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리비아 내전

 



1. 개요
2. 전쟁의 시작
3. 전황
3.1. 3월 공세
3.2. 전선의 교착
3.3. 나푸사 산맥 전투
3.4. 트리폴리 진격
3.5. 시르테 공방전
4. 내전 이후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Flags_of_the_2011_Libyan_civil_war#/media/File:Flag_of_Libya_(2011_combined).svg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 중 발생한 리비아의 민주화 시위에서 촉발된 리비아내전.
무아마르 알 카다피정부군과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는 시민군 간의 전쟁에서 결국 시민군이 카다피를 사살하며 승리했다.

2. 전쟁의 시작


피로 물들어가는 리비아 국기 포스터. 내전을 의미한다.
2011년 2월 17일 벵가지 등 동부에서 시위가 본격적으로 불 붙기 시작했다. 2월 20일은 차량 자폭 공격으로 벵가지 병영을 없에면서 벵가지가 시위대의 손에 들어갔다. 기사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고 3월 초순에 이르러 시위대의 기세는 절정에 달해 수도 트리폴리, 카다피의 고향 시르테 등을 제외한 거의 전 영역이 시위대의 손에 떨어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카다피 역시 호스니 무바라크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처럼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카다피는 두 사람과는 다르다고 강변하듯 3월 중순에 들어서자 엄청난 양의 병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공세에 나섰다. 기세등등했으나 기본적으로 훈련과 무기가 부족한 시위대는 시르테 공격에 나섰다가 빈 자와드에서 지면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서방세계는 정치적 압력을 지속하였으나 카다피는 콧방귀를 뀌며 시위대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음과 동시에 외교력을 발휘해 UN의 제재를 막으려 들었다. 3월 10일에는 트리폴리 인근의 자위야와 시르테 인근의 빈 자와드를 빼앗기고 시르테와 벵가지를 잇는 교통 요지인 아즈다비야까지 위협받기 시작했다. 계속 밀리던 시위대는 거점 도시인 벵가지 코앞까지 밀려났고 정부군이 외곽에 도달하여 포격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었다. 시민군 인사들이 도망쳤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시위대의 패배가 명백하게 보였다.
그리고 이 순간 하늘에서 홀연히 라팔이 나타나서 정부군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다.
이는 3월 18일 UN 안전보장이사회가 뉴욕 시간 17일에 15개국 중 중국, 러시아, 독일, 인도, 브라질 등 5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찬성으로 리비아에 비행 금지 구역을 선포한 것에 따른 것이다. 카다피는 이에 시민을 보호한다며 정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손바닥 뒤집듯 벵가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고 결국 서방세계는 오디세이 새벽 작전을 선포하며 프랑스의 첫 폭격을 시작으로 카다피군에 대한 공습을 개시하였다.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시민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시위는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3. 전황



3.1. 3월 공세


전열을 가다듬은 시민군은 3월말이 되자 벵가지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아즈다비야를 향해 공세를 개시하였다. 21일 밤부터 계속된 미군의 공습으로 아즈다비야의 정부군이 타격을 받자 24일 시민군은 박격포 등의 지원을 받으며 아즈다비야 시내로 공격을 개시했다. 도시의 절반을 장악한 시민군의 공세는 정부군의 기갑 전력이 반격에 나서면서 주춤하였고 밤이 되어 나토군이 다시 공습을 개시하자 RPG와 로켓을 동원해 공격을 재개하여 결국 26일에 이르러 아즈다비야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때 대부분을 빼앗겼던 제3의 도시 미스라타에서도 식량, 물, 전기 부족에 시달리는 판국에서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3월 28일, 시르테를 사이에 두고 정부군과 시민군 사이에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29일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반격으로 인해 시민군은 빈 자와드와 라스 라누프에서 밀려나며 주춤하기 시작했다. 무장과 훈련이 부족한 시민군에게 한계가 보였고 시민군은 어떻게든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RPG-7 등 중화기를 구입하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무기 공장을 건설하였으며 항공기용 로켓 포드나 장갑차 포탑 등을 이용해 각종 테크니컬을 만들어내 전선에 투입했다.

3.2. 전선의 교착


3월 말부터 시작된 브레가에 대한 공세 와중에 나토군이 시민군에 오폭을 가해 27명의 사망자가 나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나토군이 시민군이 전차를 운용하는 줄 모르고 그대로 때려부순 것. 강력한 정부군의 화력과 나토군의 오폭으로 인해 기세를 잃은 시민군은 4월 7일, 브레가에서 철수하였다. 이후에도 브레가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으나 시민군은 더이상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정부군의 반격으로 아즈다비야가 함락될 위기에 빠졌다. 시가지까지 밀고 들어온 정부군에 대항해 나토군과 시민군의 반격이 계속되었고 결국 14일 하루종일 계속된 전투 끝에 정부군이 아즈다비야 서쪽으로 밀려나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트리폴리와 가까운 미스라타는 또다시 정부군의 공격을 당했으나 시민군이 방어에 성공하면서 4월 23일 정부군이 철수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은 튀니지와의 국경까지 확보하며 리비아 서부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전선이 브레가와 아즈다비야 사이를 경계로 한 교착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자 더이상의 눈에 띄는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스라타는 5월 내내 주구장창 공격이 계속되었다. 결국 5월 15일 카다피군은 미스라타 공격을 포기했다.
유럽 국가들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의 깊은 개입이 힘들어지면서 실질적인 군사적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세계는 전쟁의 주도권을 시민군에 넘기기 위해 군사고문단 등 간접적인 도움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4월 초부터 미국, 이집트 등이 시민군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4월 19일 영국은 시민군에 군사고문단 파견과 통신 장비, 보병 전투 장비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4월 20일 미국은 연료와 의료 장비, 트럭 등 2천 5백만 달러 규모의 물자 지원을 결정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도 군사고문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카타르도 대전차 미사일과 트럭 등을 지원하였다. 동시에 서방 각국은 5월 들어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를 리비아의 합법적인 대표로 인정하며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3.3. 나푸사 산맥 전투


6월 4일부터 영국군프랑스군공격헬기를 동원한 공습을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리비아 서부 나푸사 산맥 지역에 은거한 시민군이 정부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나푸사 산맥의 시민군은 3~5월에 걸친 정부군의 공격으로 인해 많은 힘을 잃었으나 6월 들어 반격을 개시하였고 프랑스영국은 나푸사 산맥에 소화기와 전투복, 통신 장비 등을 공수해 이들을 지원하였다.[1]
6월 7일에 이르러 시민군은 주요 거점인 야프란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정부군은 8일 반격을 위해 또다시 미스라타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한달 내내 계속되었다.
나푸사 산맥의 시민군은 26일 트리폴리와 80Km 떨어진 비르 알 가남을 향해 공세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의 로켓 포격으로 인해 시민군의 공세는 7월 1일 좌절되었고 시민군은 방향을 바꿔 7월 6일 알 콰왈리쉬를 향해 공격을 가하였다. 나토군의 공습을 신호로 시민군은 공격을 개시해 몇 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알 콰왈리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이 무차별 로켓 포격을 가하며 반격에 나서면서 시민군은 더이상의 공세에 나서지 못하였다. 이어 7월 한 달 동안 알 콰왈리쉬를 두고 정부군과 시민군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알 콰왈리쉬의 시민군은 13일 탄약이 떨어져 일시 후퇴하였지만 곧장 동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그 날 저녁부터 알 콰왈리쉬 서쪽을 장악한 정부군과 5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정부군을 몰아냈다.
24일 다시 정부군이 알 콰왈리쉬를 향해 공격을 가하였으나 시민군의 반격으로 무산되었다.

3.4. 트리폴리 진격


7월 16일 동부지역의 시민군은 브레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해 4일만에 브레가를 장악하였다. 이로서 시민군은 리비아 동부지역의 유전 전체를 연결하는 공급망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그러나 정부군은 브레가에서 물러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브레가 탈환을 위해 한 달 넘게 공격을 가하며 저항하였다.
한편 나푸사 산맥의 시민군은 8월 6일 다시 한 번 비르 알 가남을 점령하기 위해 야프란을 시작으로 공세에 나섰다. 엄청난 포병 화력을 동원해 정부군을 몰아붙인 시민군은 드디어 8월 15일 비르 알 가남을 점령하였다. 시민군은 기세를 몰아서 지중해안까지 진출하기 위해 진격에 나섰다. 브레가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는 동부 시민군과 달리 나푸사 산맥 시민군은 나토군의 공습 지원을 받으며 순조로이 진격하였고 8월 16일부터 트리폴리 일대의 주요 거점을 장악하여 트리폴리로 통하는 보급선을 차단하는 작전에 나서 18일 트리폴리 서쪽으로 40Km 떨어진 위성도시 알 자위야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시민군의 공세로 트리폴리까지 위기에 처하자 정부군은 13일 스커드 미사일을 동원해 시르테 인근의 시민군에 공습을 가하며 반전을 꾀하였으나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끝까지 시민군을 인정하지 않던 중국까지 18일 시민군에 물자를 지원하며 이미 대세가 뒤집혔음을 반증했다.
8월 20일 '인어[2]의 새벽 작전'으로 명명된 시민군의 트리폴리 공격이 개시되었다. 나토군의 공습을 신호로 시민군은 트리폴리 전방향에서 공세를 개시하였다.
카다피측은 잠시 소수의 부대가 들어왔지만 격퇴했다고 주장했지만...22일 카다피의 삼남이 시민군에 붙잡히고 장남이 시민군에 투항하고 카다피의 최정예 부대인 카마스 여단이 주둔한 기지까지 장악당했다. 트리폴리시의 두 개 공항은 시민군이 점령했지만 카다피는 거미줄 같은 지하 땅굴을 통해 트리폴리를 탈출했다.
한편 카다피의 차남이 체포당했다는 초기의 소식은 오보였고 장남은 억류된 곳을 습격한 정부군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2011년 8월 23일 시민군은 공식적으로 승리를 선언[3]했지만 카다피파는 시르테를 거점으로 강력한 저항 의지를 내비쳤다. 내전의 향방은 시르테로 옮겨갔다.

3.5. 시르테 공방전


시르테가 마지막 결전지로 떠오르면서 완전히 승기를 잡은 시민군은 카다피군에게 항복을 권고하면서 협상 시한을 제시했다. 이와중에 카다피의 아내 사피아 파르카시와 딸 아이샤, 두 아들 무하마드와 한니발은 알제리로 도피했다. 반군 측에선 당연히 반발했고 카다피 가족에게 피신처 제공한 건 "적대행위"라며 알제리 측에 송환을 요구하겠다고 했다.[4]
하지만 카다피는 리비아 시간으로 2011년 9월 4일 반군이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의 점령지인 바니 왈리드에 오라는 조건을 내걸며 항복을 거부했다. 결국 시민군과 나토 연합군은 카다피의 마지막 거점 시르테를 향해 총공세에 나섰다.
2011년 9월 16일(현지 시각) 유엔 총회에서는 표결을 통해 시민군 대표인 과도국가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가 리비아의 유엔 회원국 지위를 넘겨받는 것을 승인했고[5][6] 2011년 3월부터 2024-10-28 06:15:24까지 98개의 UN 회원국이(과반수) NTC를 리비아의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했다.[7]
시르테는 치열한 교전 끝에 시민군에게 함락되었고 2011년 10월 20일 도망치던 카다피는 나토군 무인기의 공습을 받고 하수도에 피신했다가 시민군에게 붙잡혀 끌려나와 이동 중 머리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 그리고 같은 날 국가과도위원회는 카다피의 넷째 아들 무타심도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시민군은 2011년 10월 23일(현지 시각. 한국 시각으로 10월 23일 오후 11시~24일 자정 무렵) 공식적으로 리비아가 해방되었음을 선언해 내전 종식을 발표했다.

4. 내전 이후


리비아의 이후 행보에 대해선 많은 우려가 있다. 리비아는 부족주의가 강하고 시민군도 통일된 세력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자잘한 세력을 제외하면 크게 시민군은 벵가지파와 나푸사 산맥에서 싸우던 서부파 둘로 나뉜다. 이미 내전 기간 중 벵가지에서 시민군 총사령관이 반대파에게 암살당하면서 불안한 정황을 드러냈고 카다피 사후에 반군끼리 중화기를 대거 동원하여 교전을 했다가 일시 휴전을 맺기도 했다.기사
결국 이후 리비아는 통합된 정부를 꾸리지 못하고, 다시 무장세력들간의 내전이 터져서 지옥의 땅이 되고 말았다. '''제2차 리비아 내전''' 항목 참조.

5. 여담


체포 당시 살아있던 카다피가 순식간에 누군가의 총격을 받고 숨지자 그 정황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시민군 측은 호송 과정에서 교전이 벌어져 카다피가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흥분한 시민군 병사의 우발적 총격, 카다피 경호원의 사살, 심지어 카다피와 그렇고 그런 거래를 해오던 서방 국가들이 카다피가 입을 열 것을 우려해 미리 제거했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한편 카다피 축출 이후 꾸려진 새 정부도 여성 인권을 극도로 억압하는 샤리아 법을 들고 나와서 많은 우려를 사고 있다.기사
서방 세계 로부터 지원받은 무기류, 특히 대공 미사일 류가 마구잡이로 불출되어 이후 테러 행위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미국이 예전에도 소련을 견제한답시고 무기를 뿌렸다가 그 덕을 본 알 카에다가 후에 총부리를 미국으로 돌린 적도 있는 것처럼 이러한 문제가 단순한 우려로 그치지 않고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다. 일단 반군들은 공식적으로 리비아 국군이 창설되기 전에는 무기를 넘기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글라놀러지라 불리며 해괴한 웃음거리로 취급 받던 테크니컬게릴라들의 무기 제작 방식이 시민군들을 취재한 서방 기자들을 통해 널리 선보인 전쟁이었다. 오히려 기존의 이미지가 과장으로 보이지 않는 정도. 링크 이 내전에 주도적으로 역할을 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윈윈을 했다. 일단 본인들이 차기 정권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석유수입이나 리비아 경제에 대해 좀더 이득을 취할 수도 있고 게다가 군축으로 이빨 빠진 호랑이이라고 중국 러시아에게 무시당했으나, 오히려 미국보다 먼저 주도적으로 공습에 나가면서 카다피군을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박살내는 모습을 보이며 본인들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6. 관련 문서



[1] 이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는 소화기와 탄약만 공급했다고 밝혔으나《르 피가로》지는 로켓 발사기와 대전차 미사일도 지원했다고 보도하였다.[2] 목표인 트리폴리의 별명인 지중해의 인어에서 따온 이름이다.[3] 이날부터 대사관의 기도 리비아 시민군기로 변경되었다.[4] 기사 참고 근데 이 기사에 의하면 내전 기간에 알제리가 카다피 측에 용병 지원도 했다고 한다.[5] 관련 기사[6] 114개국이 찬성하고 17개국이 반대, 15개국이 기권했는데 반대한 17개국과 기권한 15개국이 어디인지는 여기의 ANNEX II에서 볼 수 있다. [7]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