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성/선수 경력

 



1. 프로 입단 전
2. 대전 시티즌 시절 (1997~2011)
2.1. 1997년~1998년
2.2. 1999년
2.3. 2000년
2.4. 2001년
2.5. 2002년
2.6. 2003년
2.7. 2004년
2.8. 2005년
2.9. 2006년
2.10. 2007년
2.11. 2008년
2.12. 2009년
2.13. 2010년
2.14. 2011년
2.15. 2012년
2.15.1. 방출 파문
3. 전북 현대 모터스 시절 (2012~2014)
3.1. 2012년
3.2. 2013년
3.3. 2014년
3.4. 현역 은퇴
4. 대표팀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1. 프로 입단 전


대학 졸업 후 프로 직행 대신 실업팀 국민은행에서 1년 동안 뛰다가 상무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대전의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사실 이 칼럼에 의하면 최은성은 대학을 모두 끝마치고 드래프트를 신청하려고 했지만, 대학 졸업 시기에 프로팀에서 먼저 연락이 와야 계약하는 줄 알고 있다가 결국 드래프트 신청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실업팀 국민은행에서 뛰다가 7개월만에 팀을 나와 상무로 입단했고, 상무를 마친 뒤 드래프트를 통해서 다시 프로에 입단하려 했었던 것이다.

2. 대전 시티즌 시절 (199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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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997년~1998년


1997년 K리그 드래프트를 앞둔 1996년 11월 유공과 입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강철유공 코끼리에 최은성을 소개했고 유공에서도 최은성의 기량을 검토한 뒤 “드래프트 신청서를 넣으면 널 뽑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최은성의 운명을 바꾼 일이 벌어졌다. 대전 시티즌이 창단하면서 우선지명권을 얻어 최은성을 선택한 것이었다. 대전은 대학과 실업 팀에서 각각 6명씩의 선수를 먼저 선발할 수 있었고 이렇다 할 대어가 없던 상황에서 최은성을 지명했던 것이었다.
당초 대전은 기존 9개 K리그 팀으로부터 베스트11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 가운데 한 명씩을 데려올 수 있었고 울산이 김병지를 베스트11에 포함시킬 것이라고 판단해 올림픽 대표 출신인 울산 서동명을 수문장으로 낙점한 상황이었지만 울산은 서동명을 대전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서동명도 베스트11에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베스트11에 골키퍼를 두 명이나 포함한 것이었다. 결국 프로축구연맹도 고민 끝에 포지션별 구분에 대해서는 명문화돼 있지 않아 울산의 손을 들어줬고 대전은 그나마 상무에서 활약한 최은성을 대신 선택해야 했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최은성은 프로 무대에 입문했다.[1]
만약 역사가 바뀌었다면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최은성을 보고 있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은성은 K리그 전체는 물론 대전에서도 그리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는데 대전의 스타는 1997년 신인왕을 받은 신진원과 김은중이었고 골키퍼에는 연령별 대표팀을 두루 거친 김승안이 있었다. 1998년에는 서동원과 강정훈 등이 가세하면서 이들에게 이목이 쏠렸다. 최은성은 김승안을 밀어내고 대전의 골문을 지켰지만, 대전은 1997년 홀로 골문을 지킨 최은성과 경쟁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골키퍼 황세하를 영입했다.
건국대 출신으로 192cm의 좋은 체격 조건을 갖춘 황세하의 가세로 최은성의 자리는 위태로운 듯 보였지만 최은성은 황세하와의 주전 경쟁에서 소리 없이 강한 모습을 보이며 완벽하게 승리했다. 최은성은 1998년 33경기에 나섰고 황세하는 최은성에게 밀려 세 경기에 출장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워낙 대전의 전체적인 전력이 약한 탓에 최은성은 1998년을 호되게 보냈다. 33경기에서 무려 56골이나 내준 것이다. 그는 그렇게 실점을 하고 아쉬워하는 모습이 익숙한 선수로 팬들에게 각인됐다. K리그 10개 팀 중 9위에 머문 대전이 10위 천안 일화보다도 실점이 더 많았다. 여기에 리그 최고 골키퍼인 김병지와 이운재 등이 주목받았고 특히 김병지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나서 한국이 대패하는 와중에도 신들린 선방을 선보이며 전국적인 스타 반열에 오르는 등 최은성을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2.2. 1999년


1999년은 최은성에게 있어 가장 악몽과도 같은 한해였다. 32경기에 나서 무려 55골이나 허용한 것이다. 당시 리그 8위였던 대전은 우승팀 수원의 24실점보다 두 배가 훨씬 더 넘는 골을 내줄 만큼 수비력이 좋지 않았다. 또한 최은성은 1999년 6월 포항과의 경기에서는 후반 44분 상대의 결정적인 공격 상황에서 이를 막다 퇴장을 당해 김은중이 대신 골문을 지키는 일도 있었다. 당시 이동국과 김은중, 안정환, 고종수를 비롯해 화려한 신세대 스타들이 주목을 받을 때 참 화려하지 않고 평범한 최은성을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저 최은성은 약체 팀에서 골 많이 먹는 골키퍼 정도였다. 당시 최은성이 골문을 지킨 대전은 18패를 당하며 리그 최다패의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하지만 대전에서 최은성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가장 헌신적이고 성실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2.3. 2000년


최은성은 2000시즌 개막을 앞두고 대전의 부주장에 선임됐다. 주장 장철우와 함께 리더십을 인정 받았다. 또한 K리그 통산 100경기를 돌파하며 팀에서도 확실한 존재로 인정 받고 있었다. 하지만 최은성은 2000년 또 하나의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역대 최단 시간 퇴장이다. 2000년 7월 성남과의 원정경기에서 경기 시작 48초 만에 상대 공격을 막다 퇴장을 당했고 이는 K리그 역사상 최단 시간 퇴장이었다. 하지만 최은성은 이때쯤부터 대전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비록 전국적인 스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전 팬이라면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최은성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은성은 2000년 K리그에서 33경기에 나서며 대전의 상징적인 선수가 돼 가고 있었다. 열악한 대전에서 이렇게 다른 팀으로 이적하지 않고 헌신하는 선수를 보며 대전 팬들은 최은성에게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2.4. 2001년


최은성에게 있어 가장 잊을 수 없는 한해가 바로 2001년일 것이다. 당시 ‘만년 하위권’이었던 대전은 FA컵에서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써 내려 가고 있었다. 특히 최은성은 전북과의 준결승전에서도 120분 내내 김도훈을 앞세운 상대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고 승부차기에서도 선방을 이어가며 팀을 결승으로 올려 놓았다. 그리고 FA컵 결승전에서 포항을 만났다. 최은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경기였다. 하지만 최은성은 전반 14분 상대와 강하게 충돌한 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광대뼈가 골절되는 큰 부상을 당해 곧바로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향하게 된 것이고, 최은성을 대신해 이승준이 교체로 투입되었다.
최은성은 병원에 가서도 텔레비전을 통해 동료들의 모습을 응원했다. 결국 대전은 김은중의 결승골로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지만 최은성은 현장이 아닌 병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최은성은 지금도 그때 현장에서 함께 하지 못했던 걸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꼽는다.
2001년은 최은성에게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사건을 안겨줬는데, 거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그를 전격적으로 대표팀에 발탁했기 때문이다. 당시 만년 하위팀 골키퍼를 대표팀에 뽑자 모두가 놀라는 눈치였으며, 당시 김병지와 이운재, 김용대 등의 기량이 이미 검증됐기 때문에 가볍게 테스트 차원에서 최은성을 깜짝 발탁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무명의 하위팀 골키퍼가 태극 마크를 단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충격이었다. 대표팀 발탁과 FA컵 우승, 그리고 우승 현장에 함께 있을 수 없던 큰 부상 등 2001년은 최은성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2.5. 2002년


2002년 최은성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그가 발탁됐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마지막까지 최은성과 김용대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이운재, 김병지와 함께 할 골키퍼로 최은성을 낙점했다. 비록 그는 본선 무대에서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지만 불평 없이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비록 월드컵 본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이운재가 모든 관심을 독식했지만 최은성은 이렇게 말했다. “경기에 나서지 못해도 괜찮아요.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합니다.” 최은성은 비록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소속팀 대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성실하고 묵묵하게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 또한 월드컵이 끝나고 FA컵 우승 자격으로 참가한 2002 아시아챔피언스리그 CD 몬테 카를로전에서는 후반 43분 프리킥으로 팀의 5번째 골을 넣어,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골을 넣은 최초의 골키퍼'''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2002년이 영광스러운 해였던 것만은 아니다. 2002년 시즌이 끝나고 대전은 창단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1997년 IMF 위기 때 동아건설과 동양 백화점 등이 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고 팀의 재정을 도맡았던 계룡건설이 2002년 11월 경영난을 이유로 팀 운영을 포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손을 쓰지 않는다면 대전은 해체 수순을 밟아야 했다. 그런데 최은성은 시즌이 끝난 뒤 추운 겨울 동료들을 이끌고 서포터스와 함께 거리로 나갔다. 대전을 살려달라고 호소하며 모금 운동까지 벌였다. 만약 최은성 같은 선수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대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순히 최은성은 기량만 좋은 선수가 아니라 대전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이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 2003년


성실함의 대명사가 된 최은성은 2003년 드디어 대전의 주장 완장을 차게 됐다으며, 또한 2002년 8천 5백만 원이었던 연봉이 2003년 1억 원으로 올라 마침내 억대 연봉자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여기에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전 무대에까지 서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최은성은 올스타 선정과 억대 연봉자 등극에 대해 실력으로 화답했다. 대전은 최윤겸 감독이 새롭게 부임한 2003년 44경기 중 18경기를 승리로 이끌며 12개 팀이 치르는 리그에서 6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고 최은성은 37경기에 나서 39골만을 내주며 대전의 돌풍을 이끌었다. 당시 대전은 평균 관중 19,092명을 기록하며 K리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구단이 됐고 최은성은 이 팀의 주장으로 ‘수호천왕’으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2.7. 2004년


만년 하위팀에서 수도 없는 실점을 내줘야 했던 최은성은 2004년 프로 입성 후 처음으로 0점대 실점률에 진입했다. 32경기에서 30골만을 허용한 것이었다. 또한 2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고 전년도에 이어 팀에서는 주장을 맡았다. 하지만 2004년 당시 최은성의 나이는 33세로 이제 선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2.8. 2005년


34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전의 골문을 든든히 지키며 제몫을 다했다. 오히려 전년도 보다 훨씬 더 좋은 선방 능력을 선보였고 2년 연속 0점대 실점률을 기록했다. 최은성은 2005년 K리그 33경기에 나서 26골만을 허용하며 뒤늦은 전성기를 맞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호화군단’ 수원을 맞아 신들린 선방을 펼치며 수원의 ‘대전징크스’를 이어가는데 일등공신이 됐고 손가락 부상으로 쉬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팀 사정이 좋지 않아 부상 투혼을 발휘해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청소년 대표팀 출신인 골키퍼 유망주 양동원이 대전 유니폼을 입었지만 최은성은 양동원과의 주전 경쟁에서도 승리하며 줄곧 대전의 골문을 지켰다.
특히 5월 29일 FC 서울 원정 경기에서, 서울이 0-1로 끌려가던 전반 10분 공격수 김은중[2]이 최은성과의 일대일 찬스에서 골키퍼를 제치고자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최은성이 김은중을 몸으로 걸어 넘어뜨리며 PK을 얻어냈는데, 문제는 김은중이 최은성을 제치는 과정에서 '''손으로 공을 툭 쳤고, 최은성과의 접촉은 그 이후에 일어났던''' 것. 명백한 핸드볼 상황이 페널티킥으로 둔갑된 것이다. 대전 선수들과 코칭스탭들은 강력히 항의했으나 가장 억울해야 할 최은성은 오히려 '''껄껄 웃으면서 항의하는 동료들을 말리더니, 곧이어 히칼도의 페널티킥을 멋지게 선방해냈다!!!'''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지만 이 장면을 통해 대전의 수호천황 최은성의 멘탈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고, 김은중은 그와 대비되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한동안 까임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

2.9. 2006년


대전에서 데뷔 10년차를 맞이한 최은성의 주전 경쟁은 쉽지 않아 보였다. 대전이 양동원에 이어 울산대에서 전국체전 우승을 이끌었던 유재훈까지 영입했기 때문이다. 한참 어린 동생들과 경쟁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전의 주전 골키퍼는 ‘노장’ 최은성이었다. 오히려 최은성은 2006년 프로 데뷔 후 한 시즌 동안 가장 많은 39경기에 나서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최은성은 2006년 4월 국내 프로축구 통산 12번째, 현역 선수 중에는 다섯 번째로 30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또한 최은성은 주장으로서 동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는데, 승리 수당 중 5만원씩을 회비로 걷고 자체 규율을 만들어 벌금을 매겨 모은 돈으로 선수들이 직접 뽑는 이달의 최우수 선수상을 신설한 것이다. 비록 적은 상금이지만 자신처럼 묵묵히 팀을 위해 희생하는 선수들을 위해 최은성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또한 수당 일부는 숙소 생활 뒷바라지를 해주는 아주머니들과 버스 기사 등을 위해 쓰기도 했다. 대전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끈끈한 팀이 될 수 있었던 건 최은성과 같은 성실하고 훌륭한 리더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최은성은 단순히 기량이 훌륭하고 자기 관리에만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 음지에 있는 이들까지도 챙기는 마음 따뜻한 주장으로 팬은 물론 동료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선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10. 2007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 맡았던 대전의 주장을 2007년 강정훈에게 물려준 최은성은 그해 5월 큰 부상을 당했다. 무릎 인대 파열로 석 달 가까운 기간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36세의 최은성이 곧 은퇴할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독하게 재활에 매달렸고 2007년 8월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적적인 대전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함께했다. 시즌 막판 극적인 4연승을 기록하며 실낱 같은 6강행 불씨를 살린 대전은 마지막 라운드에서 수원 삼성을 1-0으로 제압했고 대구가 FC 서울을 1-0으로 이겨주는 바람에 거짓말처럼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 특히 최은성은 이 마지막 다섯 경기에서 눈부신 활약을 선보이며 부상으로 석 달 가까운 기간 동안 그라운드에 서지 못했던 아픔을 날려버렸다. 대전의 가장 극적인 순간 최은성은 든든히 대전의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2.11. 2008년


2008년 시즌을 앞두고 최은성은 김호 감독으로부터 플레잉 코치 제의를 받았다. 직접 그라운드에 나서기 보다는 이제 후배들을 위해 노하우를 전수하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고민 끝에 최은성은 김호 감독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후배들과의 경쟁을 택한 뒤 2008년에도 31경기에 나서며 변함없이 대전의 주전 수문장으로 활약했다. 비록 대전은 14개 팀 중 13위에 머물며 최악의 시즌을 보냈지만 그 누구도 최은성을 손가락질 할 수는 없었다. 최은성이 2008년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소화한 경기는 무려 395경기로 한 팀에서 이렇게 활약하는 이가 드문 K리그에서 최은성은 ‘진정한 전설’이 돼 가고 있었다.

2.12. 2009년


2년 간 후배에게 주장 완장을 물려줬던 최은성은 2009년 다시 대전의 주장에 선임됐다. 역시나 대전의 주장은 최은성이 가장 잘 어울렸다. 또한 그에게 있어 2009년은 기록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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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전남 드래곤즈전을 통해 K리그 역사상 5번째로 프로 통산 4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신태용에 이어 두번째로 한팀 소속으로 400경기를 치른 선수가 되었다.
바로 다음 울산전에 선발 출장해서는 401경기 출전으로 신태용이 가지고 있던 단일팀 개인 통산 최다 출장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또한 이후 치러진 성남전을 통해서는 402경기 출장을 기록하며 단일팀으로는 개인 통산 최다 출장 신기록을 세우며 매 경기 본인 스스로 기록을 갱신해 나갔다. 최은성의 역사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대전 구단은 최은성의 등번호 21번을 따 그가 은퇴하면 21년 동안 이 번호를 결번으로 남겨두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장수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매일 한 시간씩 근력 운동을 하고 있어요.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최은성은 모두의 존경을 받는 선수가 돼 있었다.

2.13. 2010년


최은성은 2010년 시즌을 앞두고 대전 구단과 새 계약을 맺었다. 본인은 현역 생활을 더 희망했지만 구단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플레잉코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훈련장에서도 자신의 훈련보다는 후배들을 지도하는 일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동원과 신준배 등에게 기회가 돌아갔지만 그들이 지키는 골문이 무척이나 불안했고 왕선재 감독은 다시 최은성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경기를 앞두고 최은성은 외국인 선수들을 포함한 모든 선수들을 모아 놓고 파이팅을 독려했다. 그리고 개막 후 한 동안 후배들의 플레이를 벤치에서 지켜봤던 최은성은 8경기 만에 첫 승을 거두던 순간 든든히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최은성은 2010년 13경기에 나서며 나이가 무색한 활약을 펼쳤다.

2.14.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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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시즌에도 팀을 든든히 지켰지만,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으로 대전 전현직 선수가 8명이 검찰조사를 받고, 4명이 구속된 뒤에 가진 경기[3] 후, 기자회견에서 선수들을 대신해 사과했다. 특히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 경기는 이기려고 뛴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뛰었다'''고 말하며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절박함이 담긴 최은성의 눈물은 승부조작이라는 위기를 겪은 K리그를 다시 일으키는 힘이 됐다.

2.15. 2012년


대전 시티즌에서 있는 동안 2011년까지 총 K리그 464경기에 출장하며 '''K리그에서 단일팀에서 최장경기 출장 기록'''을 남기는 등[4]1997년부터 쭉 K리그의 대표적 약팀 대전 시티즌의 철벽 수문장으로서 늘 최선을 다했고, 든든히 대전의 골문을 지켜주면서 수많은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언제까지나 대전과 '''함께할 줄 알았으나...'''

2.15.1. 방출 파문

승부조작을 제외하면 '''대전 시티즌 구단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 터지고 마는데''' 2012년 리그 개막 직전 대전 시티즌이 최은성과 '''재계약을 거부'''하고 말았다. 최은성 말로는 구단 사장이였던 김광희 사장이 자신에게 모멸감을 주며 문전박대하고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아내의 간절한 호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단을 찾아갔으나, 김 사장은 아내와 함께 찾아온 선수를 앞에 놓고 동석한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며 그를 벌레 쳐다보듯 보는 것도 모자라 "나 쟤랑 말도 섞기 싫다. 저 새끼 때문에 잠도 못 잔다."며 폭언을 내뱉었다고 하며, 이는 대전 시티즌 서포터즈는 물론이요, 수많은 대전 팬들, 나아가 전국 모든 K리그 팬들을 분노케했다.
최은성의 아내는 구단 홈페이지에 “제발 부탁합니다. 조용히 잊혀지게 도와주세요”라고 하소연했다. 김 사장은 시즌 첫 홈 개막전에서 최은성의 은퇴식을 열자는 내부 의견도 묵살했으며, 최은성의 연속 경기 출장 걸개 숫자를 치우라고 했고 최은성 동영상도 틀지 말라고 했다.#
이것이 문제가 된 이유는 구단의 레전드에 대한 예우도 아니었을 뿐더러, 후술된 전북 현대 시절을 봐도 알겠지만 최은성의 기량 자체도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동네에서 뛰고 있던 '''최은성보다 1살 형으로 그 당시 만 42세였던''' 김병지도 이 시절 전혀 기량이 녹슬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김병지 못지 않게 자기 관리가 투철한 골키퍼 최은성이 나이가 들었다고 기량이 떨어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누가 봐도 '''축구의 'ㅊ'자도 모르는''' 인간이 구조조정을 구실삼아 명단 한번 죽 훓어보고는 '얘 늙고 고연봉이네? 해고!' 식으로 결정한 정황이 뚜렷했기 때문. 그리고 축구팬들 사이에서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대전은 최은성의 협상 자세를 걸고 넘어지는 치졸한 언플까지 시도한다.
이는 단지 구단과 노장 선수의 재계약 불발 차원을 넘어서, 자치단체장의 ‘제 식구 챙기기’가 낳은 파탄에 가까웠다. 대전시 정무부시장과 대전도시철도공사 사장을 지낸, 그러니까 축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낙하산 사장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만행이다. 이런 낙하산들은, 비단 축구장만이 아니라 거의 전 영역에서, 소속 직원이나 팬(혹은 시민)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정치적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임명권자만 바라보고 움직인다. 이런 자에게 축구선수는 그저 ‘뽈이나 차는 애들’일 뿐이고 15년 역사의 프랜차이즈 스타는 장기판의 졸로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최근 3~4년 동안 대전 시티즌은 이런 무자격의 사장이 줄지어 들어왔다 나가면서, ‘축구특별시’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만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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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채 시즌이 시작되자 결국 축구팬들은 뚜껑이 열렸고, 대전 시티즌 뿐 아니라 한국 축구계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퍼플크루는 '''홈경기 응원중단'''을 선언했고, 항의내용- '''최은성이 대전이고 대전이 최은성이다!'''-들을 제외한 응원 현수막을 모조리 거꾸로 내걸고 침묵을 지키는 실력행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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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엄청난 파국에 당황한 대전시는 사장을 해임하고 구단의 구단주인 염홍철 시장이 직접 최은성을 만나 설득을 하는 등 수습에 나섰으나 이미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최은성은 은퇴를 선언, 사실상 선수 생활이 마무리되나 싶었다.

3. 전북 현대 모터스 시절 (2012~2014)



3.1.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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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있는 베테랑 GK가 급히 필요했던 전북 현대 모터스가 거의 삼고초려에 가까운 설득으로 최은성을 영입하여 3월 하순부터 뛰게 되었다. 최은성은 이때까지 에이전트 없이 살아와서 이적절차를 어떻게 진행하는지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전북은 닥공으로 유명한 팀 컬러에 비해 수비력은 우승권 경쟁팀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었다. 여기에 2010 시즌이 끝나고 주전 골리인 권순태상무로 입대한데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비싼 돈 주고 영입한 염동균이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 영구제명되어 이후로 대체멤버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2012 AFC 챔피언스 리그 1, 2차전 1-5 참패.[5]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시장에 나온 국가대표급 베테랑 GK의 존재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반대로 이 상황에서 베테랑 GK 스스로 내쫓은 대전은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대전 팬들은 아무도 최은성을 배신자라 까지 않고 오히려 '''최은성 선수가 은퇴하기 전에 우승 한 번 해보겠네'''하고 눈물을 흘리며 응원하고 있다.
전북 현대는 최은성을 영입하면서 닥공에 비해 떨어지는 수비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다. 최은성 영입 이전까지 전북은 골을 많이 넣는 만큼 어이없는 실점도 잦아서 본의 아니게 드라마를 찍었는데 최은성의 선방과 안정적인 수비조율 능력에 힘입어 '''리그 최소 실점 팀'''으로 변신했다.
전북에서 엄청난 선방과 안정감 때문에 페트르 체흐에서 따온 '''최흐'''라는 별명을 획득했다. 그리고 선수생활 전혀 없었던 팀 우승 경험도 노릴 수 있는 좋은 기회는 덤.
결국 전북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2012 시즌을 잘 마무리했다. 시즌 기록은 34경기 36실점이다.

3.2. 2013년


2012시즌 종료 후 최은성의 출장 기록은 498 경기로, 500 경기 출장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팬들은 과연 선수생활을 연장해서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히 여겼는데, 전북은 '''당연히 재계약'''했다. 그리고 2012 시즌 말미에 권순태가 제대하면서 2013 시즌에 두 사람의 주전 경쟁이 이어지게 됐다. 그래도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지라 K리그 상위권 골키퍼인 권순태를 아무렇지도 않게 벤치에 앉히고 주전이 되었다. 권순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권순태의 선수 생활에 여러 가지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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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시즌 첫 경기가 대전월드컵경기장에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였고, 이날 경기에서 최은성은 정성훈의 패널티킥을 선방하는 활약을 앞세워 3:1 승리를 이끌어내며 보는 대전 시티즌 팬들 마음을 착잡하고 슬프게 만들었고,[6] 이날 경기 종료 후 최은성은 대전 서포터즈석을 향해 절을 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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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홈 개막전에서 '''통산 500경기 출장'''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를 기념해 등번호 500번을 새긴 유니폼을 입었다. 이날 전북은 강적 울산을 맞아 최은성의 안정적인 방어에 힘입어 2:1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뒀다. 공교롭게도 패배한 울산의 김영광과, FC서울의 김용대가 명성에 걸맞지 않은 아쉬운 수비를 보이며[7] 팀 패배의 단초를 제공한 것에 비한다면 '수수하지만 안정감 있는' 최은성의 장점이 돋보였다.

2013년 7월 3일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성남 일화와의 홈경기에서 '''골을 기록했다.''' 상황은 성남이 2-1로 앞서던 후반 32분에 발생했다. 성남에 부상 선수가 발생하자 성남 골키퍼 전상욱은 사이드라인 밖으로 공을 걷어냈다. 이 상황에서는 전북이 다시 성남에게 볼을 건네주는 것이 축구계의 불문율이자, 예의. 이후 경기가 재개된 뒤 전북의 이동국이 전상욱 골키퍼에게 공을 패스하려고 길게 찼는데 이 공이 그대로 골문을 통과하며 득점으로 인정됐다. 스코어 2-2. 이동국의 찜찜한 시즌 10골이자 페드로(제주)와 득점 공동 선두로 올라서는 골. 이동국은 바로 손을 들어 실수임을 인정했지만 성남 선수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성남 김태환은 항의하는 과정에서 전북 선수를 넘어뜨리는 바람에 퇴장까지 당했다. 재개된 경기에서 이동국이 다시 볼을 잡았고 골키퍼 최은성에게 롱패스를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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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패스를 받아 자신의 팀 골문으로 차 넣으면서, 매너 자책골로 사태가 일단락됐다.
자신의 골대에 골을 넣는 최은성의 모습은 진정 페어플레이가 뭔지 잘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으며, 결국 이 경기에서 전북은 성남에 2-3으로 패했지만 최은성은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되는 승리보다는 아름다운 패배를 택했다.

3.3. 2014년


2014 시즌을 앞두고 플레잉 코치로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시즌이 들어서면서 권순태가 더 기량이 나아진 모습을 보이면서 그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고, 시즌 중반 18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3.4. 현역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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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경기에서 사용된 기념 입장권. 등번호의 532는 최은성의 통산 경기 수를 의미한다.
최은성은 대전과 전북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아름답게 은퇴했다.
2014 시즌 후반기가 막 시작될 즈음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경기는 7월 20일 상주 상무와의 경기로 전반전까지만 뛴 후 하프타임에 은퇴식을 가진 뒤 후반전에는 권순태가 교체해 들어가 경기를 진행하게 되었으며, 최은성이 오랜 시간 몸담았던 대전 시티즌 구단 역시 최은성의 은퇴식에 함께 참여했다.
처음 김세환 사장이 이철근 단장에게 은퇴식에 같이 참여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는 난색을 표했으나, 이후 진심이 통해서연지 부탁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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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0일 상주 상무와의 전주성 홈경기에서 본인이 출전한 532경기 등번호를 달고 전반전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팀 후배들은 6:0 대승을 이끌면서 레전드 골키퍼의 마지막 길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은퇴식 영상
은퇴식 중 대전 시티즌 사장인 김세환은 '구단을 대신해서 감사하고 죄송하다'라는 뜻을 전했으며, 이에 최은성은 다 잊었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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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전북 서포터 대표와 함께 행사에 참석한 대전 시티즌 서포터 대표[8]는 최은성에게 대전 유니폼과 머플러를 전해주고 큰 절 올린 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최은성의 옆에서 계속 눈물 흘렸으며 이를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전북과 대전 서포터들과 중계로 지켜보던 전국의 케이리그 팬들에게도 짙은 여운을 남겼다.
대전 팬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레전드로 남을 수도 있었던 선수가 일부 구단 관계자의 삽질로 내쳐진 뒤 다른 구단에서 은퇴식을 치르는 슬픈 광경을 바라봐야 하는 참담함과 함께, 성대하게 은퇴식을 치뤄주면서 자신들을 배려해준 전북에 대한 고마움이 교차한 시간이었다. 전북 MGB들은 자신들의 서포팅석을 이 날 대전 시티즌 서포터즈에게도 개방하기로 했고, 대전 서포터즈 측은 감사를 표하면서 서포팅석을 피해 주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한편, 샤다라빠최은성 은퇴 헌정 웹툰을 그렸다. 전북 현대와 대전 시티즌이 각각 케클 1위와 케챌 1위를 달리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며 최은성이 현역으로 우승을 경험 못하고 은퇴하는데 아쉬움을 표했다. 다만 플레잉 코치 등록은 올시즌 내내 유효하므로, 기록상으로는 여전히 선수로도 리그우승을 경험할 수 있다.


4. 대표팀 경력



4.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4.1.1. 히딩크호


4.1.1.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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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FA컵에서 결승에 이르기 까지 보여준 명품 수비를 통해 거스 히딩크의 눈에 띄게 되어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국가 대표팀에 발탁된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최은성과 함께 뛰었던 골키퍼는 그 이운재김병지였다. 결국 서드 골리의 위치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으며, 출전 경기 역시 2001년 9월 16일,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 개관 기념 나이지리아와의 친선전 단 1경기 뿐이었다. 국가대표 커리어는 1경기 1실점.
시대를 잘못 타도 너무 잘못 탄 비운의 수준급 골키퍼로 평가받는데 최은성 외에도 김용대, 김영광, 김진현 등 실력에 비해 국가대표팀에서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키퍼는 많지만 최은성은 '''김병지, 이운재가 최전성기일 때 같이 떠올라 그들에게 밀리고 그들이 물러나니 자신보다 더 어린 키퍼들이 무지막지하게 나와 국대와 연이 없어진''' 케이스라 더욱 안타까운 케이스이다.
클럽에서는 수상을 많이 못 했을 뿐, 커리어 내내 주전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고 타 팬들도 그 실력을 인정할 정도였지만 국가대표팀 경력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최은성이 현재까지도 대전 하나 시티즌 소속으로 월드컵에 출전한 처음이자 마지막 선수로 남아있다.

5. 플레이 스타일


이운재, 김병지와 한국축구의 레전드 골키퍼이다. 이운재와 김병지가 모든 것이 앞서긴 하지만 최은성의 장점은 안정감이였다. 수비조율능력도 좋았다. 참고로 당시 대전의 수비진이 엉망이라서 그 엉망인 수비진을 조율하고 수문장 역할까지 보니 대단한 거다.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했고 김병지 못지 않은 자기관리 끝판왕이였다.
[1] 대전 시티즌의 역사와 최은성의 역사는 이렇게 그 시작점이 일치한다.[2] 최은성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대전의 레전드 선수 중 하나였다. 그 뒤, 여러 팀을 떠돌아 다니다 2014 시즌 플레잉 코치로 다시 돌아왔다.[3] 공교롭게도 상대가 전북 현대였다. 3-2로 역전패.[4] 이는 김병지가 최은성보다 더 많은 경기를 뛰었으나 이는 여러 팀에서의 기록을 합친 경우로서 최은성은 604실점, 경기당 경기당 평균 1.3실점밖에 하지 않았는데, 대전이 강팀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기록임에 틀림없다.[5] 의 영구제명으로 인해 전북은 어쩔 수 없이 백업 키퍼였던 김민식을 주전 키퍼로 써야 했다. 참고로 이전까지 김민식은 3시즌 동안 단 9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2011 시즌, 리그 우승을 안겨주는 등 기대 이상으로 해줄 만큼 해주고는 최은성에게 바통 터치하고 2013 시즌, 상주 상무에 입대했다. 상주에 입대하고는 주전으로서 상당한 기량 상승하고 전역했다. 최은성이 은퇴하고 여전히 권순태가 주전이지만 김민식도 백업으로선 매우 믿음직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주전 출장을 위해 2015 시즌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다.[6] 최은성 본인 역시 오랫동안 함께해온 대전을 적으로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 착잡하고 슬펐을 것이다.[7] 김영광은 옆구리로 공이 빠져나갔고, 김용대는 잡았다 놓친 공이 들어갔다.[8] 이 사람도 최은성처럼 몸에 대전 시티즌 엠블렘 문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