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방송
1. 동아일보사 산하였던 라디오방송국
1.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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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부터 1980년까지 동아일보사 산하에 있었던 라디오방송국의 통칭. 약칭은 DBS. 호출부호는 HLKJ, 출력 10kW, 주파 792kHz였다. 특이하게도 이 방송은 독립법인이 아닌 동아일보 산하 부서 중 하나였다. 그래서 방송 총책임자의 직급이 사장이 아닌 국장이었다.[1]
케이블 매체인 채널동아(구 동아TV)와는 전혀 다르다. 동아일보사-동아미디어그룹과 전혀 별개인 여성/스타일(패션) 전문 채널. 해당 채널의 이름은 개국 당시 소유주였던 동아그룹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LF그룹 소속이다.
1.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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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경의 동아일보 사옥 모습(사진 오른쪽 귀퉁이). 지금은 없어진 송출탑이 보인다.
1963년 민간 신문사인 동아일보에 의해 개국된 민간방송국이었지만, TBC에 비교해봐도 전국구급[2] 이 아닌 수도권 라디오 지역방송에 불과했다. 전국구로 방송을 할 계획이나 TV 방송 개국 계획도 있었지만 당시 동아일보가 야당지였기 때문에 번번히 퇴짜만 맞았다고 한다. 주파수는 AM 792㎑였다.[3] 동아일보사 광화문 사옥의 한켠을 빌려 스튜디오를 꾸렸으며 이 때문에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이후 스튜디오에 특수 고무판을 깔았다고 한다.[4]
개국 당시부터 BBC의 뉴스 시스템이던 '쿼터시스템'[5] 을 도입하여 서울권역에서는 나름 청취율이 높았다고 한다. 특히 1965년 당시 KBS가 생까던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이 뉴스 시간을 이용해 15분마다 '''생중계'''하는 용자짓을 한 탓에 박정희 정권에 제대로 찍힌다. 방송계 원로들 회고담에 따르면, 이 때문에 시범케이스 비스무레하게 해직기자 사태가 벌어진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DBS는 생중계와 용자짓이 전문이던 방송색채를 띠고 있었다.[6] 이외에도 유명한 필화사건으로는 1964년 소위 앵무새 사건이 있는데, '앵무새'는 당시 DBS의 논평 코너 제목이다. #앵무새 사건의 상세 내용 이 일로 고재연 제작국장 등이 계엄하에서 구속되고 최창봉 부장을 비롯하여 직원 6명이 재판에 넘겨졌으나, 5년 후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웃 동아일보 기자들과 같이 '언론자유수호투쟁'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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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80년 11월 30일 고별방송날 사옥 앞에서 찍은 사진이라 한다. 뒤쪽으로 교보문고가 있는 교보빌딩이 보인다.
1979년 10.26 사태와 12.12 사태의 혼란 속에서도 각계의 개헌 논의와 3김의 등장으로 1980년대를 열게 된 동아방송은 이때를 기회로 잡아 TV국과 지방국을 추가로 신설하고자 하여 기술부와 송신소 간부들로 구성된 기술대책팀을 꾸려 부산, 대전, 대구, 광주 등 8개 도시를 현지답사케 한 뒤 1980년 1월 4일에 일민 김상만 회장과 이동욱 사장, 김상기 부회장이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지방국 및 TV국을 설치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다. 마침 동아방송의 새 보금자리가 될 여의도 별관[7] 증축도 활발히 이루어지자 회사 전체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나. 5.17 내란이 발생해 언론검열이 강화된 뒤 11월 15일에 언론통폐합이 마련되자 끝내 이루지 못했다.
결국 11월 12일에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과 이동욱 사장은 보안사로 끌려가 수사관의 강압에 따라 지장을 찍어 방송국을 내놓아야 했고, 30일 언론통폐합으로 인한 신방겸영 금지로 12월 1일 KBS로 강제 통합되면서 KBS 제4방송으로 개칭했다.[8] 18년 동안의 DBS의 역사를 마감하는 방송인들의 회한은 11월 30일 오전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방송된 자사의 간판 프로그램이던 <DBS 뉴스쇼>의 고별방송으로 집약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정경부장 최종철 기자는 끝부분에서 눈물을 삼키는 음성으로 아래와 같은 멘트를 내보냈다.
모두 출근하여 고별 <DBS 뉴스쇼>를 지켜보던 동아방송의 기자들은 뉴스가 끝나자 눈들이 눈물로 붉게 충혈된 채 한일관으로 몰려가 아침부터 소주를 마시는 것으로 한을 풀었다고...동아방송의 보도의 공과 과(過)는 후세의 평가에 맡기려 합니다. 그러나 후세에 동아방송의 기자들이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격동의 한 시대를 정의의 편에 서서 열심히 성실하게 뛰었다고 말하려 합니다. 동아방송의 18년사는 분명히 한국 언론사에 비록 짧지만 굵게 기록된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 순간 동아방송 기자들은 손때 묻은 취재수첩에 여백을 남긴 채 일단 덮으면서 애청자 여러분이 저희들에게 주신 격려와 성원, 그리고 질책까지도 귀중한 보람으로 마음속 깊이 간직하려 합니다. DBS 동아방송 18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저희 동아방송 기자들은 청취자 여러분께 고별의 인사를 드립니다. 애청자 여러분의 가정에 행운과 건강이 향상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80년 11월 30일 오전 8시 55분 58초.''' 여러분이 그토록 아껴주신 동아방송의 <DBS 뉴스쇼>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1990년에 KBS 조직이 축소되고 주파수가 SBS로 넘어가게 되자 동아일보는 SBS 라디오 개국 직전인 1990년 11월 27일[9] 자사의 신문만화 <나대로 선생> 3115회를 통해 도둑(노태우 정권)이 훔친 라디오를 태영에 넘겨주는 표현을 통해 노 정권의 민영방송 선정을 비판했다. 19일에 국가와 KBS를 상대로 KBS에 강제합병된 DBS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21일자 사설 <동아방송의 원상회복>을 통해 동아방송은 본래 주인인 동아일보에 돌려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공보처 장관인 최병렬은 "라디오는 DBS가 쓰던 것이지만 무선국 허가는 1년 단위로 재허가하게 되어 있고 인쇄매체는 방송매체를 겸업할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이에 동아일보 측은 30일자 사설 <동아방송 빼앗긴 10년>에서 "동아방송의 원상회복은 짓밟혔던 언론자유를 되찾아 불행했던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며 원상회복 뒤에는 사적 소유 대신 국민주주에 의한 국민의 방송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여 원상회복 뒤의 DBS의 향후 진로에 대해 밝혔으나 결국 돌려받지 못하고 폐국하고 주파수가 바로 SBS로 넘어갔다. 그런고로 이 주파수는 현재 SBS 러브FM이 방송되고 있다. 호출 부호는 제주방송으로 넘어갔다. 자사 성우들도 언론통폐합 이후 KBS 성우극회와 통합 되었다.[10]
동아일보사는 2009년 미디어법 개정에 따른 신방겸영 허용 뒤 2011년에 종합편성채널 채널A를 개국하여 다시 방송에 진출하였다.
1.3. 동아방송의 주지
- 우리는 건전, 공평, 명랑을 지향하며 방송의 품위를 간직한다.
- 우리는 알기 쉽고 공정한 말의 보급과 사회순화에 힘쓴다.
- 우리는 자유와 정의 편에 서며 어떠한 독재에도 반대한다.
1.4. 동아방송국가
작사는 시인 조지훈, 작곡은 김성태가 맡았다.
1.5. 로고송 - <동아방송의 노래>
이 로고송은 동아방송국 측이 자체 제정하였다.
1.6. 역대 간부
1.6.1. 방송국장
1.6.2. 방송국장 대리
1.6.3. 방송부국장
- 최창봉, 신광우 (1964~1968)
- 조갑준 (1968~1974)
- 김석모 (1968~1980)
- 고재언 (1970~1975)
- 김성칠 (1973~1974)
- 김진현 (1974~1975)
- 이윤하 (1975~1980)
- 전영우 (1975~1980[15] )
- 권오기 (1975~1977)
- 김상철 (1976~1980)
- 신용순 (1977~1980)
- 윤양중 (1980)
- 이정규 (1980)
1.7. 역대 사원
- 기자
- 강순규 (1978~1980)[16]
- 강정문 (1971~1980)
- 강정상 (1977~1980)
- 강종수 (1966~1967)
- 강황석 (1965~1980)
- 고수균 (1972~1975)
- 고재언 (1963~1980)
- 고준환 (1968~1975)
- 국흥주 (1970~1975)
- 권오기 (1974~1980)
- 김권 (1975~1980)
- 김기표 (1965~1975)
- 김두식 (1973~1975)
- 김명걸 (1965~1975)
- 김민남 (1971~1975)
- 김병일 (1965~1974, 1983년 작고.)
- 김봉호 (1968~1969)
- 김수연 (1978~1980)
- 김용정 (1970~1971)
- 김인수 (1963~1980)
- 김일환 (1975~1980)
- 김정서 (1966~1980)
- 김종진 (1965~1970)
- 김지자 (1963~1971)
- 김진원 (1975~1980)[17]
- 김창수 (1967~1975)
- 김택환 (1964~1973)[18]
- 김현정 (1968~1980)
- 나철삼 (1975~1980)
- 남찬순 (1976~1980)
- 남태영 (1978~1980)
- 노상국 (1963~1974)
- 노상우 (1967~1974)
- 노승주 (1963~1971)
- 노재성 (1970~1978)
- 노창룡 (1963~1968)
- 노한성 (1975~1980)
- 문대탄 (1968~1973)
- 문영희 (1969~1975)
- 문준호 (1966~1980)
- 박미정 (1963~1980)
- 박병서 (1968~1970)
- 박석종 (1965)
- 박응칠 (1967~1980)
- 박인섭 (1963~1980)
- 박종만 (1970~1980)
- 박종렬 (1978~1980)
- 박중길 (1971~1980)
- 박창래 (1963~1980)
- 배석규 (1979~1980)[19]
- 백광남 (1963~1966(순직))
- 백선기 (1967~1980)[20]
- 상기문 (1967~1975)
- 서병현 (1963~1980)
- 서정훈 (1976~1980)
- 서창식 (1970~1975)
- 서행식 (1963)
- 송경선 (1968~1980)
- 송경섭 (1977~1980)
- 송석형 (1975~1980)[21]
- 송정석 (1976~1977)
- 신동호 (1975~1980)
- 신상현 (1963~1980)
- 안택원 (1976~1978)
- 엄효섭 (1975~1980)[22]
- 오상원 (1963~1980)
- 오정환 (1969~1975)
- 유겸무 (1971~1978, 1983년 작고.)
- 유택 (1966~1968)
- 윤기병 (1963~1965)
- 윤명중 (1963~1964)
- 윤석홍 (1972~1980)
- 윤인걸 (1977~1980)
- 윤재걸 (1976~1978)
- 이경문 (1965~1967)
- 이광석 (1965~1967)
- 이규민 (1976~1980)
- 이문조 (1968~1978)
- 이병대 (1970~1980)
- 이부영 (1973~1980)
- 이상연 (1964~1966)
- 이석열 (1963~1980)
- 이성주 (1971~1980)
- 이승 (1963~1980)
- 이영록 (1969~1975)
- 이영일 (1978~1980)
- 이영환 (1976~1980)
- 이용수 (1970~1971)
- 이용우 (1977~1980)
- 이재권 (1979~1980)
- 이정석 (1963~1971)
- 이종구 (1978~1980)
- 이종대 (1969~1980)
- 이태대 (1971~1975)
- 임부섭 (1970~1973)
- 장성원 (1966~1975)
- 장순재 (1965~1980)
- 전준우 (1976~1980)
- 정동익 (1970~1971)
- 정영복 (1963~1980)
- 정영일 (1970~1975)
- 정학철 (1971~1980)
- 조경환 (1966~1980)
- 조동오 (1967~1974)
- 조영희 (1976~1980)
- 진기호 (1968~1969)
- 천승준 (1967~1980)
- 최동호 (1970~1980)[23]
- 최시중 (1967~1969)
- 최유찬 (1978~1980)
- 최재호 (1963~1980)
- 최종철 (1963~1980)
- 최화경 (1978~1980)
- 최희조 (1971~1980)
- 하금열 (1976~1980)
- 한중광 (1966~1973)
- 허선표 (1966~1976)
- 허태홍 (1971~1973)
- 홍선주 (1963~1975)
- 홍승국 (1973~1980)
- 황의방 (1970~1971)
- 황재홍 (1974~1980)
- 아나운서
- 강영희 (1970~1974)
- 김광진 (1972~1975)
- 김기경 (1968~1975)
- 김남호 (1963~1966)
- 김덕렴 (1969~1975)
- 김동건 (1963~1964)[24]
- 김신환 (1979~1980)
- 김연진 (1972~1975)
- 김영자 (1967~1975)
- 김은정 (1978~1980)[25]
- 김인권 (1963~1980)
- 김인옥 (1965~1968)
- 김정희 (1976~1979)
- 김주환 (1963~1980)
- 김진순 (1978~1979)
- 나동규 (1967~1968)
- 나정희 (1979~1980)
- 맹경순 (1973~1975)
- 박광희 (1965~1969)
- 박정희 (1968~1972)
- 박창옥 (1970~1971)
- 서정숙 (1967~1969)
- 성선경 (1963~1969)
- 손석기[26] (1976~1980)
- 송명신 (1976~1979)
- 송지헌 (1978~1980)
- 신선자 (1963~1965)
- 양은숙 (1976~1980)
- 오성근 (1975~1980)
- 우제근 (1963~1980)
- 우종란 (1975~1976)
- 원예종 (1964~1980)
- 원창호 (1963~1980)
- 유재관 (1970~1973)
- 유영옥 (1964~1965)
- 윤미자 (1963~1965)
- 윤소자 (1967~1971)
- 이경자 (1969~1975)
- 이규영 (1963~1980)
- 이동운 (1965~1975)
- 이미경 (1976~1980)
- 이미선 (1978~1980)
- 이선미 (1970~1980)
- 이숙영 (1979~1980)
- 이재민 (1973~1975)
- 임선희 (1976~1979)
- 임수진 (1970~1975)
- 임옥자 (1979~1980)
- 전순식 (1965~1968)
- 전윤표 (1978~1980)
- 정철의 (1972~1980)
- 조돈승 (1970~1974)
- 조동오 (1967~1974)
- 채수일 (1978~1980)
- 최경자 (1965~1970)
- 최귀영 (1963~1965)
- 최남경 (1972~1975)
- 최문정 (1964~1970)
- 최승일 (1963~1964)
- 최윤락 (1976~1980)
- 최희자 (1965~1969)
- 한순옥 (1963~1973)
- 한현수 (1969~1975)
- 함명혜 (1979~1980)
- 현옥 (1976~1980)
- 홍명진 (1970~1975)
- 성우
1.8. 출신 인물
본 방송국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훗날 MBC 사장을 지낸 최창봉 전 부국장이 있으며, 아나운서나 진행자로는 <유쾌한 응접실>의 진행자였고, 이후 수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한 전영우와 시나리오작가 유한철, 프리랜서 아나운서 송지헌, 그리고 현재 SBS 러브FM[34] <이숙영의 러브FM> MC 이숙영, 전 SBS 스포츠 캐스터 손석기 아나운서가 있고, 기자로는 이정석, 이병도, 최재호, 박창현, 신상래, 최동호, 장순재, 최종철, 하금열 등이 있다. 그리고 가요무대로 유명한 김동건도 DBS 출신이며 TBC를 거쳐 73년부터 KBS 아나운서로 근무했다
송지헌과 이숙영은 1979년에 DBS 아나운서로 입사했다가 1년만에 언론통폐합으로 KBS로 이적했다. 송지헌은 <생방송 전국은 지금>, <추적60분>, <생방송 심야토론> 등을 각각 진행했고, 이숙영은 아침 라디오방송 "FM 대행진"을 진행하며 레전드로 남았다. 기자들 중 최동호는 통폐합 후 KBS로 이직해 1981년부터 5년 간 KBS 9시 뉴스 앵커를 지내며 이름을 날렸고 부사장까지 승진했다. 마지막 <DBS 뉴스쇼> 앵커 최종철도 폐국 후 동아일보사로 발령나 체육부장, 도쿄지사장, 출판국 부국장, 심의실장 등을 맡다가 1992년 SBS로 이직해 보도본부장, 전무이사, SBS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재직했다.
1.9. 기타
채널A가 개국하기 이전, 동아일보사에서 과거 동아방송의 콘텐츠를 가지고 재방송 위주 인터넷 방송을 운영한 일이 있으며, 채널A 개국 이후에는 홈페이지 업데이트를 전혀 하고 있지 않고 있다.[35] 하지만 페이지 자체는 아직 남아 있으며 dbs.donga.com으로 접속 가능하다.
1.10. 관련 문헌
- <동아방송사>. 동아일보사. 1990.
2. 인터넷 언론사
동아방송 홈페이지
위 1.의 방송국의 이름을 딴 인터넷 방송.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인터넷 뉴스와 함께 직접 제작한 영상뉴스를 제공한다. 인터넷 도메인은 www.dbstv.co.kr이다. 1.의 동아방송이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져서 이름이 사라진 틈을 타 '''동아방송'''이라는 한글 명칭과 ''''DBS'''(Dong-A Broadcasting System)이라는 영문 명칭[36] 을 사용하고 있다.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면 과거 1.의 동아방송과의 어떠한 연계성도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과거 자유게시판에 1.의 동아방송 출신 기자들의 명칭사용에 대한 항의글을 보면 1.의 동아방송은 물론 현재 동아일보와도 어떠한 관계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JTBC가 TBC 대구방송 때문에 TBC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 것처럼 이 동아방송 때문에 채널A가 동아방송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확실치는 않다. 애당초 채널A가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여러 회사의 콘소시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동아방송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 소규모 인터넷 언론이므로 동아일보에서 명칭을 찾아오려 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광주동아방송'이라는 광주•전남 지역 전문인 자회사도 있다. 광주동아방송 홈페이지
[1] 동아방송보다 1년 먼저 생겨나 같은 날 문을 닫았던 동양방송은 라디오와 TV가 각각 독립법인으로 출발했다가 1974년 중앙일보와 완전 통합됐다. 물론 독립자본으로 세워진 매체들이었지만 이후 삼성그룹에 인수된 것이다.[2] 전국구라 해봤자 TBC의 경우 TV는 수도권과 부산권, 라디오는 수도권과 호남권(광주, 군산), 영남권(대구)에만 방송되던 안습했던 네트워크. TBC는 부산에 직할국을 세우고 호남권의 전일방송, 서해방송, 영남권의 한국FM방송과 제휴했다. 부산에서 시작한 MBC가 서울본사를 개국하고 지방 민영방송들을 계열화하며 단일 브랜드로 큰 것과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된 이유는 TBC가 당시 TV방송국 가운데서는 정부통제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방송사였기 때문에(완전히 자유로웠다는건 아니다.) TBC에게 전국방송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그렇다.[3] 개국 당시 주파수는 1230㎑였으나 해당 주파수에 다이얼을 잡기 힘들고 외국 라디오 방송이 섞여나오는 혼선이 빚어지는 등 수신 상태가 나빴다. 결국 1966년 12월 4일부터 790㎑로 주파수를 변경했고 1975년 10월 국제전기통신연합이 라디오 주파수 간격 재배정을 결의한 이후 1978년 11월 23일부터 792㎑로 바뀌게 된다.[4] 서울 1호선은 개착식으로 지어져서 심도가 얕았고 전철의 진동이 그대로 사옥으로 전해졌다! 특히 지하 1층 윤전기가 문제여서, 현재의 청계천 옆자리에 신사옥이 지어지기 전까지 근 20년간 동아일보가 충정로에 있었던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5] 라디오로 매 시각 15분마다 뉴스를 방송한다.[6] 소위 '조중동'으로 색채가 바뀌어버린 지금도 보수 3사 중에서 제일 이빨을 심하게 까는 게 동아일보다.[7] 현 더샵아일랜드파크. 여의도 KBS 본관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다. 동아방송이 폐국되자 방송국으로 쓰려던 건물의 용도를 문화센터로 바꿨는데 이것이 사설 평생교육기관인 동아문화센터였다. 동아문화센터는 2004년 마포구로 이사를 갔고 문화센터가 있던 건물은 바로 철거돼 주상복합 아파트가 새로 지어졌다.[8] 1981년 9월 7일 KBS 라디오서울로 개칭했다.[9] SBS의 법인인 주식회사 서울방송이 세워진지 2주 정도 후였다.[10] 신성호 성우는 언론통폐합에 반발하여 KBS 합류를 거부하고 1980년 11월 30일 동아방송을 나가고 1982년 MBC로 이직하였다.[11] 이후 동아일보 부사장, 사장, 상임고문, 비상임고문 역임. 2002년 작고.[12] 이종우 전 고려대 총장의 장남. 이후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역임.[13] 전 동아일보 사회부장, 편집국장. 폐국 이후 연합통신 상임감사 역임. 2005년 작고.[14] 이후 서울중앙방송국장, 한국방송공사 초대 부사장,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MBC 사장 역임. 2016년 작고.[15] 1978년까지 아나운서실장 겸임.[16] MBC 시사제작1부장, OBS 부사장을 역임했다.[17] 언론통폐합 후 MBC로 이적, 1991년 SBS로 이적후 SBS사장을 역임했다.[18] 제주 출신 퇴사후 고향 제주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한 후 KBS로 이적 KBS종합뉴스 초대앵커를 지냈다. 1981년과 1996년에도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다.[19] 언론통폐합 후 KBS로 이적했다가 1994년 YTN 이적 후 사장까지 역임했고, 한국케이블TV협회장을 지냈다.[20] 언론통폐합 후 KBS로 이적[21] 언론통폐합 후 KBS로 이적. 1991년 SBS 이적[22] 언론통폐합 후 MBC로 이적. 1991년 SBS 이적[23] 언론통폐합 후 KBS로 이적. 1982년 KBS 9 뉴스 앵커. 1993년 KBS보도본부장 겸 9시뉴스 앵커.[24] 1964년 동앙방송(TBC) 이적. 1973년 KBS 이적[25] 언론통폐합 후 KBS라디오 리포터로 활동. 1990년 서울교통방송(TBS) 이적. 1991년 실종후 생사불명[26] 前 KBS, SBS 아나운서[27]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5200020920601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5-20&officeId=00020&pageNo=6&printNo=12786&publishType=00020[28]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6070020920301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6-07&officeId=00020&pageNo=3&printNo=14042&publishType=00020[29] 당시 한동휘로 활동했다.[30] 1년 동안 활동하다가 연기를 하기 위해 사직했다고 한다.[31] 8명 뽑는데 517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92400209205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9-24&officeId=00020&pageNo=5&printNo=17224&publishType=00020[32] 연극배우를 꿈궜지만 그 때 연극배우로도 활동 중이었던 박정자, 장미자, 장건일 등을 보고 성우시험에 지원했다고 한다.http://175edu.gwanak.go.kr/board.read?mcode=1315&code=I&page=6&id=10&num=10[33] 언론통폐합에 반대하여 1980년 11월 30일 탈퇴하고 1982년 MBC로 이적하였다.[34] 공교롭게도 SBS 러브FM의 AM주파수가 792KHz, 동아방송 주파수다.[35] 신문-방송의 겸영이 법적으로 금지되던 시절에 과거 동아방송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언론통폐합에 대해 강하게 디스하고 있는 내용을 해당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시기 중앙일보도 비슷한 성격의 사이트가 중앙일보 내에 있었다.[36] 둘 다 과거 동아일보가 운영하던 동아방송의 정식 명칭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