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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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 왕조의 건국군주.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서 고구려의 유민들을 국외로 강제 이주시켰으나 영주 지역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수가 있었다. 가혹한 통치로 거란인들이 봉기하여 영주 일대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걸사비우가 전사한 후 말갈과 고구려의 무리들을 규합하여 계속 동쪽으로 진군해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군을 무너뜨렸으며 다시 동쪽으로 향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을 기반으로 발해를 세웠다. 대조영의 기세가 강해져 만주 일대를 뒤덮기 시작하자 당나라에서도 유화적으로 나와 '좌효위원외대장군 홀한주 도독 발해군왕' 등의 칭호를 주기도 했다.
698년 진(震/振)이라는 국호를 정했다가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봉하면서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3]
중국의 기록 외에는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 등에 대조영이 언급되는데 이에 따르면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고[4] 신라에서는 대조영에게 5품 관등 대아찬을 주었다.[5] 해당 글에서 최치원은 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며 얕잡아 보기도 했다.
2. 관련 기록
대조영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탓에 남아 있는 《오대회요》, 《구당서》, 《신당서》, 《신오대사》에 실려 있는 대조영 기사의 전문을 수록한다.
2.1. 《오대회요》
당나라 총장 연간에 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그 무리들을 중국에 흩어져 살게 하면서 요(遼) 바깥에 두었으며
평양에는 안동 도호부를 두어 통솔하였다.
만세통천 중에 거란 이만영이 반란하여 영부를 함락시켰는데, 고려의 별종인 대사리 걸걸중상이 있었다[6]
걸걸중상은 말갈의 반역자 걸사비우의 무리와 함께 요동을 지키면서 고려의 땅을 나누어 왕 노릇을 하였다.
측천이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대사리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봉하였는데 걸사비우가 거절하였다.
측천이 장군 이해고로 하여금 진을 무너뜨리고 참수하게 하였다.
걸걸중상이 죽자 그 아들 대조영이 이어 즉위하고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다.
승병 정호(勝兵丁戶)가 40여만이었으니[7]
등이 읍루의 고지에 웅거하여 지켰다ㅡ五代會要 卷三十 渤海
ㅡ 오대회요 30권 발해
2.2. 《구당서》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高麗既滅, 祚榮率家屬徙居營州.
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구)려(高麗)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가족을 데리고 영주(營州)로 이주했다.
萬歲通天年, 契丹李盡忠反叛,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 保阻以自固. 盡忠既死,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 先破斬乞四比羽, 又度天門嶺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眾以拒楷固; 王師大敗, 楷固脫身而還. 屬契丹及奚盡降突厥, 道路阻絕, 則天不能討, 祚榮遂率其眾東保桂婁之故地,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만세통천년[8]
에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則天)는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여, 먼저 걸사비우를 물리쳐 목을 베고, 이어서 대조영을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모아서 이해고에 대항하자 당군(王師)은 대패했고, 이해고는 겨우 탈출해서 돌아왔다. 때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突厥)에 항복해서 도로가 막히게 되어 측천무후가 토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조영이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의 계루부가 있던 땅을 차지하여 동모산을 근거지로 삼아 성을 쌓고 그곳에 살게 되었다.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眾及高麗餘燼, 稍稍歸之. 聖曆中, 自立為振國王, 遣使通於突厥.
대조영은 용맹하고 용병에 뛰어났기 때문에 말갈 무리 및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聖曆, 698년 ∼ 699년) 중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이 되었고 사신을 보내서 돌궐과 연락했다.
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 南與新羅相接。越熹靺鞨東北至黑水靺鞨, 地方二千里, 編戶十余萬, 勝兵數萬人. 風俗瑟高麗及契丹同, 頗有文字及書記.
영토는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 리에 있었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맞닿았다. 월희말갈(越熹靺鞨) 동북쪽으로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이르렀고, 영토가 사방 2000리에 편제된 가구(編戶)가 10여만 호, 강군(勝兵)이 수만 명이었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거의 같았으며, 제법 문자를 쓰고 기록을 할 줄 알았다.
中宗即位, 遣侍御史張行岌往招慰之. 祚榮遣子入侍, 將加冊立, 會契丹與突厥連歲寇邊, 使命不達. 睿宗先天二年, 遣郎將崔昕往冊拜祚榮為左驍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 仍以其所統為忽汗州, 加授忽汗州都督, 自是每歲遣使朝貢.
중종(中宗)이 즉위하자(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을 보내 그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대조영이 아들을 황제에게 보내자(入侍), 책립을 내리려고 했지만 거란과 돌궐이 함께 계속해서 변경을 약탈하는 바람에 명을 받든 사신이 도달하지 못했다. 예종(睿宗) 선천(先天) 2년(713년)에 낭장(郎將) 최흔(崔昕)을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다스리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만들어 홀한주도독(都督)의 벼슬을 추가하자, 그때부터 매해 조공 사절을 보내게 되었다.
開元七年, 祚榮死, 玄宗遣使弔祭. 乃冊立其嫡子桂婁郡王大武藝襲父為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
개원(開元) 7년(719년)에 대조영이 죽자 현종(玄宗)이 조문 사절을 보냈다. 또한 그 맏아들 계루군왕(桂婁郡王) 대무예(大武藝)로 하여금 아버지 뒤를 잇게 해서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책립했다.
ㅡ舊唐書』卷212下「列傳」第149下 ‘北狄'
ㅡ 구당서 권 212 하 열전 제 149하 북적
2.3. 《신당서》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高麗滅,率衆保挹婁之東牟山,地直營州東二千里,南比新羅,以泥河爲境,東窮海,西契丹。築城郭以居,高麗逋殘稍歸之。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붙은 이들이며 성은 대 씨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을 차지했는데, 영토는 영주로부터 동쪽으로 2000리에 위치했고 남쪽으로 신라에 대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하였으며, 동쪽은 먼 바다, 서쪽은 거란이었다. 성곽을 쌓아 그곳에 살게 되자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萬歲通天中,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有舍利乞乞仲象者,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奧婁河,樹壁自固。武后封乞四比羽爲許國公,乞乞仲象爲震國公,赦其罪。比羽不受命,后詔玉鈐衛大將軍李楷固、中郎將索仇擊斬之。是時仲象已死,其子祚榮引殘痍遁去,楷固窮躡,度天門嶺。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楷固敗還。於是契丹附突厥,王師道絕,不克討。
만세통천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이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를 막아 성벽을 쌓아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측천무후
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고 그 죄를 사면했다. 걸사비우가 명령을 받지 않자 측천무후가 옥금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中郎將) 삭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리니, 공격해서 목을 베었다. 그때 걸걸중상이 죽고 그 아들 대조영이 잔당을 이끌고 달아나자, 이해고가 추격해서 천문령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대로써 이해고에게 대항하자, 이해고는 패해서 돌아왔다. 그때 거란이 돌궐에 붙어 길이 막히게 되어서 당군이 토벌할 수 없었다.[武后]
祚榮即並比羽之衆,恃荒遠,乃建國,自號震國王,遣使交突厥,地方五千里,戶十余萬,勝兵數萬。頗知書契,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하더니, 아득히 먼 것을 믿고 건국해서 스스로 진국 왕이라 일컬으며 사신을 보내서 돌궐과 교류했는데, 영토가 사방 5000리에 가구가 10여만 호, 강군이 수만 명이었다. 제법 글을 쓸 줄 알았고,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해북(海北)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中宗時,使侍御史張行岌招慰,祚榮遣子入侍。睿宗先天中,遣使拜祚榮爲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以所統爲忽汗州,領忽汗州都督。自是始去靺鞨號,專稱渤海。
중종 때 시어사 장행급을 사신으로 보내서 회유하자, 대조영이 아들을 황제에게 보냈다. 예종 선천 중에 사신을 보내서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의 벼슬을 내리고 다스리는 지역을 홀한주로 만들어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그때 처음으로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 칭하게 되었다.
玄宗開元七年,祚榮死,其國私諡爲高王。
현종 개원 7년 대조영이 죽자 그 나라가 사사로이 시호를 고왕(高王)이라고 했다.
ㅡ『新唐書』卷219「列傳」第144 ‘北狄’
ㅡ 신당서 권219 열전 제114 북적
2.4. 《신오대사》
渤海,本號靺鞨,高麗之別種也。唐高宗滅高麗,徙其人散處中國,置安東都護府於平壤以統治之。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부르며 고구려의 별종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사람들을 이주시켜 중국에 흩어져 살게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그들을 통치하였다.
武后時,契丹攻北邊,高麗別種大乞乞仲象與靺鞨酋長乞四比羽走遼東,分王高麗故地,武后遣將擊殺乞四比羽,而乞乞仲象亦病死。仲象子'''祚榮'''立,因并有比羽之眾,其眾四十萬人,據挹婁,臣于唐。
측천무후 때에 거란이 북쪽 변방을 공격하자, 고구려의 별종인 대걸걸중상이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임금 노릇을 하니, 무후가 장수를 파견하여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였고, 걸걸중상은 병들어 죽었다. 중상의 아들 '''조영'''이 즉위하여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는데, 그 무리는 40만 명으로서 읍루에 웅거하며 당의 신하가 되었다.
至中宗時,置忽汗州,以祚榮為都督,封渤海郡王,其後世遂號渤海。其貴族姓大氏,開平元年,國王大諲撰遣使者來,訖顯德常來朝貢。其國土物產,與高麗同。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홀한주를 설치하여 조영을 도독으로 삼고, 발해군왕에 책봉하니, 그 후세에 마침내 발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귀족의 성은 대씨이다. 개평 원년(907년)부터 국왕 대인선이 사신을 파견해와, 현덕(顯德) 연간이 끝날 때까지[9]
항상 와서 조공하였다. 나라의 토산물은 고구려와 같았다.諲撰世次、立卒,史失其紀。
인선(諲譔)의 세차(世次)와 즉위년(即位年)·졸년(卒年)[10]
등은 사관이 그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ㅡ 新五代史·卷七十四四夷附錄第三
ㅡ 신오대사 권74 사이부록제3
3. 사료 부족에 따른 의문점들
3.1. 출신
출신 문제와 관련해서도 대조영이 어디 출신인지는 물론 어떤 가문 출신인지조차 파악이 안되고 있다. 흔히 걸걸중상과 부자지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조차 알 길이 없을 지경. 일단 사서에 대중상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것은 현재까지는 전혀 없다. 이 부분은 가장 골치 아픈 발해의 출신 문제, 즉 대조영이 고구려계인가 혹은 말갈계인가와도 맞닿아있다. 한 나라의 창업 군주라는 인물의 기록이 너무나도 부실해서 오늘날 알려진 그의 출신 배경 대부분은 추측의 영역에 불과한 것이 현실. 이에 대한 내용은 발해/역사귀속과 계승인식에서 다루고 있다.
3.2. 건국
국가의 기틀을 3년만에 잡았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잡았는지 기록이 전무한 탓에 알 수가 없다. 학계에서는 천문령 전투의 승리와 군사력을 통해서 그 시기까지 무주공산으로 존재하던 고구려의 영역과 여전히 엄존했을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하면서 급속히 성장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당은 나당전쟁 패배, 토번과의 사투, 보장왕의 반란 등 악재가 겹쳐 옛 고구려 영역을 통치하지 못했고 신라 역시 삼국 통일로 얻은 영토를 추스려서 당과의 대립 과정 속에서도 최초로 약속한 대동강 ~ 원산만 라인을 넘어가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대립된 시점에서는 이미 발해 건국해서 다 먹은 뒤라는 이야기.
3.3. 재위
게다가 21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떻게 통치를 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는 실정이다. 한 나라의 건국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매우 빈약한데다 능의 소재조차 확실하지 않은 건 덤. 정효공주묘, 정혜공주묘, 무왕릉(정확하지는 않다), 룽터우 고분군의 발해 황후묘들만이 확인된 발해 시대의 무덤이다. 이는 발해의 사서라고 할 만한 기록들이 대부분 멸망 과정에서 소실되었기 때문.[11]
발해사 자체가 한국사, 중국사, 러시아사 모두에서 붕 떠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중국은 거란이 발해를 끝냈으면 끝냈지 긍정적으로 관여한 바가 없는데다 발해부흥운동으로 알 수 있듯 멸망한 발해의 강역이 순순히 요나라에 편입된 것도 아니었으며[12] , 한국은 발해의 영토 대부분을 고려가 수복하지 못하고 일부 유민이 합류한 것 외에는 발해를 확실히 아우르지 못했다. 이후에는 발해의 영토 대부분은 금나라가 차지했다.
한편 중국에서는 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지만[13] , 한국 사학계는 부여계 국가들을 한국사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대조영 역시 한민족 국가의 건국 시조로 여기고 있다. 그 결과 과거 국사 교과서에서 통일 신라 시대라 부르던 것도 지금은 남북국시대로 정정하고 국사 교과서에 발해사의 분량과 비중을 늘리는 등 대우가 좋아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늘리려 해도 태생적으로 기록이 부족한 편이라 안습한 실정이다. 발해 영토가 현재의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인데다 이쪽이 러시아 영토가 된 것도 근대 시점이기 때문에 러시아사로 편입되기에도 어불성설이다.
3.4. 연호 문제
과거에는 대조영이 천통(天統)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속설이 항간에 널리 퍼져있었고, 이런 내용이 국사교과서나 참고서 등에 정사인 듯 버젓이 실리기까지 했다. 지금도 가끔 이런 내용이 실린 참고서들이나 교재[14] 에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천통 연호가 실제로 사용되었는지는 밝힐 수 없다는 점과 관련 기록이 20세기 이전으로 소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구당서》와 《신당서》 등 발해의 역사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한 당대의 기록에는 발해의 역대 왕들이 사용한 연호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나, 대조영이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상술한 천통(天統) 연호는 위서(僞書)가 분명한 《환단고기》에 수록된 《태백일사(太白逸史)》[15] 에 대조영 대의 연호가 '천통(天統)'이었다고 전한다는 것이 최초라서 문제인 것이다.
천통 연호는 어윤적의 《동사연표(東史年表)》(1915) 304쪽 및 진단학회(震檀學會)의 《한국사연표(韓國史年表)》(1959년), 90쪽에도 채용되면서 은근히 정착된 경향이 있다. 사실 《환단고기》 자체가 70년대 즈음에 창작된 위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쪽이 먼저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천통 연호가 있었다는 주장이 근거를 믿을 만한 사료에 두지 않았으므로 신뢰도는 극히 낮은 편이다. 다만 금석문 등에서 황상 등 단어가 등장하므로 발해가 제국을 자칭했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고, 따라서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후 연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4. 가족 관계
- 아버지 걸걸중상
- 동생 대야발
- 아들 대무예: 발해의 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항목 참조.
- 아들 대문예: 항목 참조.
- 아들 대술예
- 아들 대창발가(大昌勃價): 727년 당으로 파견되어 숙위로 머물렀다가 발해로 귀환했다.
- 아들 대림(大琳): 729년 대호아와 함께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 아들 대호아(大胡雅): 729년 당에 파견되어 숙위로 머물렀다.
- 아들 대낭아(大朗雅): 730년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억류되어 736년에야 발해로 귀환할 수 있었다.
- 아들 대보방(大寶方): 727년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5. 기타
- KDX-2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의 3번 함인 DDH 977은 대조영의 이름을 따서 '대조영함'으로 명명되었다.
6. 대중매체에서
- 1992년작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 배우 임선택[16] 이 연기하였다. 안시성의 군관으로 고구려 멸망 후에도 항전하다가 안시성이 함락당한 후 양만춘[17] 으로부터 나라를 다시 세우라는 유언을 듣는다. 이후 최종 회에서 발해를 세우지만 천문령 전투는 생략되고 눈쌓인 벌판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개국을 선포하는 것만 나온다.
- 대조영을 주인공으로 다룬 드라마로는 2006년작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 배우 최수종이 연기하였다. 기록도 적고 이진충의 난 이전의 행보 자체도 불명인 인물이라 결국 창작한 설정이 많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많아서 까이기도 했고 여기 적혀 있는 얼마 안되는 기록의 대부분을 잘못 썼기도 했다. 당시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 등이 겹쳐서인지 시청률은 제법 높게 나왔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