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월리스
[image]
1. 개요
George Corley Wallace, Jr.
1919년 8월 25일 - 1998년 9월 13일
미국의 정치가. 민주당 소속으로 앨라배마 주지사를 무려 네차례 역임한 인물이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제3당으로 독자출마한 경력이 있다. 인종 분리 정책을 전면에 내세워 18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약 100년 동안 옛 남부연합 지역을 1당독재하듯 장악했던 남부 민주당파의 '''마지막 대표 주자'''라고 볼 수 있다.
2. 생애
2.1. 유년기와 정치 입문
1919년 8월 25일, 앨라배마 주 남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할아버지는 의사였다.
1935년 고등학생 시절 앨라배마 주상원의 서기로 취업하고 1938년에 할아버지의 지방 선거 유세를 돕는 활동을 하며 정치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월리스는 앨라배마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하여 1942년에 졸업한다. 그 후 공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항공기관사로 복무한다.
1946년 앨라배마 주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경력 초창기에는 남부 정치인 답지 않게 인종관련 이슈에서 온건한 입장를 취했다. 예를 들어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남부 민주당원들이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인종 분리 정책 철폐 공약에 반발하여 대거 탈당했을 때, 월리스는 민주당에 남아있었다. 1952년에 지방 판사로 당선되는데, 당시 미국 남부 사회에 만연하던 인종차별적인 이미지와는 반대로 법정 내에서는 인종과 관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존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58년에 판사로서의 좋은 평판에 힘입어 앨라배마 주지사 민주당 경선에 출마하는데, KKK의 후원을 받던 상대 후보의 인종몰이에 일격을 당해 경선에서 탈락한다. 이때의 패배가 큰 충격으로 남은 월리스는 인종 문제가 다시는 자신의 발목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월리스는 본격적으로 '''흑화하기 시작한다.'''"내가 왜 졌는지 알아? (경쟁 후보) 패터슨의 검둥이몰이에 당했기 때문이야. 내가 지금 여기서 장담하지. '''다시는 당하지 않을거야.'''
경선 탈락 후 보좌관 세이모어 트래멜에게 한 말.
2.2. 앨라배마 주지사
"제 경력과 좋은 도로와 좋은 학교에 대해 말해 봤지만 듣는 사람이 없었어요. '''하지만 검둥이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갑자기 왜 인종차별적인 공약을 내세우는지 질문했던 지지자에게 했던 대답.
1962년 앨라배마 주지사 민주당 경선에서 여유롭게 1등을 차지한다. 이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공화당의 세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민주당 경선이 사실상의 결선투표였다. 아니나 다를까, 월리스는 본 선거에서 '''96% 득표'''라는 충공깽스러운 결과를 보여주며 손쉽게 당선된다.'''"오늘도 인종 분리, 내일도 인종 분리, 영원히 인종 분리"'''
"Segregation now, segregation tomorrow, segregation forever."
주지사 취임 연설 중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월리스는 인종 분리 철폐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케네디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다. 연방정부가 군대를 동원시켜 앨라배마 대학교에 흑인 학생들을 입학시키려 하자, 자신이 직접 학교의 정문을 가로막는 기행을 선보인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에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사건으로, 이를 계기로 월리스는 단숨에 남부 민주당 계파의 리더이자 전국적 스타로 떠올랐다.
이 인기에 힘입어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경선에 출마한다. 사실상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승리가 예정되어 있는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예상을 웃도는 결과를 선보이며 차기 대통령감으로 이목을 끄는데 성공한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의료보험 확대, 주립 대학교 및 전문대학교 대거 건설, 대규모 공장 유치 등 포퓰리즘에 기반한 정책을 선보여서 민심을 잡는 데에도 성공한다.
앨라배마 헌법상 주지사 연임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월리스는 암으로 투병중이던 자신의 아내 루얼린 월리스를 1966년 주지사 선거에 얼굴마담으로 내보낸다. 남편의 후광 덕분에 루얼린은 경선과 본선 모두 무리없이 이기지만, 1년 반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해 버린다.
2.3. 대통령 후보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월리스는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결심한다.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지 않고 제3당인 '미국독립당'의 후보로 독자출마 했는데, 거대양당 후보가 아닌 이상 당선은 어렵다는 것은 월리스도 알고 있었다. 실질적인 목표는 백악관 입성이 아니라, 다른 후보들의 선거인단 과반득표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선거를 하원으로 끌고 가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희미해져가던 남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금 높여줄 뿐만 아니라,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등 인종평등 법안들의 폐지를 이끌어 내는 한수가 될 수도 있었다.
부통령 후보로는 전 MLB 커미셔너였던 해피 챈들러가 거론되었지만 MLB 첫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영입을 지지한 이력이 있어 탈락(...). KFC 할아버지 할랜드 샌더스(...)도 잠시 물망에 올랐지만, 끝내 전 공군참모총장인 커티스 르메이를 지목했다.
앨라배마 선거와 같이 흑인들을 타겟으로 삼으면 전국적인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한 월리스는 "난 한번도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다"며 말을 싹 바꾼다. 백인우월주의나 네오나치 단체들의 공공연한 지지 및 후원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신 전국적인 어필을 높이기 위해 의료보험과 사회복지 확대 등 기존에 해오던 복지정책들을 부각시켰으며, "민주당이랑 공화당이랑 하나도 다른거 없다"는 발언 등으로 비주류 이미지를 부각했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베트남 전쟁 완전 철수 등 고립주의를 내세웠고, 흑인들 대신 히피들을 집중적으로 규탄하며 '''법과 질서'''를 부르짖었다.
월리스의 언더독 전략은 거대양당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는 보수층이 분열되어 어부지리로 민주당이 이기는 것을 두려워했고,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는 중서부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대거 이탈을 우려했다. 결과적으로는 리처드 닉슨이 대승을 거두며 월리스의 작전은 실패했지만, 선거인단을 무려 46명이나 확보하는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현재까지 제3당이 선거인단을 확보한 사례는 월리스가 마지막이다.
2.4. 다시 앨라배마로
1970년에 다시 앨라배마 주지사로 출마한다. 민주당 경선 상대이자 현직 주지사였던 알버트 브루어는 더이상 흑인들을 한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흑인 유권자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유세를 펼친다. 이에 월리스는 당시 기준으로도 심히 인종차별적인 유세로 맞선다. "앨라배마가 흑인들에게 넘어간다"는 발언이나 백인 여자아이가 흑인 남자들에 둘러쌓인 TV광고 등, 적나라하게 흑인들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선거전략으로 10년 전 자기가 당했던 인종몰이를 적극적으로 쓴다. 결국 월리스가 근소한 차이로 경선에서 이기고 본 선거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승리한다.
더이상 대통령 출마 안한다는 말을 번복하고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또 출마한다. 이번에는 민주당 경선에 참가했는데, 인종문제에 관련해서는 '''또''' 입장을 바꾸어 "난 항상 온건파였다"라고 하며 말뒤집기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북부 주에서도 나름 괜찮은 성적을 내며 승리 가능성이 보였지만, 정신질환을 않고 있던 "아서 브레머"라는 사람이 쏜 '''총격에 맞아 중태에 빠지면서''' 사실상 유세가 끝나 버렸다. 긴 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지만 '''평생을 하반신 불수로 살게 되었다.'''
헌법이 바뀌어 주지사 연임이 가능해 지자 1974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마지막으로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만, 같은 남부 출신인 지미 카터 조지아 주지사와의 경쟁으로 남부의 표조차 확실하게 얻지 못하여 조기 사퇴했다. 1979년 주지사 임기가 끝이 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2.5. 말년
총격 사건의 후유증을 견디기 위해 종교를 다시금 접한 월리스는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난다. 신앙심의 여파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인종차별적인 행적에 대해 깊이 참회한다고 선언하고, 흑인 사회 지도자들에게 사과를 했으며 용서를 빌었다."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시절는 지나갔고, 지나가야 마땅합니다."
첫 주지사 임기 시절 앨라배마 대학교 정문을 가로막은 사건을 회상하며.
1982년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주지사 선거에 나섰는데, 유세의 방식이 전 선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흑인 유권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며, 다수의 흑인들을 주 정부 곳곳의 요직에 앉히겠다는 약속을 했다. 월리스의 참회가 진실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정치적으로 흑인 유권자들의 힘을 무시하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했기에 악어의 눈물을 흘린 것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결국 흑인 유권자들은 월리스에게 90%가 넘는 몰표를 주었고, 월리스는 흑인 두명을 자신의 내각에 임명하는 등 앨라배마 주 역대 최다 흑인 정부직 임명을 기록하며 약속을 지켰다.
임기가 끝난 후 다시 은퇴하여, 미국 정치의 원로로 여생을 보냈다. 1990년 이후에는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민주당보다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들을 향해 지지 의사를 간간히 밝혔다.
1998년 패혈성 쇼크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