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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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득렬(李得洌)
'''생몰년도'''
1939년 5월 7일 ~ 2001년 2월 24일
'''학력'''
보인상업고등학교 - 한양대학교 영문학과
'''경력'''
1966년 MBC 입사
MBC 정치부장(1978~1981)
MBC 보도국 보도제작2부장(1981~1982)
MBC 보도위원(1982~1983)
MBC 보도국 부국장(1983~1986)
MBC 총무국 부국장(1986~1987)
MBC 워싱턴지사장(1987)
MBC 보도이사(1988,11~1989.02/1990.02~1992.02)
MBC 애드컴 사장(1993~1996)
MBC 사장 겸 한국방송협회 부회장(1996.07~1999.03)
한국관광공사 사장(1999.06~2000.05)
새천년민주당 당무위원, 삼성생명보험 사외이사(2000)
1. 개요
2. 약력
3. 여담
4. 어록
5. 수상 경력
6. 저서

1980년 5월20일 밤 9시50분께 광주 시민들은 "사상자는 한 명도 없다"고 방송한 광주MBC에 불을 질렀다. 사흘 뒤 MBC 9시 뉴스는 불타는 광주MBC 건물을 방영했다. 이득렬 앵커는 '''"폭도에 의해 불타는 광주문화방송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어떻게 시민을 폭도로 매도하냐고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다음날 MBC 편집회의에선 노성대 부국장이 "용어 선택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자 이득렬 앵커는 '''"내가 방송을 잘못했다는 거냐"'''며 반발했다. 노성대 부국장과 오효진 기자는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앵커 이득렬은 김영삼 정부 때 MBC 사장을 지냈다.[1]

미디어 오늘 사설, "5·18 가짜뉴스는 '갑툭튀'가 아니다"#


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 하순봉 - 이득렬 - 엄기영으로 이어지는 MBC 뉴스데스크의 간판 앵커 라인 중 한 명이다.

2. 약력


1939년 5월 7일 경성부 출생으로, 보인고등학교한양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66년에 MBC에 입사했다. 1974년 가을부터 1987년 4월 30일까지 12년 반 동안 뉴스데스크를 진행했다.[2] 그는 앵커를 하면서 1978년 정치부장, 1981년 보도제작2부장, 1982년 보도위원, 1983년 보도국 부국장, 1986년 총무국 부국장 등의 요직을 거쳤다.
당시 최장수 앵커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후배 앵커인 엄기영(1989.10.09.~1996.11.08, 2002.1.1~2008.2.1)이 기록을 경신했다.

1980년대 평일 뉴스데스크 영상을 찾아보면 앵커는 항상 이득렬 앵커였다. 하지만 그 위상은 철저한 어용방송으로 유지한 것이었다. 상단의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 폄훼는 물론이고 전두환을 찬양한 프로그램을 여러번 진행했고, 결국 땡전뉴스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사실 보존되어있는 영상이 많지 않기도 하고 사실 영상보관이 잘 이뤄지지 않던 시절이라서 이 정도인 것이지 방송자료의 제대로 된 보존이 몇 년 정도만 일찍 이루어졌어도 엄청난 흑역사 영상들이 인터넷 상에 널려있었을 것이다.
1987년 워싱턴 지사장으로 보직 이동되었으며, 1988년 귀국 후 보도이사, MBC애드컴 사장직을 거쳐 1996년에는 전임 강성구 사장[3]의 사퇴로 공석이 된 MBC 사장직에 취임하여 1999년까지 한국방송협회 부회장까지 겸임했고, MBC 사장 퇴임후에 홍두표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자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영입되면서 잔여임기를 수행했다.
앞선 어용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보면 의외의 일로, MBC를 진보성향의 방송사가 된 것도 이득렬 사장때부터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임 사장이던 황선필, 김영수, 최창봉, 강성구 등이 MBC 논조에 관여했다가 내부 구성원과 갈등을 많이 빚으면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결국 중도에 사임했던 일을 교훈삼아 MBC의 논조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보도나 시사프로그램 편성과 제작에 있어서는 이전보다 자율성이 존중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98년에 이득렬이 과거의 과오가 있기 때문에 물러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자 이에 MBC 직원들이 원칙에 어긋난다면서 크게 반발했고, 민주화 이후로 끝까지 임기를 마친 첫 번째 MBC 사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99년 말 당시 여당이 추진하던 신당에 영입되어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지역구 출마가 유력했지만 본인이 출마를 고사했고[4], 그 해 5월 한국관광공사 사장직에서 물러나 개인 방송 프로덕션을 운영했다. 또한 2000년 10월부터는 프리랜서 자격으로 MBC 라디오 프로그램인 '''MBC 초대석 이득렬입니다'''를 진행하였다.
평소 지병인 간경변을 앓고 있었는데, 토요일이던 2001년 2월 24일 아침에 방송 녹음을 마치고 아내와 교외로 나들이를 나갔다가 휴게소에서 사먹은 식은 군밤 파편에 식도 정맥류가 파열되었고, 아내가 급히 119에 연락했지만 주말 도로 정체로 구급차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골든아워를 놓치면서 결국 그날 저녁, 향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 김주하가 MBC에 아나운서로 입사할 때[5], 10년 이상 MBC를 먹여살릴 얼굴이라는 평가를 했다. 실제로 김주하는 뉴스데스크 진행을 시작 한지 10여 년 뒤에 MBN으로 이적했다. 어찌 보면 예언이었던 셈이다.
  • 클로징 멘트는 "오늘 뉴스데스크, 여기서 전부 마치겠습니다"라는 말로 항상 클로징을 했다. CBS 이브닝 뉴스의 전설적인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의 클로징 멘트인 "That's the way it was."의 오마주로 보인다.[6]
  •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이영상은 변호사이다.[7]
  • 이득렬 앵커가 진행할 때인 1980년 12월부터는 컬러 텔레비전으로 방송되기 시작했다.

4. 어록


훌륭한 앵커는 몇 세기에 한 번 태어난다. 그만큼 훌륭한 앵커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그러므로 앵커들은 훌륭한 앵커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2010년, 뉴스데스크 40주년 특집, 백지연이 다른 역대 앵커들에게 말할 때 세상에 알려졌다.

몇 마디 아름다운 말보다는 한 마디 진실이 뉴스에서는 제일 중요하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고 떠납니다.

1987년 4월 30일, 뉴스데스크 마지막 진행, 클로징 멘트.[8]

백조가 임종할 때 노래를 부른다고 그래요. Swan song이 백조의 노래인데 백조의 노래가 우리말로 해석하면 자기의 마지막 작품, 그래서 여기 방송하는 것이 나의 Swan song이 될 거야, 마지막 작품...

2000년 10월 30일 인터뷰 중에서.


5. 수상 경력


  • 서울시 문화상 (1985)
  • 은관문화훈장 (1997)
  • 한국방송대상 특별공로상, 자랑스런 한양언론인상 (2001)

6. 저서


  • 좋은 질문입니다 - 비전. 1979.
  • 머물지 않는 말 - 창원출판사. 1986.
  • 잃어버린 서울 그리운 내 고향: 이득렬 에세이 - 고려원. 1994.

[1] 뒤에도 나오지만 김영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때도 철저하게 여당 입맛에 맞춘 것을 보면 권력의 의중을 따라가는데 철저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모든 정권에서 중용된 거의 그랜드슬램 수준이다.[2] 1981년 5월까지는 여러 앵커들과 번갈아 진행했고, 1981년 6월부터 고정진행을 맡게 된다.[3] 공교롭게도 강성구 앵커는 이득렬 앵커와 같은 해인 1966년에 MBC에 입사했으며 평일 뉴스데스크 후임 앵커로 발탁되었다.[4] 사실 이득렬 본인이 땡전뉴스를 비롯한 5공 시절 친정부 논조를 방송에 내보낸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데다가 공기업 사장 신분을 유지한 상태에서 정치권에 영입된 것을 놓고 뒷말이 무성했기 때문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 결국 서울 성동구에는 임종석이 공천되어 당선되었다.[5] 이후 기자로 보직 변경되었다.[6] 실제로 CBS와 MBC는 협력관계에 있다. 1985년~1988년 연간의 뉴스데스크 오프닝 화면이나 1990년대 중반 뉴스 스튜디오는 CBS의 그것을 카피한 것이다. 실제로 뉴스데스크 초창기에 앵커와 PD들이 CBS의 이브닝 뉴스의 영상을 공수해 와서 그것을 보고 따라 했다는 증언이 있다.[7] 서울 경복고등학교서울대학교 사법학과를 졸업하였으며(92학번), 1997년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29기로 수료하였다. 검사로 활동하다가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를 끝으로 2018년 9월에 퇴직하였다.[8] 6.29 선언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이다. 결국 이득렬은 전두환 정부의 압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지만 저 발언을 토대로 마지막 양심은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31년 뒤 황상무 전 KBS 뉴스 9 앵커도 마지막 방송 때 비슷한 클로징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