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공

 



'''진(晉)나라 28대 국군
경공
景公
'''
''''''
희(姬)
''''''
진(晉)
''''''
누(獳), 거(據)
'''아버지'''
진성공(晉成公) 희흑둔(姬黑臀)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81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99년 ~ 기원전 581년
1. 개요
2. 생애
2.1. 당시 진(晉)나라의 상황
2.2. 초장왕에게 발리다.
2.3. 제나라와의 대립
2.4. 초나라에게 설욕하다.
2.5. 강에서 신강으로 천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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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제28대 군주.[1] 춘추오패로 명망이 높은 진문공손자. 진성공아들. 진여공아버지. 초나라와 패권을 다투고 그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오나라를 도운 업적이 있으나, 병입고황안습한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국역사속 군주들중 가장 굴욕적이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군주이다. 아니 더 나아가 세계사에서 이양반보다 더 안습하게 죽은 군주는 없을것 같다..

2. 생애



2.1. 당시 진(晉)나라의 상황


진(晉)나라는 진양공 이후 점차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부에서 쌓인 모순 탓이었다. 진 양공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었던 진영공이 어렸기 때문에 진 문공의 공신인 경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그 대표는 조최의 아들 조돈이 이었다. 진 영공이 그것을 막거나 하기는 커녕 오히려 신하들을 마구 죽이는 등 폭정을 벌이자 조돈의 친척인 조천이 진 영공을 시해했다.[2] 그리고 진 경공의 아버지 진 성공이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나 진 성공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군신간의 불신감이 쌓였고, 외방에서는 제나라, 진(秦)나라, 노나라, 정나라, 진(陳)나라, 채나라가 진나라를 버리고 당시 춘추오패초장왕 덕에 번성하던 초나라를 따랐다.

2.2. 초장왕에게 발리다.


진 경공 원년(기원전 599년), 진 경공은 아버지 진 성공이 죽은 뒤 진나라 군주가 되었다.
진 경공 3년(기원전 597년), 초 장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쳐[3] 그 수도인 신정을 3개월간 포위하였다. 정나라가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진 경공은 중군장 순임보(荀林父)를 파견해 정나라를 구하게 했다. 그리고 진나라는 필(邲) 땅에서 초 장왕에게 패해 동맹국이 이반하였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북적의 일파인 적적이 진을 쳤다. 진 경공은 중군장인 순임보, 중군좌인 선각을 보내 적적인 노씨족을 멸하고 그 포로를 주나라 천자에게 바쳐 체면치레를 했다.

2.3. 제나라와의 대립


진 경공 8년(기원전 592년), 진 경공은 극극[4]을 사신을 보내 제경공(齊頃公)에게[5] 회맹에 참가하라고 했으나 제나라에서는 극극을 모욕하고 돌려 보냈다. 극극은 모욕을 참지 못하고 진 경공에게 제를 칠 것을 권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하지만 정말로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한 진 경공은 위나라와 회맹하여 제를 쳐서 제나라의 영토인 양곡을 압박했다. 그러자 제 경공은 진 경공에게 회맹을 요청하였고 진 경공은 그것을 받아들여 양국의 공자를 인질로 보내고 병력을 물렀다.

2.4. 초나라에게 설욕하다.


초나라에서는 초 장왕이 죽고 그 아들인 초공왕이 되었다. 그 때 초 장왕은 제나라를 치고 있었으나 초 공왕이 왕이 되면서 병력을 뺐다. 제나라는 노나라와 그 동맹인 위나라를 쳤고, 노와 위는 진에 구원을 요청해 진경공은 극극, 난서, 사섭[6]을 보내 노나라와 위나라를 구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진 경공은 패권을 되찾았다.
초 공왕은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 채나라, 허나라와 회맹해 노와 위를 쳐서 제나라의 복수를 하고자 했다. 노와 위가 초에 화친을 청하니 초나라는 노나라, 채나라, 허나라, 진(陳)나라, 송나라, 진(秦)나라, 위나라, 정나라, 제나라, 조나라, 주(邾)나라 등 여러 나라와 회맹했다. 진 경공은 이에 대항해 천자에게 제나라를 쳐서 포로를 천자에게 진상했다.
진 경공 12년(기원전 588년), 노나라, 송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포섭해 정나라를 쳤고 정나라를 돕는 초나라를 이겼다. 같은 해 진 경공은 3군에서 6군으로 늘렸고, 한궐, 조괄[7], 공삭, 한천, 순추, 조전을 경에 봉했다.

2.5. 강에서 신강으로 천도


진 경공 13년(기원전 587년), 조동, 조괄이 모반을 도모하다가 실패해 제나라로 달아났다. 진 경공 14년(기원전 586년) 초를 견제하기 위해 오왕 수몽을 지원하였다.
진 경공 15년(기원전 585년), 수도를 강(絳)에서, 신전(新田) 땅으로 천도했는데, 진 경공은 이곳을 신강이라고 칭했다.

2.6. 병입고황


진 경공 19년(기원전 581년), 점쟁이가 햇보리를 먹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해 진 경공은 번민하다가 병이 나고 말았다. 이에 이웃의 진(秦)나라는 명의 고완을 보냈는데, 고완이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했으나 진 경공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마음이 편해졌는지 병이 가라 앉았다. 그리고 진 경공은 그 점쟁이를 참수하고 보리밥을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서 설사를 하려는데, 재수없게도 화장실 바닥이 부서져 빠졌다. 구조되었으나 똥독이 올라 오래 못 가 죽었다. 결국 햇보리는 먹지도 못하고 점쟁이만 죽였다.

3. 여담


그 뒤를 이어 그 아들인 희수만이 진나라 군주가 되니 그는 진여공이다. 진 여공 또한 진 경공처럼 폭정을 저지르다가 신하들에게 살해되고, 주나라에서 일하던 공족 희주를 진나라 군주로 모시니 그가 바로 진도공이다. 진 도공은 나라를 잘 다스려 나라를 중흥시켰으나 결국 그가 젊은 나이에 죽자 진나라의 경들은 자기네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는데, 진나라 군주는
그것을 제어하지 못해 진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갔다.
[1]진헌공과 여희 사이에서 나온 희해제희탁자를 제외하면 26번째 군주.[2] 다만 그것 때문에 조돈과 조천은 역사 기록을 통해 까이게 되었다.[3] 당시 정나라는 진나라와 동맹이었다.[4] 조조처럼 다른 한자의 조합으로 된 이름.[5] 안영상국으로 임명해 번영을 이끈 제경공과는 다른 사람이다.[6] 삼국 시대 인물 사섭과는 다른 인물이다.[7] 조나라의 병법 마스터 조괄과는 다른 인물. 한자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