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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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동명성왕이 재위 19년 만인 기원전 19년 가을 9월에 사망하여 용산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광개토대왕비나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서 인용된 《구삼국사》는 재위 19년 만에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자 태자 유리와 신하들이 왕이 남긴 옥채찍을 왕 대신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 옥채찍은 비류국의 왕 송양을 굴복시킬 때 사용한 물건 같다.
북한의 수도 평양직할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한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무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36호. 무덤 앞에는 신분이 높은 자라도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고려시대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둘레의 산 언덕 진파리무덤떼(고분군)에도 고구려 무덤 수십여 기가 산재했는데, 북한에선 이를 두고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동명왕릉을 이장하면서 함께 데려온 개국공신들의 딸린무덤이라고 주장한다.
무덤 자체는 단군릉과 마찬가지로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세종실록지리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해당 무덤을 '''진주묘(珍珠墓)'''라고도 부른다는 내용이 있다. 1번 항목에서 북한 당국이 1974년에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내부에서 고구려 고분 특유의 벽화 등을 발견하였다. 이후 1993년 5월 14일에 크게 개건하였다.[5] 작은 고구려식 무덤을 거대 피라미드로 개조한 단군릉 수준의 막장은 아니지만 이 쪽도 여러 무리한 추정을 덧붙여서 상당히 큰 규모로 바꿔놓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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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왕릉의 전경. 당연히 원래있던 석조물들은 아니고 깔끔한 대리석으로 정비하면서 세운 것들이다.
현재 봉분의 높이는 11 m이다. 유홍준의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북한 측 설명에 따르면 봉분 높이는 원래 9 m 정도였는데, 김일성이 "1500년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서 지금의 높이가 된 것이니 원래 높이는 얼마나 더 컸겠느냐." 하며 '''비바람에 깎이기 전의 원래의 높이를 계산해 그만큼 더 높이라'''고 교시를 내린 바람에 과학자들이 1400년 동안의 기후 변화 등을 감안하여 지금의 높이를 계산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아일보 등 당시 기사에는 동명왕릉 개건 1년 전인 1992년에 남쪽을 방문했던 북한의 부총리 김달현이 포스코(당시 포항제철)에 이어 경주시를 방문해 천마총을 보고는 "'''이 무덤을 보니 동명왕릉의 높이를 높여야겠다.'''" 하고 말했다 하므로[6] 딱히 과학적인 고증을 살리겠단 목적보단 그냥 당시 김일성이나 북한 정권의 자존심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즉 고구려 대표 고분이란 곳이 신라 대표 고분보다 크기가 작다는 것을 북한이 남한한테 밀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7][8]
북한이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 무덤의 구조가 밑에 퉁거우의 고구려 고분처럼 3단으로 정방형 돌축대를 쌓고 내부에 석실을 만들어 벽화[9] 까지 그리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덮은, 평양 천도 이전 국내성 시절의 고구려에서 무덤을 지을 때 주로 썼던 적석총(돌각담무덤) 양식과 평양 천도 이후에 주로 나타나는 석실분(돌간흙무덤)의 중간 형태를 띤다는 것,[10] 그리고 동명왕릉의 무덤 옆에 위치한 절터 우물에서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절이 지어진 목적이 애초에 능(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능'이란 왕의 무덤을 의미한다는 것,[11]
졸본에서 사망해 졸본에 묻혔을 동명성왕의 무덤이 왜 평양에 있느냐는 반론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장수왕 때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같이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 추정을 은근슬쩍 기정사실화하여 회피한다. 외적의 침입 때마다 선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다보니[12] 수도를 옮기면서 동명성왕릉 같은 중요한 무덤은 평양으로 옮겨서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13]
사실 이 무덤이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는 것은 북한이 뜬금없이 한 주장은 아니다. 이미 조선시대에도 그러한 주장이 존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이라고 기록했고, 대표적으로 18세기 조선 후기의 사학자 순암 안정복 역시 현재 북한의 주장과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학계에서는 되려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후보들은 본 동명왕릉을 포함하여 길림성 집안시 소재 장군총, 평양 동쪽의 광대산 자락의 토포리 대총, 그리고 한왕묘(경신리 1호)가 있다.
토포리 대총이야 장수왕릉 후보에서 많이 뒤쳐진 편이지만 와당이 출토된 '동명왕릉', 한왕묘, 장군총은 여전히 각 연구자마다 와당의 변천을 기준으로 장수왕릉일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한다. 그 밖에도 묘실의 구조에 따른 판단도 있지만 고구려 석실이 장수왕 시절까지도 통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널리 인정받는 무덤으로 딱 하나를 꼬집기는 어렵다. 거기다가 고구려 왕릉이 왕릉급 고분과 실제 왕들이 딱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정하기가 어렵다. 일부 논자들은 장군총을 일종의 허묘로 축조하고 동명왕릉 또는 한왕묘를 실제 무덤으로 축조했으리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무덤이 동명성왕 고주몽의 진짜 무덤이 아니라고 한들 무덤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고구려 왕릉급 무덤인 것은 물론, 이 무덤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확인된다면, 장수왕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어마어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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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주몽)의 무덤
《삼국사기》에는 동명성왕이 재위 19년 만인 기원전 19년 가을 9월에 사망하여 용산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광개토대왕비나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서 인용된 《구삼국사》는 재위 19년 만에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자 태자 유리와 신하들이 왕이 남긴 옥채찍을 왕 대신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 옥채찍은 비류국의 왕 송양을 굴복시킬 때 사용한 물건 같다.
2. 평양의 동명왕릉
2.1. 개요
북한의 수도 평양직할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한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무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36호. 무덤 앞에는 신분이 높은 자라도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고려시대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둘레의 산 언덕 진파리무덤떼(고분군)에도 고구려 무덤 수십여 기가 산재했는데, 북한에선 이를 두고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동명왕릉을 이장하면서 함께 데려온 개국공신들의 딸린무덤이라고 주장한다.
무덤 자체는 단군릉과 마찬가지로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세종실록지리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해당 무덤을 '''진주묘(珍珠墓)'''라고도 부른다는 내용이 있다. 1번 항목에서 북한 당국이 1974년에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내부에서 고구려 고분 특유의 벽화 등을 발견하였다. 이후 1993년 5월 14일에 크게 개건하였다.[5] 작은 고구려식 무덤을 거대 피라미드로 개조한 단군릉 수준의 막장은 아니지만 이 쪽도 여러 무리한 추정을 덧붙여서 상당히 큰 규모로 바꿔놓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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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왕릉의 전경. 당연히 원래있던 석조물들은 아니고 깔끔한 대리석으로 정비하면서 세운 것들이다.
현재 봉분의 높이는 11 m이다. 유홍준의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북한 측 설명에 따르면 봉분 높이는 원래 9 m 정도였는데, 김일성이 "1500년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서 지금의 높이가 된 것이니 원래 높이는 얼마나 더 컸겠느냐." 하며 '''비바람에 깎이기 전의 원래의 높이를 계산해 그만큼 더 높이라'''고 교시를 내린 바람에 과학자들이 1400년 동안의 기후 변화 등을 감안하여 지금의 높이를 계산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아일보 등 당시 기사에는 동명왕릉 개건 1년 전인 1992년에 남쪽을 방문했던 북한의 부총리 김달현이 포스코(당시 포항제철)에 이어 경주시를 방문해 천마총을 보고는 "'''이 무덤을 보니 동명왕릉의 높이를 높여야겠다.'''" 하고 말했다 하므로[6] 딱히 과학적인 고증을 살리겠단 목적보단 그냥 당시 김일성이나 북한 정권의 자존심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즉 고구려 대표 고분이란 곳이 신라 대표 고분보다 크기가 작다는 것을 북한이 남한한테 밀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7][8]
2.2. 동명왕의 무덤인가?
북한이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 무덤의 구조가 밑에 퉁거우의 고구려 고분처럼 3단으로 정방형 돌축대를 쌓고 내부에 석실을 만들어 벽화[9] 까지 그리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덮은, 평양 천도 이전 국내성 시절의 고구려에서 무덤을 지을 때 주로 썼던 적석총(돌각담무덤) 양식과 평양 천도 이후에 주로 나타나는 석실분(돌간흙무덤)의 중간 형태를 띤다는 것,[10] 그리고 동명왕릉의 무덤 옆에 위치한 절터 우물에서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절이 지어진 목적이 애초에 능(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능'이란 왕의 무덤을 의미한다는 것,[11]
졸본에서 사망해 졸본에 묻혔을 동명성왕의 무덤이 왜 평양에 있느냐는 반론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장수왕 때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같이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 추정을 은근슬쩍 기정사실화하여 회피한다. 외적의 침입 때마다 선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다보니[12] 수도를 옮기면서 동명성왕릉 같은 중요한 무덤은 평양으로 옮겨서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13]
사실 이 무덤이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는 것은 북한이 뜬금없이 한 주장은 아니다. 이미 조선시대에도 그러한 주장이 존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이라고 기록했고, 대표적으로 18세기 조선 후기의 사학자 순암 안정복 역시 현재 북한의 주장과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북한에서는 평양에 있는 것이 무덤(墓)이고 졸본에 있는 것은 사당(廟)이라고 해석하지만, 장군총 위에서 사당의 흔적으로 보이는 건물 터가 발견된 데다 《삼국유사》에서도 수로왕의 무덤(墓)을 두고 버젓이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부른 것이 확인되어 무덤과 사당이 구분되었다고 보기에는 희박하다. 거기다 이 무덤이 정말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면, 실제 유해를 모신 무덤을 평양 코앞에 두고선 고작(?) 사당에 가서 제사를 지내려 졸본까지 갔다는 건데 영 부자연스럽다.동명(東明) 때 평양은 낙랑군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동명이 어떻게 이곳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응제시주(應製詩註)》에,
"주몽이 졸본(卒本)에 도읍하였는데 그 소재는 알 수 없으나 당(唐)의 이적(李勣)이 아뢴 말에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까지 17역(驛)이다.' 하였으니 거리가 서로 너무 멀다. 아마 일찍이 구제궁(九梯宮)을 짓고 와서 놀다가 죽어 이곳에 장례한 것이리라."
하니, 이 말 역시 잘못이다. 대개 고구려가 관구(毌丘)ㆍ모용(慕容)의 난을 만나 도읍이 잔파(殘破)되고 선왕의 능묘가 헐려 나라를 옮길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왕의 능침도 따라 남쪽으로 옮겨서 동명묘를 지금 중화(中和)의 용산(龍山)에 장례하였으므로 이르는 말일 것이다. 고려 고종이 몽고(蒙古)의 난을 만나 강화(江華)로 천도하고 태조 이하 모든 능묘를 죄다 이장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상고하건대 《광여기(廣輿記)》에,
"요동(遼東) 복주(復州)[14]
에 명왕산(明王山)이 있는데 고구려의 왕자 동명을 이곳에 장례하였다."하였으니, 혹시 처음 이곳에 장례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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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부록 상권 고이(考異) 中 '동명을 용산에 장사지내다'
학계에서는 되려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후보들은 본 동명왕릉을 포함하여 길림성 집안시 소재 장군총, 평양 동쪽의 광대산 자락의 토포리 대총, 그리고 한왕묘(경신리 1호)가 있다.
토포리 대총이야 장수왕릉 후보에서 많이 뒤쳐진 편이지만 와당이 출토된 '동명왕릉', 한왕묘, 장군총은 여전히 각 연구자마다 와당의 변천을 기준으로 장수왕릉일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한다. 그 밖에도 묘실의 구조에 따른 판단도 있지만 고구려 석실이 장수왕 시절까지도 통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널리 인정받는 무덤으로 딱 하나를 꼬집기는 어렵다. 거기다가 고구려 왕릉이 왕릉급 고분과 실제 왕들이 딱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정하기가 어렵다. 일부 논자들은 장군총을 일종의 허묘로 축조하고 동명왕릉 또는 한왕묘를 실제 무덤으로 축조했으리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무덤이 동명성왕 고주몽의 진짜 무덤이 아니라고 한들 무덤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고구려 왕릉급 무덤인 것은 물론, 이 무덤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확인된다면, 장수왕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어마어마해진다.
3. 같이보기
[1]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구려 문화의 걸작이며, 고분의 구조는 정교한 건축 공법을 보여 준다.[2] 고구려 문화의 독특한 매장 풍습은 일본을 포함한 인근의 다른 지역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3] 고구려 고분은 고대 매장 양식의 중요한 사례이다.[4] 1993년 12월 북한최고인민회의의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을 통해 1994년 문화유물보호법을 제정·공포하였으며 기존에 사용되던 국보, 보물 등의 지정번호를 일괄적으로 갱신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5] 동명성왕의 생년월일을 기원전 298년 음력 4월 1일로 보고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5월 14일이라, 1993년 5월 14일이 동명성왕의 2290회 생신날이라서 개건일로 잡았다고 한다.참조 북한은 동명성왕이 기원전 298년에 태어나 기원전 277년에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나라 학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6] 출처: 동아일보 1992년 7월 23일자 보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7] 북한 정권은 현재의 북한 영역에 중심지를 두었던 고구려에 지금 북한의 상황을 대입해, 초강대국(당나라, 미국)과 남쪽 같은 민족(남한, 신라)에게 핍박받는 상황을 동일시하는 교육을 하고 있고, 63빌딩 보고 열폭해서 더 높은 류경 호텔 건설에 뛰어든 것처럼 별의별 사소한 부분에서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집착을 일관되이 드러내었다.[8] 왕릉 크기가 국력은 아니다. 당장 신라도 진흥왕 이후의 전성기에 들어서 임금의 권위와 나라의 체계가 안정되면서 국력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지만 고분의 크기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논리나 철학이 미처 발달하지 못한, 무덤이나 궁실을 크게 지어서라도 위정자의 권력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해야만 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후대로 갈수록 '그딴 거 크게 지을 돈 있으면 그 돈으로 백성이나 좀 구제해라.'는 식으로 의식이 성장하기 때문.[9] 1970년대 무덤을 재조사하면서 벽면의 석회를 씻어내렸는데 그때 보라색 바탕에 붉은 자색을 칠한 지름 12센티미터의 연꽃무늬가 4.2 cm 간격으로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당시 남아있었던 연꽃 무늬가 모두 641개였다고.[10] 이런 구조의 무덤은 북한에서는 용강큰무덤밖에 없다고.[11] 설령 이 무덤이 실제 동명성왕릉이 아니라고 해도, 정릉사 곁에 있는 이 무덤이 왕릉급임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12] 293년 봉상왕 때 전연의 모용외가 쳐들어와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쳤고, 342년 고국원왕 때엔 모용황이 환도성을 불태우고 퇴각하면서 또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아예 그 시신까지 가져가버렸다.'''[13] 이건 고려나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고려는 고려궁지로 천도할 때 세조, 태조의 시신을 함께 모셔갔고, 조선은 선조가 종묘의 신위를 들고 파천했다. 조상을 숭배하는 한국사에선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14] 지금의 중국 요령성 대련시 와방점시(瓦房店市). 요동반도 서안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