 억제해 학력 인플레이션에서 오는 시간,비용 낭비를 막는 효과도 있다.
5.2. 극복을 위한 제언
5.2.1. 인문학은 시장을 도덕적으로 만드는가?
시장과 인문학 (2013) 참조.
오늘날 인문학이 위기인 것은 이와 같은 인문학 본연의 가치를 인문학 스스로가 소홀히 하고 있거나 다른 사회적 지향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도구적인 차원에 자신을 가두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을 정당화하고,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을 용인하는 태도, 현대인들의 고통과 소외, 차별과 억압에 둔감해진 채 추상적 개념과 몇 가지의 도식으로 정리된 정지 상태, 다른 학문 영역들과 더 이상 교류 혹은 협력하지 못하고 타 영역의 발견과 발전으로부터 더 이상 지적 자극과 영감을 받지 못하는 답보 상태 등이 인문학자들 스스로 지적하는 인문학 위기의 현상들이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만의 위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스스로를 도태시킴과 동시에 인간을, 사회를 소외시킨다. 소통하지 못하는 인문학은 고립되어 다른 학문과도 그리고 사회와도 상생할 수 없다. 결국 인문학은 내적 외적 반성과 성찰, 끊임없는 지향을 통해 소통과 상생이라는 인문학적 가치를 복원시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문학의 위기는 곧 인간의 위기이며, 인간의 위기는 곧 사회의 위기이자 국가의 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반성을 통해, 소통과 상생이라는 인문학적 가치를 복원하는 것만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인문학이 위기인 이유는 위 문단 그 자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경쟁을 정당화하는 태도?" 왜 경쟁이 나쁘다고 하는 것일까? 오히려 독과점 시장의 폐해가 크다. 수험지옥 때문에 자살하는 입시생의 사례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경쟁이 인간을 하나의 기계적인 톱니바퀴로 보는 비인문학적 사고의 산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 외의 분야, 예를 들어 "기름밥" 먹고 "지이이이잉"하는 소리 내는 기술 분야를 천시하는 사고방식, 폼 나는 정장 입고 일하는 직장만이 고급스러운 직장이라는 인식을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는 사회의 인식과 가정교육이 수험생들을 자살로 내모는 것이고, 공무원이 아니면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없는 경직된 고용구조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모는 것이다. 오히려 경쟁이 없는 사회는 인간을 태어나서부터 결정된 부모의 학벌, 재산, 인맥에 따라서 신분을 결정짓게 하는 비인간적인 사회다. 수능 지옥 입시지옥 사회에서는, 없는 집 자식도 머리가 좋다거나 노력만 한다면 수능 한 번으로 명문대를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의 입시제도는 너무나 복잡하고, 가진 자에게 유리한 정보격차가 심한 제도이다. 한 마디로 경쟁을 극단적으로 없애는 제도다. 인문학이 위기인 이유는, 현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경쟁은 나쁜 것이 아니다. 고통과 소외가 문제라고 지적은 할 줄 아는데, 그 고통과 소외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는 애매모호한 태도. 비인문학적인 것은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태도. 그런 태도가 모여서 기업들로 하여금 인문학도를 기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탁상공론과 도덕론에 그치기 때문에 위기인 것이지, 사회가 인문학을 핍박하기 때문에 위기인 것이 아니다. 한국의 인문학은, 경쟁을 죄악으로 보는, 조선시대의 유가적 사관을 아직도 고수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부패했다.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장은 원래 의도와 관계없이 ‘교환이득’과 ‘정보유통’이라는 수단을 통해 상생과 소통이라는 고상한 가치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만일 사정이 그렇다면 시장이야말로 인문학적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하는 사회제도가 아닐까? 그러나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이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교환이득에 기반한 시장적 호혜성이 형식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점을 살펴보기 위해 사물에 대한 시장의 평가 방식 그 자체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장은 시장에 고유한 사물의 가치 평가 방식을 갖는데 이로 인해 시장의 “부패 경향”이 촉발된다(마이클 샌델 2012). 다시 말해 시장에서 어떤 대상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그 자체가 어떤 특정한 성향이나 경향을 부추기는 효과가 있다. 우리가 사회적 삶 속에서 중요한 가치라고 간주하는 것들이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하면 대상의 고유한 미덕은 변질되기 시작한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퇴근 이후 유치원에 아이를 늦게 찾으러 오는 부모들에게 10분당 5000원의 벌금을 매긴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설사 늦게 도착한다 할지라도 발걸음을 빨리 하려고 노력하였다. 늦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키는 것은 ‘도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 늦을 경우에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벌금 제도가 도입되고 난 다음부터 상황은 바뀌게 되는데,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도덕이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발걸음을 빨리 서두르지 않는다. 늦을 것 같으면 사람들은 벌금을 낼 요량으로 보다 더 천천히 걸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개인이 마치 극장의 영화 티켓을 구매하듯이 늦을 권리를 구매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늦을 권리가 상품으로 간주되는 순간 벌금이 가격으로 변질된다.''' 도덕이나 미덕이 재산권에 의해 구축(驅逐)되는 셈이다. 설사 이후 이러한 벌금 제도를 폐지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지각할 것인데 왜냐하면 한 번 상품이라고 간주되었던 대상은 지속적으로 상품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늦을 권리라는 상품을 ‘제로의 가격’으로 구입하게 된다(Gneezy and Rustichini 2000)
따라서 인문학적 견제와 비판은 경제학 논리로 옹호될 수 없다.
5.2.1.1. 반론
먼저 이러한 비판에 전제되는 인문학의 조건은 "시장화나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부당하다."이다. 인문학자의 이러한 주장은 시장의 개념을 왜곡하고 있다. 여기서 벌금이란 공급자(유치원)가 자신이 공급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벌금"이라는 제도로 불이익을 제공하는 것이다. "교환이득에 기반한 호혜성"에서 벗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애초에 시장화나 자본주의화라고 볼 수 없다. 자본주의와 시장은 교환이득을 통해 서로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제도이다. 서로 상호호혜적인 교환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시장이나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정말로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벌금을 내리는 유치원이 아니라, 다른 유치원에 아이를 보낼 것이다. 상술한 인문학자의 비판은 일단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 명제를 설정하고 난 후, 그 명제에 합치되어 보이는 상황을 가정해버렸다. 과학적이지 못하고, 비현실적인 비판이기 때문에 비판으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이러한 인문학자의 도덕론적 비판을 어느정도 받아들이더라도 경제학의 입장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경제학의 전통적인 전제는 "모든 것에 가격을 매길 수 있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반론해보도록 하자. 법경제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 가진 미덕이나 도덕적 관념은 "측정불가능한 가치나 리스크(개인의 평판과 명성, 인맥, 신뢰감)에 대한 확대해석/과대평가"가 작용되는 현상이다. 얻는 것에 비교했을 때 감당 가능한 리스크 혹은 대가라 생각될 경우, 인간은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꼭 불합리하고 비도덕적인 행동인 것인가? 살인이나 폭행 같이 명백히 극단적인 불이익을 가하는 행위에 대해선 사회적 합의를 통해 무기징역이나 사형처럼 철저한 응징이라는 가격을 매기고 가격에 대한 정보를 널리 퍼트려(=대중을 교육하여), 그러한 사고방식을 차단하면 된다. 그리고 상술한 "지각할 권리로 인식된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오히려 유료 시간연장 서비스를 제공하면 될 일이다. 고객들과 협상하여 합리적인 가격을 맞춘다면, 유치원에서도 직원들의 야근으로 인한 불이익이 줄어들고, 야근으로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부모들의 문제도 해결된다.
5.2.2. 인문학적 스노비즘의 문제
동서양을 막론하고 범람하는 교조적인 태도, 극장의 우상이 된 학자들, 스스로를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배타주의, 선민의식,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 없이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의 이론을 가져와 해석하는 지적 사기 사례[46] 등, 곪을 대로 곪은 문제가 인문학계 내부에도 산재해 있다. 개중에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예로 들며 불교의 색즉시공에 담긴 종교적 진리를 설명하려는 사람도 있으며, 시공간의 물리적 특성을 설명하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가져와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해 고찰하는 등, 자칫 사회와 대중을 호도할 가능성이 있는 그릇된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움베르토 에코는 『가재걸음』 중 「정치적 올바른 말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우리가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신체 장애인이나 불구자 대신 '다른 능력을 갖춘differently abled' 사람들이라 부르기로 하고선 이후 공공장소에다 진입 경사로를 설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으로 말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중략) 이는 이름 변경과 여건의 개선이 요구되는 어떤 그룹에서 이름 변경과 더불어 불합리한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절대로 끝나지 않을 회피의 목적으로 새로운 이름이 요구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 장애인 차별 언어의 양태에 관한 연구 보고서 발간하였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차별성이 높은 부류(병신, 저능아, 애꾸눈, 무뇌아, 앉은뱅이, 불구자)와 차별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부류(장님, 장애자, 농아인, 정상인, 맹인, 장애우)가 있고, "같은 어휘라도 문맥과 상황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차별성 정도가 다르다"며 "특히 문맥 속 대안 표현에서 차별 관련 표현을 그대로 사용해도 상관없다는 의견이 독립적 단어형에 비해 전체적으로 높게 나타나 사회 전반적으로 문맥 속에서 사용되는 차별 관련 표현의 사용을 일부 허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인문학계에선 인문학을 가르치거나 타인의 행동을 강제한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대부분의 경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5.2.3. 과학기술과의 교류 필요성
“과학기술 시대”의 인문학 - 김영식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에게 인문학의 대상이 고착되어 바뀌지 않고 있고, 서양의 르네상스 시기나 중국 송대, 또는 기껏해야 서양 계몽사조기 또는 우리나라 개화기의 전통적인 대상과 주제가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 후 인간의 삶은 크게 바뀌었고 최근 수십년, 특히 지난 십여년 동안의 인간의 삶의 방식은 엄청나게 바뀌었으며, 따라서 이렇게 변화되어 새로워진 인간의 삶, 문제, 가치 등을 인문적 반성, 탐색의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새로운 인문학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대상, 주제들만이 아니라 현재의 인간의 삶의 현실과 문제를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전통적 인문학의 주제와 대상들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르네상스 시기나 송대와 같이 새로운 사상적 조류, 새로운 문화와 사회의 모습이 대두되던 시기에 그에 따라 생겨난 새로운 삶, 가치, 문제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또한 그러한 새로운 사상, 문화가 새로운 가치, 문제 등을 빚고 있는 시기이고 그런 면에서는 새로운 인문학을 요구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과학기술 지식이 일반 학문, 특히 인문학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과학혁명” (Scientific Revolution)이라고 부르는 과학상의 획기적 변혁이었다. 16, 17세기 서양에서 일어난 과학혁명의 결과 그 동안의 과학과는 크게 다른 “근대과학”이 형성되었고, 이 근대과학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과학은 기술에 응용이 가능해졌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으며 이해하기 어려워졌고, 무엇보다도 ‘전문화’되었다. 그리고 전문화가 진행되면서 과학은 점점 문화 일반이나 인문학으로부터 분리, 격리, 소외되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 이같은 유리 상태는 심해지고 차츰 고착화되었다. 그리고 그같은 유리 상태의 고착과 함께 과학과 인문학 양쪽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 상태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당시 새로 부상하는 과학기술이 지적인 우위와 실용적 가치를 내세우는 데 대항해서 인문학 또는 인문주의가 고전과 교양 위주 교육의 도덕적 우위를 선언한것은 그 같은 예였다.5) 이는 결국 과학기술에 대한 전통적 인문학자들의 우월감과 반감이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문학자들에게서는 이와는 상반되는 태도도 찾아볼 수 있었다. 전문 과학지식에 대해 지니는 과학자들의 전문성을 인문학자들이 존중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존중”은 또 한편으로는 인문학자들이 전문 과학지식을 전문 과학기술자들에게만 맡기고 자신들의 관심 대상으로부터 제외시킨 채 무시해 버리는 효과를 빚어냈다.
게다가 현대의 사회, 문화에서 과학이 엄청난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 과학은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고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학은 기술을 통해서 그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당초 자연세계에 대한 지적 추구의 중요성 때문에 지식인의 관심 대상에 포함되어 있던 과학이, 이제는 현대 지식인의 생활의 필수적 부분, 관심의 필수적 부분이 되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은 온통 과학기술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오늘날 인문학자들이 현대 사회, 현대 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과학기술은 제외시키고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란 바로 인문학이 과학을 포함한 여러 전문지식으로부터 분리되고 격리된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인문학의 위기가 한국에서 특히 심각한 것은 그같은 분리 상태가 한국 사회에서 특히 심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러 의견이 제시되지만 대게 원론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여기서 김영식 연구자는 인문학자가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비판해야 한다는 정면돌파를 주장했다. 새로운 인문-과학 패러다임의 연구나 과학의 인문학적 환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현대 사회의 주류는 인문학이 아니라 과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문학자가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빈자리를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고 본다.
5.2.4.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
시장과 인문학 (2013) 참조.
삼성경제연구소가 국내 CEO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97.8%가 인문학적 소양이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고,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하다면 채용할 의사가 있다는 대답도 82.7%에 이른다고 보고하고 있다. 시장 환경의 변화에 어느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지닌 이들 CEO의 답변은 인문학이 시장에 미칠 영향이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기대감을 넘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임을 예증하고 있다(2011년 2월 SERICEO 회원 498명을 대상으로
실시).
다음은 국내외 기업들이 자신들의 경영 전략에 인문학을 접목한 사례들이다.
1) <토이스토리>, <몬스터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라따뚜이>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PIXAR)’는 구성원 전체의 협력적 활동과 고갈되지 않은 창조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은데, 이처럼 픽사가 지속적으로 창조성을 유지 할 수 있는 원인 중 하나는 ‘픽사 대학’(Pixar University)이라고 불리는 사내대학이다. 픽사는 조직의 창조성을 위해 인문학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바, 픽사 대학에서는 문학, 철학, 글쓰기 등의 인문학적 과정과 예술교육 및 기술교육에 이르기까지 100여개의 과정을 개설하여 직원들로 하여금 일주일에 최소 4시간씩 교육을 받도록하고 있으며, 교육을 업무로 간주하고 있다.
2) 구글(Google)은 2011년 신규 채용 인력 6,000명 중 5,000여명을 인문학전공자로 충원하겠다고 발표했다.
3) 인간의 본질적인 행동 패턴과 직관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를 제품의 기능 및 디자인에 반영했다고 알려진 ‘애플(Apple)’의 혁신적인 제품은 인문학과 기술의 접목이 제시하는 미래기술생활환경의 좋은 예이다.
4) IBM은 미래전망을 위해 자연과학, 공학자 및 인문학자가 포함된 전담부서를 두고 있다.
5) 인텔(Intel)은 2010년 미래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 기술의 발전 방향 및 인간과의 소통방식 연구를 강화하기 위해 ‘상호작용 및 경험 연구소(Interaction & Experience Research)’를 설립하였다. 인텔의 이 연구소는 ‘사회적 통찰’, ‘경험 디자인’, ‘이머징 기술’, ‘미래 전망’ 등 4개 팀으로 구성되었으며, 2020년까지 ‘컴퓨터와의 경험방식을 재창조’하자는 미션 아래 다양한 관점과 지식의 융합을 도모하고 있다.
6) 야후(Yahoo)는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25명의 인문학자로 팀을 구성하여 네티즌이 어떤 광고에 반응하고 클릭하는지 연구하고 있다.
7) 유니레버(Unilever)는 정기적으로 시인과 작가를 초청해 ‘글쓰기 워크샵’을 진행하고, 연극배우가 연출하는 역할극을 통해 직원의 커뮤니케이션역량을 점검하는 등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8) 국가별로 상이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파악하여 무의식적 욕구의 차이를 제품 개발 및 마케팅에 반영하기 위해 월마트(Walmart)는 2011년 2월 ‘Global Customer Insights’팀을 발족하였다.
9) 삼성전자 디자인 경영센터에는 15%가 넘는 인문학 관련 전공자들이 고용되어 있는데, 이들은 커뮤니케이션 및 지식 융합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를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10) 삼성그룹은 인문학적 소양과 기술을 갖춘 통섭형 인재양성을 위해 ‘삼성컨버전스 소프트웨어 아카데미(Samsung Convergence SoftwareAcademy)’를 신설, 2013년 상반기 신입사원 공채에서부터 적용하기로 하였다.
11) SK C&C의 정철길 사장은 ‘CEO가 들려주는 오페라의 유령’을 주제로 한 토크 콘서트에 직접 나서 인문적 교양 함양의 필요성을 몸소 실천하는 사례를 남겼다.
12) 포스코(POSCO)는 신입사원 채용과 임직원 교육에서 ‘문리(文理) 통섭형’인재관을 강조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와 인도 등의 제철소 운영과 관련 2011년이슬람 문화 이해를 위한 강좌도 진행한 바 있다.
13) 2013년 KB 국민은행은 인문학분야 베스트셀러 28권을 활용한 심층면접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다.
5.2.4.1. 반론
이부분에 대해선 매우 단편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위 예시를 살펴보아도, 제한적인 마케팅, 콘텐츠 연구에서 통계학이나 경제학, 공학 등의 주류 학문을 보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라", "사회문화를 연구하라", "인간적 가치와 윤리를 연구하고 이를 제품에 반영하라" 같이 명백한 성과 측정이 불가능하고 매우 실험적인 연구분야가 대부분이다. 이런 실험적인 분야들은, 경영진의 도전정신으로 인해 추진되었다가, 기업 홍보팀의 홍보 소재로 쓰이고, 주주들의 인건비 감소 압박에 가장 먼저 폐부되어 버리는 분야다. 장기적인 인문학 진흥 정책으로선 부적합한 예시다.
5.2.5. 인문대 지원의 문제
박찬길 교수
인문대를 보통 경영대처럼 만드는 경우 수많은 문제점을 양산한다.
또한 인문학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거나 줄이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 기초학문과 사회적 교양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학술진흥재단의 학술지 등급제도이다. 연구업적을 ‘빨리’ 계량화하려면 객관적인 점수 환산방식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학술진흥재단이 학술지를 ‘심사’하여 ‘등재지’와 ‘등재후보지’를 나누어다른 점수를 부여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젊은 연구자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학술진흥재단으로서는 개별연구업적의 질 관리를 위해 불가피한 장치라고 하겠지만, 이러한 제도의 틀 안에 있는 개별 연구자로서는 내용이좋은 논문을 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등재지’에 통과할 수 있는 정도의 논문을 여러 편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대학 단위의 외부 평가든 개인 단위의 연구업적 평가든 모든 평가는 ‘무엇을’ 썼느냐는 묻지않고, ‘몇 점으로 환산되는’ 업적을 냈느냐만 묻기 때문이다.
5.2.5.1. 반론
먼저 인문대를 경영대화하는 행위를 정확히 정의하자면 이와 같다.
- 엄밀한 성과 측정
- 대외 기관의 대학 연구 투자
- 논문 평가의 수치화
- 학생들의 지원률과 등록금 측정
- 지원률 및 등록금 대비 학생들의 취업률 및 졸업 후 소득
- 학점 평가의 수치적 객관화
- 성과에 의한 투자 증감
- 교수의 연구비 투자
- 교수 TO 확대
- 학생 장학금 지원 증가
또한 교육기관의 연구가 사회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분야일 경우, 이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다. 의대나 공대, 자연대 등이 인문사회 계열과 예체능 계열보다 많은 투자를 받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원하는 타 기관이 많은 만큼, 교육기관에 투자할 사회적 유인이 발생한다. 반면 인문대는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투자가 적을 뿐이다. 인문대에 대한 투자가 줄어드는 원인은 '''인문대 측에서 자신들의 투자 유인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지, 다른 기관에서 인문학을 비하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를 인문대 홀대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타인의 투자를 원하는 여러 대학이 있을 때, 자신의 투자 매력을 증명할 책임은 각 대학과 소속 교수에게 있다. 인문대는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하여 이러한 노력을 소홀히 했고, 결국 대학 신입생들과 구직시장의 관심을 잃은 것이다.
5.2.6.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가
문화산업 분야에서의 인문학 활용현황과 활성화 - 한국교양기초교육원
인문학은 문화산업에 대하여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경로를 통하여 기여할 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 인문학은 보다 나은 인문학 콘텐츠를 공급함으로써 문화산업의 생산성 제고에 외부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둘째, 인문학은 교육내용의 개선을 통하여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콘텐츠 중심 인력 및 기술 인력들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문화산업 혁신에 기여할 수가 있다. 셋째, 인문학은 연구인력 및 교과과정의 학생들이 콘텐츠 산학협력시스템을 통하여 문화산업 제작-유통-소비과정의 연구개발에 참여함으로써 문화산업의 생산성을 높일 수가 있다. 이는 요약하면 인문학의 근본적인 연구방식의 변화, 교육 커리큘럼의 변화, 문화콘텐츠 연구개발시스템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다.
문화산업콘텐츠 생산 및 소비의 과정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간략하게 세 가지로 나뉜다.
- 우선은 문화산업의 소재가 되는 인문학적 콘텐츠의 공급이다.
- 둘째로는, 인문학적 소양을 핵심으로 하는 기획 및 창작인력의 공급이다. 이들은 인문학적 소양과 교육을 바탕으로 인문학적 콘텐츠를 문화산업으로 전달하는 통역자이며 문화산업콘텐츠의 생산과정에 새로운 인문학적 성과를 추가하는 인문학콘텐츠 생산자이기도 하다. 인문학적 소양은 후반부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IT기술을 첨가하여 문화산업콘텐츠를 구현하는 과정을 감독하는 인력에 게도 크게 요구된다.
- 셋째, 문화산업의 마케팅을 위하여 국내외를 포함하는 소비자정보에 대한 지식의 생산 및 접근성의 제고도 인문학의 영역이다.
또한 반대급부의 그레이드에서 프랑스의 영화산업이 현대예술영화 시장을 선도하게 만든 것 역시 <까이에 뒤 시네마>로 대변되는 장 뤽 고다르 등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비평세력이었다. '선언의 시대' 이후 현대 예술의 흐름을 보면, 특정 사회에 굳건하게 형성된 인문학적 토대는 문화 시장에 있어 단순히 개별 표현물이라는 한계를 넘어, 시장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담론과 헤게모니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가령 마이클 잭슨의 춤은 이제와 많은 사람들이 따라할 수 있고, 누군가는 더욱 화려하게 재단할 수도 있는 하나의 동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팝의 황제이며 다른 사람들이 따라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것은, 그가 '컬러TV 시대의 등장'과 '흑인문화의 본격적인 궐기'를 선언하는 하나의 '혁명'이며 '상징'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의 '동작'을 '상징'으로 만드는 것은 '비평[48] '이 가진 기능 중 하나이며 이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인문학적 소양과 사회 자체가 가진 토대를 기반으로 한다.
좀 더 와닿는 예를 제시해보자면 대한민국처럼 글로벌 IT 산업에 있어 선도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그 어느 나라보다 게임산업과 일상이 가깝게 엮여 있는 국가에서 과거 프랑스가 그랬듯 '예술 게임 이론' 따위가 등장하여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흐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창의적인 개발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개발자의 '창의력'을 소비하고 (돈이든 아이디어든) 그에 투자하려는 계층이 없기 때문이다.[49] 서로 다른 각 종목의 레전드를 모아 축구팀을 짠다고 한들 그 팀이 좋은 축구팀이 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음악, 미술 연출 등의 예술적 요소를 짜집기 하여 만든 게임이라는 매체가 단순히 그러한 요소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예술이 가진 담론에 올라타기는 요원하다.
한때 술집 안주거리 공연에 불과했던 영화라는 매체가 오늘날 종합예술의 지위를 넘어 '1번 매체' 취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음악과 미술과 스토리(문학)가 들어갔기 때문이 아닌, 영상이라고 하는 새로운 표현 방식을 통해 리얼리즘[50] 이라고 하는 새로운 미학적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부여 작업에는 앙드레 바쟁, 장 뤽 고다르 등 인문학 출신 비평가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이러한 작업을 통해 지금까지도 예술영화의 종주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공정은 그러한 비평을 제시하는 사람의 인문학적 소양뿐만이 아니라, 창작자, 소비자, 투자자 등 그러한 그들의 비평을 이해하고 돈과 시간과 아이디어를 투자할만큼의 '주변환경'이 받쳐줘야만 실현가능한데, 이러한 '주변환경'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바로 그 사회가 가진 '인문학적 토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의 부정적 인식과 싸우고 있는 게임업계가 인문학계에 투자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문화연구 전공자들 사이에선 제법 오래 전부터 오르내리고 있다. 과거, 카메라의 등장으로 기록매체로서 지위를 위협받던 그림이나, 서커스 같은 취급이나 받으며 술자리 안주거리에 불과했던 영화는 예술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인문학의 힘에 기대었다.
따라서 인문학이 문화와 예술에 도움을 주느냐는 질문은 그 자체로 어리석은 우문이다. 현대 순수예술과 대중문화는 이미 인문학과 한 몸이었으며, 인문학적 토대의 부족은 그 자체로서 문화 예술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5.2.6.1. 반박
- 상단의 주장: 술집 안주거리 공연에 불과했던 영화라는 매체가 오늘날 종합예술의 지위를 넘어 '1번 매체' 취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음악과 미술과 스토리(문학)가 들어갔기 때문이 아닌, 영상이라고 하는 새로운 표현 방식을 통해 리얼리즘[51] 이라고 하는 새로운 미학적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부여 작업에는 앙드레 바쟁, 장 뤽 고다르 등 인문학 출신 비평가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 반박: 잘못된 인과관계를 근거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예술가나 평론가들이 "이것이 예술이다"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대중에게 가치있는 문화예술로 인정받지 않는다. 대중에게 있어서의 가치있는 예술과 평론가들에게 가치있는 예술은 상호연관성은 있지만, 엄연히 분리된 이슈다. 현실에서 인문학자나 지식인들이 하는 주장을 대중들이 귀담아 듣던가? 영화가 대중과 여론에게 예술로 인정받게된 이유는 세대 교체이다. 영화를 보면서 자란 (상술한 앙드레 바쟁, 장 뤽 고다르를 포함한) 청소년 세대가 사회 지도층이 되면서 영화도 사회 주류 문화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대중가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도 마찬가지이다. 1980~2000년에는 대중가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역시 공부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들 매체 역시 탄압받으면서 나름대로 예술적인 혁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게임 중독법이나 만화 검열, 가요 검열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 매체는 당시 성인들의 주류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2010년~2020년에는 지상파 방송에서 진격의 거인과 같은 만화 유행어가 나와도 비난받지 않는다. 이는 80~20년대의 청소년들이 10~20년대에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이 즐기던 매체들도 사회 주류 문화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논의와는 별개로, 현실에서 예술의 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대다수가 인정하냐다.
5.2.7.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인문학의 대번영기
한국(조선)은 원래 대부분의 학문이 인문학일 정도로 인문학이 압도적이던 나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인문학 논술시험으로 양반중심의 상급 행정관료를 선발했기 때문에 인문학(성리학)이 곧 출세의 길이었고 과학기술 등 실용학문(실학)은 중인출신의 하급 실무자를 뽑는 잡과에 불과했다. 이러한 문과중심 학문전통은 현대산업사회에 접어들어서도 그대로 이어져 대학/학계/문화계나 정재계의 엘리트는 문과 중심이어서 출세의 길이었던 인문학/문과 우대 풍조는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반대로 과학기술은 천대를 받아왔고 이공계는 늘 찬밥 신세였다가 한국의 산업구조가 기술 기반의 제조업 중심이 된 1990년대 이후에나 과학기술이나 학문의 실용성이 강조되며 인문학이나 문과의 비중이 줄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이과 배경의 엘리트는 매우 적다. 2000년대 들어서는 교육부 장관이나 종합대학총장에 이공계 학자가 배출되는 사례가 보이는 등 한국의 엘리트 사회에서 이공계의 점차 비중이 올라가고 있다. 현재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는 것은 한국 사회와 산업의 변화에 따라 출세의 수단이 점차 인문학에서 과학기술로 비중이 옮겨가는 엘리트들의 천이과정에서 과거 출세수단으로 압도적이았던 인문학이 실용적 학문에 밀려나며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출세의 수단에서 밀려난 것을 아쉬워 하는 회고적 한탄일 뿐이다.
그러면 과연 인문학의 비중이 줄어들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21세기야 말로 인문학의 대 번영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초 양반 인구의 비율은 7% 정도였다. 또 1960-70년대만 해도 미국은 대학진학률이 8% 정도였고, 한국도 대학진학률이 13% 가량으로 인구중 인문학 전공자 비율은 크게 늘지 않았다. 그 외 대부분의 인구는 실용적인 농업이나 기술 등 실용적 노동을 배우고 직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현대 한국에는 인구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고 매년 배출되는 인문학 전공 졸업생 수가 20만 가량으로 이는 동년배 인구의 30%가 넘는 비율로 역사상 가장 많은 수와 비율의 인문학 전공자를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발행되는 인문학 서적의 종류나 판매고나 인문학자의 총수나 논문의 수를 그 동안의 인구증가로 나눠도 (즉 인구 100만명 당 인문서적의 종수나 인문학 교수/연간 졸업생의 수) 1960-70년대에 비하면 몇 배이상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대학교육을 받은 인구가 늘어나므로서 인문교양서 등의 소비도 크게 늘었다. 즉 오히려 역사상의 어느 시대보다 인문학이 대중화된 인문학의 대번영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수요에 비해 과잉 배출되는 게 문제이지 이 비율을 인문학 교사와 연구자 인문학 교양/전공교수 등의 사회적 수요에 맞게 줄인다면 오히려 역사상의 어느 시대보다 인문학이 대중화된 인문학의 대번영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대학진학률이 낮은 북유럽이나 실용학문의 전통이 강한 선진국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는 나타난 적이 없다. 한국과 일본 미국 등 갑자기 대학진학률이 높아지고 인문학 정원도 비례해 늘어난 국가에서만 인문학 위기설이 나올 뿐이다.[52] 또 인문학 졸업생등이 취업이 잘 안되어 취업률이 낮아져 위기라고 하는데 이것도 인문학출신 취업자수를 보면 이전 시대보다 많은 인문학 전공자들이 취업에 성공하고 있다.[53] 인문학 전공자의 취업 기회도 대학의 수가 늘어서 교양교수 자리나 연구직 교사직 등도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즉 절대수는 인구증가를 감안해도 크게 늘어났다. 즉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장은 과잉배출된 인문학대학 졸업생의 취업률 위기일 뿐, 인문한 전공 취업자 수는 어느 때보다 많아졌고 인문학은 한국에서도 결코 위기인 적이 없다.
6. 고전의 가치
왜 오늘날에도 우리는 고대철학을 연구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들이 있을 법하다. (중략) 오늘날 우리들의 철학적인 사색과 과학적인 사고 전체의 본질적인 개념들도 모두 고대의 정신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원리, 원소, 원자, 물질, 정신, 영혼, 질료와 형상, 가능태와 현실태, 실체와 속성, 존재와 생성, 인과관계, 전체, 의미, 목적, 개념, 이념, 범주, 판단, 추리, 증명, 가설, 이론, 요청, 공리 등등의 개념들은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우리들이 이 개념들의 본래적인 뜻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이 개념들을 올바로 들여다 보지도 못하고 맹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은 단순히 개별적인 철학의 기본개념들만 고대철학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심리학 및 우주론 등과 같은 철학의 본질적인 여러 부문들도 다 고대에 이룩된 것들이다. 그리고 또 관념론, 실재론, 회의론, 유물론, 감각주의 및 이것들이 뒤섞인 형태 등등, 철학적인 사고의 여러 유형들도 이미 그리스 시대에 발달했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중에서
인문학은 매우 심오하며 다른 분과학문과 비교하여 고전(classics)이 매우 중요한 학문이다. 예컨대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고 해도 물리학사(史)를 전공하지 않는 한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전부 볼 필요는 없으며, 그 주요 개념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고전역학 교과서를 이해하는 정도로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정치철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은 한 번이라도 반드시 플라톤의 <국가론>을 제대로 읽어 볼 필요가 있으며, 이와는 별개로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플라톤에 대한 해석도 눈여겨 봐야 한다. 따라서 마음먹기에 따라 인문학은 그야말로 평생을 파고들어가도 모자랄 정도의 엄청난 독서량과 생각의 깊이를 요구하는 학문이 된다. 실제로 유명 철학의 원전을 강독하는 대학원 수준 수업의 경우 1시간 강의에 채 2페이지를 못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구절 한 구절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컴퓨터 보안을 위한 수학적 모델링으로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 하기에는 뭔가 기묘한 조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만나는 학생들에게 대학에서 남은 시간 동안 최고의 인문학 강의를 들으라고 강력 권유한다. 1995년 내가 수강한 디지털 회로 강의는 이제 전혀 쓸모가 없는 구식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해 내가 들었던 문학과 역사 강좌는 지금도 내 마음에 깊이 남아 있다. 존 로크, 토머스 홉스, 임마누엘 칸트 등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위대한 교훈과 이야기들은 지금도 여전히 밝은 등불이 되어 인류의 앞길을 비추고 있다. 빠르게 질주하는 세계에서 성공하려면 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 지금 달려가고 있는 미래가 정말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미래인지를 확인할 줄 알아야 한다.
앤 미우라 고(Ann Miura-Ko), 벤처캐피탈 Floodgate의 임원(《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175면에서 인용)
이처럼 인문학은 고전을 통해 과거 사람들(학자들)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이를 비판하며 새로운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중요시한다. 고전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새로운 생각을 위한 '''참고(레퍼런스)'''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당장 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혼자 결정을 내리기 힘들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던가. 고전은 그런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물론 고전이 무조건 옳다는 식의 교조주의는 인문학의 자멸을 불러오기 때문에 피해야 하며 실제로도 인문학에서 경계한다.
하지만 인문학에서 고전이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고전을 읽더라도 단순히 '누가 어떠 어떠한 얘기를 했다더라.' 거나 '그의 주장은 이러이러하다.' 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더욱 중시한다.[54] 예를 들어 프린스턴 대학교의 유명한 철학자 길버트 하먼은 사무실 문에 "철학사 꺼져" 같은 문구를 붙여놓기도 했고, 분석철학의 거장 콰인은 철학사 강의를 지루한 작업이라 평가하면서 진짜 철학(즉 자기 연구)을 하고 싶어하기도 했다. 고전 중심의 강의가 인문학 교육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좀 비약이다.
무엇보다도 학부 커리큘럼에서는 고전 한 권을 정해서 한 학기 동안 강독하는 강의가 있을 수 있지만, 대학원에서는 논문주제로 어떤 고전을 선택하는 것이면 또 모를까 이런저런 고전들을 정독해 볼 시간조차 없다. 어떤 이는 고전에 대한 반발조차 고전의 영향 하에 있다며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지만, 이는 그가 현대 분석철학 등의 연구 동향에 무지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콰인이나 하먼의 연구는 고전의 해석이나 비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고전을 몰라도 그들의 연구를 이해하기에는 지장이 없으며 그들의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서 더 필요한 것은 동시대의 동료들의 연구 성과와 타 학문 분야의 연구 성과들이다. 당장 대학교에서 분석철학 수업을 듣게 되면 두꺼운 고전이 아니라 중요한 현대철학자들의 논문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철학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인문학이라고 간주되던 여러 학문 분과들이 이러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고전이 인문학 커리큘럼에서 당장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고 여전히 자주 마주치기야 하겠지만, 고전이 인문학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관념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