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매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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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존 매켄로'''
'''(John Patrick McEnroe Jr.)'''
'''생년월일'''
'''1959년 2월 16일 (65세)'''
'''국적'''
'''미국''' [image]
'''출생지'''
'''독일, 헤센비스바덴'''
'''신장'''
'''180cm(5 ft 11 in)'''
'''사용 손'''
'''왼손, 한 손 백핸드'''
'''프로데뷔'''
'''1978년'''
1. 소개
2. 커리어


1. 소개


통산 커리어 성적 중에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서만 우승 7회, 준우승 4회, 4강 진출 8회를 기록하였고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 3회, 준우승 1회를 기록하였으며 통산 타이틀 획득 77회로 역대 테니스 선수 중 4위를 기록할 정도의 미국 출신의 테니스 레전드이다. 하지만 대중들에겐 성깔이 나쁜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다 코트의 심판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고 경기 매너도 좋지 않은 비신사적인 선수라서 코트의 악동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선수였다. 그래도 테니스 세계 랭킹 누적 부문에서 170주나 1위를 기록하여 역대 테니스 선수 중 7위에 올랐으며 테니스 레전드이며 윗세대인 지미 코너스와 비외른 보리, 비슷한 나이대의 이반 렌들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위대한 테니스 선수이기도 하다. 1999년에는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코트의 악동'''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실력 역시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지미 코너스, 비에른 보리, 이반 렌들과 함께 최고의 자리를 다투던 테니스의 레전드. 직설적이면서 불 같은 성격으로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서 욕설을 하거나 라켓을 부러뜨리는 등 숱한 기행으로 많은 벌금도 물었지만, 점잖은 신사의 스포츠인 테니스에서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그 악동 기질은 현재는 유쾌한 유머로 발전했고, TV 해설가 및 코치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나이키는 이런 매켄로의 스타성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스폰서를 해줬다.
출생지가 서독 시절의 비스바덴인데, 아버지가 공군으로 전후 서독에 파견되어 있던 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후 뉴욕으로 이주한 후에 1976년에 아마추어 선수로 데뷔했고, 1978년에 프로에 데뷔했다. 데뷔 2년 차이자 아직 아마추어이던 1977년에 18살의 나이로 윔블던에서 4강까지 올라갔고, US 오픈에서는 4라운드까지 진출하더니 20살인 1979년에 US 오픈에서 커리어 처음으로 그랜드 슬램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후 US 오픈에서만 3연패(통산 우승 4회)하면서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1980년에 윔블던은 결승까지 올라가 숙적 비에른 보리에게 패퇴했지만[1] US 오픈에서 우승했고, 1981년에는 윔블던과 US 오픈을 동시에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1983년의 그랜드 슬램은 무관에 그쳤으나 그의 최전성기라고 여겨지는 1984년프랑스 오픈에서 준우승[2], 윔블던 우승, US 오픈 우승까지 거두며 참가한 그랜드 슬램 3개[3] 대회 모두 결승에 올라 2개의 우승을 거두었으며, 이해 그랜드 슬램 승률 89.9%(62승 7패)와 시즌 전체 96.5%(82승 3패) 승률은 모두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1985년까지는 프랑스 오픈 4강, US 오픈 결승까지 올랐으나 점차로 하락세를 기록하게 됐다. 1992년 윔블던 4강에 오른 뒤 1994년에 단식을 은퇴했고, 2006년에 복식을 은퇴했다. 1999년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73년에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받았던 테이텀 오닐과 1986년에 결혼해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나 1994년에 이혼했다. 이후 1997년에 록가수 패티 스미스(Patty Smyth)[4]와 결혼했다.
은퇴 후에 친구였던 에디 밴 헤일런에릭 클랩튼에게 기타를 배워서 밴드도 결성해서 2년 정도 투어를 돌기도 했고, 각종 TV 드라마와 영화에 자기 자신역으로 출연하거나, 현대 미술을 수집하고 갤러리를 여는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겼다.
1992년에는 앤드리 애거시와의 이벤트 경기를 위해, 2016년에는 피트 샘프러스와 ATP 챔피언스 투어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2017년에 개봉한 '보리 vs 매켄로'에서는 샤이아 라보프가 매켄로 역을 맡았다.
세레나 윌리엄스.비너스 윌리엄스가 우린 남자선수 랭킹 200위 이하는 얼마든지 이긴다고 언론 인터뷰로 큰 소리쳤던 적이 있다. 이에 독일 프로 테니스 선수였던 카스텐 브라쉬(독일 국적으로 당시 세계랭킹 203위)가 도전장을 내밀어서 경기를 치뤘고 둘은 각자 1-6,2-6으로 참패했다. 이게 1990년대 말, 그야말로 전성기 시절이었다. 이런 패배에 언론들이 좋아라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면서 비웃음을 당하자 '''남자 랭킹 350위 이하 수준을 이길 거 같다'''고 부랴부랴 인터뷰했는데 정작 이래놓고 랭킹 350위 이하 남자선수들이 그럼 우리랑 겨뤄보자는 말에 일절 경기를 하지 않아 더더욱 비웃음을 받았다. 2017년 존 매켄로는 자서전을 내면서 자서전 홍보투어 경기를 하던 그는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저 둘은 기껏해야 남자 랭킹으로 700위 수준''' 테니스선수이며, 60대가 되는 나도 저 둘은 지금 당장 경기해도 다 이긴다면서 불만이라면 겨뤄보자고 했는데 이 둘은 20년전 일을 그렇게 자랑할 것도 아니며 그야말로 젊은 치기로 마구 하던 일인데 이걸 이렇게 언급하냐며 기분나뻐했다.
사실 이것도 이 둘을 무조건 까기도 그런데 실제로 10대 후반 나이로 여자대회 메이저를 여럿 우승하면서 자신감이 붙어 이렇게 말했던 것이었고 이 참패 이후로 둘은 다시는 남자랑 맞붙겠다라는 말을 안하고 여자 대회로 나가 둘 다 여자대회에서 전설이 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더불어 매켄로 본인도 세레나 윌리엄스에게 왜 그러니까 남자대회 나온다고 요청하고 함부로 200위 정도 이긴다, 350위 정도 이긴다 설레발을 치냐라고 깐 것이지 그도 세레나 윌리엄스는 적어도 여자 선수로서는 전설이다. 군말없이 테니스 여제에 들어갈 존칭이 아깝지 않으며 이뤄낸 성적을 봐도 칭송할 것 밖에 없다라면서 여선수로서 찬사했었지, 여선수로 이뤄낸 커리어를 모욕하지 않았다.

2. 커리어


'''그랜드 슬램''' 단식 우승 7회 / 준우승 4회
  • 호주 오픈 4강 1회[5]
  • 프랑스 오픈 준우승 1회 / 4강 1회
  • 윔블던 우승 3회 (1981, 1983, 1984) / 준우승 2회
  • US 오픈 우승 4회 (1979, 1980, 1981, 1984) / 준우승 1회
'''그랜드 슬램''' 복식 우승 9회 / 준우승 3회
  • 윔블던 우승 5회 / 준우승 2회
  • US 오픈 우승 4회 / 준우승 1회
'''그랜드 슬램''' 혼합복식 우승 1회
그 외
  • 마스터스[6] 우승 3회 / 준우승 1회
  • ATP 월드 투어 파이널 우승 3회
  • ATP 싱글 랭킹 1위 통산 170주[7], 연말 1위 4회
  • 단식/복식/혼합복식 통틀어 우승 156회(단식 77, 복식 78, 혼합복식 1회)[8]
그랜드 슬램 단식 타이틀은 윔블던과 US 오픈 쪽에 편중되어 있는 편이며, 호주 오픈은 16년 동안 달랑 5번 참여했고, 그나마도 자신의 전성기가 지난 1989년 이후 참가가 3번 있을 정도다. 역대 최고 승률을 기록한 전성기였던 1984년에도 호주 오픈에 참가하지 않았을 정도. 당시의 호주 오픈은 잔디 코트 시절이니 코트 문제는 아니고, 연말에 치러지는데다[9] 태평양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야 했던 머나먼 호주 오픈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했던 것. 덕분에 호주 오픈 승률은 프랑스 오픈 승률보다 낫다.
그리고 복식 타이틀 개수도 많은 편인데 역대 최고의 복식 선수로도 평가받고 있고 ATP 랭킹 남자 복식 1위를 270주 하기도 했다.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서비스 모션이 자신만의 독특한 것으로 유명한데다 서브가 어느 곳으로 갈지를 숨기는데 능했다고 한다. 거기에 빠른 반응 속도와 재빠르게 라켓을 다룰 줄 알아서 발리와 네트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고 한다.
[1] 이 대결은 후에 보리 vs 매켄로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이 작품에서 샤이아 라보프가 매켄로를 연기했다.[2] 이반 렌들과 결승에서 만나 첫 두 세트를 6-3, 6-2로 비교적 손쉽게 따냈으나 나머지 3세트 모두 간발의 차이로 모두 내주면서 리버스 스윕을 당했다.(...)[3] 호주 오픈은 불참[4] 펑크락의 대모라 불리는 패티 스미스(Patti Smith)와는 스펠링이 다른 동명이인의 가수.[5] 1977년부터 1992년까지 참여 자체가 5번밖에 없다.[6] 현재의 ATP 월드 투어 마스터스 1000의 전신에 해당한다.[7] 통산 7위[8] 이 부문 역대 1위. 2위는 124회의 지미 코너스[9] 1987년에야 1월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