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우
1. 개요
한국의 기자로 전라남도 목포 출신. 아버지는 호남은행 목포지점장이었던 최건홍(崔健洪)이며, 어머니는 허고도(許古道)이다. '''한국 언론 역사상 유일하게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순직한 기자이다.'''
2. 약력
2.1. 기자가 되기까지
전라남도 목포 출신으로 목포북교보통학교(北橋普通學校)[2] 에 입학, 4학년 때 부모를 따라 상경하여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제일고등보통학교[3] 에 수석합격하였다. 1942년 일본 시코쿠 고치고등학교(高知高等學校), 1944년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법학과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6월 일본 육군에 징병당하였다.
같은 해 9월 광복으로 귀국하여 바로 미군정청 외무처(外務處)에 들어가 1947년 외무처 동경공관의 섭외담당관으로 파견근무하였고,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는 주일 대표부 서기관급으로 봉직하였다. 이후 1950년 5월 재일동포 김남희(金南姬)와 혼인하고[4] , 같은 해 6월 주일대표부를 떠나 한국은행 조사부장이던 장기영을 도와 한국은행 동경지점 개설에 공헌하였다.
2.2. 기자가 되다
당시 장기영은 한국은행 조사부장에 있으면서 일본을 오갔고 이 과정에서 최병우와 면식을 쌓았다. 최병우의 뛰어난 영어실력과 개설업무의 능력을 인정한 장기영은 1952년 3월 한국은행 부총재직을 사임하고 경영난에 빠졌던 조선일보 사장이 되면서 그를 외신부장으로 기용하였다. 최병우는 이미 1951년, 부산에 귀국하면서 종군기자로 변신했는데 조선일보는 그가 취재기자로 활동하던 첫번째 직장이었다. 그는 장기영과의 인연으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으나, 외신의 정리·편집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종군기자를 자원하여 전선취재에 뛰어들었다. 그가 뛰어들어서 쓴 기사 중 하나가 바로 휴전협정을 다룬 기사였다.
이 기사를 포함한 르포를 통해 종군 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최병우는 1954년, 장기영을 따라 한국일보로 가게 되면서 그의 조선일보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된다.<기이한 전투의 정지>
백주몽(白晝夢)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학교 강당보다도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 측 기자단만 해도 약 100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명이 넘는데,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27일 상오 10시 정각, 동편 입구로부터 유엔 측 수석대표 해리슨 장군 이하 대표 4명이 입장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서편 입구로부터 공산 측 수석대표 남일(南日) 이하가 들어와 착석하였다. 악수도 없고 목례도 없었다. ‘기이한 전쟁’의 종막다운 기이한 장면이었다.
북쪽을 향하여 나란히 배치된 2개의 탁자 위에 놓인 각 18통의 협정문서에 교전 쌍방의 대표는 무표정으로 사무적인 서명을 계속할 뿐이었다. 당구대같이 퍼런 융에 덮인 2개의 탁자 위에는 유엔기와 인공기가 둥그런 유기 기반에 꽂혀 있었다. 이 2개의 기 너머로 휴전회담 대표는 2년 이상을 두고 총계 1000시간에 가까운 격렬한 논쟁을 거듭하여 온 것이다.
한국어·영어·중국어 세 가지 말로 된 협정문서 정본 9통, 부본 9통에 각각 서명을 마치면 쌍방의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으로 준다. 그러면 상대편 대표가 서명한 밑에 이쪽 이름을 서명한다.
정(丁)자형으로 된 220평의 조인식 건물 동익(東翼)에는 참전 유엔 13개국 군사 대표들이 정장으로 일렬로 착석하고 있으며 그 뒤에 참모장교와 기자들이 앉아 있다. 서익(西翼)에는 북쪽에 괴뢰군 장교들, 남쪽에 제복에 몸을 싼 중공군 장교의 일단이 정연하게 착석하고 있다.
양편의 수석대표는 북면하여 조인하고, 멀리 떨어져 좌우에 착석한 양측 장교단은 동서로 대면하고 조인하는 것을 주목하고 있다. 조인이 계속되는 동안 유엔 전폭기가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쏟고 있는 폭탄의 작렬음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었다. 원수끼리의 증오에 찬 정략 결혼식은 서로 동석하고 있는 것조차 불쾌한 듯이, 또 빨리 이 억지로 강요된 의무를 끝마치고 싶다는 듯이 산문적으로 진행한다.
해리슨 장군과 남일은 쉴 새 없이 펜을 움직인다. 각기 36번 자기 이름을 서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의식에 따르는 어떠한 극적 요소도 없고 강화에서 예기할 수 있는 화해의 정신도 엿볼 수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전’이지 ‘평화’가 아니라는 설명을 잘 알 수 있었다.
각기 자기 측 취미에 맞추어 가죽으로 장정하고 금(金)자로 표제를 박은 협정부도(協定附圖) 각 3권이 퍽 크게 보인다. 그 속에는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강토에 종횡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이렇게 의아(疑訝)해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곳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자답하였다.
10시 12분 정각, 조인작업은 필하였다. 해리슨 장군과 남일은 최후의 서명을 마치자 마치 최후통첩을 내던지고 퇴장하듯이 대표를 데리고 나가버린다. 남일은 훈장을 가슴에 대여섯 개 차고 있는 데 반하여 해리슨 장군은 앞 젖힌 여름 군복의 경쾌한 차림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관례적인 합동 기념촬영도 없이 참가자들은 해산하였다. [판문점 조인식장에서=최병우 특파원 發]
2.3. 한국일보 시절
1954년 6월 장기영이 한국일보를 창간하자, 그도 한국일보 외신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즉 최병우는 한국일보 초대 외신부장이었던 셈. 이듬해인 1955년에는 편집부 부국장으로 승진, 1956년 6월 영자지 코리아타임즈 편집국장으로 발탁되었다. 상당한 고속 승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장에 나가서 취재하기를 좋아했었다. 1958년 7월에는 당시 내란이 벌어지던 인도네시아로 가서 현지를 취재하기도 했고 귀국 직후인 그해 9월, 중화민국 진먼으로 출국했다.
그해 그의 직책은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코리아타임즈 편집국장이었다. 그리고 진먼으로 간 것이 그의 마지막 출장이 되었다.
2.4. 진먼 취재, 그리고 조난
1958년 9월 5일. 최병우는 포격전이 전개되던 진먼으로 출국하게 된다. 그가 일하던 한국일보는 그날 최병우의 파견 소식을 전했고 3일 뒤인 9월 8일자 신문을 통해 최병우와의 전화 인터뷰를 싣게 된다. 그가 9월 5일에 대만으로 간 것은 다른 언론사보다 소식을 더 빨리 전하기 위한 승부수였고 그는 첫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말을 한다.
9월 11일 진먼 섬에 상륙했지만 그가 탔던 지프차가 중화민국군 트럭과 충돌하여[5] 부상을 입고 타이베이로 후송, 9월 14일자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최병우는 이렇게 말했다.“금문도에 국부군 병력이 6개 사단 약 7만 명이며 전도가 군사기지화하고 있대요. 도민들도 있는데 금문도의 특산은 ‘배갈’이라니 재미있지요.”
이날 기사의 제목은 ‘금문도는 싸우고 있다’로 그가 직접 금문도를 보고 한국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이었다. 최병우는 또한 당 기사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전했다.“정신을 차리니 부서진 팔목시계가 9시 정각에서 스톱되어 있더군요.”
9월 15일에도 그의 취재는 이어졌다. 그는 그날 한국일보에 보내는 리포트를 통해 국부군이 중공군에게 포의 크기에서 밀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급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을 보냈다. 치료가 어느 정도 완료된 9월 말. 그는 다시 진먼 섬으로 향했다.“외과에 가니 네 개나 있는 수술대가 모두 만원, 중공측 포격으로 팔다리를 잘린 병사들이 수술을 받고 있어 가장 전장기분이 심하더군요.”
“이날(11일) 중공군은 금문도에 대하여 7만발이라는 포탄을 발사하여 기록을 세웠으니 무리도 아닙니다.”
[image]
마지막으로 떠나기 직전에 찍은 사진. 화살표가 머리 위에 있는 인물이 고인이다.
사장인 장기영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화민국 해군의 소형 상륙정에 일본인 야스다 기자, 중화민국 현지 기자 4인, 중화민국군 5인과 함께 섬으로 향하던 그는 파도로 인해 상륙정의 엔진이 꺼지자 상륙정에 있던 군관의 지시에 따라 바다에 뛰어들었고, 거기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1958년 9월 26일 오전 10시 40분경, 행동파 기자가 이 세상을 떠난 순간이었다.
3. 수색, 그리고 사후
중화민국군은 즉시 수색에 착수하여 27일 새벽에 최기자를 구했다고 밝혔으나 이는 오보로 밝혀졌다. 당시 최병우 기자는 사고로 인하여 수영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포탄이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 그를 구조하기란 쉬운 상황이 아니었던 것. 수색을 거듭할 수록 사실상 구출은 어려워진 상황
결국 중화민국 정부는 수색을 공식적으로 중단하고 합동 위령제를 정부 차원에서 거행하였으며 유품은 현지에 있던 김종규 한국일보 특파원[6] 이 가지고 10월 9일 귀국, 10월 11일, 모교인 경기중학교에서 위령제를 거행했다.
그가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관훈클럽은 그의 사후 31년이 지난 1989년에 그의 이름을 따서 최병우 국제보도상[7] 을 신설하였고 국제뉴스 보도에 공적이 뛰어난 언론인에게 시상하고 있다.
2008년에는 그의 위패가 진먼에 있는 타이우산 충렬사에 안치되었다. 사후 50년 만의 일이었다.
4. 의의
단순한 종군기자라고 보기 힘들던 그는 입버릇처럼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외국인 기자가 17명이나 되는데 한국인 기자 전몰자는 한 사람도 없다. 부끄럽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 스스로 그 말을 지켰다. 기자정신을 몸으로 직접 실천하였으며 철저한 직업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다.
또한 그는 신문 종사자들을 한데 모으고 그들이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그를 비롯한 몇 명의 기자들이 관훈동에 모여서 만든 관훈클럽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모두 그가 중심이 되어서 만들어진 단체로 특히 후자는 그가 발기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