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롤라모 카르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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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olamo Cardano
1501년 9월 24일 ~ 1576년 9월 21일
1. 개요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죽었다. 수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본업은 의사였다.[1] 부업으로 철학이나 도박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말이 좋아 부업이지 전문가 수준이었다. 그 활동 중에는 그가 자살을 하게 만든 점성술도 포함되었다. 이탈리아의 천재 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2. 생애
지롤라모 카르다노는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로 활동했었다.[2] 지롤라모는 커서 대학에 입학해 의학과 약학을 전공하여 의사가 된다. 그러나 천재성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다방면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호전적이고 거칠었던 성격 탓인지 친구는 거의 없었으며 의사가 되어서도 그의 인간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알아주던 의사이자, 파비아대학교의 의학 교수로 재직했다.
도박중독자였는데 아무리 수학적 확률을 동원해도 도박으로 돈을 딸 수는 없었다는 것은 자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박꾼이 가장 이득을 많이 보려면 도박을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으니... 그러나 실제로 카르다노 자신은 여느 도박 중독자들처럼 도박을 끊지 못하여 일상생활을 망쳤으며, 말년에는 예수를 점성술과 엮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그 외 이것저것 시대를 초월하는 기행을 많이 했는데, 심지어 자신이 죽는 날까지 예언했고 그것을 정확히 맞혔다! 어떻게 맞혔냐면 예언을 달성하기 위해 '''단식을 해서''' 딱 예언한 날에 맞춰 죽은 것이었다(...).
3. 업적
3.1. 의학
최초로 장티푸스를 발견했고, 먼지나 털 같은 비위생적인 것들을 치우고 영양식을 섭취하도록 하는 천식 치료법을 고안해 냈으며, 알레르기성 질환 발견, 그리고 탈장 수술법 개발 등의 업적도 있다.
3.2. 수학
'''확률론 체계화를 시작하고 허수 개념을 고안한 수학자이다.''' 허수 개념은 수학적 사고의 범위를 넓혀 주었다. 또한 그는 한 평생 도박을 할 만큼 심각한 도박 중독자였다. 그는 의사로 벌어들이는 수입과 수학경시대회의 상금으로 도박을 하였고 대부분 말아먹었다. 특히 좋아했던 도박은 체스와 주사위 던지기였다. 이렇게 도박에 미친 그는 도박을 잘하기 위해 공략집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결과 <확률 게임에 관한 책>이라는 저서를 만든다. 그리고 이 저서는 '''최초로''' 확률론을 체계적으로 다룬 책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도박을 하지 않는 게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한다"고 말하며 도박을 하지 않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삼차방정식의 해법을 증명한 학자로도 유명하다. 그의 이름을 단 "카르다노의 정리"가 있다. 다만 이 정리는 카르다노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되는데, 다른 학자의 성과를 '''도둑질'''했다는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카르다노는 타르탈리아라는 수학자에게서 3차방정식의 해법을 전해듣게 되었는데, 타르탈리아는 절대 남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조건을 걸고 비밀리에 카르다노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런데 카르다노가 이걸 자신의 이름으로 공식 발표해 버린 것.
이에 대해 카르다노에겐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는 변호도 있다. 카르다노가 검토해보니 타르탈리아의 해법에는 불완전한 점이 있어서 다시 연구, 보완해서 완전한 형태의 해법으로 완성한 것이며, 저서에 해법 자체는 타르탈리아가 맨 처음 발견했다는 언급을 해 놨다. 거기에 타르탈리아 이전에 페로라는 다른 학자가 1510년대 쯤 발표한 논문에 불완전하지만 방정식 해법을 이미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해법도 카르다노가 독자적으로 다시 해결했다.
이 때문에 좀 미심쩍은 부분은 있어도 당대에 "카르다노의 정리"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3차방정식을 위한 근의 공식은 허수 개념을 도입하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다.[3] 따라서 카르다노가 이 근의 공식을 완성한 동시에 허수의 개념을 창안한 수학자였음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자신과의 약속을 깨고 3차 방정식의 해법을 공개한 카르다노에게 분개한 타르탈리아는 그에게 3차방정식의 해법을 건 수학경기를 신청한다. 서로에게 문제를 내서 풀지 못하는 사람이 지는 경기였는데, 카르다노의 천재 제자 루도비코 페라리가 3차방정식의 해법을 이용해 4차방정식의 해법까지 구해 스승 대신 경기에 참가했다.[4] 결국 타르탈리아는 경기에서 진 후 모든 명예를 잃고, 카르다노를 저주하며 쓸쓸히 삶을 마감한다.
3.3. 기타
점성술에도 심취하여 많은 연구물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천체를 제외하면 영속적인 운동은 없다고 주장했다.[5] 또한 자기현상과 전기현상의 구별법을 확립했으며 암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공학에도 재능을 보여 기계ㆍ기재의 결합을 이루는 이음매인 카르단 조인트도 만들었으며 이것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이런 천재였던 카르다노에게도 한계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허수의 개념을 창안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쳤으나 이를 복소평면이라는 개념까지 확장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상술했듯 카르다노가 허수의 개념을 창안하게 된 것이 철학적/수학적 경로를 통해 발생한 것이 아닌, 오로지 삼차방정식을 정확하고 빠르게 풀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단, 당시의 시대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카르다노가 위와 같은 한계에 봉착한 것은 사실상 당연한 일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카르다노가 살았던 16세기의 유럽 수학자들은 허수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아직도 음수를 받아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주제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카르다노 본인도 허수 개념을 제시한 직후 허수 자체까지는 갈 것도 없이 '''"왜 당신은 음수의 존재를 당연시 하느냐?"'''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어딘가 병맛나는 비난에 그것도 지속적으로 시달려야 했다. 당시 분위기로서는 허수 개념을 통해 삼차방정식을 완벽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시대를 훨씬 앞선 지성이었다고 봐야 한다.
4. 관련 문서
[1] 아이작 뉴턴 이전의 수학자는 전업 수학자라는 개념이 없었고 베르누이 가문 같은 생업에 신경 안써도 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투잡(?)을 뛰었다. 대표적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유명한 피에르 드 페르마는 원래 변호사였다.[2] 지롤라모의 친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3] 정확히는 허수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3개의 근 중 하나는 계산해낼 수 있으나 나머지 2개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허수가 반드시 필요하다.[4] 그래서 4차방정식의 해법은 페라리의 공식이라 불린다.[5]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중력의 원리를 밝힌 것을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