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
中華民國立法委員選舉
중화민국의 선거.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 대응하는 국회의원 총선이다.
1948년에 중국 전역에서 첫 선거가 시행되었고 760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이 선거는 1947년 국민대회 선거와 함께 전국에 걸쳐 벌어진 총선거이다.[1] 다만 처음이자 마지막 총선이었다고는 해도 제1야당인 공산당은 불법정당으로 지정된데다가 국공내전 중이라서 당연히 선거에 불참했고 이외에도 민사당과 중국청년당을 제외한 대다수의 야당이 불참했고, 국민당은 국공내전 재개로 인한 경제파탄으로 민심을 잃어가고 있었을 때라서 투표율이 대략 30% 언저리 내외로 추정된다. 즉, 민주적인 환경에서 치러진 선거는 아니었다는 말이다.[2]
당시 입법위원의 임기가 3년이었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은 3년에 한번씩 선거가 치러져야 되지만 1949년 국부천대 이후에 장제스가 본토수복 이전까지 선거를 연기하며 입법원 의원들을 종신직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다가 처음으로 보궐선거가 치러진것도 1969년이었고, 1983년 선거때까지는 중국 국민당과 중국 민주사회당등의 위성야당, 무소속 후보만 출마가 가능했으며 일부 선거구(중화민국 자유지구)에서만 선출되었다. 그러다 장징궈 말기때인 1986년부터 야당 후보의 출마가 시작되었고, 1989년 선거때부터는 야당 후보들의 출마가 합법화 되었고 1991년의 개헌이 이뤄지면서 1992년 선거때부터 총선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1998년에 타이완 성의회 선거가 폐지되고 2000년에 국민대회 기능의 일부를 넘겨받음으로써 권한도 더욱 커졌고, 의원수도 224명(1998), 225명(2001, 2005)으로 늘어났다. 2005년의 개헌에 따라 국민대회의 기능이 입법원으로 이전되면서 임기를 3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고 선거제도도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했으며 의원수도 225명에서 113명으로 축소했다.
상원 격인 국민대회도 있었고 직선제 전환 이후에도 입법원과 별도로 선거가 치러졌지만 2000년에 기능이 축소되면서 선거가 치러지지 않았고 2005년에 마지막 선거가 치러진 후에 개헌을 하여 입법원에 기능을 넘겨주고 사실상 폐지되었다.
유권자는 중화민국 자유지구(타이완, 펑후, 진먼, 마쭈) 주민 중 20세 이상인 자로 규정된다. 입법위원 정수 113명 중 73명은 중화민국 자유지구의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소선거구제 의원들이며, 34석은 재외국민(화교)과 중화민국 자유지구 주민에 의해 선출된 비례대표들이다. 나머지 6석은 대만 원주민으로 등록된 유권자들끼리만 선거를 치러 당선된 원주민 대표로 구성된다. 기본적으로 소선거구제이지만 원주민 의원은 중선거구제로 평지원주민 유권자 사이에서 다득표 순으로 3명, 산지원주민 유권자 사이에서 3명이 선출된다.
비례대표 중 절반 이상은 여성 의원이 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한국에서 홀수번째에 반드시 여성을 공천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비례순번은 정당이 성별 상관 없이 공천할 수 있으되 당선시에 남성 절반이 채워지면 앞순번이라 하더라도 남성은 낙선하며, 뒷순번에 있는 여성이 당선된다. 제10대 선거 민진당 결과(영어, 대만 선관위) 이 선거에서, 민진당은 비례대표로 13명 당선되었으나, 남성 비율을 초과한 13, 14, 15번이 낙선하고, 대신 여성인 16번이 당선된 것을 볼 수 있다.
총 113석, 지역구 73석은 대만의 인구(2018년 기준, 2360만 명)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적은데, 2008년 의원정수가 절반으로 감축되었기 때문이다. 인구수가 약 2배를 살짝 넘는 대한민국의 국회가 총 300석, 지역구 253석인 것과 대비된다. 한편 선거구간 인구 비례가 2:1 안쪽이 되어야 하는 한국과 달리, 대만은 헌법에 따라 모든 현과 직할시에 최소 1석 이상을 배분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펑후, 진먼, 롄장, 타이둥 등의 인구가 적은 현들도 선거구는 1석씩 배정받는다. 제10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 기준, 인구 1.3만의 롄장과 인구 45만의 이란이 똑같이 현 전체가 단일 선거구로 1석씩 배정되어 있다.
1. 개요
중화민국의 선거.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 대응하는 국회의원 총선이다.
2. 역사
1948년에 중국 전역에서 첫 선거가 시행되었고 760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이 선거는 1947년 국민대회 선거와 함께 전국에 걸쳐 벌어진 총선거이다.[1] 다만 처음이자 마지막 총선이었다고는 해도 제1야당인 공산당은 불법정당으로 지정된데다가 국공내전 중이라서 당연히 선거에 불참했고 이외에도 민사당과 중국청년당을 제외한 대다수의 야당이 불참했고, 국민당은 국공내전 재개로 인한 경제파탄으로 민심을 잃어가고 있었을 때라서 투표율이 대략 30% 언저리 내외로 추정된다. 즉, 민주적인 환경에서 치러진 선거는 아니었다는 말이다.[2]
당시 입법위원의 임기가 3년이었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은 3년에 한번씩 선거가 치러져야 되지만 1949년 국부천대 이후에 장제스가 본토수복 이전까지 선거를 연기하며 입법원 의원들을 종신직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다가 처음으로 보궐선거가 치러진것도 1969년이었고, 1983년 선거때까지는 중국 국민당과 중국 민주사회당등의 위성야당, 무소속 후보만 출마가 가능했으며 일부 선거구(중화민국 자유지구)에서만 선출되었다. 그러다 장징궈 말기때인 1986년부터 야당 후보의 출마가 시작되었고, 1989년 선거때부터는 야당 후보들의 출마가 합법화 되었고 1991년의 개헌이 이뤄지면서 1992년 선거때부터 총선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1998년에 타이완 성의회 선거가 폐지되고 2000년에 국민대회 기능의 일부를 넘겨받음으로써 권한도 더욱 커졌고, 의원수도 224명(1998), 225명(2001, 2005)으로 늘어났다. 2005년의 개헌에 따라 국민대회의 기능이 입법원으로 이전되면서 임기를 3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고 선거제도도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했으며 의원수도 225명에서 113명으로 축소했다.
상원 격인 국민대회도 있었고 직선제 전환 이후에도 입법원과 별도로 선거가 치러졌지만 2000년에 기능이 축소되면서 선거가 치러지지 않았고 2005년에 마지막 선거가 치러진 후에 개헌을 하여 입법원에 기능을 넘겨주고 사실상 폐지되었다.
3. 상세
유권자는 중화민국 자유지구(타이완, 펑후, 진먼, 마쭈) 주민 중 20세 이상인 자로 규정된다. 입법위원 정수 113명 중 73명은 중화민국 자유지구의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소선거구제 의원들이며, 34석은 재외국민(화교)과 중화민국 자유지구 주민에 의해 선출된 비례대표들이다. 나머지 6석은 대만 원주민으로 등록된 유권자들끼리만 선거를 치러 당선된 원주민 대표로 구성된다. 기본적으로 소선거구제이지만 원주민 의원은 중선거구제로 평지원주민 유권자 사이에서 다득표 순으로 3명, 산지원주민 유권자 사이에서 3명이 선출된다.
비례대표 중 절반 이상은 여성 의원이 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한국에서 홀수번째에 반드시 여성을 공천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비례순번은 정당이 성별 상관 없이 공천할 수 있으되 당선시에 남성 절반이 채워지면 앞순번이라 하더라도 남성은 낙선하며, 뒷순번에 있는 여성이 당선된다. 제10대 선거 민진당 결과(영어, 대만 선관위) 이 선거에서, 민진당은 비례대표로 13명 당선되었으나, 남성 비율을 초과한 13, 14, 15번이 낙선하고, 대신 여성인 16번이 당선된 것을 볼 수 있다.
총 113석, 지역구 73석은 대만의 인구(2018년 기준, 2360만 명)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적은데, 2008년 의원정수가 절반으로 감축되었기 때문이다. 인구수가 약 2배를 살짝 넘는 대한민국의 국회가 총 300석, 지역구 253석인 것과 대비된다. 한편 선거구간 인구 비례가 2:1 안쪽이 되어야 하는 한국과 달리, 대만은 헌법에 따라 모든 현과 직할시에 최소 1석 이상을 배분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펑후, 진먼, 롄장, 타이둥 등의 인구가 적은 현들도 선거구는 1석씩 배정받는다. 제10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 기준, 인구 1.3만의 롄장과 인구 45만의 이란이 똑같이 현 전체가 단일 선거구로 1석씩 배정되어 있다.
4. 선거 이력
5. 관련 문서
[1] 전인대 의원도 선거로 선출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방 인민대표대회 대표자(=공산당 당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선출되고 일반 인민들의 직접선거로 뽑히지는 않는다.[2] 중국에서 민주적인 환경에서 치러진 총선거는 1913년도에 있었지만 이 선거는 보통선거가 아닌 제한선거라 소수의 부유층과 중산층만이 참여할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