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키츠
'''빛나는 별이여, 내가 그대처럼 한결같을 수만 있다면—'''
'''밤하늘 높은 곳에 걸린 채 외롭지 않고,'''
'''영원한 눈꺼풀이 뜨인 채 내려다 볼 수 있으니'''
- 존 키츠 <빛나는 별이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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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도니스는 죽었노라; 미래가 감히'''
'''과거를 잊으라고 할 때까지, 그의 운명과 명성은'''
'''메아리와 빛이 되어 영원으로 향하리'''
> 中
'''"우리의 언어로 쓰인 시 중에 가장 고요하게 결점이 없는 시."'''
- 평론가 M. R. 리들리
만 25살 짧은 일생과 단 4년 동안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2세대 낭만주의 시인 3명 중 한 명[2] 이자 현대 문학 시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인 중 한 명이다.'''"영어라는 언어 속에서 최고의 형태에 도달한 작품들을 모아놓았다."'''
- 평론가 헬렌 벤들러
2. 일생
2.1. 유년 시절
1795년 10월 31일, 런던 무어게이트 역 부근에서 아버지 토마스 제닝스 키츠(Thomas Jennings Keats), 어머니 프란시스 제닝스 키츠(Frances Jennings Keats)의 키 작은 아들[3] 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마부일을 하였으며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는 운수업체 사장의 딸이었다. 당시의 운수업체는 여러 대의 마차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운수업체를 물려받은 키츠의 부모는 비록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는 않는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8살 때 아버지는 낙마로 인해 떨어져 죽었고, 키츠가 14살 때는 어머니마저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일찌감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년의 감수성 또한 대단히 예민했다.
어머니가 죽은 후, 4남매의 양육권을 가지고 있던 할머니가 아이들 후견인으로 리처드 에비와 존 샌델을 지명한다. 4남매에게 남겨진 유산은 지금의 금액으로 환산해 보아도 꽤 큰 액수였지만 전혀 이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키츠는 자신의 후견인으로 지목된 리처드 에비의 권유에 따라 기존에 다니고 있었던 클라크 학교를 떠나고 외과의사 토마스 해먼드의 제자가 되어 의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1813년엔 할머니마저도 연로하여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되어 키츠는 동생들의 생계와 교육을 책임져야 하게 된다.
2.2. 청년 시절
1815년 가이스 병원[4] 으로 옮겨 의학 공부를 계속했고, 이듬해 의사의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키츠는 당시로서는 평범한 직업이었던 의사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업을 계속 유지하지 않았다. 키츠는 학창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시의 세계에 다시 한번 파고들었다.
그가 시인으로서 삶을 살기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1816년 채프먼이 번역한 호메로스의 시를 읽고 감명받아 <채프먼이 번역한 호메로스를 처음 읽고(On First Looking into Chapman's Homer)>라는 시를 쓰게 된다.
1817년 5월 키츠는 첫 시집 <시집(Poems)>을 펴낸다. 첫 시집은 크게 주목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마니아층 사이에서는 반응이 나쁘지 않아 출판업자 존 테일러와 제임스 헤시에게 다음 시집의 출판을 약속 받았다.'''시인들이 아폴론을 모신 서방의 섬들도'''
'''두루 돌아보고 거기에 노닐었건만'''
'''소문으로 익히 들으면서도 여태껏'''
'''깊은 이마의 호메로스가 다스리는 나라'''
'''그 티 없는 맑음을 숨쉬지 못했더니'''
'''이제 채프먼의 우렁찬 소리로서'''
- 존 키츠 <채프먼이 번역한 호메로스를 처음 읽고> 中
그렇게 하여 탄생한 시가 장시 <엔디미온(Endymion)>이다. 키츠가 그의 대부분의 시에서 의도한 핵심적인 원리는 고뇌와 고통의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한 ‘미의 추구’인데, 이러한 주제가 가장 환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시가 바로 <엔디미온>이다. 젊은 목동 엔디미온이 달의 여신 셀레네[5] 와 사랑했다는 그리스 신화를 원형으로 한 시이다.
이 구절이 바로 키츠가 추구하고자 하는 시의 핵심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 시가 혹독하게 비판 받게 된다. 지나치게 탐미적이라는 것. 그러나 키츠는 좌절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1819년에는 창작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성 아그네스의 전야(The Eve of St. Agnes)> <그리스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Ode on a Grecian Urn)> <우울에 대한 송가(Ode on Melancholy)> 등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명시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졌음으로 말미암아 시련을 오히려 에너지로 삼은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격.'''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다'''
- 존 키츠 <엔디미온> 中
2.3. 유일한 사랑, 패니 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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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니 브론(Fanny Brawne, 1800~1865)
한편, 그렇게 열심히 다작 활동을 하던 키츠는 23살에 이웃집 여자 '''패니 브론'''을 만난다. 브론은 꽤나 당돌하고 발랄하며 자유분방한 여자였는데 감성적이고 때론 수줍음도 타던 키츠와는 완전 상반된 스타일의 소유자였던 것. 브론은 키츠를 처음 보자마자 악수를 청했는데 브론의 당돌한 매력을 보고 키츠는 그녀에게 홀딱 빠지게 된다.[6] 브론도 처음에는 키 작은 키츠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키츠 특유의 문학적 감수성과 의대 생활로 다져놓은 풍부한 지식에 서서히 빠지게 되어 이 둘은 결국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이후 브론은 키츠의 정신적 지주이자 문학적 영감을 불어넣어 준 뮤즈로 함께했다. 키츠의 시 중에서 브론을 향한 시들도 꽤 있으며 대표적으로는 <빛나는 별이여(Bright Star)>[7] 가 있다. 이후 만난지 1년이 되는 해, 1819년에 키츠는 그녀에게 반지를 건네며 프로포즈를 하고 정식으로 약혼을 하게 된다.
2.4. 건강 악화와 죽음
1820년 초 키츠는 우연찮게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하게 된다. 그는 입에서 나온 자신의 피 색깔을 보고 자신도 폐결핵에 걸렸음을 금방 알아차렸다.[8]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친구인 찰스 아미티지 브라운(Charles Armitage Brown)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 폐결핵은 유럽을 휩쓸던 전염병이었으며 키츠의 어머니는 물론, 동생 토마스도 마찬가지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츠는 더 많은 시들을 써내려갔다. 병마와 싸우던 이 시기에 쓰인 시 중에 대표적으로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송가(Ode to a Nightingale)>가 있다.'''“I know the colour of that blood! It is arterial blood. I cannot be deceived in that colour. That drop of blood is my death warrant. I must die.”'''
“난 저 피의 색깔을 알아! 이건 동맥혈이야. 내가 저 색깔을 모를 리가 없어. 저 피 한 방울이 나의 사형 집행 영장이야. 난 분명히 죽을 거라고.”
키츠의 병세가 악화되자 의사의 조언에 따라 요양 차원으로 교황령[9] 로마로 떠나기로 했다. 날씨도 항상 우중충하고 소음들로 가득 찼던 런던과는 달리 당시 로마는 언제나 기후도 온화하고 평화롭기도 해 북유럽 지역의 사람들이 요양지로 많이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로 떠날 때 약혼녀 브론이 아닌 그의 절친 조세프 세번(Joseph Severn, 1793~1879)과 함께 떠났다. 브론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키츠는 자신의 폐결핵이 브론에게까지 전염될까봐 말렸다고 한다. 대신 키츠는 브론에게 “당신 없이도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선물을 하나 줘.”라고 부탁했다. 로마로 출발하는 배를 타던 날, 브론은 키츠에게 타원형 홍옥수[10] 를 주었다.'''어둠 속에서 나는 듣노라, 아주 여러 번'''
'''포근한 죽음에 절반쯤 빠져 있었느니'''
'''아름다운 가락으로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부르네,'''
'''내 고요한 숨결을 공기 중에 흩뿌려달라고'''
'''지금은 죽기에 딱 알맞은 시간'''
'''아, 고통도 없는 이 한밤중의 숨 멎음이란'''
- 존 키츠 <나이팅게일에게 부치는 송가> 中
로마에서 친구 세번의 헌신적인 간호 아래에 요양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키츠는 계속 시를 써내려갔다. 그는 이미 양쪽 폐 기관에서 심각한 내출혈 증상으로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 브론과 결혼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1821년 2월 23일, 만 26살도 채우지 못하고 그는 브론이 준 작은 홍옥수를 쥔 채 결국 숨을 거두었다. 병으로 죽어가던 키츠 곁에는 그를 간호하던 친구 세번이 유일했다.
2.5. 죽음 이후
키츠의 사망 소식은 브론에게 한 달이나 지나서야 전해졌는데, 브론은 한동안 슬픔에 잠기다가 12년이 지난 1833년이 되어서야 다른 남성과 결혼하였고, 세 명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키츠가 그녀에게 준 반지는 죽을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했다고 한다.
세번은 자신의 친구인 키츠의 작품을 알리는 데에 힘을 썼고 그 덕분에 키츠는 재평가되어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그의 영향으로 세번은 '위대한 시인의 마지막까지 함께한 의로운 친구'라고 칭송을 받으며 장수하다가 키츠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2.6.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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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로마 포르타 산 파올로 근교에 위치한 비(非)카톨릭 공동묘지(Cimitero Acattolico)에 묻혔다.[11] 참고로 키츠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묘에는 영국의 젊은 시인의 유해가 묻혀 있다.
죽음의 자리에서 고국 사람들의 무심함에 극도로 고뇌하던 그는 묘비에 이런 말이 새겨지기를 원했다.
'''‘여기에 물로 자신의 이름을 쓴 사람이 누워있노라.’'''
3. 영향
그의 작품들은 훗날 많은 시인들과 작가들의 귀감이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영국의 유명 근현대 시인인 알프레드 테니슨,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이자 시인인 윌프레드 오언,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에게 문학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참고로 보르헤스는 키츠의 작품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적 경험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을 정도.
4. 편지
그의 작품들 못지않게 그가 생전에 쓴 편지들도 문학계에선 꽤나 유명하다. 시인답게 아름답고 수려한 문장들로 편지들을 썼는데 이는 존 키츠의 사적인 일상들과 솔직한 심정들 을 엿볼 수가 있어 존 키츠의 시를 이해하는 데에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존 키츠를 주제로 하는 웹페이지에서 그가 쓴 편지들을 읽을 수가 있다.
5. 대표작
- 빛나는 별이여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
- 엔디미온 (Endymion: A Poetic Romance)
- 성 아그네스의 전야 (The Eve of St. Agnes)
- 이사벨라 (Isabella)
- 무정한 미인 (La Belle Dame Sans Merci)
- 라미아 (Lamia)
- 그리스의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 (Ode on a Grecian Urn)
- 우울에 대한 송가 (Ode on Melancholy)
- 나이팅게일에게 부치는 송가 (Ode to a Nightingale)
- 가을에 (To Autum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