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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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이자 몽골의 법전 야사(Yassa)의 관리인. 차가타이 칸국의 칸을 처음으로 자처한 카라훌레구는 그의 손자이며, 3대 차가타이 칸국의 칸이 되는 예수몽케는 그의 아들이다. 원나라 개창 후 조카 쿠빌라이 칸에 의해 성종(聖宗) 충무황제(忠武皇帝)로 추존되었다.
장자인 주치의 혈통이 모호한지라(주치 항목 참조) 후계자 계승때 주치에게 반발하며 대놓고 주치를 메르키트의 사생아라고 불러 칭기즈 칸을 불편하게 했다.[1] 그 이후에도 주치와 사사건건 대립했으며 이들의 대립 때문에 후계자 자리는 온화한 오고타이 칸에게 넘어가게 된다.[2]
주치와의 대립에서 보이듯이 성격이 불 같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고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인물이라서 칭기즈 칸은 차가타이에게 몽골의 법전인 '에케 야사'의 관리역을 맡겼다. 일례로 오고타이가 칸이 된 이후 차가타이와 오고타이가 술자리를 했는데, 차가타이가 취중에 오고타이에게 실수를 했다. 다음 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차가타이는 아우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실수를 벌해달라고 청했다. 오고타이는 "뭘 형제끼리 그런 걸 가지고 그러십니까?"라며 허허 웃으며 넘어갔지만 차가타이는 끝내 야사의 법전을 스스로에게 적용해서 스스로를 벌 줬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엄격한 성격답게 오고타이가 술에 취해서 깽판(…)을 치면 대칸이고 나발이고 없이 법의 수호자이자 무서운 형님으로 돌아가 동생을 혼냈는데 취중에도 오고타이는 형이 혼내러만 오면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었다고.[3] 여담이지만 그의 동생, 툴루이의 장남이자 훗날 칸이 되는 몽케가 그의 성격을 가장 많이 닮았다.[4]
중앙아시아에 차가타이한국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차가타이는 '''죽을 때까지 결코 칸을 자칭하지 않았다'''. 차가타이한국의 지배자들 중 처음으로 칸을 칭한 것은 손자인 카라 훌레구이다. 하지만 오고타이 정권을 창출하는데 크게 힘을 쓴 사람으로써 차가타이는 파미르 이서의 제국령에서 사실상 지배자로 군림했고 이것이 후에 차가타이한국을 만들었기 때문에 차가타이한국의 제1대 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를 시조로 간주하는 차가타이한국은 동유럽을 밟아버린 킵차크 한국, 중국을 집어삼킨 원나라, 그리고 맘루크와 싸우고 페르시아 문화에 영향을 받은 일한국에 비하면 이미지가 좀 희미하다. 다른 한국들은 각각 러시아, 명나라, 맘루크/오스만 같은 중세 후기~근세 대제국들이 성장하면서 뛰어 넘어야할 적으로서, 또 동시와 많은 문화와 기술, 제도를 서로 교환한 외교적 파트너로서 세계사의 굶직한 거대 세력들의 역사와 같이 존재감이 커졌던 반면, 차가타이한국이 있었던 지방은 이후 티무르라는 걸출한 정복자를 배출한 것 빼곤 이후 세계사의 중심이라 보기에는 힘든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차가타이한국이 세워진 땅에서 티무르가 나왔고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튀르크계 위구르인과 섞여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이어진다. 아팍 호자는 바로 차가타이한국의 잔당. 그의 시호와 묘호는 이와 상관없이 조카 쿠빌라이 칸이 올린 것.
2. 창작물에서
징기스칸 4에서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조금 수수한 느낌의 능력치를 받았다. 정치 57, 전투 79, 지모 54. 그러나 어디까지나 '형제들에 비해'이지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쓸만하다. 전투가 79라 전장에서 굴릴 정도는 되며 파워업키트에서는 전투가 80에 지모와 정치도 대폭 올라가서 더욱 쓸만해졌다. 특기는 각각 등용과 돌격만을 소유하고 있지만 경험을 쌓게 하면 다른 특기들도 배울 여지는 충분하고 '등용' 특기와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몽골 플레이시 최전선의 영주로 적임인 무장이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1228년에서 1241년 사이로 연도를 조정하면 히바의 국왕인 상태에서 플레이할 수 있으나 영토가 킵차크한국과 일한국 사이에 끼여 있는 탓에 앞의 두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체인 편이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술고래''' 트레잇이 붙어 있다.
워해머 40K에 등장하는 프라이마크인 자가타이 칸은 아무리 봐도 이 사람한테서 이름을 따왔다. 이 사람이 이끄는 군단 컨셉도 몽골 제국.
3. 둘러보기(계보)
[1] 칭기즈 칸은 이때 그저 "차가타이야. 다시는 주치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라고만 했다고 한다. 어쨌든 칭기즈 칸은 주치를 자신의 아들로 대하려고 노력했던 편이다.[2] 이는 차가타이의 성격 때문이기도 할 것 이다. 설사 주치가 아버지 칭기즈 칸의 친자라 할 지라도 나중에 일어날 분란을 용납하지 못했을 것 이다. 스스로 벌을 주었을 정도에 엄격함과 원리원칙이라면 분란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주치를 인정하지 않았을 수 있다.[3] 오고타이가 차가타이를 무서워한 것이 단순히 차가타이가 무서워서 그랬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애초에 차가타이가 칭기즈 칸에게 후계 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또 칭기즈 칸의 사후에 오고타이 지지를 선언하지 않았다면 결코 오고타이는 자신의 정권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즉슨 차가타이 개인의 엄격함도 엄격함이지만, 정치적 세력으로 차가타이가 매우 강력했다는 증거이다. 동생인 툴루이야 그렇다쳐도 형인 차가타이가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대칸이 된 오고타이 입장에서 차가타이는 매우 두려울 존재일수 밖에 없다.[4] 몽케의 치세에서는 황금 항아리를 짊어진 부녀자가 제국의 끝과 끝을 횡단해도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