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고아
1. 개요
원나라 시대의 잡극 작가인 기군상(紀君詳)이 사마천의 사기 조세가에 쓰인 조무의 일화를 재구성한 소설로 정식 명칭은 원보원조씨고아(寃報寃趙氏孤兒)이다. 작중 시대 배경은 진(晉) 경공(景公) 3년(기원전 597년)부터 17년(기원전 583년)까지이다.
2. 재앙의 씨앗
2.1. 등장인물
조최(趙衰) : 조씨의 중흥지조(中興之祖). 주인공인 조씨고아의 증조부
조돈(趙盾) : 주인공의 조부, 아버지 덕택에 막강한 권세를 누렸고, 그것이 결국 비극의 씨앗이 된다. 이름을 돈으로 읽는다.
조삭(趙朔) : 조씨고아의 아버지. 이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
'''조무(趙武)''' : 주인공인 조씨고아.
장희(莊姬) : 주인공의 어머니이자 진 경공의 고모. 성공의 누이. 즉 공주.
한궐(韓厥) : 진나라의 장군. 의리남
공손저구(公孫杵臼) : 조삭의 식객. 의리남
정영(程嬰) : 조삭의 친구. 의리남
도안고(屠岸賈) : '''인간 쓰레기'''. (하지만 달리보면 입체적인 악역).
2.2. 조씨(趙氏)의 리즈시절
주인공 조무의 집안인 조씨는 그 증조부 조최가 19년 동안 진문공(晉文公)[1] 의 방랑생활을 보필한 공 덕택에 진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권세가로써 기틀을 다져, 그의 아들 조돈의 시기에는 명실상부한 진나라 최고 실세로 자리잡게 되었다.
2.3. 불길한 조짐
조돈이 그의 아버지 조최의 작위를 세습한지 겨우 2년이 지났을 무렵, 진양공(晉襄公)[2] 이 죽었다. 태자 이고(夷皐)가 너무 어려 다른 이를 세우려고 하였으나.[3]
이런 하소연을 버티질 못하고 어린 태자를 세우니, 바로 진영공(晉靈公)[5] 이다. [6]太子母 日夜啼泣, 頓首謂趙盾曰 ''' "先君何罪 釈其適子而更求君?" '''
태자 이고의 모친이 밤낮으로 통곡을 하다가 조돈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 "돌아가신 선군께서 무슨 죄가 있다고 그의 적자(適子)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는단 말입니까?" '''[4]
2.4. 덕 없는 군주
어머니의 눈물 덕택에 군주자리에 오른 태자 이고. 뭐,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으로 할아버지 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기 아버지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 그런거 없다 '''
十四年, 霊公壮 侈 厚斂以彫牆 従台上弾人 観其避丸也
영공 14년(기원전 607년) 영공이 장성하여 사치가 심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궁궐의 모든 담장에 그림을 그려 채색을 하고 다시 궁궐의 높은 대에 올라 탄궁(彈弓)으로 궁궐 밖에 난 길로 지나가는 백성들을 쏘아 맞히고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겼다.
宰夫胹熊蹯不熟 霊公怒 '''殺宰夫 使婦人持其屍出棄之'''
또한 궁궐의 요리사가 요리하여 바친 곰발바닥이 제대로 익히지 않았다고 노하여 '''요리사를 살해하고는 그 요리사의 부인을 시켜 시신을 들고 궁궐 밖으로 나가 버리게 했다.'''
過朝 趙盾 随会前數諫 不聴 '''已又見死人手''' 二人前諫. 随会先諫 不聴
요리사의 부인이 시신을 들고 조당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전에도 조돈과 수회가 여러 번에 걸쳐 영공에게 간했으나 영공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날 두 사람은 조당에 나왔다가 요리사의 부인이 들고 나가던 '''시신에서 튀어나온 손을 보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두 사람이 영공의 앞으로 나아가 우선 수회가 먼저 영공에게 간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7]
2.5. 폭군은 결국 이렇게 되는 법
저런 막장인증을 성공리에 마친 영공, 급기야 자기 앞에서 간언하는 신하도 꼴 보기 싫었는지 좀 조용히 하라는 의미에서 자객을 보낸다.
하지만 이 서예라는 사람.'''霊公患之''' 使鉏麑刺趙盾
'''영공이 조돈을 두려워하여'''[8]
서예(鉏麑)를시켜 조돈을 암살하도록 하였다.
라며, 조돈의 집 앞 나무에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殺忠臣 棄君命 罪一也
충신을 죽이거나 군주의 명령을 어긴다면 죄를 짓는 일이다[9]
물론, 영공은 두번째 시도도 준비했다.술자리에 초대해 취한 틈을 타 죽여버리려고 했으나. 요리사 시미명(示眛明)[10] 이 술을 조금만 먹도록 권해, 겨우 석 잔만 마시고 일어나는 통에 병사를 부를 타이밍을 놓쳐 실패.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바로 맹견[11] 을 풀어 끔살을 유도했으나, 앞서 나온 요리사 시미명이 '''맨손으로''' 개를 잡아버렸다.
이제야 눈치를 챈 조돈, 한마디 남긴다.
그 사이, 영공은 조돈을 잡으려고 병사를 풀었으나, 시미명의 활약으로 목슴을 건져 도망치는데 성공했다[12]棄人用狗 雖猛何為
사람을 죽이려고 개를 풀어놓다니 참으로 무도한 자들이로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조돈의 동생 조천(趙穿)이 막장 군주를 죽여, 조돈은 복귀할 수 있었다.[13]
도원(桃園)에서 죽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대비를 못하고 놀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3. 비극의 꽃
3.1. 찜찜한 뒷처리
이렇듯 대사건을 겪고 복귀한 조돈.기록에는 무고한 피해자이자 의도하지 않은 수혜자이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듯 찜찜한 뒷 마무리가 조돈 사후 집안의 멸문을 불러오게 된다.君子譏盾 為正卿 亡不出境 反不討賊 故太史書曰 趙盾弑其君
군자들이 조돈을 비난하며 "국정을 맡았던 정경(正卿)으로서 국경 밖으로 도망치지 않았으면서도 돌아와 그 군주를 시해한 반역도를 잡아서 죄를 주지 않았다."[14]
그런 연유로 태사(太史) 동호(董狐)가 사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돈이 그 군주를 시해했다."
3.2. 악당 등장
권신 조돈이 죽고,[15] [16] 그의 아들 조삭(趙朔)이 관작을 물려받았다. 이 때만 해도 조씨 가문의 권세는 군주와 인척[17] 관계를 맺으며 하늘 높은줄 몰랐으나
사구(司寇)[18] 도안고(屠岸賈)의 움직임으로 조씨 가문의 권세에 비극의 꽃이 피어난다.
그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말하기를
조씨 집안의 식객출신이었던 한궐(韓厥)이 변호한다.盾雖不知 猶為賊首 以臣弑君 子孫在朝 何以懲罪 請誅之
조돈이 비록 (영공의 시해 건에 관해)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역시 그는 시해사건의 수괴다. 신하의 신분으로 그 군주를 시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손들은 여전히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살고 있으니 어찌 다른 죄인들을 벌 줄 수 있겠는가? 조씨들은 주살되어야 마땅하다.[19]
하지만, 도안고는 무시한다. 일이 난감하게 되어 가고 있음에 조삭을 찾아가 몸을 피하도록 권해보지만.霊公遇賊 趙盾在外 吾先君以為無罪 故不誅 今諸君将誅其後 是非先君之意
영공이 시해될 때 조돈은 밖에 있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선군들 께서 조돈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러 장수들이 그 후손을 주멸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선군들의 뜻을 거스르는 겁니다.
한궐은 이 말을 듣고 병을 핑계로 칩거한다. 그리고, 도안고는 조씨 일문이 살던 하궁(下宮)을 공격하여 조씨일문을 멸문시킨다.[20] 그러나 임신 중이던 조삭의 아내는 성공의 누이, 즉 공주였기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한다. 그 대신 도안고는 조삭의 아내를 자기 집안에 감금했다가 출산하면 아이를 죽일 생각을 한다.子必不絶趙祀 朔死不恨
당신이 도와 우리 조씨들의 제사가 끊어지게 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3.3. 고아의 탄생
그런 학살의 와중에도 조삭의 처[21] 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22] 궁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난리통에서도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고, 공주가 조씨 집안의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도안고는 군사를 풀어 궁을 수색했다.
절체절명의 상황. 공주는 아이를 다리 사이에 끼고 기도하기를
신기하게도 애는 울지 않았고, 당장의 위험은 넘기게 되었으나, 그런 요행이 계속 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 이었다. '''그 때''''''趙宗滅乎 若号 即不滅 若無声'''
'''조씨 종족들을 멸족시키려면 네가 울고, 멸족되지 않으려면 울지 말아라!'''
3.4. 의리의 전설
조씨 집안의 식객이었던 '''공손저구(公孫杵臼)'''와 조삭의 친구인 '''정영(程嬰)'''이 등장한다.
원래 저 두 사람은 조씨 일가가 멸문지화를 당할 때 자결하려 하였으나, 조씨의 혈육이 공주의 뱃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아들이면 자신들이 기르기 위하여 살아있기로 했다.[23]
정영이 공주가 아이를 출산했고, 도안고가 궁을 수색했으나 찾지 못하였음을 공손저구에게 말하자.
이렇게 해서 공손저구는 화려하게 수 놓은 강보에 싸인 '''다른 사람의 아이'''[24] 를 업고 산 속에 들어가 숨어있기로 하고, 정영은 군사들에게公孫杵臼曰 立孤與死孰難
공손저구 : 고아를 맡아 기르는 일과 지금 죽는 일 중 어느 편이 쉽다고 생각하시오?
程嬰曰 死易 立孤難耳
정영 : 죽는 것은 쉬운 일이고, 고아를 맡아 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오.
公孫杵臼曰 趙氏先君遇子厚 子彊為其難者 吾為其易者 請先死
공손저구 : 그대는 조씨들의 선대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있는 힘을 다해 어려운 일을 맡아주고 나는 쉬운 일을 맡아 먼저 죽겠소.
그렇게, 정영이 군사들을 대동하고 공손저구가 숨은 곳으로 왔다. 그 모습을 본 공손저구 분노가 대뇌의 전두엽까지 뻗쳐 말하길嬰不肖, 不能立趙孤. 誰能與我千金, 吾告趙氏孤処
이 정영이 불초하여 조씨의 일점 혈육을 기를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만일 조씨의 고아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면 누가 능히 나에게 천금을 주겠소?
물론, 들어줄 리 만무한 일이었다. 아이와 공손저구는 죽게 되었으나, 진짜 '''조씨고아'''는 정영이 숨겨 기르게 된다.小人哉程嬰 昔下宮之難不能死 與我謀匿趙氏孤児 今又売我 縦不能立 而忍売之乎
정영 소인배 놈아! 옛날 조씨들의 하궁(下宮)에서 변을 당할 때 같이 죽지 않고 나와 함께 모의하여 조씨의 고아를 몰래 숨겨 기르기로 해 놓고 오늘 다시 돈에 욕심이 나서 나를 팔았구나! 아무리 네가 조씨 고아를 부양할 능력이 없어서라고 하지만 어찌 네가 돈에 눈이 멀어 나를 팔아먹을 수 있단 말이냐?
天乎天乎 趙氏孤児何罪 請活之 独殺杵臼可也
하늘이여, 하늘이여! 조씨 고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여러 장군들게 부탁하건대, 제발 어린아이만은 살려 주시고 이 저구의 목숨만 가져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4. 복수의 열매
4.1. 점괘의 결과
진 경공 17년(기원전 583년) 몸에 병이 나 점을 쳐 본 결과 대업(大業)[25] . 의 후손[26] 이 잘못되어 하늘이 재앙을 내린 탓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를 한궐(그렇다. 조삭과 약속한 바로 그 사람)에게 상의한 바
이 말을 들은 경공은 조씨 고아, 즉 '''조무(趙武)'''를 궁에 몰래 들여놓은 후, 병문안을 하러 온 귀족들을 병사들로 협박, 조무 앞에서 조씨 멸족을 일을 실토하게 만들었다.今吾君独滅趙宗, 国人哀之, 故見亀策. 唯君図之
오늘날 주공께서 조씨 종족들을 멸족시켜 국인들이 그것을 애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한 징조가 귀갑(龜甲)[27]
과 시초(蓍草)[28] 점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를 헤아리십시오.
이렇게 된 이상 역적으로 찍힌 도안고는 조씨 일문에게 했던 것과 같이 멸문의 복수를 당하고, 조씨집안의 재산은 모두 돌려받게 된다.昔下宮之難 屠岸賈為之 矯以君命 并命群臣 非然 孰敢作難 微君之疾 群臣固且請立趙後 今君有命 群臣之願也
옛날 하궁의 난은 모두 도안고가 시켜서 한 일입니다. 도안고는 군주의 명이라고 사칭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난에 가담하도록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우리가 난을 일으킬 수 있었겠습니까? 비록 주군께서 그 일로 해서 병이 나지 않았더라도, 저희들은 원래 조씨들의 후손을 다시 세우기 위해 주청을 드리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오늘 주군께서 명을 내리시니, 그것은 저희들이 바라던 바입니다.
4.2. 의리남의 마지막
조무가 관례(冠禮)를 행한 후, 정영이 조무에게
조무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눈물로 만류해 보지만昔下宮之難 皆能死 我非不能死 我思立趙氏之後 今趙武既立 為成人 复故位 我将下報趙宣孟與公孫杵臼
옛날 하궁의 난 때 나와 저구는 같이 따라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때 죽지 않은 이유는, 조씨들의 후사를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당신이 성인이 되어 다시 조씨들의 후사를 잇고 옛날 조씨들의 작위를 찾게 되었으니, 나는 이제 지하에 가서 조선맹(趙宣孟)[29]
과 공손저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되겠습니다.
한 후 자살한다.武願苦筋骨以報子至死 而子忍去我死乎
조무 : 제가 이 몸을 바쳐 그대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는데, 어찌 나를 버리고 죽으려고 하십니까?
不可 彼以我為能成事 故先我死 今我不報 是以我事為不成
정영 :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공손저구는 내가 능히 일을 맡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지금 가서 알리지 않는다면 이는 내가 일을 성공하지 못한것과 같습니다.
조무는 정영을 위해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5. 몰라도 상관없는 이야기들
5.1. 진짜로 있었던 이야기일까?
이 이야기의 실제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아래는 그 근거
1. 지나치게 자세한 내용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사실로서의 역사'''라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위의 이야기 중에서 예를 들어 본다면, '''아이를 다리 사이에 숨기고 했다는 말'''은 과연 누가 기록으로 남겼으며, 사기를 편찬할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30] 이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태클 거는 것이 너무하다 싶으면, 조씨 집안의 멸문을 대하는 진 경공의 태도를 본다면 어떨까?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의 손꼽히는 귀족집안이 군사력에 의하여 깡그리 멸족했는데도 십년 넘는 기간동안 도안고가 '''무단으로''' 군사력을 동원하였다는 것을 몰랐을까? 후에 조무 앞에서 고백하는 귀족들의 말 또한 웃기기는 마찬가지. 왕이 몰랐는데, 왕에게 주청해서 조씨 일문을 다시 세우겠다니? 이건 자청해서 자신들이 죽을 자리를 찾겠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
2. 사기 자체의 기록과 충돌
조씨고아와 관련된 이야기는 조세가(趙世家)와 진세가(晉世家) 양쪽 기록을 대조해보면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조세가 같은 경우 위에 나와있는 조씨고아 이야기의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는 반면, 진세가의 경우. 조씨 일문의 멸문과 그 복귀는 조씨 일문의 멸문시기인 경공 3년 기록에는 전혀 나와있지 않고, 오로지 경공 17년 기록에만 나와있다. 문제는
이 기록만 놓고 보면 그냥 17년에 뜬금없이 조씨 일문을 그 유복자만 남겨두고 죽여버린 것이 된다. 뭐, 결과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그 과정도 그렇고, 시기적으로도 마치 17년에 양 사건[31] 이 일어난 것 처럼 묘사되고 있어, 차라리 진세가와 조세가의 편찬자가 별개의 인물인 것 처럼 느껴질 정도다. 어차피 다른 기록에 나와있으니, 굳이 중복설명이 필요 없이 간소하게 적었다고 해도, 조씨 집안의 멸문시점인 경공 3년 기록에는 초나라와 전쟁한 이야기만 길게 나와있을 뿐. '''조씨의 조도 찾을 수 없다.'''十七年 '''誅趙同 趙括 族滅之''' 韓厥曰 趙衰 趙盾之功豈可忘乎 柰何絶祀 乃复令趙庶子武為趙後 复與之邑
경공 17년 '''조동, 조괄 형제를 죽이고 조씨들 종족들을 멸했다.''' 한궐이 말했다. "조최, 조돈이 세운 공을 망각하고 어찌 그들의 후사를 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조씨들의 유복자인 조무(趙武)를 후계자로 삼은 후에 조씨들의 봉지를 돌려주었다.
3. 다른 사료의 내용과 모순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춘추좌씨전에도 조씨집안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사기의 기록이 드라마라면, 좌씨전의 이야기는 그냥 '''막장'''
노(魯)나라 성공(成公) 4년(기원전 587년)[32] 기사는 이런 내용으로 끝난다.
쉽게 말해, 조카며느리랑 검열삭제를 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개 같은 상황을 부끄러워 한 그의 형제들[35] 이 그를 제(齊)나라로 추방시켰는데, 추방되기 전에 말하길晉趙嬰通于趙莊姬
진나라의 조영[33]
은 조돈의 아들 조삭의 아내인 조장희와 간통하였다.[34]
형제들은 이 개잡놈의 말을 쌩까고 추방시켰다.我在故欒氏不作 我亡吾二昆其憂哉 且人各有能 有不能 舍我 何害
제가 있기 때문에 난씨[36]
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떠나면 우리 두 형제도 우환을 당할 것이에요. 또 사람에게는 제각기 잘하는 것과 잘못하는 것이 있는 법이죠. 저를 진나라에 둔다고 해서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조카며느리의 존재를 간과했다.'''
즉, '''애인 이 추방되어 열받은 과부의 복수극'''晉趙莊姬爲趙嬰之亡故 譖之于晉侯曰 原屛將爲亂 欒郤爲徵
진나라의 조장희는 자기와 간통하던 조영이 제나라로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진후에게 참언하기를 "조원과 조병은 장차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난씨'''[37]
와 극씨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六月晉討趙同趙括 武從姬氏畜于公宮
그래서 6월에 진나라에서는 조동과 조괄을 토벌하였다. 나이 어린 조무는 어머니 장희를 따라서 공궁에서 길러지게 되었다.[38]
후에 한궐의 주청으로 조씨가문의 가산은 조무가 승계하게 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과정이 '''그냥 막장'''
이러한 근거로 인하여 실제의 사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趙盾代成季任国政二年而晉襄公卒, 太子夷皐年少. 盾為国多難, 欲立襄公弟雍. 雍時在秦, 使使迎之
조돈이 성계의 직위를 이어받아 당진의 국정을 돌본지 2년 만에 진 양공이 죽었다. 조돈은 태자 이고(夷皐)가 나이가 어려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양공의 동생 공자 옹(公子雍)을 세우려고 했다. 당시 공자 옹은 진나라에 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자를 보내 모셔오려고 했다.[4] 사기 조세가.[5] 시법 항목에 나와있다시피 령(靈)자 시호는 나라를 개막장으로 만든 군주에게 주는 시호이다.[6] 사기 진세가(晉世家)의 기록은 더 디테일하다.
太子母繆嬴日夜抱太子以号泣於朝 曰
태자 이고의 모인 목영(穆嬴)은 밤낮으로 어린 태자를 품에 안고 조당에 나와 통곡을 하면서 외쳤다.
"先君何罪 其嗣亦何罪 舎適而外求君 将安置此"
선군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는가? 그리고 그의 적자인 태자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적자를 폐하고 나라 밖에서 군주를 모셔오는가? 그렇게 되면 장차 태자를 어찌하려고 하는가?
出朝 則抱以適趙盾所 頓首曰
태자를 안고 조당 밖으로 나와 조돈이 묵고 있는 처소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하소연하였다.
"先君奉此子而属之子 曰 此子材 吾受其賜 不材 吾怨子 今君卒 言猶在耳 而棄之 若何"
"선군께서 살아 계실 때에 이 어린아이를 상국에게 부탁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가 쓸모 있는 재목이 된다면 내가 비록 지하에 있겠지만 그대에게 감사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 쓸모없는 재목이 된다면 나는 그대를 원망하겠소!’라고 하셨소. 지금 주군께서 돌아가셨다 하나 그 말씀이 아직 귓가에 쟁쟁한데 오히려 선군께서 당부하신 말씀에 반하여 이 아이를 버리려고 하니 이는 어찌 된 일입니까?" [7] 사기 진세가.[8] 조세가의 이 대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전체적으로 사마천의 조씨고아 사건에 대한 서술은 조씨 집안에 대하여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이 기사는 '''군주가 권신(權臣)을 두려워 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확실히, 영공 즉위시 보여주었던 정치적 영향력은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사기 조세가(趙世家)
霊公既立 趙盾益専国政
영공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 조돈은 당진의 국정을 더욱 전단했다.
이 기록은 그가 장성한 군주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신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9] 사기 진세가.[10] 궁에 들어가기 전 조돈이 뽕나무 아래에서 굶어죽을 뻔 한 자신을 살려주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은 것이다. 심지어 조돈은 그를 까맣게 잊어버렸는데도.[11] 그 맹견의 이름이 오(獒)라고 기록되어 있다.[12] 그 때까지 그 요리사가 자기가 밥을 준 뽕나무 아래 그 사람인 걸 몰랐다고 한다.[13] 사기 진세가
盾昆弟将軍趙穿襲殺霊公於桃園 而迎趙盾
조돈의 동생 조천(趙穿)이 도원(桃園)에서 영공을 시해(弑害)하고 조돈을 맞이하였다
그때까지 조돈은 진나라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동생이 죽인 거라고 하지만 과연 혼자서 임의대로 내린 결단이었을까? [14] 벌주기는 커녕 조천으로 하여금 양공의 동생인 흑둔(黑臀)을 주(周)나라에서 모셔오게 한다. 그가 바로 성공(成公).[15] 조돈의 죽은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경공때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경공 재위 초반에 죽었을 것이다.[16] 사기 진세가
成公元年 賜趙氏為公族
성공 원년(기원전 606년) 조씨에게 공족의 작위를 내렸다.[17] 조삭의 부인이 경공의 고모.[18] 공자가 노나라에서 역임했던 바로 그 관직이다. 지금의 법무부장관.[19] 원래 도안고는 조씨가 죽인 영공의 총신(寵臣)이었다. 경공 즉위 후 사구가 되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단순히 죽은 주군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 즉위 초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적인 술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20] 사기 조세가
賈'''不請而擅與諸将攻趙氏於下宮''' 殺趙朔 趙同 趙括 趙嬰斉 皆滅其族
도안고는 '''군주에게 주청하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여러 종족들의 장수들과 함께 조씨들이 살던 하궁(下宮)을 공격'''하여 조삭(趙朔),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 등을 포함하여 조씨 종족들을 모조리 죽였다.
주군에게 청하지도 않고 군사를 일으켰다면 반역이다. 군주의 묵인이 있었거나, 군주의 동의가 없었어도 저렇게 군대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조씨 일문의 권세를 견제하려는 타 귀족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21] 장희(莊姬), 진 경공의 고모[22] 임신 중 이었다.[23] 사기 조세가
朔之婦有遺腹 若幸而男 吾奉之 即女也 吾徐死耳
조삭의 부인이 유복자를 임신하고 있소. 다행히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우리가 맡아야 길러야 하오. 그렇지 않고 여아를 낳는다면 우리가 그때 가서 죽는다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24] 최근 우리나라에도 방영된 중국드라마 '조씨고아'에서는 정영의 아이로 나온다. 극적인 비장미를 돋보이기 위한 조치일 뿐, 사기 조세가에는 '''他人嬰児'''라고만 나온다.[25]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인 전욱(顓頊)의 후손으로 진(秦)의 선조 중 한명이다.[26] 사기 조세가
趙氏之先, 與秦共祖
조씨의 선조는 진(秦)과 같은 조상이다.[27] 거북이 등껍질. 이것을 태워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점을 쳤다.[28] 점을 칠때 사용하는 풀. 후대에는 대나무를 깎아 사용했다.[29] 조돈.[30] 물론, 이것은 사마천의 잘못이 아니다. 당시에는 역사는 커녕 소설도 없던 때이고, 자신이 기전체 역사서를 세계 최초로 쓰는데, 누구의 저서를 참고로 할 수 있었을까.[31] 조씨 일문의 몰살과 조무의 승계.[32] 춘추는 기본적으로 노나라의 역사서이다. 당연히 노나라 군주의 재위기간이 기준이 된다.[33] 조순의 이복형제.[34] 참고로 이 때 조삭은 이미 죽어있었다.[35] 조원(趙原), 조병(趙屛).[36] 진나라의 귀족으로 권세를 누렸다.[37] 조영이 추방되기 전에 말한 난씨가 바로 이들이다.[38] 노나라 성공 8년(기원전 5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