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하
* 정치인/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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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淵夏
1924년 05월 17일 - 2006년 08월 28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호는 춘산(春山)이다. 본관은 옥천(玉川).[1]
1924년 전라남도 순천군 주암면 구산리[2]#에서 태어났다. 순천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농업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으로 중퇴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승주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순천시-승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조경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우경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경선에서 이철승의 참모였고, 이철승계 표를 김대중을 지지하도록 이끌어 김대중의 후보선출에 기여하였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동교동계에 속하여 활동한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당한 내용은 해당 기사에 있는데 아래와 같다.
12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유명한 '조연하 파동'이 터진다. 국회 부의장직을 수행하다 작고한 김녹영의 뒤를 이어 신민당 몫의 부의장 후보자로 내정되어 있었으나[3] , 동교동계 및 당 지도부에서 이용희를 내정하기로 방침을 바꾸자 이에 대해 반기를 들며 독자 출마를 감행한 것이다. 그로 인해 국회에서 국회부의장 투표가 이루어졌고, 신민당 비주류와 심지어 민주정의당 의원들의 지지까지 받은 조연하가 이용희를 제치고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다만 해당 국회부의장 선출 파동으로 인해 당내에서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고 부의장직도 1년만에 내려놓았다.
이후 동교동계와 정치적으로 결별하고 통일민주당, 통일국민당, 국민신당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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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淵夏
1924년 05월 17일 - 2006년 08월 28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호는 춘산(春山)이다. 본관은 옥천(玉川).[1]
1924년 전라남도 순천군 주암면 구산리[2]#에서 태어났다. 순천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농업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으로 중퇴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승주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순천시-승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조경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우경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경선에서 이철승의 참모였고, 이철승계 표를 김대중을 지지하도록 이끌어 김대중의 후보선출에 기여하였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동교동계에 속하여 활동한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당한 내용은 해당 기사에 있는데 아래와 같다.
이후 1984년까지 정치활동 피규제자로 묶여 있었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운영위원을 지내다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선거구에 출마해 민주정의당 김기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한 50대 민간인이 연행돼 들어왔다. 옷을 벗기고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힌다. 이어 의사가 건강 상태를 점검했다. 의사는 책임자에게 "혈압이 높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중앙정보부에 끌려왔으니 누구라도 호흡이 가빠지고 혈압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병이 있을 경우 목숨을 잃는 사고가 터지기도 한다.
담당 수사관은 "사실대로만 얘기하면 곧 나갈 수 있어요"라며 점잖게 취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년 전 잡혀왔을 때도 심문하던 수사관으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조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전되지 않았다.
수사관이 바뀌더니 2인조 고문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먹질과 각목 구타가 이어졌다. 고문자들은 기가 빠진 그를 지하실로 끌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혀 손발을 묶고 고개를 뒤로 젖혀 얼굴에 물을 부었다.
'''그래도 묻는 말에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자 고문자들은 그를 어떤 작은 방에 집어 넣었다. 진공실 고문이었다. 조금 있으니 얼굴과 가슴이 바깥으로 찢어지는 것 같고 몸뚱이 전체가 공중에 둥둥 뜨는 듯했다. 비명을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안 나오고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12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유명한 '조연하 파동'이 터진다. 국회 부의장직을 수행하다 작고한 김녹영의 뒤를 이어 신민당 몫의 부의장 후보자로 내정되어 있었으나[3] , 동교동계 및 당 지도부에서 이용희를 내정하기로 방침을 바꾸자 이에 대해 반기를 들며 독자 출마를 감행한 것이다. 그로 인해 국회에서 국회부의장 투표가 이루어졌고, 신민당 비주류와 심지어 민주정의당 의원들의 지지까지 받은 조연하가 이용희를 제치고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다만 해당 국회부의장 선출 파동으로 인해 당내에서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고 부의장직도 1년만에 내려놓았다.
이후 동교동계와 정치적으로 결별하고 통일민주당, 통일국민당, 국민신당에 속하였다.
2. 선거 이력
[1] 22세손 연(淵)◯ 항렬[2] 옥천 조씨 집성촌이다. 인근의 주암리, 오산리, 복다리, 문길리, 죽림리, 어왕리, 백록리, 대구리, 궁각리, 요곡리, 대광리, 한곡리에도 옥천 조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조충훈 전 순천시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일설에는 원래 12대 국회 개원부터 조연하가 부의장직 내정자였으나, 당시 투병중이던 김녹영이 일본에서 치료를 받기 편하도록 의정활동 부담이 덜한 부의장직을 양보했다고도 한다.[4] 승주군. 1995년 순천시에 통합됨[5] 순천시, 승주군[6] 순천시, 승주군[7] 1887.6.5 탈당, 11.13 통일민주당 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