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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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남장여자 정치인이다. 남장을 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 죽은 오빠를 그리워하는 것을 보고"라 밝혔다.
2. 생애
1934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1] 에서 태어났다. 서울특별시 정신여자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3. 정치 활동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소속으로 서천군에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서천군 - 보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처음에는 민주공화당 이원장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으나 선거소송으로 재검표 끝에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재검표를 통해 국회의원 당락이 뒤바뀐 경우'''로 이런 경우는 역사상 총 3번에 불과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서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상익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서천군-보령군-부여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종익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후 김영삼계에 소속되었다. 1975년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화 이후의 안보데모를 관제데모라고 하였다가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 의원들이 그에 대한 징계를 결의하였다. 이후 여당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명안이 본회의에 올라가자 결국 김옥선 자신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가 나몰라라 하는 태도를 보여서 당내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른바 김옥선 사태 혹은 김옥선 파동이라고 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서천군-보령군-부여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상익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 해 말 조연하 국회부의장 선출 당시 이용희 후보로 내정된 것에 반기를 들고 조연하의 국회부의장 선출을 지원하였다는 이유로 신한민주당에서 징계를 받았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 양 김과 거리를 두었다. 이후 30년이 넘게 충청 지역에서는 지역구 여성 국회의원이 나오지 않고 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서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신정치개혁당에 합류하여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서울로 옮겨 성동 갑에 출마했으나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이후 탈당하여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1%가 안되는 득표율로 낙선, 3년 뒤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1%가 안되는 득표율로 낙선한다. 이듬해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당파국민연합 소속 전국구 후보로 출마했으나 득표율 미달로 낙선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를 다시 원래의 보령, 서천 지역으로 옮겨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3%대 득표율로 낙선했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로 무소속 출마하였으나 선거운동기간 중 후보직을 사퇴했다.
1950년대 전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에 전쟁으로 인한 모자결손가정을 보호하는 에벤에셀모자원을 설립했다. 정의여중, 정의여고의 이사장이었다. 지금은 폐교되었다.
2011년 사기 혐의로 징역 2년 5개월을 선고받았다. #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고 현재도 박사모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박정희를 딕데이터 박 즉 독재자 박 이라 불러 파문이 일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만 김옥선 본인이 박근혜에 대해서는 박정희와 달리 우호적인 시각을 표출한 바 있으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다소 의외인 것은 여성임에도 여성할당제 등의 여성 우대정책에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진정한 성 평등은 여성들이 남성들과 경쟁해서 쟁취하는 것이라는게 본인의 신념인듯.
4. 선거 이력
[1] 당시 충청남도 서천군 서남면.[2] 서천군[3] 보령군, 서천군[4]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에는 51,189표, 47.74%를 득표하여 51,725표 48.24%를 득표한 민주공화당 이원장 후보에 뒤진 것으로 나오지만 추후 재검표 결과에서 21표차로 역전되었다.# 정확한 득표수치 및 득표율은 확인되지 않는다.[5] 1975.10.13 관제데모 발언, 이른바 김옥선 사태로 자진 사퇴[6] 1987.10.13 탈당[7] 해당 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해 '황당한 대선 공약'으로 유명한 '''무공약이 공약'''을 내세웠다. 못 지킬 공약은 안 하는 게 낫다는 이유에서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