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image]
후보자들의 선거 포스터

1967년 5월 3일
6대 대선

1971년 4월 27일
'''7대 대선'''

1972년 12월 23일
8대 대선
}}}
'''투표율'''
79.9%▼ 3.7%p
'''선거 결과'''
'''후보'''
'''민주공화당''']]
'''박정희'''
'''신민당''']]
'''김대중'''
'''득표율'''

'''53.2%'''
45.3%
'''득표수'''
'''6,342,828'''
5,395,900
'''당선인'''
'''민주공화당'''
'''박정희'''
1. 개요
2. 배경
3. 과정
3.1. 정책공약
3.2. 부정선거 논란
4. 결과
4.1. 지역별 결과
5. 영향
6. 로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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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취임 선서를 하는 박정희 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기사'''

'''대통령 취임 영상'''

"''' 여러분들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야기도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여러분들이 표를 많이 모아서 우리 공화당과 이 사람을 한 번 더 지지하여 일할 수 있는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민주공화당 후보, '''대통령 박정희''', 서울 후보선거유세, 1971년 4월 25일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제를 한다는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신민당 후보, 국회의원 김대중,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 1971년 4월 27일

1971년 4월 27일에 있었던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로, 이 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대통령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군부 독재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직선제였다.[1]

2. 배경



2.1. 민주공화당, 3선 개헌


5.16 군사정변 이후에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중임을 1차에 한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는 이미 연임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필 이 때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국회 내 의석 수가 전체의 '''2/3'''을 훌쩍 넘는 바람에(...)[2] 여당이 마음만 먹으면 헌법 개정을 통한 재출마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주공화당 안에서도 엄청난 진통이 있었다. 다름아닌 민주공화당의 2인자였던 '''김종필의 반발'''이었다. 5.16 군사정변의 브레인이자,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 한일기본조약 협상을 주도했던 그는 당연히 박정희가 출마할 수 없던 민주공화당의 차기 대선주자로 떠올랐고, '''박정희의 3선을 반대하였다.''' 마침 비슷한 시기 신민당에서 제출한 권오병 문교부장관 해임권고 결의안이 상정되었는데, 예춘호 등 김종필계 민주공화당 의원들이 세력과시를 위해 찬성표를 던지면서 결의안이 가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분노한 박정희와 공화당 내 개헌파 의원들이 김종필계 의원들을 공화당에서 제명 처분시켰다.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부산에 내려갔다가, 박정희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 무력하게 3선개헌 작업에 앞장선다. 이렇게 추진된 3선 개헌(6차 개헌)은 신민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본회의 상정이 되지 않다가, 새벽 2시 반에 공화당 의원들끼리 국회 별관에 모여서 날치기 통과시키며 국회를 통과했고, 이후 국민투표를 거쳐 개정이 확정된다.

2.2. 신민당의 40대 기수론


한편 이전까지 무력한 야당에 불과했던 '''신민당'''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1969년 11월 8일 당시 '''42세'''의[3] '''김영삼'''이 남산 외교구락부 건물[4]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뒤이어 1970년 1월 24일 '''45세'''의 '''3선'''의원 '''김대중'''이, 2월 12일 '''48세'''의 '''3선'''의원인 '''이철승'''이 각각 출마를 선언했다.
신민당 지도부에서는 "젖비린내 나는 정치 소년들이 나온다"며 반감을 표했지만[5] 오히려 당내의 반응은 이들 '''40대 기수들'''에게 환호하고 있었다. 후보들에게 "당이 단합하는 모습을 보이려면 명망 있는 분을 단독 추대하는 게 그림이 좋다 "면서 출마 철회를 종용하던 당 지도부도 결국은 포기,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 투표에서 이철승의 지지를 업은 김대중이 458, 김영삼 410으로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된다. 그리고 김영삼은 결과에 승복하고 대선 동안 김대중의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훗날 김영삼은 "2차 투표 때 소석과 DJ가 '(둘 다 호남 사람인) 우리가 남이냐'며 연합했다," "이후 나는 '배알도 없느냐'며 울먹이는 우리 측 사람들 달래며 DJ를 지원했는데 DJ는 내게 선대위원장을 시켜주진 못할 망정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완전히 나를 배제시켰다"고 술회했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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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에게 경선 패배를 인정하며 지원을 약속하는 김영삼
이 세 명의 '''40대 기수'''들은 이후 '''제4공화국, 제5공화국'''을 거쳐 야당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김영삼, 김대중의 양김은 끝내 '''대통령'''에 오르기도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양김 문서 참조.

3.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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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김대중 박정희 대선유세

3.1. 정책공약


1971년 5월에 선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는 1970년 10월부터 지방유세를 돌기 시작하는 등 일찍부터 대선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김대중 후보가 제시한 공약 중에는 당시로서는 정말 파격이라고 할 수 있는 공약들이 많았다.
  • 향토예비군 폐지[6]
  • 미/일/중/소 4개국에 의한 전쟁억제 보장 요구
  • 노사공동위원회 설치
  • 남북한 사이의 단계적 비정치적 접촉 시도
  • 대중경제론: 박정희정부의 수출주도산업화수입대체산업화로 회귀를 주장
반면 민주공화당은 대통령후보 지명을 1971년 '''3월'''에 하는 등 선거 열기가 처음부터 뜨거워지는 것을 가급적 막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박정희 후보는 안보 문제와 예비군 폐지 문제, 경제정책 문제 등으로 김대중 후보와 열띤 공방을 벌였다.

3.2. 부정선거 논란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표 확보를 위해 정부가 뿌린 돈이 당시 '''국가예산의 1/7'''인 700억원 남짓이었다.[7] 2010년대 기준으로도 선거자금으로 큰 돈이지만 당시의 물가수준으로 친다면 최소 100배는 더해야 될 판으로, 서울의 아파트 30평 아파트 한 채가 4백만 원 가량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다. 더욱이 부재자 투표의 표가 박정희 몰표로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8] 더불어 김대중 자서전에서는 유리한 지역의 표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전부 무효표 처리된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결국 3.15 부정선거만큼은 아니라도 매우 불공정한 부정선거였다는 것은 확실했고 이 때문에 대학생 데모 등 반대집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위수령이 남발되면서 모두 진압되었다.
이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미국 의회의 일명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부정선거가 아니었다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을 것이며 그 엄청난 부정선거 공작에도 큰 표차가 없는 결과를 낸 김대중 후보를 상당히 두려워했다는 증언을 했다. 이 증언 이후 김형욱은 파리에 갔다가 실종되어버린다.

4. 결과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기호'''[* 이전 선거까지 추첨으로 기호를 배분했던 것과 달리, 이 때부터는 기호를 '''국회 의석 보유수''' 순서대로 부여했고, 광복 직후 문맹률이 높아서 쓰였던 막대 기호(|,
,
|,
등) 대신 아라비아 숫자 기호도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여부'''
'''1'''
'''박정희'''

'''6,342,828'''
'''53.19%'''
'''1'''
'''당선'''
2
'''김대중'''

5,395,900
45.25%
2
낙선
3
박기출

43,753
0.36%
4
4
성보경

-
-
-
유세기간 중 자격 반납
5
이종윤

17,823
0.14%
5
낙선
6
진복기

122,914
1.03%
3
7
김철

-
-
-
유세기간 중 자격 반납
선거인수
15,552,236
투표수
12,417,824
무효표수
494,606
투표율
79.85%
투표 결과 겨우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비록 표 차이 자체는 생각보다 작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지역감정을 있는 대로 자극하면서 부정선거까지 펼쳐서 나온 결과였다는 점이다. 신선한 정책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은 김대중 후보는 이후 야권 거물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며 박정희의 강력한 정적이 된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는 이전 대선들에 비해서 유달리 군소후보들의 총 득표율이 1.5%정도로 낮다. 그만큼 박정희, 김대중 양대 후보가 주목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얻은 득표율인 45.2%는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깰 때까지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얻은 최대 득표율이었다. 무려 31년이나 깨지지 못한 기록인 셈.

4.1. 지역별 결과


[image]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지역
'''민주공화당
박정희'''
'''신민당
김대중'''
전국
'''6,342,828
(53.2%)'''
5,395,900
(45.2%)
서울
805,772
(40.0%)
'''1,198,018
(59.4%)'''
부산
'''385,999
(55.7%)'''
302,452
(43.6%)
경기
687,985
(48.9%)
'''696,582
(49.5%)'''
강원
'''502,722
(59.8%)'''
325,556
(38.8%)
충남
'''556,632
(53.5%)'''
461,978
(44.4%)
충북
'''312,744
(57.3%)'''
222,106
(40.7%)
경남
'''891,119
(73.4%)'''
310,595
(25.6%)
경북
'''1,333,051
(75.6%)'''
411,116
(23.3%)
전남
479,737
(34.4%)
'''874,974
(62.8%)'''
전북
308,850
(35.5%)
'''535,519
(61.5%)'''
제주
'''78,217
(56.9%)'''
57,004
(41.4%)
6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전라도, 제주도에서는 박정희가 이전 대선보다 낮은 지지율을 받았으며 여기에 서울까지 추가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여전히 박정희는 10% 이상의 차로 이겼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이전 대선보다 높은 지지율을 받았다. 그리하여 경기도에서는 사실상 백중세를 이루었으며, 충남도 이제 박정희 쪽으로 돌아섰다.
5, 6대 대선과 다른 점으로는 영, 호남에서의 득표율 양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전 대선까지 박정희는 경남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이번에는 경북에서 더 지지를 받았다. 또한 6대 대선까지 전북전남 중에서 전북이 박정희를 더 싫어했으나 이번에는 전남에서 박정희 비토 정서가 훨씬 높아졌다.

5. 영향



5.1. 지역감정 문제 대두


당시 신민당은 1960년대 중순부터 호남 푸대접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급기야 19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 유세 당시에는 김대중을 포함한 신민당 의원들이 '''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9] 이렇듯 안 그래도 호남에서 형성 중이던 반여 정서는 호남 출신 김대중이 신민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자 더욱 심화되었다.[10]
박정희 측 또한 이런 자극성 유세몰이에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이 이전부터 이효상 등이 주장해왔던 '''신라 대통령론'''과 이후락중앙정보부에서 주도하여[11] 선거 3일전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허위전단을 뿌려 선동하여 영남(특히 농촌지역)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이는 호남의 김대중 지지율에 비해 영남의 박정희 지지율이 더 압도적으로 높은 선거결과로 나타났다.
이로써 1967년 대선에서 처음 나타났던 영호남의 지역주의는 이번 선거에서 훨씬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런 지역주의에도 김대중은 부산광역시에서 40% 후반으로 선전했고, 경남에서도 충무시, 창원시, 마산시 등 당시 인구가 급증하던 지역에서 30% 후반을 득표하는 등 선전했다. 또한 경상북도에서도 당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대구시에서 30% 초반 정도 득표했다.[12] 전남, 전북에서도 박정희가 34~35% 정도 득표 했으며, 또한 7대 대선 직후 치러진 8대 총선의 경, 호남(여21 : 야13)이 오히려 영남(여26 : 야24)보다 여당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지역감정으로 인한 몰표성이 그나마 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막을 드러낸 지역주의는 중선거구제를 내세운 1970년대1980년대에는 주춤했다가, 1987년13대 대선과 뒤이은 13대 총선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5.2. 유신의 원인이 되다


“이것 봐. 내가 그래도 그동안 잠자고 있던 국민이 일어서서 일하게 하는 세상을 만들고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여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김대중씨가 뭐를 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안 나?''' 내가 이름이 나도 김대중보다 더 낫고, 선거비용을 써도 김대중보다 훨씬 더 많이 썼는데 말이야. 행정력은 또 얼마나 사용했나. 선거라는 게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긴 하지만 이게 큰일 날 수도 있어.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선거를 하다 보면 앞날을 제대로 내다보고 건전하게 나라를 열어 갈 위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뽑힐 수 있어. 그럴 땐 조국 근대화라는 혁명 과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어. '''그러니 내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선거 다음 날 박정희의 발언)

[김종필 증언록] “김대중 뭘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 낙심한 박정희의 화살, 과녁 벗어나 “큰일 나겠어” … 유신을 작심했다

갑자기 등장한 40대 후보에게 예상외로 접전 끝에 이기며 박정희는 체면을 구긴다. 여기에 더해 대선 한 달 뒤 치뤄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진산 파동이 터지며 야당인 신민당에게 선거 판세가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예상을 깨고 신민당이 89석을 확보하여 개헌저지선(69석)을 훌쩍 넘는 의석수를 획득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결국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연임이 불가능해 보이자 불안해진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일으킨다.
선거 운동 중 박정희는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고[13], 김대중은 "박정희가 이번에도 집권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입니다." 라고 했는데 박정희의 발언과 김대중의 우려는 '''둘 다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6. 로고송


기사
신민당은 동요 "산토끼"와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을 다음과 같이 개사해 선거에 사용했다.

-대중(大衆/大中)의 노래 (산토끼)-

대중아 대중아 어디로 가느냐

대중 대중 김대중 찍고서 올 테야

-미남 대통령 후보 (대머리 총각)-

신민당 강연장에 김대중 후보~ 오늘도 만나려나 기다려지네~

미남인 그 얼굴에 연설도 잘해~ 행여나 나를 보나 발돋움했지~

신민당 강연장에 김대중 후보~ 이번에 2번 찍어 승리하겠네~

이번에 2번 찍어 승리하겠네~


[1]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16년간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2] 하필이라기 보다는 박정희와 중앙정보부(김형욱)의 공작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 정설이다. 7대 총선 과정에서 물품 살포, 돈봉투 살포, 공안사건 조작등의 수단을 통해서 어거지로 개헌선 확보에 주력시켰다. 물론 당연히 선거가 끝난 후에 난리가 나서 재보선이 대규모로 치러질 판이었지만 사법부에 압력을 넣어서 무마시켰던 것.[3] 하지만 이미 '''4선''' 의원에 신민당 '''원내총무'''로 당직까지 맡고 있었다. 1954년 '''26세'''에 거제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이다. 그 와중에 총선에서 1번 낙선한 적이 있는 경력만 따지자면 거물급 중진 의원이었다.[4] 2008년 철거되었다.[5] 지금의 관점으로 봐선 당연한 일인 자유 경선이었으나, 당시의 당 지도부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얼마나 지금과 다른 시대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범진산계의 양일동 부당수는 전당대회 3주 전인 70년 9월 초 인터뷰에서 "40대 후보들에게 지명대회를 맡길 수는 없다, 또 그들에 의해 지명 대회가 이끌려서도 안 된다, 당의 꼴이 엉망이 된다"며 지난 67년 대선처럼 윤보선·이범석·백낙준·유진오 등의 4자 회담을 통해 후보를 결정하거나 당 간부들로 이뤄진 후보조정위원회를 만들어서 후보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주요 정당의 지도자가 있다면 소가 웃을 얘기겠으나, 이것이 그때 당시 당 지도부의 분위기였다. 유진오 전 총재가 9월 17일 대통령 후보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했다는 말이 "경선은 할 생각이 없지만 추대를 해준다면 나서겠다"는 것이었던 것만 보더라도, 그 당시 당 대표며 야권 리더며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감히 자기 같이 대단한 사람에게 제발 받아달라며 후보직을 바치진 못할 망정 후보를 하려면 열심히 선거를 치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6] 현재와는 달리 창설 당시의 향토예비군은 독재정권 관제사업에 강제노역을 동원하기 위한 임의 소집으로 물의를 많이 빚어서 향토 예비군제도에 대한 반감이 굉장히 컸었다.[7] 김종필은 600억을, 71년 당시 중앙정보부 보안차장보 강창성씨는 700억을 증언했다. 또한 미 하원 소위 보고서는 미국계 정유사들(걸프, 칼텍스, 유니언 오일)이 제공한 돈이 정치 자금으로 쓰인 경황을 보고했다.[8] 다만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만큼 부재자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곧 묻혀버렸다.[9] 이전 5대 대선때에도 윤보선 당의 한 소속 의원이 '''부산,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라는 발언을 해서 박정희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이 있다. 이렇듯 지역주의를 선동하는 식의 선거 전략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사용한 것이었다. '''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는 말은 지금 해도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을 주장이다.[10] 김대중이 지역감정을 자극한 또 다른 사례로는 13대 대선 때 들고 온 4자필승론.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김대중의 실책이다. 실제로 13대 대선 이전에 대구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둘 정도로 지역색이 심하지 않았다.[11] 이 전략에 엄창록이 가담했다는 주장도 있다. [12] 예외는 거창군인데 여기서도 30% 정도를 득표했다.[13] 물론 겉으로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