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태

 

'''이북5도위원회''' '''평안북도지사'''
''' 국민의 정부 '''
<color=#373a3c> ''' 참여정부 '''
8대
백형린

''' 9대
차인태 '''

10대
백도웅

[image]
'''이름'''
차인태 (車仁泰)
'''국적'''
대한민국 [image]
'''본관'''
연안(延安)
'''출생'''
1944년 8월 11일 (80세)
평안북도 벽동군[1]
'''학력'''
휘문고등학교(55회)
연세대학교 성악과 학사[2]
'''경력'''
1966년 KBS 입사
1969년 MBC 아나운서
1992년 MBC 편성이사
1995년~1998년 제주MBC 대표이사
1999년 경기대학교 다중매체영상학부 학부장
2003년~2007년 제9대 평안북도 도지사
2009년 통일부 통일 고문 회의 통일 고문
2019년~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병역'''
예비역 육군 중위(학군 5기)
'''가족'''
배우자 이선희, 슬하 2녀
'''종교'''
개신교(예장통합)[3]
대한민국의 방송인이자 대학교수... 라고 쓰고 '''미스터 MBC'''라고 읽는다.[4] MBC의 대표 뉴스 앵커가 엄기영이라면, 대표 아나운서는 차인태라고 할 수 있다.
평안북도 벽동군 출신의 실향민으로, 어린 시절은 평북 정주에서 잠깐 보내고 분단 직후인 1949년 일가족이 월남하여 경주에 정착했다가 6.25를 거치며 서울로 상경, 휘문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성악학과를 졸업하였다.
미스터 MBC라는 별명이 있지만 의외로 라디오 시절의 MBC(1961년 서울 개국)에서 처음 방송 경력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연세대 재학 중 1965년 동아방송 전국대학방송경연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방송에 입문하였고,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에 입사하였다가 1967년 퇴사하고 병역을 수행한다. 병역은 ROTC로 이행했으며 학군 5기 출신이며, 예비역 중위로 전역했다.
이후 1969년 7월 MBC-TV 개국과 함께 입사하여 활동하였다. 그의 경력 중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은 1973년부터 진행한 MBC 시절 장학퀴즈. 30대 이상 위키니트들은 거의 다 이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또한 평일 아침 방송된 '차인태의 출발 새 아침'도 오래 진행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MBC 라디오 초창기에 별이 빛나는 밤에을 진행한 경력이 있다. 1970년대까지 별밤은 명확한 컨셉을 잡지 못하고 개편 때마다 전문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교양 프로와 가수가 진행하는 음악 프로를 오가곤 했는데, 차인태도 교양 프로 시절 진행을 맡았다. 이 경력으로 별밤 10,000회 특집 방송에 2대 별밤 지기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의외로 MBC 뉴스데스크는 오래 진행하지 않았음에도[5] 불구하고 메인뉴스 진행자 이미지가 강한데, 그 이유는 뉴스데스크의 주말에디션인 'MBC 뉴스센터(1981~1984)'를 꽤 오랫동안 진행하였기 때문이다.[6]
그래서인지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실황중계시 메인캐스터였으며[7], 이후 20세기말 남북관계가 개선되자 실향민이자 남한 방송인 신분으로 '''북한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향인 평안북도의 명예 도지사(이북 5도 문서 참조)를 지내기도 했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남자 1000m에 출전한 김기훈이 '''대한민국 동계올림픽 도전사 최초로 금메달을 따는 역사적인 순간'''을 중계하기도 했다. '''"자, 그대로 고~~~올인! 금메달!!! 우리 김기훈 선수 금메달!!!"'''
1998년 제주문화방송 사장을 끝으로 방송 현업을 떠나 경기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정년 퇴임 후에는 서울문화예술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내고 있다.
매우 독실한 신앙인으로,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교회 장로 자격으로 참여한 간증영상 등이 간혹 등장한다. 아래 영상은 신촌성결교회에서 진행한 신앙강연이다.

여담으로 자동차생활 1984년 9월 창간호 중 카라이프 포커스 코너에는 차인태 아나운서와 그의 가족들의 생활을 다루었다. 당시 차인태 아나운서가 운행했던 차량은 현대 스텔라.
한때 전두환 정부 시절 전두환과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홍역을 치뤘던 적이 있었다[8]. 그래도 어찌 80년대 당시 장학퀴즈 진행 등 방송 일은 꾸준히 맡아서 역시 전두환이랑 닮았다고 방송에서 매장되어서 다른 자영업을 했던 박용식보단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2019년 3월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에 선임되었다.


[1] 실향민이며 아호도 고향의 지명인 '''벽동(碧潼)'''이다.[2] 원래는 의과대학 진학을 희망하였으나 낙방하였다고 한다.[3]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인 영락교회의 은퇴장로이다.[4] 실제로 MBC 30주년 특집방송(1991년) 당시 '차인태와 MBC'라고 자막이 나왔을 정도였다.[5] 그것도 추성춘 앵커가 건강상 이유로 뉴스진행이 불가능해지자 후속진행자(엄기영)의 투입전까지 임시로 진행한 것 이었다. [6] 물론 뉴스센터는 시사 프로그램 시절(1981-1984)이나 뉴스 시절(1989, 1991~1993)이나 지금은 뉴스데스크의 역사에 포함된다. 차인태를 뉴스데스크 앵커로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이득렬도 1981년에는 뉴스센터 진행자였다.[7] 옆동네(KBS) 김동건 아나운서의 경우는 방문단에 포함되어 직접 북한으로 갔다.[8] 머리도 그렇고, 안경을 쓴 모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