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걸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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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아버지. 신당서에는 사리걸걸중상(舍利乞乞仲象), 오대사에는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으로 되어 있다. 걸걸이 사실 성인지 그냥 이름의 일부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한국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의 시조다.
기록상 '고구려의 별종'으로, 영주에 거주하다가 이진충의 난이 일어나자 말갈의 추장인 걸사비우와 함께 동만주로 이주하였고, 측천무후에 의해 진국공으로 책봉되었으나 이내 병으로 죽었다.[1] 이 측천무후 시절의 당나라에 귀순한 거란족인 이해고를 보내어 걸걸중상측을 공격하자 그의 아들 대조영이 걸걸중상의 병사로 지도자를 잃은 고구려인 집단과 걸사비우의 전사로 지도자를 잃은 말갈인 집단을 아울러 이해고를 물리치고 발해를 세웠다.
2. 생애
구당서에는 이 사람의 활동이 죄다 대조영의 것으로 처리되어 있어 등장하지도 않는다. 어떤 의미로는 안습. 따라서 신당서와 오대사의 기록을 토대로 대조영의 초기 활동을 걸걸중상의 것으로 보게 된다.
영주는 요서 지방으로 그 치소는 유성(柳城) 즉 오늘날의 차오양(朝陽)이었는데, 고구려가 망하고 당나라로 이주당한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성공한 인물인 이정기나 왕사례도 영주 출신이었다. 대신 고선지는 일찌감치 내륙으로 이주당한 쪽이었다. 이 지방에는 고구려의 유민뿐만이 아니라 당나라에 복속된 말갈과 거란 사람도 모여 살고 있었는데, 당시 영주도독으로 있던 조문홰(趙文翽)가 각 부족 수령들의 권위를 무시하자 결국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켜 조문홰를 살해하고 가한을 자칭하였다. 걸걸중상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말갈의 추장인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와 말갈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동으로 달아나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들은 곧 요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에 자리잡았으며, 오루하(奧婁河)를 경계로 수비를 굳혔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오루하(奧屢河)란 곳은 지금의 액돈산(額敦山)에서 두 강이 나와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는데, 그 위도는 영주의 동쪽 2천 리로 조사되며, 중상이 나라를 세운 처음에 본디 백산의 동쪽에 웅거하였고 그 아들 조영은 잠시 달아났다 돌아왔으니, 백산의 동쪽에서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라고 하였고, '''만주원류고'''는 "오루하(奧屢河)는 마땅히 아로하(阿嚕河)이니, 수원은 길림 안반화탁봉(安班和托峯)에서 나와서 하나는 서남으로 흘러 합달하(哈達河)에 들어가고, 하나는 흘러 개원에 이르러 청하(淸河)에 들어간다."고 되어 있다. 근래에는 발해가 건국된 동모산 부근으로 보려는 주장이 있지만, 오루하는 단순히 세력이 미치는 경계이지 반드시 중심 거점과 인접해 있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신당서에 따르면, 이에 측천무후는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을 각기 허국공(許國公)과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고, 지금까지의 죄는 사면해준다는 말로 두 사람을 회유하였다. 하지만 걸사비우는 이를 거부하였고, 걸걸중상은 다른 기록은 없지만 역시 거부했거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어버리면서 중간에 흐지부지 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에는 걸걸중상의 반응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단지 "비우가 명을 받지 않았다.(比羽不受命)"고만 되어 있다. 걸걸중상의 사망에 대해서는 신당서에 "중상이 이미 죽어, 그 아들 조영이 해고의 군대를 패배시켰다.(仲象已死 其子祚榮 敗楷固兵)"고 되어 있고, 신오대사에 "걸사비우가 격살되고 걸걸중상 역시 병들어 죽으니, 중상의 아들 조영이 섰다.(擊殺乞四比羽 乞乞仲象亦病卒 仲象子祚榮立)"는 기록이 있다.
이에 측천무후는 마침내 이해고와 삭구 등에게 조서를 내려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걸사비우는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걸걸중상의 뒤를 이은 대조영이 지도자를 잃은 말갈을 아우르면서 천문령을 넘어 추격해오는 이해고를 무찔렀다. 흔히 천문령에서 무찔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기록상에는 천문령을 넘어서 추격해오자 무찌른 것으로 되어 있다. 때마침 중간에 있는 거란 등이 돌궐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측천무후는 더이상 대조영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이후 대조영은 계루의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을 근거지로 성력(698~700) 중에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발해이다.
3. 의문점
대조영과 함께 어디 출신인가가 상당한 논쟁 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발해의 역사 계승 문제와도 관계가 깊다.
걸걸중상은 기록의 표현을 옮기자면 본래 고구려의 '별종'으로 당나라의 영주 지방에 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구당서에는 걸걸중상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고 단지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단순히 기록하고 있을 뿐이며, 신당서에는 걸걸중상이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대조영의 아버지라는 것 외에는 그 신분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신당서에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며, 성은 대씨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말갈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발해라고 칭했다.'라는 기록이 적혀있다. 그리고 신오대사에서는 '고려별종 대걸걸중상'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또한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부르며, 고려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별종이란 뜻은 다르다는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보통 고구려 사람과 구분이 되면서도 연계성이 있다라는 뜻도 있다.
걸걸중상에 대한 가장 큰 의문점은 신당서의 기록에는 분명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당나라 때의 역사를 다룬 구당서에는 존재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당서에 따르면 대조영은 가족을 데리고 영주로 이주했다가 696년에 거란의 반란이 일어나자 걸사비우와 함께 동쪽으로 도주하였다. 그리고, 걸사비우가 이해고와 싸우다가 죽자 잔당을 이끌고 천문령에서 이해고와 싸워 이겼고 후에 발해를 세웠다. 다시 말하자면 구당서에서 대조영은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행적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구당서에서 대조영과 걸걸중상이 동일인물로 간주되었으나 훗날의 신당서에서 다시 구분되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하며, 애초에 '''대조영과 걸걸중상이 동일인물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아들인 대조영은 분명 성이 대(大)씨인데 걸걸중상의 이름에는 대(大)자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도 의문점이다. 애초에 신당서에도 발해 왕족은 성씨가 대씨라고 언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에 대해서는 걸걸중상 이름의 첫글자인 걸걸(乞乞)은 본래 말갈족의 성씨로 대조영 역시 본래 같은 성씨였으나 후에 성씨를 다시 지었다는 설도 있고 혹은 이름 앞의 걸걸(乞乞)이 그저 일종의 존칭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다. 또한 걸걸(乞乞)이라는 말 자체가 '크다'라는 뜻이며 즉 대(大)와 의미가 같으니 실상은 같은 글자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혹은 신당서와 오대사의 명칭을 비교하며 '걸걸(乞乞)'이 아니라 '사리(舍利)'가 대(大)에 해당된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중 '''명확한 설'''은 없다.
때문에 족보나 드라마 등에서는 가끔 아들인 대조영과 성씨를 맞추기 위해(...) 기록에 남아있는 이름 대신 대중상(大仲象)으로 개명당하는 경우도 있으나[2] 정식 사서에 남아있는 기록중에 걸걸중상의 이름을 '대중상'이라고 표기한 사례는 '''전혀 없다.'''
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사서에 기록된 본래 이름인 '걸걸중상'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개 대조영과 성씨를 맞춰 대씨로 등장한다. KBS의 사극 삼국기에서는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이라는 이름으로 등장. 배우는 이후 대조영에서 부기원 역할을 맡았던 김하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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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같은 방송사에서 방영한 대조영에서도 대중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중견배우 임혁이 열연하였는데, 카리스마있고 중후한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여기서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부터 고구려 장수였다고 묘사되지만 (그리고 고구려 최서단의 보루인 고려성이란 곳의 성주로 부임했다고 나오지만) 그리 신빙성은 없다. 드라마가 중반이후 산으로 갔음에도, 임혁의 열연이 극의 무게감을 더했고 이후 임혁은 연말 시상식에서 조연상을 수상했다. 다만 역사대로라면 중반쯤에 죽었어야 할 대중상이 '''최후의 전투'''에서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고의 동귀어진으로 죽는 등 역사왜곡이 있었다. 고돌발과 의형제로 묘사된다. 여담으로 배우가 임혁인지라 작중 설정상 그의 상관인 양만춘과 비슷한 나이대 처럼 보이나,[3] 대중상이 대조영에게 양만춘은 자신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작중 설정상 양만춘과 대중상의 나이차는 꽤나 많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걸걸중상은 안시성 전투보다도 50여년 후에 사망했으니 상식적으로 이때 20대, 최대 30대거나 아니면 90대까지 장수한 괴물이 돼야 한다. 그래도 그 안시성 전투보다도 40여년 전에 벌써 청년 장수로 나오는 밑의 연개소문보다는 낫다."고구려의 장졸들은 내 마지막을 똑똑히 보아두거라! 우리가 이 싸움에서 패한다면 살아서도 꿈을 잃을 것이나 승리를 한다면 우리는 죽어서도 지킬 나라가 생길것이다!
나 대중상은 이제 마지막 칼을 뽑아 부끄럽지 않은 생을 마치려 한다!
'''살아서 꿈을 잃느니 죽어서도 이 천문령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리라!!!"'''
한편 SBS에서 방영한 연개소문에서는 걸걸중상도 대걸걸중상도 대중상도 아닌 기록에서 전혀 안 보이는 '''대걸중상'''이란 괴상한 이름으로 등장하며(대걸을 성으로 취급해서 '대걸 장군'이라고 지칭),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인 영양왕 시기 제1차 고구려-수 전쟁 때 이미 장수로 활약했던 것처럼 묘사되었다.[4] 연개소문이 아직 아역으로 나올때 이미 고구려의 청년 장수로 나왔으니 적어도 나이도 연개소문 보다도 나이가 10여살 위일텐데.... 나중에 연개소문이 아역에서 이태곤으로, 이태곤에서 유동근으로 바뀐 이후 연개소문과 만났을때 "우린 나이도 비슷하고." 라는 대사를 친다. 기록에 없는 대걸중상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도 그렇고 설정 붕괴까지 있으니 이 드라마가 얼마나 개판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 중년 이후 대걸중상의 배역은 송금식이 맡았는데 그는 훗날 정도전에서 변안열을 맡아 유동근이 맡은 이성계에게 숙청당하는 배우 개그를 보여준다.
[1] 당시 당나라는 690년에 측천무후가 즉위하여 국호를 주나라로 바꾼 상태였다. 그러다 측천무후가 15년 만에 밀려나면서 다시 당나라로 복구되기에 정식 왕조로 치지 않는다.[2] 이러면 이름 어감도 좀 더 자연스러운 한국사 인물 이름같아 보이는 것도 있다.[3] 배우개그로, 임혁은 실제로 삼국기에서 양만춘 역을 맡은 적이 있다.[4] 이 설정부터가 이상하다. 제1차 고구려-수 전쟁은 598년에 시작되는데, 역사상 걸걸중상은 발해 건국(698) 직전인 697년 경에 사망한다. 따라서 그가 제1차 고구려-때 이미 장수였다면 100년 하고도 한참 더 산 게 된다. 심지어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 당시 이미 머리와 수염이 새하얀 노인으로 등장하는데, 역사적으로는 그러고도 30년은 더 활동을 해야 하니 사실상 동명이인 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