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먼 포격전

 


'''진먼 포격전'''
'''金门炮战 (금문포전)'''[1]
'''八二三砲戰 (8.23포전)'''[2]
'''Second Taiwan Strait Crisis (제2차 대만 해협 위기)'''
[image]
'''기간'''
1958년 8월 23일 ~ 10월 5일
'''장소'''
중화민국 푸젠 성 진먼 섬마쭈 열도 일대
'''교전국'''
[image] 중화민국

지원국
[image] 미합중국
[image]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image] 장제스
[image] 후리엔
[image] 지싱원
[image] 야오다오이
[image]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image] 마오쩌둥
[image] 펑더화이
[image] 쉬샹첸
[image] 펑더칭
[image] 류지안팅
'''결과'''
'''중화민국 국군의 방어전 성공
중공군의 진먼 섬 점령 좌절'''
'''영향'''
진먼 섬의 본격적인 요새화 시작, 양안간 산발적 포격전은 이어짐.
'''병력'''
[image] 중화민국 국군
* 병력 92,000명
[image] 중화민국 육군 진먼방위사령부
* 화포 308문
[image] 중화민국 해군
* 남부 초계전단
* [image] 해군육전대 상륙장갑차대대
(海軍陸戰隊 登陸戰車營)

[image] 중화민국 공군
* 전투기 최소 70여대
[image] 미합중국 해군
* 제7함대
[image] 중국 인민해방군
[image] 인민해방군 육군
* 병력 215,000명
* 해안포 600여문
[image] 인민해방군 해군
* 동중국해 함대
* 고속정 전대 12개
[image] 인민해방군 공군
* 전투기 800여대[3]
'''피해규모'''
440명 전사
화포 14여문 파괴
수송함 3여대 격침/파손
460명 전사
민간인 218명 사망
화포 80여문 파괴
어뢰정/고속정 18여대 격침/파손
전투기 24기 피격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이야기거리


1. 개요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44일간 진먼 섬(金門島: 금문도)에서 벌어진 중화민국군중국 인민해방군국지전. 하지만 실제로는 1979년미-중공 국교수립까지 쌍방 포격은 간헐적으로 발생하여, 무려 21년간 대치한 사건이다. 아직까지는 양안간 가장 최근의 실질적 군사충돌.
진먼 섬중화민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지만 타이완 섬도 아니고 전통적으로 타이완 섬과 역사를 같이 한 지역도 아니므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문서에서는 중화민국의 통칭인 '대만' 대신 공식 국명인 '중화민국'만을 사용한다. 역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도 통칭인 '중국'을 사용하지 않고 공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 혹은 약칭 중공만을 사용한다.

2. 배경


지도에서 보듯 진먼 섬(金門島: 금문도)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매우 가까운 섬으로, 샤먼 시와 겨우 4km 정도만 떨어져 있다.

3. 전개


1949년, 국공내전 말기 진먼 섬은 중화민국의 최전선 역할을 맡기도 하였으며, 산발적인 교전이 발생하곤 하였다. 이에 중공은 눈엣가시인 진먼섬을 점령하기 위하여 대규모 병력을 대만 해협에 집결시켰고, 진먼 섬에 상륙을 감행하여 금문도 전투가 발발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해공군 세력의 방해 및 중화민국육군 진먼방위사령부(사단 급)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인민해방군은 단기간에 큰 손실을 입고 패퇴하였고, 이후 1950년 일어난 6.25 전쟁 때문에 베테랑 군인들이 한반도로 파병되었던터라 다시금 상륙전을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1954년에는 중화민국 국군이 진먼 섬 및 마쭈 열도에 군대를 증파하면서 중공도 가만있지 않아 쌍방간 포격전이 발생, 1차 대만 해협 위기가 발발하였다. 이 때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암시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에 압력을 가했고,[4] 결국 1년 뒤인 1955년에는 쌍방은 포격 중지를 합의하였고, 미국은 중화민국과 방어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중공은 1차 위기와 한국전쟁 당시의 해공군 역량 부족을 교훈삼아 이번엔 소련으로부터 신형 전투기인 MiG-17의 라이선스 생산권을 얻어 생산해내며 J-5를 1956~57년간 대규모로 배치하였고, 동남부 연안 지역에 철도, 비행장, 해안 포대등을 짓는 한편, 인민해방군 해군의 함대 전력 또한 강화하는 등 중화민국과의 전쟁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1958년 7월, 이라크 왕국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왕정이 붕괴하여 미·영이 요르단에 병력을 급파하는 등 서구권의 이목이 중동에 집중되자, 마오쩌둥은 이를 기회로 여겨 진먼 섬 근처로 대규모로 병력을 충원하고, 인민해방군은 진먼 근처에서 수차례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화민국은 인민해방군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되자 1958년 8월 15일 진먼-마쭈 지구에 전투준비를 명령했고, 증원군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인민해방군은 북경통신을 통해 "곧 진먼 섬을 해방할 것"이라고 발표하였고,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를 기해 인민해방군은 진먼 섬 및 마쭈 열도에 대규모 포격을 개시하였다. 양측의 포격전은 매우 치열해서 오후 8시까지 약 4만발의 포탄이 사용되었고, 이날 하루에만 5만 7천여발의 포탄이 소진되었다고 한다. 포격의 목표가 된 시설은 주로 군사 시설과 포대 진지 및 랴오뤄 만(料羅灣, 요라만) 부두의 접안 시설이었고, 당시 중화민국 육군 진먼방위사령부 부사령관 지싱원과 상급 장교 두명이 전사하고, 진먼 섬을 시찰 중이던 중화민국 국방부장이 부상을 당하는 등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진먼방위사령관 후리엔의 지휘 아래 중화민국 육군도 대응 사격으로 포탄 1만 2천여 발을 발사하였다.
미국은 전투에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에식스급 항공모함이 포함된 제7함대와 당시 최신예 전투기 F-104A 스타파이터를 파견하여 중화민국의 해상 보급로를 어느 정도 확보하거나 중공에 대한 일종의 무력시위를 해주고, '블랙 매직'(Black Magic) 작전을 개시하여 중화민국 공군의 세이버에 AIM-9B를 달 수 있도록 돕는 한편, 수송함에 M115 8인치 곡사포와 다수의 155mm 견인포 등을 실어 중화민국 육군에 공급하였고, 인민해방군 공군의 폭격을 대비하기 위해 MIM-14 나이키 허큘리스를 중화민국에 주는 등 큰 지원을 해줬다.
한편, 공중에서는 인민해방군 공군MiG-15MiG-17 (J-5) 총합 100여대와, 중화민국군 공군F-86F 세이버 32대가 서로 맞붙었는데, 미그기들의 비행성능이 더 뛰어났고, 숫적으로 우세했으므로, 중화민국의 F-86은 수세에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상기 서술한 대로 미군이 중화민국 공군의 F-86에 단거리 공대공미사일 사이드와인더를 장착할 수 있게 개조를 도와줘서 세이버들이 선제로 미사일을 발사하여 미그기들이 미사일을 회피하느라[5] 20여 대 이상이 격추되는 등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 공중전의 결과로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규모로 전투기를 동원했음에도 20대가 넘는 미그기가 격추당했으나, 중화민국군은 겨우 2~3대 정도의 피해를 입어 중화민국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게 된다.[6] 한편 인민해방군의 MiG-17 한 대가 불발된 사이드와인더를 동체에 꽂고 생환했고, 이 사이드와인더는 소련에서 K-13으로 역설계당한다.
중화민국 해군은 진먼 섬에 보급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9월 1일 마궁(馬公) 항에서 출발하여 라오뤄 만으로 접근하다가 다음날 인민해방군 해군의 고속정 및 어뢰정들과 조우, 격돌하여 9.2 해전(九二海戰)이 발발하였다. 이 해전에서 무장 수송함 퉈장(沱江, 타강)호[7]가 심각하게 손상[8]당하고, LST 2척도 피해를 입는 등 어려움이 있었으나, 인민해방군의 함정 18여 척을 격침하거나 피해를 입혔다. 해군의 물자보급 작전에는 중화민국 해군육전대 상륙장갑차대대도 함께 참가하여 빗발치는 포격 속에서 영웅적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다.
이후에도 1달 넘게 동안 쌍방간에 포격전이 이어져서 인민해방군 포병은 47만 4천발의 포격을 가하고 중화민국 육군 진먼방위사령부 포병부대는 82회에 걸쳐 12만 8천여발의 대응 사격을 실시하는 등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이 사이에 미국과 소련은 사태가 확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중공에 국지전을 중단할 것을 압박하였고, 결국 1958년 10월 5일에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진먼 섬에 대한 포격을 일주일간 중지한다'고 발표하였다. 10월 13일에는 다시 2주간의 공격중지를 발표, 대대적인 공격은 없어졌고 포격전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0월 28일에 중공이 '2일에 1번꼴로 포격한다'고 발표하며 포격은 차츰 줄어갔다.

4. 이야기거리


  • 계속된 포격으로 진먼 섬의 전체적인 높이가 2m 정도 낮아졌다.
  • 한국일보최병우 기자는 금문 포격전에서 특파취재 중 1958년 9월 26일 조난, 순직하였다. 이후 중화민국의 충렬사[9]에 안치되었는데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안치된 인물이다.
  • 위에 언급한 것 같이 대규모의 충돌만 2~3번 이상 있었고, 21년 동안 간헐적이지만 포격을 당했기 때문에 현재 진먼 섬의 상당부분은 두꺼운 철근 콘크리트+철갑판으로 된 벙커와 역시 중장갑인 포탑, 포대 투성이다. 그래서인지 포격의 양에 비해서는 사망자나 부상자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지금은 중공과의 관계가 그럭저럭 좋아져서 벙커를 둘러보는 관광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 중국인민해방군이 쏘아댄 수십 만 발의 포탄 파편들은 요즘 식칼이 되어 역시 진먼에서만 구할 수 있는 여행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이연복 셰프의 식칼 컬렉션중 하나였으나 쓸 일이 없어서 되팔았다고 한다.[10]
  • 진먼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품은 아니지만 깊은 관련이 있는 물건이 또 있는데, '금문고량주'라 불리는 술이다. 일반 고량주보다 훨씬 독하게[11] 만든 고량주인데, 진먼 섬에 주둔하는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다. 중공과의 포격전이 격화되는 시점에는 포격만 시작되면 모두 벙커나 지하로 틀어박혀야 했는데, 수없이 떨어지는 포탄에 의한 셸 쇼크(Shell Shock)나 폭음 등으로 병사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다보니 사기를 고양하고 기분도 전환할 겸 빨리 취할 게 필요해서 이 금문고량주를 마시게 했다고 한다. 현재에 와서는 명주로 인정받아 중국에 수출까지 하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

[1] 중화인민공화국 [2] 중화민국 [3] 800대를 모두 띄운건 아니고 전투에 참여한 총 소티를 뜻하는 듯 하다. 실제 출격한기체는 100여대 미만이 출동했다.[4] 당시 중공에는 핵무기가 없었다.[5] 실제 사이드와인더가 격추시킨 미그기는 4대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미사일의 존재 때문에 인민해방군 공군 파일럿들이 충격을 받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세이버의 기총에 격추되었다고 한다.[6] 이 전투를 지켜본 미군미사일 만능주의에 빠져버리게 되었고 이후 F-4 팬텀기에 기관총을 제거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너무 끔찍하니 이하생략.[7] 훗날 이 함정을 기리기 위해서 중화민국 해군의 신형 초계함의 이름은 타강급으로 명명된다.[8] 중공 측은 침몰했다고 주장했다.[9] 타이베이 충렬사가 아니라 진먼에 있는 태무산 충렬사다.[10] 군용 무기로 쓰이는 철강의 품질은 식칼로 만들기에도 최상급이다. 내구성과 신뢰성이 보장되기 때문.[11] 1958년에 포격전이 일어났다는 점을 상기하기 위해 58도의 도수로 만든다. 원류는 65도이다. 58도는 나중에 상품화하면서 40도짜리와 같이 개발한 것. 진먼 현지에서는 65도짜리도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