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2월 18일, 제2의 도시 벵가지에서 2만여명의 시위대가 모여있다.(출처)
1. 개요
2. 배경
3. 시위 전개
3.1. 부족 구성
3.2. 시위대의 상징물
3.3. 시위의 정보전달
4. 각국의 반응
4.1. 아랍
4.2. 아프리카
4.3. 유럽
4.3.1. 이탈리아
4.4. 미주
4.4.1. 북미
4.4.2. 남미
4.6. 독재 국가들
4.7. 시민 사회
5. 관련항목


1. 개요


리비아에서 2011년 1월 13일부터 발생한 반정부 민주화 시위.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일련의 사건 중 하나이다. 트리폴리를 최종 본거지로 하여 저항하는 무아마르 카다피와의 '''내전'''으로 발전했다. 카다피는 비행기 폭격을 포함하여 자신의 군대를 진압에 주저없이 사용했으나 최종적으로 시민군이 승리하고 카다피가 사살됨으로서 결말 단계에 접어들었다. 하루하루 엄청난 사망자가 나오고 있었기에 사망자 수 통계는 의미가 없으나 수천명쯤 사망. 4.19 혁명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보다 더 심한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었다. 카다피 정권에 안보리 차원의 제재가 취해졌다.

2. 배경


[image]
3월 초순 시위대의 기세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의 세력도. 이후 국제 사회의 지원에 의해 승리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진압되어 기세가 줄어들었다. 최종적으로는 전국을 제압. 트위터 사용자 Iyad El-Baghdadi가 제작하고 있다.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인 무아마르 카다피는 2011년 권좌에서 쫓겨나기까지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하였다. 이는 현재 세계 각국의 지도자 중 최장의 기록이다. 그가 이토록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데에는 무바라크와 정반대로 반미 사상이 주효했다. 실제로 80년대에는 미국이 그를 오사마 빈 라덴에 버금가는 위험 인물로 지목해 잡으려 들 정도였다. 놀랍게도 과거엔 소위 운동권을 위시해 '''반미주의자들의 이상적인 영웅상'''이었던 시절도 있으며 지금도 그렇게 떠받드는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의 좌파 저술가가 민주주의와 저항 정신을 가진 위대한 인물이라고 찬양한 서적이 국내에까지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축구선수 박지성으로 유명한 '''명지대학교'''에서 '''당시 총장을 파견하면서까지 2002년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적 있으며,'''[1] '''2003년에는 제9회 한국 불교인권상을 수상받기도 했다.'''# 위의 설명대로 당시 운동권에서의 이미지와 몰락 이전 카다피가 친한파로 통했던 점, 더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에서 김정일에 대비되는 '현명한 독재자'로 카다피를 띄워준 것의 결과.
1969년 당시 리비아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해외로 나간 틈을 타서 육군 대위였던 카다피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한 이후 계속 권좌에 있다. 왕정을 폐지한 대신 카다피는 아랍 민족주의에 사회주의를 뒤섞은 '이슬람 사회주의'를 제시했고 정치 사상을 압축하여 '녹색책[2]'을 집필하였다. 77년에는 공화국에서 '자마히리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대중의 국가'라는 뜻이다. 카다피가 만든 단어.
반미, 반유대 노선의 선두에서 전세계의 반군, 게릴라 단체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기도 하였고, 이로 인해 팬암기 폭파 사건 등의 몇 차례의 테러에 연루되었다. 결국 UN 안보리와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의 낙인이 찍혔고 레이건 시절에는 수도 트리폴리가 폭격당하기도 했다. 핵 개발의 의혹이 있기도 했다. 이 시절 얻은 별명이 ''''중동의 미친개''''. 이런 상황에도 국유화한 유전을 통해 경제를 이끌어 나갔다. 2009년 GDP가 9529불. 이 정도면 아프리카에선 정말 잘 사는 축이다.
이러다가 조지 W. 부시 행정부 집권 2기에 이르러 갑자기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3]을 하면서 잘못을 실토하고(?) 국제적 활동을 재개했다. 팬암기 폭파 사건의 보상 문제도 다시 논의가 진행되었다. 집권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 원수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 중인 집권자 중 하나로 그의 패션 센스는 세계 최악의 컨셉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카다피는 트리폴리 폭격 이후 항상 유목민처럼 커다란 텐트를 치고 숙소로 삼는데 국내 뿐 아니라 해외인 뉴욕에 방문해서도 똑같이 하려다가 미국 시민들의 주거지 침해로 무산되었고 UN 총회에서 장시간 연설에 빈축을 사기도 했다.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에 이어 다음 타자가 누가 될 것인가 하는 예상에서 양국 사이에 있는 리비아를 지목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부패와 아들로의 권력 승계 움직임, 자유와 인권의 박탈, 고실업 등으로 내부 불만도 어느 정도 있는 상황. 그러나 상대적으로 풍족한 데다가 오랫동안의 신격화와 반대 세력 탄압으로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실제로 11년 1월에 있었던 시위는 탄압과 2.4조 달러를 풀어서 식량과 집을 공급하겠다고 나서는 등 유화책을 펼치면서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리비아는 원래 3개의 국가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왕국이었다. 서부의 해안의 트리폴리타니아, 동부의 키레나이카, 서부 사막의 페잔이 합쳐진 것. 그래서 처음 동부의 벵가지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트리폴리에서는 벵가지의 시위대의 행동을 비판한다는 말이 합쳐져서 시위는 동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이 나왔다.
그러나 막상 불길이 한 번 붙자 엄청난 불길이 되었는데...

3. 시위 전개


'''"나의 조국 앞으로!"'''

-한 시위단장의 함성


3.1. 부족 구성


중동의 아랍 국가들은 대체로 부족의 영향력이 크지만 리비아는 역사적으로 부족들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 이탈리아 왕국에 맞서 싸운 적이 있기에 특히 더하다. 앞으로 리비아의 정세가 부족들의 움직임을 통해 변할 가능성이 크며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건 간에 부족 간의 분열이 격화될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본 항목을 작성한다.
리비아에는 140여개의 부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영향력이 있는 부족은 30개를 넘지 않는다. 최근 들어서는 인구의 15%를 베르베르족, 튀르크족들이 차지하고 청년층에서 부족으로서의 소속감이 약해지면서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도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다. 지난 42년 간의 카다피의 집권 동안 리비아인들은 직업을 구하고 정부 기관에 진출하는 과정에 어느 부족에 속해있느냐가 큰 역할을 해왔다. 초반 10년 간은 부족 통합 정책을 펼쳤으나 차츰 특정 부족의 힘에 따라 기용을 하면서 영향력을 늘려왔다.
카다피가 속해있는 부족은 카타파(Qathathfa)이다. 카다피 자신이 카타파 부족의 부족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 정권과 가장 가까운 연관을 가지는 부족은 두번째로 큰 마가리하(Magariha)이다. 이 부족은 정부와 보안 기구에서 민감한 고위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랍권 언론인 Asharq Al-Awsat에 따르면 마가리하 부족의 청년층의 일부는 동부와 남부 리비아에서 카다피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마가리하는 백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최대 규모의 와르팔라(Warfallah) 부족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와르팔라의 경우 시위대에 참여한 상황이다. 와르팔라는 초창기에 시위에 합류한 트리폴리 남쪽의 도시 진탄을 기반으로한 알 진탄(Al Zintan) 부족과 가깝기도 하다. 추가로 자위야(Zawiya) 부족은 석유의 유출입을 통제할 수 있기에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 부족은 강경 시위 진압을 중단하지 않는 한 석유 유출입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상황이다.
수도인 트리폴리 주변의 피잔 지구는 자와위야(Zawiya) 부족의 고향이며 와르팔라, 마가리하, 마스라타(Masrats) 부족이 살고 있다. 트리폴리 도시의 주된 종족은 마스라타 부족의 일부인 것으로 알려졌다. 알무하브라(Al-Mujabra) 부족은 트리폴리 남서쪽에 강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대표인물인 아부 바르크 유니스 자빌 육군참모총장의 경우 가택연금되어 있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파르잔(Farjan) 부족은 아즈바디야의 서쪽 중심부를 주된 거점으로 삼고 있으며 시르테, 질텐, 트리폴리 등 해변가 도시에도 부족원들이 있다.
동부 리비아에서 최주요 부족은 미수라타(Misurata) 부족이다. 벵가지와 다르나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과 베두인의 전통을 버리고 도심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나뉘어진 상황이다. 이외에 카르가라(Kargala), 타와지르(Tawajeer), 라믈라(Ramla) 부족이 있다. 동부 토브룩과 그 주변 지역의 경우에는 아브디얏(Abdiyat) 부족이나 Masamir 부족이 이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랍계의 여러 지파로 구성되어 있는 카와르(Kawar) 부족도 있다.
무슨 관계인지 이해가 안되고 헷갈리는가? 그게 리비아의 부족 시스템의 현실이다.

3.2. 시위대의 상징물


녹색 단색으로 칠해진 리비아 국기는 카다피 집권 이후 1977년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로 정식 국호를 정하면서 바뀐 것이다. 상징하는 것은 카다피의 '녹색 혁명'.
[image]
튀니지, 이집트 등의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시위에서 대부분 자신의 국기를 흔든 것과 다르게 리비아의 시위에서는 상기 이미지의 국기가 시위대의 상징물로서 사용되고 있다. 시위대에 따라서 형태가 조금 달라지기도 한다. 결국 정부가 전복되고 새로운 국기가 되었다.
본 국기는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한 1951년 11월 24일부터 69년까지 존재했던 리비아 왕국의 국기였다. 붉은색은 독립 과정에 흘린 피를, 녹색은 번영을 상징하며 가운데 검은색과 초승달과 별[4]은 리비아 왕국의 왕조인 센누시 왕조의 깃발을 따온 것이다.
시위대가 이 국기를 상징으로 사용한 것은 왕실 복귀를 요구하는 것과는 연관성이 적다. 사실 40세 미만의 리비아 사람들은 왕실 통치를 겪은 적이 없으며 왕실에 연관된 것이라면 구체적이라기보다는 막연한 과거에 대한 향수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 국기가 상징이 된 것은 이탈리아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후에 처음으로 결정한 국기라는 상징성과 현재의 국기가 또다른 압제자 카다피가 등장해 독립을 빼앗아가고 정한 것이기에 카다피 체제를 부정하는 태도가 결합된 것이다.

3.3. 시위의 정보전달


리비아의 경우 타 중동 국가들도 어느정도 그랬지만 미디어의 시위대에 대한 접근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외신 기자는 입국 자체가 차단되었으며 시위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리비아에 들어간 유일한 외신 기자인 BBC 현지 특파원과 스탭들도 엄격한 감시로 인해 기사 출고 활동을 중단하였다. 시위의 중심지인 벵가지로 가는 모든 교통 수단은 끊겼다. 오로지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국제 전화로 조금씩 나오는 정보가 전부가 되면서 본 항목에는 '알려졌다', '라고 한다', '라고 증언했다' 등의 불확실한 표현이 많다.
이쯤 되면 당연히 예상되는 거지만 국영 TV와 신문사들은 시위의 움직임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벵가지의 폭동이 진압되었다든지, 친정부 시위대를 보여준다든지, 시오니즘 해외 공작원 탓을 하거나 1면 특집으로 축구 기사를 보여주는 뜬금없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알 자지라, CNN, BBC 등의 해외 TV 전파에 대해 재밍(전파교란)을 했다고 한다. 레바논의 방송에서 시위 화면을 보여줬다고 레바논 TV도 재밍을 했다고 한다. 인터넷도 많은 곳에서 끊어졌다.

4. 각국의 반응



4.1. 아랍


카다피의 행위는 '''다른 아랍 국가들이 보기에도 너무 비상식적인 짓'''이였기 때문에 카다피 정권에게 유혈사태를 즉각 멈추고 시위대와 대화할 것을 촉구했다. 카다피가 진압을 멈추지 않자 아랍 연맹(AL)은 리비아 측에 어떠한 회의 참석도 금지한다고 통보해 전제적인 나라가 많은 아랍 국가들마저도 등을 돌린 상황이다.
이집트의 경우 리비아로 일하러 간 자국민이 '''150만명'''[5]이나 돼서 다른 나라들처럼 자국민을 구하러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신 리비아와의 국경지대에 군 병력을 증강하고 리비아를 탈출하는 이집트인들을 맞이하는 중이다. 25일 타흐리흐 광장에서 모인 수만명의 시위대는 개혁을 더디게 주도하는 군부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면서 함께 '불의에 저항하는 우리의 형제들'로 지칭하면서 리비아의 저항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카타르, 쿠웨이트, 무슬림 형제단, 헤즈볼라, 하마스 등은 규탄 성명을 냈다.
아랍은 아니지만 근린 이슬람권인 이란 또한 전투기를 사용한 폭격을 비난하며 현재의 연이은 사태는 이슬람적인 자각에서 발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역시 아랍은 아니지만 터키 또한 현재의 폭력 진압을 반대하기는 했지만 제재는 리비아 국민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다.

4.2. 아프리카


카다피 정권의 돈을 보고 리비아로 들어온 수단 공화국,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니제르, 모리타니 출신의 용병들이 트리폴리를 비롯한 카다피 정권의 지배하에 있는 일부 지역에서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다. 아무리 용병이라고 하나 무고한 시민들을 거리낌없이 대량 학살하는 행위를 볼 때 이들을 고용한 카다피 정부는 물론 용병들에게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지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물론 관련 국가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고 있지 않다.[6]
그런데 포로로 잡힌 용병들의 말을 보면 이들 상당수는 돈 벌러 왔거니와 겁 먹고 총도 안 쏘고 항복한 이들도 있다. 약 150여명이 잡혔는데 현재 구금 상태인 이들은 카다피가 몰락하면 자신들은 교수대에 올라올 것이라고 불안해하고 있다고 한다.
용병들로 인해 사하라 이남에서 올라온 이민자들이 용병으로 오인받아서 구타 당하거나 사살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대부분 튀니지 난민촌으로 와 있는 상황이라고.
보츠와나남아공의 경우 규탄 성명을 냈다. 그러나 막장 물가로 유명한 짐바브웨는 절친이자 같은 독재자인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유일하게 카다피 정권에 지원군을 보냈다.

4.3. 유럽


유럽 연합 차원에서 폭력 진압에 대한 강도 높은 반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개별 국가들도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히고 있다. 각국은 현지에 체류하고 있는 자국의 시민들을 구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 군인들이 자국민 구출 작전을 시행하는 도중 리비아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그들의 헬기, 조종사, 해병대원들과 시민들이 생포되었다. 카다피 측은 명백한 영토 침범이며 허락도 받지 않고 중무장한 병력을 타국의 영토에 칩입시켰으므로 절대 그냥은 송환활 수 없다는 입장이다.
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1&no=136708
그리고 2011년 3월 10일,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반정부군 지도부인 임시과도국가위원회를 리비아 국민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리비아 반정부 측 지도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국가는 프랑스가 처음이다.#
또한 10일 브뤼셀에서 열린 EU 외무장관회의에서 알랭 쥐페 프랑스 외무장관과 귀도 베스테벨레 독일 외무장관,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무장관과 루이스 아마두 포르투갈 외무장관은 카다피는 물러나야 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원론적인 도덕적 문제 외에 지중해를 맞대고 있는 유럽 국가들은 한 가지 골치 아픈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카다피의 리비아군이 아프리카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피해 넘어오는 보트 피플을 붙잡아 본국으로 강제 송환시키는 '더러운 역'을 여태까지 자처해왔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난민들의 홍수를 직면하지 않으면서도 도덕적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탈리아는 지리적 위치상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오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표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데 카다피는 이 점을 쥐고 자신을 '유럽의 수호자'라고 자칭하며 자신이 물러나면 유럽 국가들은 난민들의 파도에 직면하게 될 거라고 공갈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이러한 사태를 우려하여 지금까지 카다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고 프랑스를 비롯한 지중에 연안국들 역시 도덕적으로는 비난해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막상 카다피가 없어진 뒤 자신들이 직접 난민들을 거부하여 비난을 받고 싶은 마음은 또 없기에 여태까지 간섭을 피해온 것. 그러나 이제 카다피는 실질적으로 해안의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이며 실제로 지중해 연안국들은 미칠 듯이 급증한 아프리카 보트 피플들의 유입과 보트 전복 사망사고 등을 수습하고 대처하는 데 정신이 없는 실정이다.

4.3.1. 이탈리아


前 리비아 지배 국가이자 유럽 국가들 중에서 리비아와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며 베를루스코니와 카다피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이탈리아는 유럽 지역에서 리비아에 온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리비아의 지도자를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뭐 이런 이유 말고도 리비아에서 채굴되는 석유의 24%가 이탈리아로 넘어가고 있을 정도로 리비아산 석유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태가 격화된 21일 이후부터는 반대 쪽으로 돌아서긴 하였다. 심지어 카다피의 절친으로 알려진 베를루스코니마저도 "카다피는 틀렸다"라고 할 정도다.
게다가 위의 유럽 란에도 언급되었다시피 정권의 통제력이 사라지자 아프리카 난민들이 몰려오고 있다.

4.4. 미주



4.4.1. 북미


미국은 폭력 진압에 대해 강도 높게 반대했다. 5함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미묘한 상황인 바레인이나 친미 성향이 짙었던 무바라크의 이집트와는 다르게 부담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의외로 반대 성명 등이 강도가 낮고 빈도도 약한 편인데 이에 대해서는 부담이 없기 때문에 얻을 것도 없는 데다가 문제 해결을 위해 압력을 가할 수단이 딱히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문제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분석이 있다.
시위가 격화되자 23일 오바마는 리비아 상황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관련 연설을 하여 "리비아의 유혈사태와 고통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며 용납될 수 없는 것이며 리비아에서의 폭력 사용을 강력히 규탄한다"라는 등 강력 비판을 하였다. 현재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 미국인들의 안전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고. 24일 중으로 제재 내용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27일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카다피에게 즉각 퇴진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존 매케인 등 일부 미국 정치인들은 오바마 행정부가 현재 벵가지에 들어선 과도 정부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리비아의 원유 폭등에 대한 최후의 수단일 가능성일 확률이 높다.
캐나다도 당시의 폭력 진압에 반대 성명을 냈다.

4.4.2. 남미


페루의 경우 폭력 진압에 항의하여 첫번째로 리비아와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국가가 되었다. 페루 대통령은 UN에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우루과이는 폭력 진압 반대 성명을 냈다.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쿠바의 카스트로는 원래도 카다피와 친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로인해 현재 일어나는 폭력 상황에 대해서 그들은 일절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며 카스트로의 경우는 미국이 뒤에 있는 NATO가 석유를 노리고 리비아를 침공하려고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니카라과의 오르테가 대통령은 카다피와 전화 통화를 통해 용기를 북돋아줬다고. 베네수엘라의 외무장관은 제국주의자들의 간섭 없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정보 주권을 지키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남미 국가들[7]의 참여 속에 2005년 출범시켰고 09년 온두라스에서의 군부 쿠데타 사실을 신속 보도하면서 중남미의 알 자지라라는 명성을 얻었던 텔레수르 방송은 트리폴리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중심가에선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데 외국방송들은 내전에 빠진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이 5시간가량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것도 우연히 발생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후 비난 여론이 조성되자 기자의 보도는 트리폴리 상황만 전한 것이라면서 다른 지역은 시위대가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서야 보도했다. 시위 여파가 베네수엘라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뒤에 있는 차베스 대통령의 의도가 담겨있는 듯 하다.
초반에는 딱히 베네수엘라가 카다피와 그 정권을 좋아한다기보다도 반미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교류가 있는 것 뿐이지, 그리고 전반적으로 미국과 서방세계에 대한 견제가 우선이냐, 우방국의 반독재세력 옹호 및 기존 정권 질타냐를 저울질하다가 한쪽으로 기운것 뿐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의 추측도 있었다. 베네수엘라는 남미 중에서도 평등과 민주주의가 제법 괜찮게 뿌리 내린 나라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막상 러시아, 중국, 이란마저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NTC)를 승인한 마당에 끝까지 승인못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심지어 9월 16일 UN 총회 표결에서조차 NTC에 리비아 의석을 넘겨주는 표결에서조차 반대표를 던졌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8] 단순히 반미 카테고리 안에서 교류가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친분이 굉장히 두터웠다. 이 기사에 의하면 그는 또 "서방국이 카다피를 끌어내리고 죽이려 하고 있다"며 "신에게 우리의 형제인 카다피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카다피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기까지 했다.

4.5. 아시아



4.5.1.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직 '예의주시'이다. 이는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교민 철수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2011 이집트 혁명시에도 무바라크가 사임하고 나서야 공정한 선거를 기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단 주 제네바 차석대사가 25일 유엔 인권이사회 특별 회의에서 리비아의 인권 상황에 우려를 표명하긴 했다.
한국 건설사 공사 현장의 습격이 일어나는 것에 우려하고 있다. 20일 벵가지에 위치한 공사 현장과 인근 숙소가 습격당하여 컴퓨터와 중장비가 도난당하고 동일밤 트리폴리 서부 자위야시의 공사 현장에 무장한 주민 수백명이 들이닥쳐 폭력을 행사하여 한국인 직원 3명이 다쳤다. 또한 산유국인 리비아의 불안정으로 국제 유가가 오르는 것에 매우 우려하는 움직임.
외교부는 리비아 동부 지역에 여행 제한인 3단계를, 이외 전 지역에 여행 자제인 2단계를 발령했다. 교민 철수를 위해 특별기를 파견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또한 사태가 종료될 때까지 특별지휘본부를 만들어 운영하는 중. 현지의 한국인은 교민 1400여명과 근로자 1000여명이 있다.
일각에서는 신격화-후계승계 등을 하다가 난리가 난 것과 같은 표면적 현상을 보면서 북한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으나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을 하고 서방의 요구에 맞췄다가 몰락해버린 카다피를 교훈(?)으로 삼은 김정일에게 미국과 한국이 줄기차게 북에 요구하고 있는 북핵 폐기와 개방은 더욱 어려워지고 북한에서 더욱더 핵 무기에 집착하고 극단적인 고립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으로 언론은 예측했다.
게다가 카다피가 본격적으로 미쳐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북쪽에서 실제로 저런 일이 일어났을 때 카다피처럼 그쪽 정권이 북한을 소말리아처럼 만드는 벼랑 끝 전술을 동원할 경우 한국은 물론 주변 국가들이 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함도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국의 가디언 지가 "한국 용병이 리비아 시위 진압에 참여 중이다"라는 오보를 내보내 한국 정부가 해당 언론사에게 기사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YTN에서 한국인 유학생이 반군에 합류했다는 뉴스가 나온 적도 있었다.
2월 24일 현재 한국은 트리폴리 공항에 전세기를 투입하고 소말리아에서 작전 중이던 최영함을 급히 리비아로 파견해 교민 구조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9] 기반 시설을 제외한 다른 건설 사업자들은 탈출을 시도하고 있으며 기반 시설의 경우 혁명군이 경비를 서주고 있다고 한다.
한편 2월 25일 전용기를 통한 탈출 행렬 속에 황우석 박사가 목격되어 관심을 모았고 보도에 따르면 1천 5백억원 규모의 연구를 계약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카다피가 벌이고 있는 무자비한 살육극에 대해서 거의 침묵하고 있는 상황을 두고 비판도 많다. 리비아에 진출한 기업들의 이익에만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리비아가 만약 서양정유회사가 나가면 중국, 인도, 브라질, '''한국'''의 회사와 경제 협력을 맺겠다고 했다. 국가 망신이다.
  • 리비아 한국대사 돌연 귀국?
이런 난리판의 와중에서 조대식 주 리비아 대사가 재외공관장 회의에 참석키 위해 입국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강연을 듣기 위해(강연 내용은 재외 국민들을 잘 보호하라는 내용이었다고 전해진다.) 국내로 입국한 것이다. 혹시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는가? 교민들 입장에선 리비아에 입국할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내전 나서 출국할 때는 아니란 말이다. 리비아 한국대사관이 당장 교민을 철수시켜야 하는 마당에 대사가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후 교민들은 고생 끝에 이집트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간첩 관련으로 구금된 목사 및 사업가 전 아무개씨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결국 한국 정부는 차분하게 리비아 내전 상황을 지켜보다 반군의 승리가 확실시 된 이후에야 리비아 시민 과도 정부의 지지를 선언하며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카다피 정권과 맺었던 각종 건설 계약의 승계도 약속 받았는데 협상 자체는 몇개월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었던 듯.

4.5.2. 중국


튀니지 혁명으로 인해 하나둘씩 대륙에 모여드는 민주화 열기에 중국 정부는 옛날 천안문 사태의 기억도 있는 터라 가뜩이나 심란한 판에 리비아에서 일하던 중국 기업이 약탈까지 당했다.(...) 현재 천 명에 달하는 중국인 노동자들과 교민들을 전용기편으로 철수시킬 것이라고 한다.
27일 중국판 튀니지 혁명의 2차 집회를 25개 도시에서 개최하자는 글이 인터넷 상에 등장하고 있다. 중국 공안당국은 인권 운동가들에 대한 체포, 격리, 출국 금지, 출판 행사 금지 등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70~80명이 가택연금 혹은 격리 조치를 당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되려 이후 시민군에 무기와 물품을 제공하면서 카다피 정권을 몰아내고 재건사업에 참여하고 자원 개발권을 따낼 꿈에 젖어 있다. 하나 문제는 리비아가 분열되면서 서로 영토 및 자원 개발권을 두고 3국 및 부족별로 나눠 내전을 벌이면?
어쨌든 중국도 결국 2011년 9월 12일 반 카다피 진영의 국가과도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NTC)를 리비아의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4.6. 독재 국가들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은 강압 장기 통치 중이며 부정부패에 빈곤 등 많은 것이 비슷하다. 게다가 이슬람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SNS와 같은 새로운 소통 수단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기에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투르크메니스탄의 경우 08년에야 인터넷 접속이 풀렸으며 무제한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1인당 GDP가 4,000달러가 안 되는 나라에서 월 7,000달러를 내야한다. 인터넷 카페를 사용하려면 신분증 제시가 필요할 정도. 검열 및 접속 제한은 당연하다.
북한의 경우는 시위의 전파가 더욱더 비관적이다. 통제의 수준이 더욱더 높은 상황이라. 그러나 어느정도 염려는 하는지 최근 들어 내부 단속을 더욱더 하는 추세이다. 장마당이나 대학에 보안 요원을 파견하여 감시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리비아 현지에 북한 사람들이 간호사와 건설 인력으로 200명 가량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한은 대피를 위한 어떤 조치도 하고 있지 않다. 경제난으로 인해 여기에 신경쓸 겨를이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시위 장면을 본 이들이 돌아와서 소식을 전할 가능성이 있는 점을 걱정한다고 한다. 파견 인력의 가족을 통해 중동의 시위 소식이 유입되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4.7. 시민 사회


이집트의 카이로-알렉산드리아, 튀니지의 튀니스,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 레바논의 베이루트, 요르단의 암만, 터키의 이스탄불, 영국의 런던-맨체스터-에딘버러, 스위스의 제네바, 프랑스의 파리-마르세유, 몰타의 발렛타, 독일의 베를린, 그리스의 아테네, 아일랜드의 더블린, 이탈리아의 로마, 미국의 워싱턴 DC-애틀란타-캔자스시티-포틀랜드-랜싱-시애틀-새크라멘토-올랜도-풀만-덴버-콜롬비아-디트로이트-뉴욕-샌프란시스코-시카고, 캐나다의 토론토-애드몬튼-브랜던-오타와-몬트레올, 호주의 맬버른-시드니,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 일본의 도쿄, 한국의 서울 등지에서 연대시위가 열렸다.

5. 관련항목


[1] 이유는 카다피가 콩고 내전 등 아프리카 지역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애써왔고 1999년 아프리카연합 창설을 주도하는 등 북아프리카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아랍민족주의를 제창해 아랍권 통합에 앞장선 공로를 평가했다나 뭐라나...[2] 시위 사진 중에 녹색 구조물을 시위대가 쓰러뜨리는 것이 있는데 그게 녹색책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3] 카다피의 치명적인 실수였으며, 소위 말하는 '''리비아식 해법'''이 배척되는 이유다. 참고로 카다피는 생전에 북한에게 비핵화를 설득하기까지 했는데 그런 카다피가 죽었으니, 카다피에게 했던 지켜지지 않은 약속(리비아식 해법)을 더욱 믿을 수 없게 된 셈이다.[4] 초승달은 오스만 제국의 국기로 제정된 이후부터 이슬람권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알제리, 튀니지, 모리타니, 말레이시아 등에서 국기에 들어가 있다. 다만 초승달에 별이 저렇게 붙은 국기는 터키 국기가 원조로 아타튀르크가 만들었다. 이걸 튀니지와 리비아에서 이를 따라한 국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현재는 이슬람권의 보편적인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5] 인원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이웃나라이니까. 참고로 이집트는 당당한 산유국이자 세계적인 천연가스 수출국이다. 관광업밖에 먹고 살 게 없다는 건 터무니없는 편견이자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다만 이집트 석유는 질이 안 좋아서 특수 정제를 해야 하는데 이 기술력은 알다시피 서구에서 독점하기에 자국 석유를 싸게 팔아서 소비 석유를 더 비싸게 사온다. 거기에 천연가스 자원은 극소수가 판매 수익을 독점해오고 있다. 리비아 말고도 쿠웨이트와 예전 이라크, 카타르에도 유조차 운전사는 거의 이집트인이라고 할 정도로 이집트 노동잔 많았다.[6] 하지만 잘 보면 저기서 몰려온 나라들을 보면 모두 다 지구에서도 손 꼽히는 헬게이트들 뿐이다. 정부가 없거나 내전중인 국가가 대부분이니 반응을 보일 수나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7]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볼리비아, 쿠바 등[8] 참고로 우루과이는 이 표결에서 기권표를 냈고 현재까지 NTC를 역시 승인하지 않고 있다. 이걸로 볼 때 상당수 남미 국가들이 이 표결에서 찬성표 낸 건 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마저 NTC를 승인하는 바람에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리비아 항목 참조.[9] 2월 25일 198명의 현지 교민들이 리비아를 빠져나와 카이로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정부는 최종적으로 830여명 정도가 현지를 탈출할 것으로 보고 앞으로 전세기 두 기를 더 투입해 교민들을 탈출시킨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