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밴 헤일런

 


'''Eddie Van Halen'''
[image][1]
'''본명'''
'''에드바르트 로더베이크 판 할런(Edward Lodewijk van Halen)'''
'''출생'''
'''1955년 1월 26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사망'''
'''2020년 10월 6일(향년 65세)'''
'''국적'''
'''미국''' [image]
'''활동'''
'''1964년 ~ 2020년'''
'''소속'''
'''밴 헤일런'''
'''직업'''
'''기타리스트, 사업가'''
1. 개요
2. 그의 일대기
2.1. 유년기
3. 사망
4. 연주 스타일
5. 사용 기타


1. 개요


'''"신참 밴드나 후배 뮤지션들이 한결같이 성공하려면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한테 물어 보는게 참 재미있다. 우선 그 '성공'의 의미부터 내게 설명해주길 바란다. 단순히 록스타가 되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면 음악 자체를 사랑해 평생 직업으로 하는 게 목표인가?"'''

'''Edward Lodewijk van Halen'''
미국의 기타리스트. 그는 '''태핑 기법을 선보였고, 다양한 음향학적 실험을 전개한 전설적인 하드락 기타리스트'''이다.
기타 연주, 혹은 더 나아가 헤비메탈, 하드락 계에서 에디 밴 헤일런의 존재감은 정말 엄청나다. 형제 성을 딴 밴드 밴 헤일런과 함께 등장해 새로운 일렉트릭 기타 주법, 이펙트 및 장비와 키보드 연주로 헤비메탈 작법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일렉트릭 기타뿐만 아니라 키보드 연주에도 두각을 드러낸 음악적 천재로 불린다.
그는 60세인 2015년까지도 화려한 연주로 노익장을 과시했으나, 젊은 시절부터 이어온 흡연으로 후두암에 걸려 결국 2020년에 세상을 떠났다.
2015년 지미 키멜 라이브. 이때까지만 해도 에디 밴 헤일런이 5년 뒤 사망할 줄은 아무도 몰랐으리라...

2. 그의 일대기



2.1. 유년기


195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지만, 출생 직후 네이메헌[2][3]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가족 전체가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가족이 음악인 집안[4]이라 어렸을 때부터 형 알렉스와 함께 피아노를 배웠지만, 딱딱하고 체계적인 클래시컬 교육에 진절머리를 내 부모님과 한창 대립했다고 한다.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 보다 귀로 듣고 카피하는 걸 선호했고 또 한 음 한 음 따라 치는 것보다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미해 즉흥연주 하는 걸 선호했다. 물론 정식 교육을 받은 음악인인 부모님 입장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록 유망주답게 끝까지 반항해 지금도 악보는 잘 읽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그의 이토록 자유로운 자기류 음악 공부는 나중에 기타 연주와 키보드 연주에도 상당한 유연성을 가져다 주었으니 말짱 도루묵은 아니었던 셈. 실제로 콩쿠르에도 몇 번 나가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피아노에는 점점 관심이 멀어지게 되고, 형은 기타를, 에디 본인은 드럼에 매진해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그러다가 형이 오히려 드럼에 대단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악기를 바꿔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음악인의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 한건 초등학교 4학년때 첫 밴드 브로큰 콤스를 결성할 때였다. 이 시기에 일화가 있는데, 리치 블랙모어에게 공연 후 사인을 받으러 갔다가 꺼지라고 욕설을 들었다고... 이때 부터 형 알렉스는 드럼, 에디는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해 점점 세월이 지나며 실력을 갈고 닦으며 여기저기 아마추어 무대를 진전하다 17세 때 밴 헤일런의 전신이 될 만한 밴드 제네시스[5]를 결성. 이때 잘 하지도 못 하는 메인 보컬을 싫증내던 에디는 보컬 오디션에는 탈락했지만 무대 장비는 계속 해서 빌려주던 데이빗 리 로스를 경제적인(…) 이유로 고용을 하고 원래 베이시스트였던 마크 스톤은 마이클 앤서니로 교체해 밴드명도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네시스와 겹치고 하니 새롭게 맘모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그러나 데이빗 리 로스가 맘모스라는 밴드명은 뭔가 촌스럽다고 생각했던지 그냥 밴 헤일런 형제의 밴 헤일런이라는 이름 자체가 산타나 같이 느낌이 좋다고 열심히 설득해 결국 밴드명이 밴 헤일런으로 바꾸게 된다.
70년대 중후반을 주변 고등학교에 전단지로 돌려가며 무대에 서고, 선셋 스트립에서 나름 잘 나가던 나이트 클럽 '가자리'에서 연주도 하게 된 밴 헤일런은, 결국에는 유명 스튜디오에서 첫 데모 테이프도 녹음 하게 되는 기회도 부여받고 여러 유명 클럽을 진전하며 인지도를 쌓게 된다. 그러다가 당시의 최고의 밴드였던 KISS진 시몬스에 관심을 얻어 두번째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게 되지만, 어쩐지 말도 안 듣고 하니 질렸는지[6] 진 시몬즈는 성공의 가망이 없다고 곧바로 손을 때게 된다. 그렇게 버려진 밴 헤일런을 발굴한건 오히려 워너브라더스 뮤직의 프로듀서 두명이었다. 비록 소규모 무대였지만 성공의 예감이 든 두 프로듀서는 곧바로 계약을 채결. 몇주간의 전문 스튜디오에서 앨범 작업을 통해 대망의 데뷔 앨범인 "Van Halen I"을 내놓는다.

2.2. 밴 헤일런


이후 활동 내역에 대해서는 밴 헤일런 항목 참조.
에디 밴 헤일런은 1집에 수록된 ''Eruption''#이라는 곡으로 록기타계에 투핸드 태핑 주법을 널리 퍼뜨렸으며, 또한 마이클 잭슨의 ''Beat It''의 기타솔로를 연주해서 주목받기도 했는데, 당시 공연 등으로 바빴던 에디가 그냥 마스터 테이프에 녹음해서 보내준 걸 그냥 썼다고 한다(…). [7] 참고로 솔로 부분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유명한 세션 기타리스트인 폴 잭슨 주니어와 TOTO의 현 기타리스트 스티브 루카서가 연주#.

3. 사망


한국 시각으로 2020년 10월 7일(현지 시각 10월 6일 오전), 아들 볼프강 밴 헤일런이 트위터로 에디 밴 헤일런이 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2019년 후두암 투병 사실이 밝혀졌을 당시, 투병 5년차였다고 한다.
'''한편, 에디 밴 헤일런은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골초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에디는 담배 이외에도 어렸을 적부터 담배, 마약을 즐겨해 잦은 투병 생활을 했다. 결국 이 담배 때문에라고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었다. 2000년대 초반에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았고 금연에 실패하여 다시 담배를 피워서, 2015년경에 후두암 판정을 받았고, 2020년 10월 6일 에디 밴 헤일런은 별이 되었다.
그는 흡연을 하는 모습이 아이콘이 될 정도로 흡연자의 상징이었지만, 되려 이로 인해 사망할 정도로 흡연이 왜 위험한지 알려주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그의 과거 동료였던 보컬 샘 헤이거와 마이클 앤서니가 그를 추모하는 영상을 올렸다.

4. 연주 스타일


에디 밴 헤일런의 기타 연주, 이펙트 및 톤은 당대 엄청난 파란을 몰고 왔다. 등장과 함께 락 기타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버린 이른바 'Game Changer' 중 한 사람으로, 유명 기타리스트 슬래시가 자서전에서 회고 하기를 마치 록 음악 업계가 한번에 뒤 바뀐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레드 제플린딥 퍼플을 카피하던 동네 기타리스트 청년들은 이제 밴 헤일런의 모든 것을 카피하려고 들었다고. 우선 에디 밴 헤일런의 전가의 보도 태핑 주법은 재즈 기타, 혹은 컨트리 기타에서 가끔 쓰이는 주법을 헤비메탈에 도입[8]해 대단히 유려한 3단음 클래시컬 멜로디를 들려주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트레몰로 피킹, 얼터네이트 피킹과 레가토 피킹을 섞어 새로운 방식의 속주를 보여주어 당대에 있던 기타리스트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트레몰로 바의 중요성도 다이브 봄 주법을 비롯해 여러 연주법을 통해 널리 알렸다. 리프 작곡에 있어서도 70년대의 블루스 락의 느낌이 나지 않고 독창적이고 참신한 시도를 끊임없이 해 80년대 헤비메탈의 기틀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을 세웠다. 잉베이 말름스틴이 등장하기 전까지 70년대와 80년대 사이 헤비메탈/하드록 의 음악적인 차이를 가장 많이 벌려놓은 장본인중 하나이다. 에디 밴 헤일런의 특징을 가장 잘 정리해놓은 곡이 바로 데뷔 앨범의 기타 솔로곡 Eruption[9]인데, 이 곡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 솔로에서 10위권을 벗어나는 일이 없을 정도.

탭핑시의 어택감에 맛깔남을 더해주는 MXR 페이져 90 (Phase Shifter : 일명 오렌지블럭)를 사용해, 많은 기타리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만의 특유한 스트라이프 모양의 스크립트 모드가 추가된 페이져 모델이 따로 있으며, 폴 길버트 등 많은 기타리스트들이 애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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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용 기타


여러 기타를 사용했지만, 가장 유명한 건 위 사진에서도 나오는 샤벨에서 넥과 바디를 구입하여 색칠하고 조립한 '프랑켄슈타인 스트랫'[10]이겠다.
이 프랑켄스트랫은 처음에는 흰색 바탕/검은색 스트라이프[11]였으나, 밴드와 앨범들이 히트하게 된후 그 유명세를 타 여기저기서 모조품들이 나오자 여기서 빨간색으로 또 칠하게 된다. 그리고 이 빨/흰/검 스트라이프는 '''에디의 상징이 된다.'''
프랑켄스트랫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이 글을 읽어볼 것.
1980년대 중반에는 크레이머#s-3의 엔도서가 되어 크레이머 기타를 사용하기도 했다. '''3색 스트라이프까지 칠해서.'''
1990년대에는 뮤직맨에서 만든 'EVH'[12][13]라는 시그니처 기타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피베이로 엔도서를 옮긴 후에도 볼프강이라는 이름의 비슷한 디자인의 기타와 피베이의 베스트셀러 기타앰프인 5150을 사용했고[14], 아예 "EVH"라고 자신만의 기타/기타 앰프/기타 액세서리 회사를 차린 후에도 볼프강 기타를 생산하여 판매중이다.
그리고 EVH 회사에서는 오리지널 프랑켄스트랫 스타일의 페인팅이 된 기타를 'EVH 스트라이프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판매중이다.

[1] 들고 있는 일렉트릭 기타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격인 기타 '프랑켄스트랫'에 크레이머 기타의 넥을 장착한 것이다.[2]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가톨릭이 주류인 곳이라서 에디 본인을 포함한 가족 대다수가 가톨릭교도였다. 그리고 성씨를 네덜란드어로 발음하면 '''판 할런'''이 된다.[3] 여담으로 모계쪽에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혼혈인이다.[4] 아버지가 클라리넷 연주자[5]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와는 관계가 없다.[6] 몇 번이나 고쳐 바꾼 이름 밴 헤일런을 'Daddy Longlegs'(키다리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바꾸라고 강요했으니 말을 들을리가 없었다.[7] 일설에는 전화 너머로 들려주는 걸 녹음했단 말도 있는데 좀 무리일 듯.[8] 그러나 에디 밴 헤일런이 태핑 주법을 개발한 건 아니다. 본래 재즈 기타에서 사용되고 있던 주법이기도 했고, 록 기타에서도 처음이 아니다. 이미 60년대에 여러 록 기타리스트들이 선보인바 있었고, 심지어는 70년대 초반에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네시스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해킷이 71년도에 연주한 바 있고 역시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Yes의 스티브 하우 같은 기타리스트도 선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 전에 이미 클래식의 바이올리니스트들도 즐겨하던 주법이다. 딱히 새로울게 없었다는 이야기.[9] 태핑 자체는 킹크스의 원곡을 커버한 첫 싱글인 ''You Really Got Me''의 기타솔로에도 태핑이 일부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10] 흔히 줄여서 '프랑켄스트랫'이라고 많이 부른다. 그리고 이 기타는 '''슈퍼스트랫'''의 시초가 된다.[11] 이런 식으로 페인팅하려면 검은색 바디에다가 줄무늬를 하고 싶은 부분에 마스킹테이프를 붙인 후 흰색으로 칠해야 한다.[12] 이후 뮤직맨의 간판 일렉트릭 기타가 되는 '''AXIS'''의 베이스 모델이 된다.[13] 여담으로 에디 밴 헤일런의 줄임말이며 예명이다.[14] 역시 이후 피베이를 떠난 뒤 단종된 후 6505의 베이스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