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회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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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社會民主黨 / Korean Social Democratic Party
1. 개요
조선사회민주당은 북한의 정당이자 구색정당이다. 1945년 11월 3일 창당됐으며 처음 당명은 조선민주당이었고 원래 지도 이념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였다. 1981년 1월 28∼29일에 개최된 제6차 조선민주당 당대회에서 당명을 지금의 '조선사회민주당'으로 변경함과 동시에 당 지도 이념을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로 변경했다.
2. 역사
이 당의 전신 조선민주당은 이북 민족주의자들이 분단의 장기화를 예상치 못한 정세에서 소련군정 허락으로 '조선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했다. 조선민주당의 첫 당수로 선출된 조만식은 소련군정 초반 나름 소련 측에 협조하고자 노력했으며 1945년 11월 3일 창당대회서도 "'''소련이 없었으면 조선민주당은 창당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발언하며 소련에 감사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신탁통치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등 소련군정 입맛에 맞지 않는 행보를 보이자 창당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구실로 연금당했다. 조만식 연금 후 이윤영 부당수를 포함한 당내 우파 당원 상당수가 월남하여 서울에서 같은 이름의 당을 창당했으나 대한민국 정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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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당 3대 당수 강량욱
조만식 연금 후 남은 조선민주당은 김일성 측근 최용건 세력과 개신교 내 친(親)김일성 세력인 강량욱 세력이 조만식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장악하게 되었다. 이듬해 개최된 2차 당대회에서 2대 당수로 최용건을 선출했으며 부당수로는 강량욱을 선출했다. 당수가 된 최용건은 한국전쟁 때 조선민주당 당원을 전쟁에 동원하는데 앞장섰으며, 마찬가지로 같이 당을 장악한 강량욱 또한 북한 개신교인들을 전쟁 협조에 동원하는데 적극 앞장섰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율성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 한국전쟁 종전 후 조선로동당 내 파벌투쟁에서 일부 당원이 김일성 반대파를 지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8월 종파사건이 김일성 반대파의 패배로 끝나고 숙청이 진행되는 와중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포함 반대파를 지지한 조선민주당 간부들이 숙청되면서 조선민주당은 자율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김일성 빨치산파의 조선로동당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8월 종파사건 후 몇 년 안 가 1958년 최용건이 자기 세력을 이끌고 조선민주당을 탈당하여 조선로동당으로 복귀한 뒤로는 동년 11월에 유일하게 남은 세력인 강량욱 세력이 강량욱 목사를 3대 조선민주당 당수로 선출했다.
조선민주당의 지역조직은 1959년에서 1960년에 걸쳐 와해되었지만, 3대 당수 강량욱이 김일성 주석의 인척이자 북한 정권 초기부터 일관되게 북한 정권의 정책을 지지해왔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월북자들의 정당과는 달리 당 중앙 자체는 살아남는다. 당수 강량욱 또한 1960년대 외무상을 역임하고 1972년에는 부주석에 임명되는 등 북한 정권 관료로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강량욱 목사는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1970년 조선로동당 5차 당대회 축사에서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한 것 외에 거의 전적으로 정치인 및 관료로서만 일해왔지만, 1972년부터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공개 활동을 다시 재개함에 따라서 개신교 종교인으로서도 활동을 재개하게 되며, 1979년 4월 방북 재미동포 노의선 목사와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면담을 가지기도 했다.
1981년 1월 28일-29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민주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명·당 지도 이념·당 규약을 현재와 같이 변경했다.
3. 현황
조선사회민주당 지도부로 중앙위원회가 있다. 중앙위원회 상설기구로 중앙위원회 위원 일부가 위원으로 선출되는 정치위원회가 실질적 지도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3명으로 구성되며 수시로 회의를 통해 당을 지도한다.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은 현재 박용일로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당사는 평양에 있으며 4층짜리 건물이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남·대외선전용 인터넷 신문 우리민족끼리에 일찍이 사진으로 공개된 바 있고 2005년 민주노동당 방북단을 본부 당사로 초대하면서 그 모습이 공개된 바 있다. 유럽 각국 공산당 등 외국 좌파 정당[1] 방북단에게도 당사를 공개하고 있다.
남한에는 지역조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정당이라고 알려졌으나, 계간《조선사회민주당》 2016년 1호[2] 에 조선사회민주당 평양직할시당의 위원장 홍영남 사진과 그의 기고문이 게재되었으며, 계간《조선사회민주당》 2019년 3호[3] 에 평안북도당의 위원장으로 김명성의 이름이 기재된 바 있다. 그 외에도 일부 시·군당 위원장 이름이 계간《조선사회민주당》에 게재된 바 있다. 또한 1980년대 말 동구권 해빙 때도 직할시·도(道)당 위원장 이름이 이 기관지를 통해 일부 공개된 전례가 있다고 한다. 1990년 중앙일보 기사에는 그 당시 조선사회민주당에서 옛 조선민주당 연고자를 찾아 당원으로 재입당시키고 평양관광을 시켜주고 있다고 소개하는 기사가 게재된 적이 있다. 하지만 조선사회민주당 스스로 량강도 등 일부 지역에는 당조직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했다. 현재 당원 수는 약 35,000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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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민주당 기관지 계간《조선사회민주당》 1987년 3호 차례. '종교인들과의 사업', '《통일교회》', '베르뗄로 신부' 등의 문구들이 주목을 끈다.
조선민주당 창당 시 기관지는 주간 신문 《조선민보》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후 폐간하고 지금까지 기관지로 계간 잡지 《조선사회민주당》을 발행하고 있다. 계간《조선사회민주당》은 정기호 외에 호외 성격의 특간호를 발행한다. 출판사로는 "조선사회민주당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조선사회민주당 당원은 당규 상 수입 2%를 당비로 내야한다. 하지만 2005년 민주노동당 방북단의 확인 결과 조선사회민주당 재정 90% 이상은 당 소유 기업소와 농장 수익에 의존한다고 밝혀졌다. 시인한 바에 의하면 귀금속공장 등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계간《조선사회민주당》을 확인하면 가끔 조선사회민주당 간부들이 당 소유 기업소나 농장에 시찰가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 계간《조선사회민주당》의 당원 소개도 대부분 기업소 관리직을 맡고 있는 당원에 대한 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사회민주당 스스로도 북한의 취약한 경공업 발전을 위해 기업소와 농장 등을 소유·경영하고 있음을 부인하고 있지 않다. 일종의 부문 이익단체로써 기능하는 측면이 커 보인다.
조선로동당·천도교청우당과 마찬가지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맹되어있다. 선거를 앞두고 다른 두 당과 함께 공동으로 후보를 공천한다.
2019년 8월 28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신임 중앙위원장으로 박용일을 선출했다. 이튿날 8월 29일 박용일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박용일이 전에 북한적십자사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전되면서 대남교류 활동에서 조선사회민주당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는 추측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조만식계 당원의 월남 후에도 오랫동안 북한 개신교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다. 오랫동안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장을 맡은[4] 강량욱 역시 오랫동안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을 맡았으며[5] 13년 동안[6]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서기장 직을 맡은 고기준 목사도 조선사회민주당 조직부장[7] 과 정치위원[8] 을 역임했다. 3년간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장을 맡았던 김성률 목사도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1987년까지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평양신학원은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청사에 입주해있었다.
현재 조선사회민주당은 조선로동당의 우당으로서 북한 내각의 일부 각료직을 맡고 있는 연립여당이기도 하다.
조선사회민주당 역대 당수 및 중앙위원장은 다음과 같다.역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
전체 572석 중 35석, 35/572, (6.12%)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
전체 215석 중 11석, 11/215, (5.12%)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
전체 383석 중 4석, 4/383, (1.04%)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
전체 457석 중 4석, 4/457, (0.88%)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
전체 655석 중 14석, 14/655, (2.14%)
9기 최고인민회의 선거 결과
전체 687석 중 51석, 51/687, (7.42%)
14기 최고인민회의 선거 결과
전체 687석 중 50석, 50/687, (7.28%)
조선민주당 시절
1대 조만식
2대 최용건
3대 강량욱
조선사회민주당 시절
1대 강량욱
2대 이계백
3대 김병식
4대 김영대
5대 박용일
4. 인민민주주의
북한에 조선사회민주당이 창당되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2차세계대전 후에 소련이 패권을 확립한 동유럽과 아시아 일부에 자신의 체제를 이식하면서 그대로 이식하지 않고 어느정도 변형을 기하여 이식했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를 소련과 그 우방국들은 '인민민주주의'라고 규정했다. 중국은 소련의 패권 확립이 이루어진 나라는 아니었지만, 체제에 있어 '인민민주주의'를 모방하였으며 이를 '신(新)민주주의'라고 규정했다.
'인민민주주의' 체제는 구체적으로 의회를 부정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여 곧바로 공산혁명을 수행한 소련과 달리 부르주아계급·지주계급·중간계급 등과 연립정권을 세워 소련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체제를 의미한다. 물론 초기에만 부르주아계급·지주계급과의 연립이 성립되며 정권 안착 후에는 옛 중간계급 출신으로 구성된 '우당'과의 연립정부로의 전환이 '인민민주주의' 체제의 일반적 특징이다.
'인민민주주의' 체제는 형식적이지만 다당제 및 생산수단 일부 사유화가 용인된다. 이러한 점에서 '인민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공산당이 절대적인 지도적 지위를 확보하기에 의회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론상 '프롤타리아독재'의 또 다른 형태로 간주되는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국가에는 1989년 혁명 전의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알바니아 및 현재까지의 중국·북한 등이 있다.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은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1988년부터 정치적으로 소련식 일당독재와 아무 차이점이 없어지면서, '인민민주주의'라는 말이 완전히 무의미해졌다.
중화인민공화국 또한 '인민민주주의'에서 글자만 바꾼 '신(新)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했지만, 1957년 반우파투쟁 후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야당들이 아예 활동을 중단하면서 소련식 일당독재와 아무 차이점도 남아있지 않게 된 시기가 있었다. 중국의 민주당파들은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쿠바는 1962년 카스트로 정권의 집권당인 '7월 26일 운동'이 자국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임을 선포한 후 카스트로 집권 전의 공산당인 '대중사회당'과 합당하고서 다른 정당을 금지했기 때문에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지 않았다.
시리아아랍공화국은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한 적이 없다. 하지만 정치구조는 그와 유사하다. 아랍사회주의바트당을 비롯하여 다른 구색정당들이 가맹한 국가진보전선에 소속된 정당'''만'''이 총선에 참가할 수 있었고, 지금도 국가진보전선에 소속된 정당이 아니면 총선 참가와 의석 획득이 어려운 실정이다.
5. 자매결연
2005년 민주노동당과 자매 결연을 맺었다. 후에 통합진보당이 된 후에도 계속 자매결연 관계를 유지하였다. 물론 이젠 해산되었으니 과거지사.
그런데 조선사민당 쪽에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을 헷갈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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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을 '''진보신당'''에 보내버렸다(···). 참고로 진보신당은 북한에 비판적이다.
2018년 통합진보당 후신을 자처하는[9] 민중당에 신년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7월 21일~22일에 중국 심양에서 민중당-조선사회민주당 양당간의 실무회담이 잡히면서 다시금 정당교류가 복원될 것으로 보인다. 2019년에는 민중당과 조선사민당 간 반일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