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정

 



'''소비에트 민정청
蘇維埃民政廳
Советская гражданская администрация
'''
소비에트 연방군정
[image]
[image]
'''상징기'''
'''문장'''
[image]
'''1945년 10월 3일''' '''~''' '''1946년 2월 15일'''
'''성립 이전'''
'''해산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치'''
조선반도 38도선 이북과 부속 도서
'''정치 체제'''
군정체제
'''민정청
군정장관
'''
이반 치스차코프(1945년 10월 3일 ~ 1947년 4월)
'''주요 사건'''
1945년 8월 26일 치스차코프 포고문 선포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1946년 2월 9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수립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 수립
'''현재 국가'''
대한민국[1], 북한
1. 개요
2. 역사
2.1. 종결
3. 관련 인물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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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략) '''북쪽이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친위공산세력을 기초로 하는 정부조직을 만들고 있을 때''', 남쪽은 미국이라는 강력한 또 하나의 세력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한 모든 정부를 불인정하고, 새 정부 건설은 자신들이 적극 주도하겠다는 노골적인 의사를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정객들은 정파와 이념에 따라 서로 갈등하고 분열되고 있었다. '''공산주의민족주의, 즉 역사에 큰 상처로 기록되는 분단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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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레이션 - 야인시대 51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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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김일성의 초상화, 그리고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북한 주민들[2]
일제강점기가 종식된 뒤,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 소련 육군이 실시한 군정을 말한다. 사실상 이 기간에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치스차코프는 처음 포고문을 1945년 8월 24일 함흥에서 발표했다. 이는 함흥이 소련군이 가장 먼저 해방시킨 함경도 지역 중심 도시였을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말기 육성된 대표적인 공업도시여서 일본 열도를 제외하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산업화율이 높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사실도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주장은 아니다.[3] 차스치코프도 2일 만인 26일 평양으로 이동해서 소련군 열병식과 소련군 환영 주민 대회를 열고 연설했다.
소련군이 조선으로 진격한 이유는 조선 해방 때문이라기보다는 동북아시아 패권 확립에 있었다.[4] 만주 작전 당시 만주국을 비롯, 만주지역 내 일본군 세력 괴멸이 소련군의 목표였다. 여기서 일본군 세력은 당연히 만주국 실질적 통치 주체나 다름없는 관동군이었다. 1945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본은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북을 관동군 위수지역으로 설정했고, 그 이남을 육군 17방면군 위수지역으로 변경했다. 소련군의 주력은 소만국경을 돌파하며 만주의 종심을 찔렀으나, 다른 한편으로 관동군의 위수지역인 조선 북부를 찔렀다. 이 과정에서 웅기, 나남소련 육군이 점령했다. 나남을 점령한 것은 소련 해군해군 육전대였다.
당장 김무정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내 조선인 연안파가 '이제는 조선을 해방시키라'는 린뱌오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려 했으나 소련군에 의해 저지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
보통 미군정과 더불어 소군정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소련 입장에선 '''공식적으로는 민정''', 즉 민간 정부로 칭했다. 소련은 종전 후 독일같은 추축국 본토에만 군정이란 말을 썼고, '''추축국에 점령됐다 해방시킨 지역'''(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북한 등)에서는 민정이란 말을 썼다.

2. 역사


1945년 8월, 만주 작전으로 일본군을 무찌르고 청진 등의 북한 지역에 진입한 소련군은 8월 말경에는 북한 전역을 장악하였다. 1945년 8월 26일, 소련 연해주군관구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은 "조선인민들이여, 그대들은 독립과 자유를 회복했다. 이제 그대들의 행복은 바로 당신들 손에 달려 있다"고 언명했다. 또한 소련군정은 미군정처럼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표방하며 각지에 세워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지부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였다. 이 점을 들어 '소군정이 미군정보다 나았다!'는 주장도 있으나[5] 소련의 목표는 자생적인 반일 성향 단체들의 연합을 기초로 한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한 뒤, 최종적으로 친소련 성향의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마침 건준이 한반도 전역에 뿌리를 가지기도 하였고 좌익 성향을 띄고 있었으므로 건준을 인정한 것.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2차 대전 후 동유럽에 소련군이 공산주의 정권을 세웠다.
소련군이 김일성을 간택한 이유는 김일성이 소련이 연해주에서 조직한 88여단에서 활동한 적이 있어서 면식이 있었고, 한반도 민중에게 지지를 받는 친소련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아래 표에서 보시다시피 김일성보다 지지를 받는 정치인은 많았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 같은 우파 정치인이거나 중도좌파인 여운형은 확실한 친소련이 될 수 없는 정치인들이다. 조만식은 한반도 북부에서 인지도가 높았지만 우파성향에 친기독교 성향이라 소련과 갈등을 맺었다.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유학간 적도 있는 정통 공산주의자였으나 하필이면 기반이 남쪽에 있었다. 이관술도 마찬가지. 북쪽에 있으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 친소 거물급 정치인은 김일성 밖에 없다. 소련군정도 한반도 민중에게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조선계 소련인 정부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김일성을 민 것이다. 참고자료
소군정 내내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군에 의한 강간, 폭행,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소련군 중령 페드로프는 소련군이 1945년 8월부터 이후 5개월간 북한지역에서 벌인 행태를 기록했는데, 12월 29일 작성된 해당 문서에는 “우리 군인(소련군)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고 전제하면서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
치스차코프는 이에 대항하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면 "조선인의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 사단장인 드리트리예프 대령은 "조선인은 이미 35년간 노예생활을 했다. 좀 더 노예생활을 지속해도 괜찮지 않은가?"라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노획한 문서 가운데는 이른바 '체포인 명부'도 존재한다. 소련군에 대항하다 체포된 이들의 명단인데, '쏘군 감옥 이송'으로 표기된 이들의 행방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쏘군 감옥 이송'으로 표기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
소련군의 만행은 조선인뿐 아니라 식민지 일본인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일본인에게 가해진 폭력의 수위는 식민지 조선인조차 경악할 지경이라, 일부 북한 지역에서는 조선인 치안대가 소련군을 말리다 되레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 지역에서 살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 본토로 돌아간 일본인들의 증언을 담은 책 <조선을 떠나며>에서는 오히려 현지 조선인들이 소련군에 협조해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약탈에 적극 가담했다고 언급된다. 특히 조선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일본인 경찰이나 판사들은 조선인들에게 붙잡혀 소련군이 주도한 재판에 넘겨져서 징역 10년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다만 경제정책이나 행정능력에 있어서는 소군정이 미군정보다 훨씬 유능했다. 이유인 즉슨, 미군정이 인민위원회와 건준을 무리하게 해산하고 친일경찰을 기용해서 스스로 명성을 날려먹은 것은 물론이고 무리한 미곡 가격자유화로 물가를 폭등시키는 또한 토지개혁 또한 지지부진하기 그지 없었데에다가 인민위원회 해산을 무리하게 단행하고 각종 사건사고 수습에도 무능함을 드러내며 정국혼란을 스스로 자초한 반면에 소군정의 경우에는 인민위원회를 활용하면서 행정을 안정화시켰고, 강력한 물가통제 정책으로 경제도 안정화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웠기 때문이었다. 즉, 미군정이나 소군정이나 반대파를 탄압한 것은 똑같았지만 그럼에도 행정능력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얘기이다.
사실 미군정과 소군정 사이의 행정력에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미군정장관 존 하지는 순수 군인이었다. 하지만 소군정장관 치스차코프는 직접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시티코프 상장이 군정행위를 했다. 시티코프는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식인범죄단속 기동타격대를 지휘한 적이 있었다. 시티코프는 정치인 출신으로 공산당에서 장병들에게 공산주의 교육을 하고 당의 방침을 잘따르는지 감찰하러 군대로 파견나온 사람에 가깝다. 실질적으로 정치인이 정치를 하는거니 군인이 정치하는 것과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소련이 조선 북부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1945년 9월경 김일성원산으로 귀국하였다. 김일성은 평남 인민위원회에 가입하였고, 1945년 10월 북조선 5도 인민 위원회가 세워졌다. 이를 즈음하여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을,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어 정치 활동에 나섰다. 한편 1945년 10월 소련은 포고령을 발표하여 여러 조선인 무장단체를 해산하였고, 군대격인 조선보안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이 발표되면서(신탁통치 오보사건) 조만식 등이 반탁 운동에 나서자, 소련측은 조선민주당을 탄압하고 조만식을 가택연금해 사실상 정치 생명을 끊었다.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등 반공 활동 또한 탄압하였으며, 조선의용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진군해 들어오자 소련 포고령을 들어 이들을 무장 해제하는 사건도 있었다. 연안파가 일부 귀국하여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을 세웠으나, 이들은 국공내전에 참전하느라 일부 간부만이 참여했으므로 큰 세력을 갖추지 못했다.
1946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된 후 조선계 소련인(고려인)들이 요직에 들어와 소련의 의도대로 차츰 조직을 장악해나갔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명단을 살피면, 각 부처의 은 조선인이나, 부상은 거의 예외없이 조선계 소련인으로 채워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대표적 인물로 소련군 사단 참모였던 남일,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려인 출신인 허가이와 휴전회담 당시 북한측 대표였던 이상조[6] 등이 있다.
이후 김일성 등은 공산주의적 개혁을 진행해 나갔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연구자들은 이를 사실상의 북한 단독정부로 본다-가 세워진 1946년 2월부터 토지 개혁법, 8시간 노동제, 주요 산업의 국유화령 등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반발하여 월남한 사람들은 남한 내 반공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1946년 4월 북조선공산당이 세워졌는데 이는 남한조선공산당의 정통성을 축소시킨 것이며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의도도 보인다. 이후 김두봉 등의 조선신민당을 통합하여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으로 세력을 재편하였다.[7]
이후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세워지고, 단독 정부 수립 작업이 진행되어 1948월 2월경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4월경에는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으나 형식상의 합의만이 이루어졌고, 김구김규식 등이 돌아간 이후로는 북한에 남은 인사들을 끌어모아 6 ~ 7월에는 북한이 남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는 선전용으로 2차 남북연석회의를 열었다. 이후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한에서도 최고 인민 회의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북한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 때 북한의 헌법에서는 수도를 서울특별시로 정하였는데, 이는 당시 남한 지역을 북한 정권의 미수복지로 보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부터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가 시작되었다는 점도 중요한데 북한의 모든 행사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함께 등장했으며 "우리 민족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의 표어가 곳곳에 붙여졌다. 그리고 북한 최초의 종합대학의 이름이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지어졌다. 다만, 1960년대 이후보다는 개인숭배의 정도가 덜해서 아직 '수령'이라는 호칭은 조심스럽게 사용되었고 대신 주로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으며 김일성의 생일이 국경일로 지정되거나 김일성의 가족까지 우상화될 정도는 아니었다.

2.1. 종결


미군정이 끝나면서 미군과 소련군은 동시철수를 개시했다. 하지만 미군이 한국군에게 애초 약속했던 수준보다도 못한 소화기와 약간의 물자만 넘겨주고 고문관도 500명 미만으로 남긴데 반해, 소련군의 경우 T-34 전차Yak-3 전투기, 어뢰정을 비롯한 중화기 일체와 관련 군수물자를 통째로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8] 고문관도 3,000명 이상 남겨놓았다. 이들 소련의 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의 훈련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인민군 육군 6사단 출신으로 한국 육군에 투항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북한 육군 군관은 개전 직전에 소련군 군사고문단이 기존의 '훈련전담' 고문에서 '작전지휘' 고문으로 전부 교체됐음을 증언한 바 있다. 한국전쟁 개전 직후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 장군이 본국에 타전한 전문에 따르면, 개전 당시 북한군 각 부대마다 배치된 소련 고문관의 작전지휘는 훌륭했으나, 38도선을 넘어선 뒤부터 소련 고문관이 동행하지 않으면서,[9] 일부 부대의 경우 사령부와 48시간 이상 교신이 두절될 정도로 북한군의 작전은 매우 졸렬해졌다고 한다.
소련의 괴뢰가 되어버린 이런 행태는 2차 대전 종전 후 소련위성국가가 된 여러 공산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으며, 이것을 피한 공산국가는 티토가 장악한 유고슬라비아밖에 없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북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상실된 것은 바로 소련이 북한의 지도자로 올려놓은 김일성8월 종파사건 같은 일을 벌여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부수적으로 발생한 현상이다.

3. 관련 인물



4. 관련 문서


[1] 현재 실효지배하고 있는 38선 이북 지역은 경기도(연천군 대부분, 포천시 영북면, 관인면 전체와 이동면, 영중면 일부, 가평군 북면 적목리 일부) 및 강원도(철원군 일부, 춘천시 사북면과 북산면의 일부,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양양군 일부, 속초시, 고성군 일부, 김화군 일부). 다만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이므로 대한민국 헌법상 소련군정 전체 영토의 현재 국가는 대한민국이다.[2] 사진은 1946년 11월 평양음악학교 학생들이 북조선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서 경축대행진을 하는 모습이다. 소련군정 시기 내내 북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으로 이와 같은 스탈린 개인숭배 분위기는 한국전쟁 시기까지 이어지다 스탈린이 사망 후 소련에서 격하되고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내세운 1950년대 중반에야 사라진다.[3]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113479[4] 물론 소련은 일본과 달리 언제까지나 한반도를 직접 통치한다거나 그럴 구상은 없었다.[5] 7차 교육과정 당시 금성출판사 출간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이 언급을 미군정의 총독부 통치 체제 온존과 대비해놓아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6] 이상조는 훗날 8월 종파사건 때 주소대사로 재직중 현지에서 바로 망명했다. 어차피 소련 공산당 당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7] 남한의 조선공산당도 이에 맞춰 좌익계 정당들을 통합, 남조선로동당으로 개편되었다.[8] 공짜는 아니고 구매비용으로 북한지역의 공업물자나 시설/농산물을 뜯어갔다. http://nestofpnix.egloos.com/4222938[9] 소련이 참전, 혹은 그에 가까운 행위를 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