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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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모습)

대만 원주민 음식 소개
1. 개요
2. 대만인과 대만 원주민
3. 현황
4. 명칭
5. 역사
5.1. 고대, 중세
5.2. 근세
5.6. 국민당 독재 시기
5.7. 민주화 이후
6. 특성
7. 정치 성향
8. 유명한 대만 원주민
9. 기타
10. 관련 문서


1. 개요


臺灣原住民 / Taiwanese aborigines
근현대에 한족들이 넘어오기 전부터 대만 섬에 거주해 온 오스트로네시아족 원주민으로 '대만 원주민'(臺灣原住民)은 '한족'인 본성인과 구별되며, 모두 대만 제어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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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지도는 현재 대만 행정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대만 원주민 민족의 분포 지도로 이 지도는 공식적인 대만 원주민인 고산족(高山族)의 분포만 나타내고 있다. 이미 한족에 동화되어 공식적인 원주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원주민 민족들인 평포족(平埔族)의 분포는 나타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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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포족까지 나타낸 대만 원주민의 분포 지도.

2. 대만인과 대만 원주민


'''대만 원주민은 대만인이지만 대만인이 대만 원주민은 아니다.''' 흔히 대만 원주민과 대만인을, "외성인=한족"으로 "본성인=대만인=대만 원주민"으로 혼동하는 것이 꽤 많이 보이는데, 그게 아니다. 본성인이나 외성인이나 중국대륙에서 기원한 한족이다. 그래서 이걸 혼동하면 대만을 '소수의 한족이 다수의 대만인(대만 원주민)을 지배하는 사회' 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다보니 일부 외국인들은 '어? 한족(외성인 또는 중화인민공화국)들이 대만을 점령하고(또는 노리고) 있네? 대만 민족은 독립해야 해.'란 착각으로 대만 독립을 지지하기도 한다.
본성인 기준을 넓게 잡으면 원주민들도 포함된다. 이 경우에는 본성인의 대다수를 한족계 본성인이라 하여 따로 구분한다.[1]
'대만 원주민'(臺灣原住民, Taiwanese Aborigines)은 '한족'인 본성인과 구별되며, 이들은 본래 대만에서 '기원'한 민족으로 한족이 아니다. 이들의 언어인 대만 제어도 아예 중국티베트어족의 언어가 아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한다. 즉, 마인어, 필리핀어 등과 같은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얘기. 한족계 본성인들의 모어인 대만어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한 민남어 계열이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의 원주민이 당연히 그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공용어인 표준중국어나 사용 인구가 많은 대만어도 할 줄 안다.
원주민 중 상당수는 한족과 동화되었는데 그들의 후손들은 생활 습관이나 외모로 한족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 대만에서 '원주민'으로 간주되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남방계인 대만 원주민들도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걸로 추측되고 본성인들 대다수도 중국 푸젠 성 일대에서 기원했으며 유전적으로 보면 한족과 남방계인 월인의 혼혈이기에 외형적으로 차이가 크게 나지는 않는다. 사실 춘추전국시대때 푸젠성 지역은 월나라의 영역이었는데 월나라는 중원의 문화를 일정 부분 받아들인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언어부터가 달랐고 종족 구성원도 남방계로 이루어졌던 걸로 보이기에 정체성 자체가 달랐고, 진시황에 의해서 중국에 정복된 적이 있었지만 얼마안가 다시 민월-동월로 독립하였다. 이 지역이 온전히 중국의 영역에 편입된 것은 한무제때 와서였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 시절 일제는 이들을 고산족(高山族)이라고 불렀다. 고산족은 높은 산에 사는 민족이란 뜻으로서 외지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피해 높은 산으로 올라가 정착한 것에 기인한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대만 원주민들을 고산족이라고 통칭하고 있다. 다만 이 용법은 고산족의 범위를 넓게 잡았을 때 얘기다. 좁은 의미로 쓸 때는 한족과 동화가 거의 되지 않은 원주민만 고산족이라고 부르고, 한족과 동화가 많이 이뤄진 원주민은 평포족(平埔族)이라고 부르며 대만에서는 위에 언급한 이유로 원주민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크게 평포족과 고산족으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이 분류가 명확히 정해진 것은 아니고 시대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가령 대만 정부가 원주민으로 인정한 타오족이나 카발란족은 과거에 평포족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3.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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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기준으로 본 종족별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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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친근하게 그려진 종족별 캐릭터)
대만 정부에서 공인한 민족은 16개이다. 중국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 56개 민족에 포함시킨다.
  • 아미족(阿美, Amis) 183,799명
  • 파이완족(排灣, Paiwan) 88,323명
  • 아타얄족(泰雅, Atayal) 80,061명
  • 부눈족(布農, Bunun) 51,447명
  • 트루쿠족(太魯閣, Truku) 25,857명 - 타로코(Taroko)족이라고도 한다.
  • 루카이족(魯凱, Rukai) 11,911명
  • 푸유마족(卑南, Puyuma) 11,850명
  • 초우족(鄒, Tsou) 6,733명
  • 시디크족(賽德克, Seediq) 6,606명
  • 사이시얏족(賽夏, Saisiyat) 5,900명
  • 따오(達悟, Tao) 3,748명 - 야미(雅美, Yami)족이라고도 하며, 본토와 떨어진 난여(蘭嶼:란위섬)에 거주한다.
  • 카발란족(噶瑪蘭, Kavalan) 1,218명
  • 타오족(邵, Thao)족 693명
  • 사키자야족(撒奇萊雅, Sakizaya) 442명
  • 흘라알루아족(拉阿魯哇, Hla'alua) 274명 - 사아로아(沙阿魯阿, Saaroa) 족이라고도 한다.
  • 카나카나부족(卡那卡那富, Kanakanavu) 24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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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복장 기준 분류)
처음에는 이들은 9개 민족으로 구분했으나 21세기 들어 타오(邵)족, 카발란(噶瑪蘭)족, 트루쿠(太魯閣)족, 사키자야(撒奇萊雅)족, 시디크(賽德克)족이 추가로 인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카나카나부(卡那卡那富)족, 흘라알루아(拉阿魯哇)족이 인정되었다. 중앙정부의 인정은 받지 못했으나 지방정부의 인정을 받은 원주민 민족들도 있으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의 공인을 받지 못한 미식별 민족까지 합하면 40여개가 넘는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주민 대부분은 대만에 거주하여 2006년 기준 468,602명으로 전 인구의 2%를 차지했으며, 2013년 기준으로 533,139명을 기록했다. 대만의 인구증가율이 연 0.4% 내외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고 출산율도 1명대 초반 이내로 매우 낮다는 걸 생각하면 원주민들의 인구 증가율은 상당한 편이다. 2014년 기준 원주민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타이둥(35.4%)·화롄(27.4%)·핑둥(6.9%)의 세 현이었다. 이 세 현은 동시에 원주민 인구가 가장 많은 세 현이기도 했다. 한편 이들은 과거에는 대만 전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한족의 도래를 거쳐 평지에 있었던 원주민은 한족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거나 산지로 이주했고, 현재는 산지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와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들도 꽤 있다.
일본 통치기에는 원주민 거주구역을 단순히 오랑캐의 땅이라는 "번지(蕃地)"로 불렀으나(가령 대북주 소오군 번지(台北州 蘇澳郡 蕃地)), 중국 국민당이 들어오면서 이들을 전부 향(鄕)으로 개편하고 행정구역 이름을 붙여줬다. 이때 제정된 이름 중에서는 원주민들의 명칭을 존중하지 않고 유교에서 유래하거나 국민당을 선전하는 명칭이 많았는데(부흥, 삼민, 신의, 화평 등등...) 민주화 이후 일부는 원주민들이 부르던 명칭으로 개칭되는 사례도 있다. 이때 만들어진 향들을 산지향(山地鄕)이라 했는데, 현재도 이 지역은 "산지원주민지구"로 지정되어 외부인의 활동에 제약이 있으며, 이 지역의 지자체장은 원주민만이 될 수 있다. 이 지역들 중에서는 직할시가 되어 구로 바뀐 향도 있는데, 본래 대만에서 직할시의 구는 지방자치단체가 아니어서 구청장을 선거로 뽑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임명하지만 이 지역은 예외적으로 지자체로 인정받아 구청장을 선거로 선출하고 구의회도 있다. 이들 산지원주민지구 지역을 모두 합치면 대만 면적의 약 40%, 인구의 약 1% 정도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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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행정원이 설정한 산지원주민지구(녹색), 평지원주민지구(갈색). 평지원주민지구는 산지원주민지구와는 달리 비원주민도 지자체장이 될 수 있다.
중화민국 입법원 입법위원 113명 중 6명은 원주민 유권자들끼리의 투표로 선출된 원주민 대표에 할당되어 있다. 물론 출마자도 원주민이어야 한다. 평지원주민선거구에 3명, 산지원주민선거구에 3명이 할당되어 있으며, 중선거구제를 채택했다. 원주민은 지역구 국회의원에 대한 선거권/피선거권이 없이 원주민 대표에 대한 선거권/피선거권만 존재하는데, 도시 거주 원주민의 권익을 제대로 대변할 수 없어 이에 대한 개혁 요구도 꽤 있다. 뉴질랜드마오리족처럼 지역구 투표와 원주민 선거구 투표 모두 가능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관련 기사
중국에도 소수 거주하는데, 2000년의 경우 4,461명의 대만 원주민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중국의 56개 민족 중 하나로 인정되어 전국인민대표대회에도 할당 의석이 있는 등 그 나름대로의 대우를 받고 있다. 중국의 대만 원주민은 대만일치시기 등에 중국 대륙으로 이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광기에 휩쓸려 중국에 반감을 가지고 본토를 탈출해 대만으로 떠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4. 명칭


청대와 일본 통치기엔 생번(生蕃)이라 불리면서 차별받았다. 생번이란 멸칭이며 동화된 대만 원주민은 숙번(熟蕃)이라 불렀다. 뜻은 생번은 "날것 그대로의 야만인"(...), 숙번은 "(벼가 익듯이)앞선 문명을 접해 어느정도 '문명이 익은', 즉 개화된 야만인" 정도.[2] 일단 글자 그대로의 뜻은 그렇지만, 熟은 (나/우리가) "잘 아는, 낯익은", 生은 "잘 모르는, 낯선"이라는 뜻도 있으니,[3] 이렇게 해석하면 "낯선 야만인", "낯익은 야만인" 정도. 염상섭만세전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요보라고 말하면서 "젊은 자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라는 문구가 있다. 이 정도의 멸칭이다.
우서 사건이 터지고 난 1935년부터는 고사족(高砂族), 동화된 원주민을 평포족(平埔族)이라 불렀다. 고사(高砂)는 일본어로 타카사고라 읽으며, 전국시대나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대만 지역을 이르던 말이었다.
국민당 통치기의 대만에서는 산지족(山地族), 산지동포라 불렀다. 그러다가 1994년 대만 정부가 정식 명칭을 (대만) 원주민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아직도 이전에 쓰던 명칭인 고산족이라고 부른다.

5. 역사



5.1. 고대,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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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사진 자료
이들은 대략 8천 년 전부터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 것으로 생각된다. 한족들이 중국 남부지역으로 남하하기 이전에 상당수 오스트로네시아계 부족들이 중국 남부에 살고 있었기에 이들과의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백월의 일파로 여겨졌다. 사실 이라는 말이 중국 남부에 살던 종족들을 통칭하던 용어지만. 하지만 진나라 때 이들 지역이 중국에 편입되고 한무제 이후 확고하게 중국의 영역이 되었고 이후로도 남북조 시대에 한족이 남하하여 현지인에 융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족에 동화되었기에 고고학적인 발굴이나 언어학적인 연구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어쨌든 상당수 부족이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미크로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로 진출하기도 했다[4]. 삼국시대였던 서기 230년경에 오나라 황제 손권의 명에 의하여 대만에 파견된 관리에게 1천 명이 포획당해 건업으로 끌려갔던 바 있다.

5.2. 근세


원주민들은 근처 중국 대륙에서 볼수 있을 법한 고도화된 국가를 세우지는 못했지만, 이 때에도 타이완 섬 중서부에서는 원주민들의 연합 왕국인 다두 왕국이 성립하였다.
15세기에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 서양 세력에게도 원주민들의 존재가 알려졌다. 타이완 섬을 처음으로 찾은 서양인들인 포르투갈 항해사들은 이 섬의 원주민들과 교역을 했다.
한편 1624년에는 네덜란드 제국이 펑후 열도와 타이난에 당도하였다. 이들은 타이난에 질란디아 요새를 쌓고, 펑후에는 포대를 구축해 거점으로 삼고자 했는데 펑후의 포대에 대해서는 명나라가 자국 영토라고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오래 있지 못하고 밀려났다. 원주민들은 이들에 호의적이지 않아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원주민들보다 우수한 무기를 지닌 네덜란드(동인도 회사)를 이길 수는 없었고, 이내 타이난, 가오슝, 핑둥, 타이둥 일대를 세력권 안에 넣는다. 네덜란드인들은 타이완 섬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수출하여 이득을 얻었는데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명나라 복건 지역에서 한족 노동력을 수입했으며, 네덜란드인들은 일부 한족들을 하급 관리로 기용해 원주민을 통제하거나 세금을 거두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한편 네덜란드로부터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회 등을 세우고 이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5.3. 정씨 왕국


정성공은 1661년에 청나라의 군대를 피해 타이완 섬에 들어와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냈다. 네덜란드의 지배 하에 있었던 원주민들은 대체로 정성공의 도래에 맞춰 봉기하여 네덜란드 세력을 공격했다. 정성공은 타이완 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는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지 못한 대만 원주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고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렸지만, 세력권 안에 있는 원주민들을 착취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성공은 정씨 왕국을 세우면서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도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되었다.


5.4. 대만청치시기


정씨 왕국은 1683년에 강희제에 의해 멸망했고, 원주민들의 국가였던 다두 왕국도 1732년에 옹정제의 군사 작전으로 인해 멸망했다. 이로서 타이완 섬은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족의 대만 이주가 본격화된다. 청 정부는 타이완 섬이 또 다시 다른 세력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족들의 타이완 섬 이주 금지 정책을 펼쳤지만, 전근대의 모자란 행정력 때문에 한족들의 불법 이주가 판을 쳤다.[5] 이주한 한족들은 대체로 타이난 인근에 정착하여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점차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거주 범위도 타이완 섬 평야지대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청나라는 한족과 원주민(당시에는 날것 그대로의 야만인이라는 멸시 의식에서 생번(生蕃)이라 하였다)의 경계인 '번계(蕃界)'를 정해 서로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금했지만, 한족의 이주가 계속되면서 한족들이 점차 번계를 넘어 원주민 영역에서 농사를 짓고, 시간이 흘러 번계가 재조정되어 원주민 영역이 점차 축소되어 갔다. 또 원주민 영역에서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은 한족들도 있었지만 원주민 토지를 강탈한 한족들도 있었다.
이렇게 한족의 생활영역과 원주민의 생활영역이 중첩되기 시작하고,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타이완 섬 한족 주민의 남초현상이 심각했기에, 한족 남성들이 주로 평야지대의 대만 원주민 여성들과 혼인하여 대만 원주민의 한족 동화가 촉진되었다.
청나라는 대만 섬을 영토로 삼고 통치했지만 중앙에서 너무나 먼 땅이라 그런지 행정력은 그리 강하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원주민들과 대륙에서 밀려들어와 대만에 정착하고자 하는 한족의 갈등이 공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로 끝없이 벌어졌다. 원주민들은 밀려드는 한족에 맞서 자신의 영역을 내주지 않기 위해 자체적인 무력으로 한족 마을을 습격했고, 반대로 평야에 정착한 한족들도 마을마다 자경단 비슷한 것을 만들어 원주민들의 습격에 대응하거나 원주민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나 한족 이민 인구는 원주민 인구를 쉽게 압도했고, 따라서 큰 틀에서 보면 이 시기 원주민들은 점차 대만의 한족과 동화되거나 산으로 밀려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인상적인 사건으로 1867년 로버호 사건으로 인해 대만으로 원정온 미해병대를 대만 원주민인 파이완족이 격퇴한 사건이 있다.영문위키

5.5. 대만일치시기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에서 대만을 빼앗아 점령하고 이른바 이번정책(理蕃政策)을 펼쳤다. 일본은 평지와 원주민 거주지역 사이에 애용선(隘勇線)을 그어 원주민을 격리시키고, 이 땅을 오랑캐의 땅이라는 "번지(蕃地)"로 불렀다. 그리고는 일단 평지에 거주하는 한족의 저항을 막는 데 치중하였다.
그러나 평지의 정세가 안정되자 점차 원주민이 사는 산지에도 침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대만 원주민들이 사는 산지의 울창한 삼림자원과 지하자원에 주목하여 원주민 영역에 침투하고자 했다.
일본은 대만을 통치하기 위해 대만 원주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학자들은 이 연구에 참여해 원주민들을 평야지대에 거주하는 평포족과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고산족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1910년대부터는 원주민(고산족) 거주지를 특별거주구역으로 정하고, 일본 법이 통하지 않으며 경찰이 사법, 행정권을 행사하는 구역으로 만들었다. 사람사냥 금지, 토지 국유화, 한족과의 분리정책, 주둔 경찰관(현지 학교의 선생도 겸했다)과 현지 여성과의 정략결혼이라는 통혼 정책이 취해졌다. 일본은 원주민 영역으로의 침투를 "야만인들에 대한 교화"로 포장함으로써 대만의 한족 세력에도 원주민 영역 침투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했고, 이는 일본의 대만 통치에 대한 한족의 저항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적 대우는 1930년 우서 사건(霧社事件)의 원인이 되었다. 이 우서 사건을 진압한 이후에는 산지 원주민들을 고사족(高砂族)이라 개칭하고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선전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철저한 황민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1944~45년 전쟁 말기, 일본 군부는 고사족으로 구성된 의용대를 조직하고 뉴기니, 필리핀 등으로 차출했다. 이 부대를 타카사고 의용대라고 한다.

5.6. 국민당 독재 시기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후 중화민국이 대만 섬을 접수했다. 중화민국은 이들에게 고사족 대신 '산지동포'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줬고, 번지(蕃地)라 이름붙여진 원주민 거주구역에 전부 정식 행정구역을 편성해줬다.
그러나 일본이 그랬듯 중국 국민당도 이들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데에는 인색했다. 일본이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멸시하여 2등 국민 취급을 했다면, 중국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국민당에서는 이들을 중국인으로, 중화민족으로 동화하려 했다. 원주민들에게 한족식 이름을 붙이고 원주민 고유 이름은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교육과정에서도 원주민의 언어나 역사, 문화보다는 중국의 언어, 역사, 문화가 훨씬 더 크게 강조되었다. 국민당 독재 시절 표준중국어가 교육현장에서 강조되고 대만어가 학교에서 금지된 것처럼 원주민의 언어도 학교에서 금지되었다.
대만의 고도성장 시기에도 이들은 그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다. 교육수준이 한족에 비해 낮았던 원주민들은 사회적 성취라는 면에서 한족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원주민 거주 지역은 거의 대부분이 험준한 산지로써 고도성장 시기 개발에서 소외되어, 많은 원주민들이 도시로 이주해 저임금 노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도시로 이주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갔다.

5.7. 민주화 이후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1980년대부터 원주민 권리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원주민 정체성 공인, 땅 되찾기 등의 운동을 벌였고 이는 민주화 운동과도 연계해 진행되었다.
그리고 리덩후이 집권기에 민주화와 함께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980년에 개설된 입법위원(국회의원 격) 원주민 대표 의석이 1992년부터 점차 늘어났고, 1994년에 명칭이 산지동포, 산지족에서 대만 원주민으로 개칭되었으며, 1996년에 행정원에 원주민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95년 입법위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아슬아슬하게 절반을 넘었는데 국민당에 소속된 원주민 선거구 의원 6명이 캐스팅 보트를 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한다.
2016년 8월 1일[6]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대만 원주민에 대해 이루어진 차별과 억압의 역사에 대해 대만 정부를 대표하여 사과하였으며, 기사 12월에 총통부 원주민족 역사정의 및 이행기 정의 위원회(總統府原住民族歷史正義與轉型正義委員會)를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는 원주민에 대한 부당한 권익 침해 등을 조사하고 시정하는 활동을 하며, 위원회 인사는 원주민 민족 대표들과 관련 학자들 및 원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평포족 인사 등으로 구성된다.
2017년에는 원주민 토지 법안을 놓고 원주민들이 총통부 앞 카이다거란 대도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6.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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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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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전통 선박)
오스트로네시아어족임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모로 민족 어족적으로 한족보다는 필리핀인이나 말레이인에 가깝다. 대부분이 쌍꺼풀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는 화전농업과 수렵을 병행했으며, 오스트로네시아 쪽에서 흔한 수많은 터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움집에 거주하며 곡물창고를 높게 세웠다.
과거엔 아미족 일부와 섬에 사는 타오(達悟)족을 제외하고는 모든 부족이 적대적 부족이나 타종족을 사냥해서 머리를 베는 풍습이 있었다(出草). 출초라는 이름은 풀밭에 숨어 있다가 사냥감(?)의 목을 습격한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주로 성인식으로 행해졌다. 해골을 비치해 놓기도 하였으나 일본이 이를 엄금한 뒤로는 사람사냥을 하진 않는다. 과거에는 한족들이나 일본인들이 대만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비하할 때 이러한 사람 사냥을 언급하는 일이 많았다.
푸유마와 아미족은 모계사회고 나머지는 대부분 부계사회로 루카이, 파이완, 푸유마족은 귀족과 평민의 두 계급이 존재한다고 했다. 또한 이름의 방식도 제각각 달라 자녀 이름에다 부모의 이름을 첨가한다던지, 아니면 성씨를 사용하는 민족도 있다. 가령 아타얄족은 이름 + 아버지 이름을 사용하며 부눈족은 이름 + 성씨를 사용하고, 파이완 족은 출생지 + 이름의 형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개명을 통해 만들어진 한족 방식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1945년에 중화민국이 대만을 접수한 이후로는 한동안 정부에서 한족식 이름이 아니면 등록을 거부했기 때문에[7] 원주민들에게는 중국식 이름를 갖는 것이 불가피했다. 민주화 이후 1995년부터 원주민 고유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한족식 이름과 함께 민족어로 된 자신의 본명을 한자로 음차하거나 본명 발음을 라틴 문자로 적어서 함께 나타내기도 한다.
이들은 대만 제어를 사용한다. 민족마다 언어가 다르지만, 대만 원주민들도 공용어인 표준중국어나 사용 인구가 많은 대만어를 익혀야 대만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으므로 대부분이 표준중국어나 대만어를 구사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17세기에 한족이 대만에 들어온 이후로 한족에 많이 동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원주민들 중에서도 민족어에 서툴거나 아예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딱히 자신이 소수민족이라는 자각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종교에서는 많은 수가 장로교를 믿는다. 19세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대만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포교 사업을 해온 결과이며, 대만 장로회는 역사적으로도 원주민 권익 신장에 목소리를 내오고 기여해왔다.

7. 정치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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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총통 선거 기초자치단체별 다득표 후보
푸른색 : 마잉주(중국 국민당), 녹색 : 차이잉원(민주진보당), 노란색 : 쑹추위(친민당)
2016년 총통 선거 기초자치단체별 다득표 후보
푸른색 : 주리룬(중국 국민당), 녹색 : 차이잉원(민주진보당), 주황색 : 쑹추위(친민당)
정치적으로는 중국 국민당에 몰표를 던지는 경향이 있다. 총통선거 결과 지도에서 보면 원주민이 주로 거주하는 동부 산간지역은 국민당(파란색) 일색이다. 역대 입법원과 국민대회 선거결과를 보면 1986년 증액선거때부터 2001년 총선거때까지는 두개의 원주민 지역구(산지원주민선거구, 평지원주민선거구)에서 민진당이 단 한석도 확보한 적이 없고, 이는 국민대회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처음으로 의석을 확보한것도 2004년 선거때의 일이다. 평지 선거구는 뚫었지만 산지 선거구는 2020년에야 겨우 한 명을 당선시켰다. 차이잉원 정부 출범을 전후해 젊은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국민당 몰표 성향은 누그러지고 있고 민진당 득표율도 점점 높아지는 추세이다.
이들이 국민당에 몰표를 던지는 이유는 명청시기에 이주해온 본성인들이 원주민들을 야만인 취급하면서 땅을 빼앗은 전적이 있어서 본성인에 대한 불신감이 상당한 것, 그리고 국부천대 이후로 국민당이 본격적인 근대적 통치를 시작하며 산지 개발을 시작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호감을 샀으며, 또한 90년대 국민당이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해 원주민 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원주민에 대한 회유가 어느 정도 먹혀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국민당 일당제 시기에 국민당에서 원주민 거주 지역의 기반을 탄탄히 구축하여 지역의 현안 해결 등에서 민진당에 비해 압도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자랑한다고 한다. 관련 기사
사실 국민당 독재 시절에 대만 본성인 문화가 억압된 것처럼 원주민들의 문화도 그리 존중받지는 못했기에, 20세기 말의 원주민 운동에는 민진당계 인사들이 많이 동참했고, 천수이볜 정부 하에서 선거공약으로 원주민 자치권 보장을 내세우고 총통 재직때는 대만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교육에서도 원주민들의 문화나 역사, 언어에 대해 가르치는 비중을 크게 늘렸고 원주민 텔레비전(原住民族電視)도 개국하는 등 원주민 문화 진흥에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8] 그렇지만 역사적 이유로 본성인에 대한 불신 의식은 여전하다. 극단적인 사견으로는 원주민이 한족계 본성인을 싫어하는 정도는 2.28 유족이 국민당을 싫어하는 정도나 똑같다고 말한다.
또한 한족계 본성인들의 대만 독립 주장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진짜 대만의 주인'이 누구냐면서, 외성인 정권이나 본성인 정권이나 외래 정권임은 매한가지이며, 오히려 '조금 일찍 굴러왔을 뿐인' 본성인들이 대만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대만 독립을 외치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것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에서 유럽인들이 다수지만 원래 주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고 홋카이도에서 일본 사람들이 다수지만 원래 주인은 아이누였듯이 말이다. 사실 원주민 입장에서는 대만이 독립한다 하더라도 대만 원주민이 인구의 2%에 불과한 소수민족인 것은 여전한 상황.
일부 원주민은 중국 통일 지향자이기도 한데, 이 경우 대륙의 소수민족과도 어느 정도 교류한다.
과거 대만을 지배했던 일본에 대한 태도는 지역이나 민족마다 다른데, 원주민들을 야만인 취급했고, 우서 사건같은 학살도 저질렀기에 반일 성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본성인과 외성인에게 시달리던 그 반대급부와 일본이 점차적으로 몇몇 대만 원주민 민족에 회유책을 썼기에 친일적 태도를 보이는 사례도 있다.
원주민들의 권익을 위해 만들어진 당도 있다. 이름하여 대만 제1민족당.

8. 유명한 대만 원주민


대만 스포츠 계에서 여러 원주민 출신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다. 소수민족으로서 정치권 등 대만 사회의 주류 세력이 되기에 불리한 이들에게는 지위 상승을 위한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었던 점을 반영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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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 족 출신의 마이상 칼리무드(Maysang Kalimud). 한식(漢式) 이름인 양촨광(楊傳廣)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타이둥 시내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촨광루라는 길이름이 있다. 1960 로마 올림픽 남자 10종 경기 준우승자로 10종 경기 역사상 전설적인 선수다.[9] 중화권(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홍콩·마카오)을 통틀어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10] 마이상은 은퇴 후 국민당에 입당, 입법위원을 지냈으며, 나중에 국민당을 탈당하고 민진당에 입당했다. 2007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만의 올림픽 두 번째 메달리스트인(육상 여자 80미터 허들, 지금은 100미터로 바뀜) 지정(紀政) 역시 원주민, 정확히는 혼혈이며 평포족으로 부계는 원주민, 모계는 한족이다.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올림픽 시상대에 매화기가 아닌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올린 사람은 이 두 사람이 전부.
대만의 인기 스포츠인 야구에서도 장타이산(아미 족), 린즈성(아미 족), 장즈셴(아미 족), 가오궈후이(객가인과 아미 족 혼혈), 천진펑, 양야오쉰 등 원주민 출신 스타 선수가 상당수 존재한다. 2017 WBC 국가대표팀에서는 오히려 한족 선수보다 원주민 선수가 더 많았다고 할 정도. 2018년에 NC 다이노스에 입단한 왕웨이중 역시 원주민인 아미 족 출신이다.
원주민들이 이국적인 외모에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서인지 연예계에도 원주민 출신들이 꽤 있다. '대만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여가수 장혜매는 푸유마 족 출신이다. 비비안 수, 대만판 '꽃보다 남자'(원제 유성화원)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F4의 멤버 언승욱과 주유민은 아타얄 족 혼혈이다. 가수와 배우, 예능 MC 등으로 활동하는 나지상은 아미 족 혼혈. 그밖에도 A-Lin(아미 족), 가가(家家, 부눈 족과 푸유마 족 혼혈), 둥리훠처(動力火車, 파이완 족) 등이 원주민 출신이다.
2020년에는 아타얄족 태생인 쉬얀푸 육군 2급 상장이 대만군의 2인자격인 참모본부의 부참모총장집행관(한국의 합참차장격)에 임명되었다. 원주민 출신으로 군부의 고위직에 오른, 정관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문 사례.
제14대 중화민국 총통인 차이잉원의 할머니가 파이완 족 출신이다(할아버지는 객가 출신).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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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부터는 중부의 내륙 난터우 현에 '구족문화촌'(九族文化村)이라 하여 원주민 문화, 풍습을 주제로 하는 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과거에 원주민을 9개 민족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일종의 민속촌인 셈. 이곳에는 유럽식 정원, 케이블카 등의 위락 시설들도 위치하고 있어서 나름 대만의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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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관련 박물관으로는 타이베이의 순이 대만원주민박물관(順益台灣原住民博物館)을 비롯하여 기타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순이그룹에서 운영하는 사립박물관으로 3층 규모의 사무용 건물 수준이다. 국립고궁박물원 근처에 지어졌는데(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 중화권 문화의 총본산과 대만 고유문화의 상징이 서로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느낌을 준다. 고궁박물원에서 통합입장권을 할인해서 판매하고 있고, 고궁박물원 표가 있으면 원주민박물관 입장료가 약간 할인되는 혜택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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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제조되는 고급 위스키 브랜드 '카발란'(Kavalan)은 동명의 원주민 부족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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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중심부인 총통부를 가로지르는 대로에는 역시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케타갈란(Ketagalan[11])'의 이름이 붙여졌다. 과거의 이름은 장제스의 장수를 기원하는 '제서우'(介壽)[12]였는데, 1990년대에 대만 독립 성향인 천수이볜이 타이베이 시장을 하고 있었을 시절에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대만 제어로 된 지명은 대만 곳곳에 남아 있다. 타이완(臺灣)이라는 지명부터 대만 제어를 음차한 것이다. 대만 제2의 도시인 가오슝(高雄)도 그 지역 원주민 언어로 '대나무숲'을 뜻하는 '타카우'를 일본어로 음차한 것이고(高雄의 일본어 독음이 타카오), 베이터우(北投, ←Ki-Pataw), 난터우(南投 ←Ramtau), 유명 관광지 타이루거(太魯閣 ←Truku 혹은 Taroko) 같은 지명도 원주민 언어가 어원이다. 다만 대부분의 대만 제어 지명을 음차할 때 대만어에 기초해 한자 음차했고, 그 한자를 표준중국어 독음으로 읽은 것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기에 표준중국어 독음만으로 그 기원을 유추해내기는 힘들다.

월드 뮤직 아티스트 Enigma의 히트곡인 Return To Innocence 속의 후렴구는 대만 아미족의 민요인 '老人飲酒歌'(Elders Drinking Song으로 구글링할 수 있다.)이다. 원곡

아미족 공연단의 老人飲酒歌. Enigma의 곡 속의 후렴과는 다르게 향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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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에화(...) 캐릭터도 있다.

10. 관련 문서



[1] 한족 본성인 안에서도 크게 대만어 계통 한족들하고 객가인으로 구분된다.[2] 명나라여진족에 대해서도 생여진과 숙여진으로 구분한 바 있다. [3] 잘 아는 길을 熟路, 초행길을 生路라고 한다.[4] 폴리네시아의 여러 원주민들은 자기들 민족의 기원지를 '하와이키'(Hawaiki)라고 지칭하는데, 마오리족은 '하와이키', 하와이 원주민들은 '하와이'(Hawai'i), 사모아인들은 '사바이'(Savai'i)하는 식으로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고향을 서쪽이라고 지칭한다. 하와이 원주민의 경우는 자신들이 사는 곳을 하와이라고 부르지만, 여기가 본래 하와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그냥 자기들 조상이 살던 땅과 얼추 비슷한 곳이라서 그들의 전설에 나오는 고향의 이름을 따서 하와이라고 명명했을 뿐이다. 문화인류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이 이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한 결과, 이 하와이키의 정체가 타이완 섬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5] 이들은 대개 대륙에서 가난하게 살던 자들이나 나라에 찍힌 해적들이었기에 어차피 이주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6] 원주민의 날[7] 명시적으로 거부하기도 했고, 이름 기입 칸이 한족식에 맞게 4자를 넘어가지 않아서 그것보다 길이가 긴 민족어 이름을 기입하는 것이 어려웠다.[8] 시각에 따라서는 한족 본성인들이 소수민족인 원주민을 '간판'으로 활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만은 중국 대륙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셈으로. 어차피 두 중국의 24성(푸젠은 둘로 세서), 5자치구, 2특별행정구, 10직할시, 즉 41개 성급 행정구역 모두 절대 다수는 한족이다. 그러나 소수민족의 구성 비율은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르니 지역성을 나타내려면 써먹기 좋다. 원주민도 자신들을 띄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함을 모르지는 않는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다른 방식이지만 한족이 소수민족을 간판으로 활용, 체제를 위해 구색에 맞추는 것은 매한가지. 중국이나 대만뿐만 아니라 소수민족이나 소수인종이 존재하는 국가에서라면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다. [9] 1960년 로마 올림픽 10종 경기 금메달 리스트인 레이퍼 존슨과의 라이벌 관계는 그야말로 10종 경기의 레전설. 10종 경기에서 던지기 부분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레이퍼 존슨을 앞섰고 로마 올림픽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경기에서 마이상 칼리무드가 이기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약점인 던지기 부분에서 레이퍼 존슨에게 조금 심하게 밀려서 마지막 1500미터 경기 하나를 남겨놓았을 때는 존슨이 점수에서 앞섰지만 두 사람의 평소 1500미터 기록대로라면 점수가 역전이 되어 금메달은 마이상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이때 레이퍼 존슨은 평소대로 달려서는 절대 마이상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마이상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을 떨어지지 않는다는 특이한 전략을 세운다. 그리고 이 전략이 맞아떨어져 마이상이 이기긴 했으나 두 선수의 기록은 얼마 차이가 안 났고 결국 총점에서는 역전에 실패하여 금메달은 레이퍼 존슨의 차지가 되었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10종 경기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의 하나다. 사실 마이상이 미국 유학 중이라서 두 선수는 같은 코치 밑에서 배웠고 코치는 1500미터를 남겨놓고 한쪽은 점수를 지키는 방법, 다른 쪽은 역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고 했는데 성공한 것은 존슨이었다.[10] 한족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같은 로마 대회에서 나왔는데, 중화권이 아닌 싱가포르에서 나왔다. 참고로 이쪽은 역도 선수로 역시 은메달을 땄다.[11] 대만어에 기초한 한자 음차로는 발음이 유사한 凱達格蘭(Khái-ta̍t-kek-lân). 표준중국어 독음은 카이다거란(Kăidágélán)이며 한국에는 표준중국어 독음으로 알려져 있다.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과는 무관하다.[12] 근처에는 제서우 공원도 있는데 이건 이름이 바뀌지 않았으며, 제서우라는 지명은 대만 곳곳에 흔하다. 제서우 공원은 길 건너에 있는 228평화공원에 비하면 동네공원 수준으로 작다. 타이베이에는 제서우라는 지명을 거의 찾기 힘들지만, 강 건너 신베이 시에는 제서우라는 지명이 비교적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