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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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정운수(鄭雲樹)
생몰
1903년 5월 27일 ~ 1986년 11월 6일
출생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운수는 1903년 5월 27일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가족이 대구로 이주한 뒤 제일교회에서 설립한 대남소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12월 기독교 학교인 계성학교로 진학한 그는 1919년 계성학교 2학년에 재학하던 중 3.1 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1920년 서울 연지동으로 이주한 그는 연동교회에 출석하는 동시에 경신학교를 재학했고,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6.10 만세 운동에 가담했으며, 1929년 3월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미국에 유학가려 했으나 실패하자 경남 마산교회 소속 호신고등보통학교에서 하갯읃렝게 조선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후 평양신학교에 진학해 비교종교학을 전공해 1935년 평양신학교를 제30회로 졸업하고, 평양신학교 교장 로버트의 추천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가서 프린스턴 대학교에 진학했다.
1937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인 중심으로 애국단체인 동지회, 교민회를 조직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발발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전개되자, 그는 한인신문인 신한민보에 기고문을 거듭 올렸다. 특히 1942년 3.1 절을 기념하여 워싱턴에서 개최된 전한인대회의 진행사항을 기고하여 미국민들과 항일의식의 공감대를 조성했다. 1942년 3월말부터는 워싱턴에서 구미위원부 이승만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정운수는 “구미위원 주보”의 편집 발송을 담당하여 임병직, 장기영 등과 같이 근무했다.
1943년 6월 미국 공군사관학교(O.C.S) 등에서 훈련을 받고 1944년 1월에 공군소위로 임관되었으며, 1944년 5월 C.B.I(중국, 버마, 인도)전투구 항공대에 배속되어 일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 1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중국 곤명에 도착하여 미 제14항공대 소속 특수 중폭격기 대대에 근무하던 중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협의하여 한미 합작 군사훈련을 위한 한국측 잠재세력을 조사 보고하라는 미 육군성 지시를 받았다. 여기서 미공군 소령 클라이드 비 사전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사전트와 함께 임시정부 요인 김구, 조소앙, 엄항섭, 신익희를 비롯하여 지청천, 최용덕, 김원봉, 김규식 등과 긴밀한 상의 끝에 양자강 건너 광복군제1지대와 서안에 있는 광복군제2지대를 각각 방문하고 정확한 실태를 조사했다. 1945년 5월초에 서안에 도착하니 광복군 제2지대의 본부는 지대장 이범석과 안춘생, 노태준 등이 부서를 맡아 훈련을 하고 있었다. 미 국방성으로부터 미국 OSS(전략정보처) 산하에 한미합작으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훈련 시키라는 지시가 있어, 그는 이순용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여 주로 통신교육을 전담했다.
이후 한국 광복군의 국내진입 작전계획에 참여했으나 조국의 광복으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8.15 광복 후,그는 버드 중령을 단장으로 미군 장교 19명,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등 도합 24명으로 구성된 인원과 함께 C-26비행기를 타고 1945년 8월 17일 중국 서안을 떠나서 서울 여의도 비행장 상공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위협으로 다시 서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1947년 미 공군에서의 복무를 끝낸 그는 뉴욕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이승만으로부터 귀국을 종용하는 편지를 받았으나 거절했고, 194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2년 다시 이승만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귀국한 그는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맡았고, 1954년 8월 남궁련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준 뒤 1957년 미국 펜솔루회사 한국지부에서 근무했다. 1978년 남산관광주식회사 이사를 맡았으며, YMCA에서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1986년 11월 6일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운수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