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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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97년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이 천문령에서 무주(武周)의 군대를 격파한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대조영은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다.
2. 사서 기록
기록이 굉장히 별 것 없다.
盡忠既死,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 先破斬乞四比羽, 又度天門嶺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眾以拒楷固; 王師大敗, 楷固脫身而還.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는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여, 먼저 걸사비우를 물리쳐 목을 베고, 이어서 대조영을 추격하여 천문령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모아서 이해고에 대항하자 황제가 보낸 군대는 대패했고, 이해고는 겨우 탈출해서 돌아왔다.
이 2가지가 천문령 전투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대조영에 대한 기록이 워낙 부족하고, 천문령 전투 기록은 더 별 것 없다. 여기에 뭔가 더 붙는 부분은 모조리 추측.比羽不受命,后詔玉鈐衛大將軍李楷固、中郎將索仇擊斬之。是時仲象已死,其子祚榮引殘痍遁去,楷固窮躡,度天門嶺。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楷固敗還。
걸사비우가 명령을 받지 않자 측천무후가 옥금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삭구에게 조서를 내리니, 공격해서 목을 베었다. 그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 아들 대조영이 잔당을 이끌고 달아나자, 이해고가 추격해서 천문령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대로써 이해고에게 대항하자, 이해고는 패해서 돌아왔다.
3. 배경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후 당나라 영역에 복속된 지방의 고구려계 유민들은 당나라의 감시를 받으며 여러차례 옮겨졌으며 대조영이 이끄는 집단은 당나라의 성방[5] 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당은 고구려 멸망 직후에 검모잠 등이 일으킨 고구려 부흥운동을 크게 진압한 후였고, 남아있는 고구려 유민들이 추가 반란을 일으킬 것에 우려하여 유민들을 계속 감시하였다. 이로 인해 당나라 경내의 고구려 유민들은 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일으키지 못하고 한동안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696년, 상황이 급변하였는데 당시 거란족의 이진충이 당을 계승한 무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자 무주 조정은 고구려 유민들이 거란의 반란군과 동조할 것을 우려하여 성방의 이민족 집단을 유주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대조영은 이에 항거하였으며 대조영의 이러한 결정에 따라 같은 해 9월 거란군과 무주군이 전투를 벌이는 사이 대조영 집단은 걸사비우의 말갈족들과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동의 옛 고구려 땅에서 세력을 점차 키워갔다.
무주 조정은 결국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당시 요동지방에서 대조영은 이미 세력을 크게 키운 후였고, 이들과의 정면충돌에서 일어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무주의 성신황제는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회유하기 위해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6] 에 봉하였다. 한낱 유민들의 지도자인 대조영과 말갈족인 걸사비우에게 이러한 엄청난 조건을 내세운 점은 당시 이들의 세력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걸사비우는 단호하게 무주 조정의 작위를 거절하였으며, 걸걸중상 역시 단호하게 거절하진 않았지만 얼마 안가 병사함으로서 결과적으론 받지 않은 셈이 되었다.
그러나 대조영은 무주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행보의 의지를 명확히 했다. 그러자 무주는 이들의 행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거란군에서 항복한 거란인 장수 이해고를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겸 연공(燕公)[7] 으로 삼아 공격해왔다.
4. 전개
최초 무주군의 공격을 받은 대조영과 걸사비우 집단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 때 피해가 얼마나 컸나면 말갈의 수장이었던 '''걸사비우가 전사했다!'''
지도부가 전사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가 되었고, 후퇴를 하면서 전투를 계속했다. 대조영 휘하 집단은 무주군의 추격을 피해 천문령으로 이동했다. 이해고와 그의 거란 기병은 천문령으로 진격하였고, 전개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승리를 거뒀다.
5. 결과
이 전투로 인해 무주군은 요동 지방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에 무주 조정은 직접 중앙군을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이들이 물러난 후 거란과 해가 돌궐에 복속되어 무주가 대조영 집단을 공격할 수 있는 길이 틀어 막힌다.[8]
그 사이에 대조영은 더욱 동쪽으로 이동하여 계루부의 옛 땅을 차지하고 오늘날의 길림성 돈화시에 있는 동모산에 성을 축성하고 그 곳을 근거지로 삼았는데 하나 둘 말갈인들과 고구려인들이 지속적으로 모여들었다. 이를 발판으로 697년 세력을 다시 키운 대조영은 동모산을 도읍으로 정하고 국호를 '''진국'''[9] 이라 했다. 이 진국이 훗날 '''발해'''가 된다.
대조영 집단이 천문령 전투에서 무주군을 격파함으로써 동만주에 있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이 강대국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아울러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대조영 집단을 중심으로 많은 고구려 유민이 결속되었으며 발해 건국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6. 대중 매체
대조영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사극 대조영의 클라이맥스 전투로 나왔다.
[1] 발해사 학자 한규철은 요하의 지류이자 동만주로 통하는 길목인 길림성의 합달령 일대로 추정하고 , 송기호 역시 요동의 태자하 일대로, 방학봉, 박시형 등은 요서지방이나 요하 서변 즈음으로 추정한다.[2] 자치통감, 신당서 등에는 하북성 승덕시~내몽골 적봉시 사이의 지명으로 명확하게 나와있다.[3] 보통 당나라와의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이미 690년에 예종에게 선위를 받은 측천무후가 국호를 주(周)로 바꾸면서 당이 일시적으로 멸망한 상태였다.[4] 신당서에 병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요동 방면으로 이동한 이후 얼마 안돼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전투 중에 죽은 것은 아닌 듯.[5] 이민족으로 구성된 반전문적 군사집단으로 당이 유목민들의 군사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6] 당 왕조에서 국공은 '''종1품'''에 포함되며, 사왕(嗣王, 계승을 받은 왕), 군왕(郡王) 아래의 3번째 직위였다. 당의 체계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은 무주에서도 많이 다르진 않았다.[7] 이해고에게 연공의 작위를 내린 건, 연 지역이 거란에 포함되어 있는 것 이외에도 대조영 세력의 근거지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대조영 세력과 거란을 싸우게 하고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려는 전형적인 이이제이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8] 또한 당시의 무주는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의 압박을 꾸준히 받고 있었고 바로 2년 전에는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營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천문령 전투가 벌어지던 697년에는 묵철가한이 무주의 요청으로 이진충을 박살냈지만 되려 영주와 승주(勝州=내몽골 일대)를 노략질했다가 평적군부사(平狄軍副使)로 임명된 안도매(安道買)가 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물러났을 정도로 상황이 막장이었다. 무주로서는 눈에 거슬리는 대조영 집단을 대군을 내어 잡고 싶어도 그럴 요건이 안되었던 것.[9] 아이러니하게도 걸걸중상이 받지 못한 진국공의 '진국'이라는 명칭이 훗날 대조영이 건국했을 때 첫 국호로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다만 구당서와 신당서의 한자표기가 서로 다른데, 구당서는 '振國', 신당서는 '震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