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1903)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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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체신부 장관
장기영
張基永 | Chang Ki-young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03년 10월 20일
강원도 영월군 군내면 영흥리
(現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사망
1981년 5월 17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석정(石正)
재임기간
제2대 체신부 장관
1949년 6월 14일 ~ 1952년 1월 11일
제10대 서울특별시장
1960년 5월 2일 ~ 1960년 12월 30일
학력
영월공립보통학교 (졸업)
춘천공립농업학교 (졸업)
중동중학교 (고등과 / 졸업)
주오대학 전문부 (경제과 / 졸업)
버틀러 대학교 (정치학 / 학사)[1][2]
인디애나 대학교 (국제법학 / 석사)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여담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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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03년 10월 20일 강원도 영월군 군내면(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서 태어났다. 영월공립보통학교, 춘천공립농업학교, 중동중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스보보드니로 건너가 무장독립부대 통합을 위해 조직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의 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4년 주오대학 전문부 경제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안창호·김구의 권유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버틀러 대학교 정치학부를 졸업하고, 인디애나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며 학업을 계속하였다. 1932년 겨울에는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워싱턴 D.C.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봄, 구미위원부에서는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어 가는 시국 상황에 한미공동전투활동의 필요성을 통감하고는 구미위원부 직원을 보강하여 새로운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한·미 공동 전투 활동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한·미 작전에 의한 재미 한국 청년들의 전투훈련 및 참전을 미국 측에 제안하여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에 그는 장석윤·조종익(趙鍾翊)·피터 김 등과 함께 OSS에 추천되어 정보·통신 등 특수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미국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육군 항공대 중령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그동안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고향인 강원도 영월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이 가입 승인을 받도록 힘을 쏟았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는 제2대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정일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3대 총선 후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아시아반공대회 한국대표, 1957년부터 1960년까지는 대한중석광업 사장, 1960년 관선 서울특별시장 등을 지냈다. 그해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한근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5대 총선 후 정당활동을 재개하였고 박정희가 집권하자 국민의당에 입당했다가, 1967년 신민당으로 옮겨 운영위원을 지냈고, 같은 해 제6대 대통령 선거 때는 신민당 선거사무장 직을 맡기도 했다. 1971년에는 국민당으로 옮겨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민중당에서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으며, 1981년 5월 17일 별세하였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선거 이력


<rowcolor=white>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강원도 영월군)
무소속
12,375표 (31.65%)
당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중구 을)
무소속
3,041표 (15.28%)
낙선 (4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
무소속
10,383표 (24.89%)
낙선 (2위)


4. 여담


5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고향 영월읍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학교의 이름을 그의 호인 석정(石正)을 따서 각각 석정여자중학교·석정여자고등학교로 지었다.
영월읍내 초등학생들은 다른 지역으로 전학가지 않는 이상 남자는 영월중학교, 여자는 석정여자중학교로 가게 된다. 석정여자고등학교는 옛날에는 수능 성적이 우수한 편으로 정시로 대학을 진학하는 학생이 많았으나 현재는 수시 농어촌특별전형으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5. 둘러보기




[1] 1950년 간행된 『대한민국인사록』에는 '미국 패트러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했다'고 기재되어 있고, 1967년 간행된 『사진으로 본 국회20년 - 부록 - 역대국회의원약력』에는 '미국 ■■리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했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1977년 간행된 『역대국회의원총람』에는 '미국 버틀러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 중 대한민국헌정회 홈페이지에 기재된 약력사항은 1967년 간행된 『사진으로 본 국회20년 - 부록 - 역대국회의원약력』에 기재된 사항을 보고 막연히 버클리 대학으로 추측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당시 학력사항에는 '미국 빅토리 대학 졸업'으로 기재되어 있었기에 버클리 대학으로 추측한 것은 확실히 억측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심지어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버지니아대학에서 수학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기도 하다.[2] 한편,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930년 버틀러 대학교 정치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