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호

 




1. 출범 전 상황
2. 코칭스태프
3. 2002 월드컵 엔트리
4. 월드컵 조 편성
5. 활동
6. 영상
7. 경기 결과
8. 평가
9.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할 수 있었나?
9.1. 동기부여
9.2. 축협의 꾸준한 지원과 리그의 희생 및 적절한 홈 어드벤티지 활용
9.3. 최정예 멤버
9.4. 탄탄한 조직력
9.5. 거스 히딩크 감독의 탁월한 지도력
10. 편파 음모론
11. 대진운
12. 관련 문서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2002년 3월, 유럽 전지훈련 중 외신 기자회견에서

"우린 이미 목표(16강)를 달성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배가 고프다."[원문]

포르투갈전 승리 후 16강을 확정지으면서[1]


1. 출범 전 상황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 출전한 차범근호거스 히딩크가 이끌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0:5로 대패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과 레바논 아시안컵에 출전한 허정무호도 이렇다 할 성적[2]을 내지 못하면서 국가대표팀에 대한 우려는 극에 달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 열린 아시안 청소년 대회 U-16/U-19 대회 모두 4강에서 탈락하면서 이 우려를 더 부채질했다. 이대로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16강 진출 실패 개최국이 되겠다며 비난 여론이 벌떼처럼 들끓었다.
만약 대한민국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일본이 16강에 진출한다면, 그 당시 국민 정서상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J리그의 흥행에 이어, 프랑스 출신 명장 필립 트루시에를 영입해서 1999년 U-20 월드컵 준우승, 2000 시드니 올림픽 8강,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우승,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 준우승 등 많은 수의 성과를 냈었다. 세리에 A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던 미드필더 나카타 히데토시와 당시 아시아 최초의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거인 이나모토 준이치[3]가 활약한 것도 이 때였다. 게다가 히딩크 감독의 취임 이후인 2001년 12월에 열린 본선 조 추첨식에서 일본은 러시아, 벨기에, 튀니지와 같이 H조에 배정됐는데, 당시 H조는 FIFA 랭킹 20위 안에 드는 팀이 하나도 없는 행운의 조였기 때문에 한국 축구팬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4]
당시 기술위원장으로 일했던 이용수 해설위원의 회상에 의하면,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시작했던 하루 일과가 대국민 사과문을 작성하고 수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정몽준은 이용수에게 "대표팀이 16강에 못 든다면, 우리 둘 중 하나는 한강에서 뛰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자조 섞인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들은 월드컵 국대의 운명을 '외국인 감독 영입'이라는 승부수에 걸었다. 기술위원회는 누구를 감독으로 영입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을 했고, 여지껏 주로 기용해왔던 값싼 동유럽 감독들은[5] 제외하고 어차피 돈을 써서 지를거면 화끈하게 지르자면서 세계 초일류급 감독을 영입할 계획을 세운다. 새 감독을 선임하기 위한 감독 후보 1순위는 프랑스에게 1998년 월드컵 우승을 안겨준 에메 자케. 그 당시 자케는 프랑스 축구협회에서 기술고문으로 유유자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봉 협상만 잘 되면 영입이 어렵지 않을거라는 관측이 있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네덜란드의 거스 히딩크가 2순위였다. 또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남자 축구에서 나이지리아에 금메달을 안긴 조 본프레레가 3순위,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의 3위 돌풍을 이끈 미로슬라프 블라제비치가 4순위였다고.
일단 가삼현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은 1순위인 자케와 2순위인 히딩크를 순차적으로 만나 한국 감독직에 대한 의향을 타진했는데, 자케는 1998년 월드컵 우승 커리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왔고 실제로 2000년 11월 21일 프랑스 축구협회에서 가삼현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과 만나 최종적으로 한국 감독직을 거절했다. 반면 히딩크는 선뜻 수락만 안했을뿐 자케와는 달리 거절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본프레레와 블라제비치를 더 이상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히딩크와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사실 2000년 말 시점의 히딩크 또한 감독 커리어에 있어서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는데, 1998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위에 올려놓은 후 레알 마드리드 CF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에서 연이어 경질당해 야인으로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월드컵 개최국인 대한민국의 감독직에 도전하는 것을 두고 갈등하다가 2000년 12월 7일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겠다고 통보한 뒤 2000년 12월 18일 대한축구협회를 찾아 정식 계약을 한 후 마침내 2001년 1월 1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당시 협상 담당이었던 가삼현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의 회고에 따르면, 히딩크는 협상 도중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내가 선수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나무에 오르라고 하면, 그들(한국 선수들)이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

이에 가삼현 부장이 한국 선수들은 그렇게 할거라고 답하자 만족스러워 했다고. 또한 히딩크의 자서전에 따르면 처음에 네덜란드에서 가삼현을 만났을 때 감독직 수락이 내키지 않는 대신, 가볍게 조언해 줄 겸 "한국 팀은 장기 합숙을 통해 조직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얼마 후[6] 다시 만난 가삼현이 언제든 원할 때 장기 합숙에 돌입할 수 있도록 K리그 구단들과 합의했다는 답변을 했고, 결국 감독직 수락 여부를 확실하게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사실 히딩크 본인은 전력이 약한 한국팀이 무엇보다도 조직력을 끌어올리는게 2002 월드컵에서 만날 유럽/남미 강팀을 상대할 유일한 해법이라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는 장기 합숙 훈련이 급선무라는 취지로 조언한 것이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대한축구협회가 자신의 조언을 바로 실행에 옮기자 본인도 한국 대표팀을 맡아보자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된 뒤 유럽/남미의 여러 강팀들과 친선 경기를 해야 한다는 요구를 했는데 이것 역시 대한축구협회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결국엔 한국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2000년 당시의 히딩크는 스페인에서의 연이은 실패로 서서히 퇴물 취급을 받았기에 에메 자케처럼 쉽게 거절할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도박수를 던져야 하는 입장이었고, 반대로 대한축구협회 입장에서는 아무리 히딩크의 최근 커리어가 안 좋았다 해도 전체적인 커리어와 한국의 역대 월드컵 성적을 감안하면 반드시 영입해야 할 인물이었기에 결국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서 한국 감독 취임을 성사시킨 셈. 실제로 히딩크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고향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 한국전 참전 용사가 있어서[7] 조언을 구했더니 한국 감독을 한 번 맡아보라는 권유를 했다고.

2. 코칭스태프


직책
이름
국적
생년월일
<colbgcolor=#0055a4> 감독
거스 히딩크
[image]
1946년 11월 8일
수석코치
박항서[8][9]
[image]
1959년 1월 4일
코치
핌 베어벡
[image]
1956년 3월 12일
코치
정해성
[image]
1958년 3월 4일
GK코치
김현태
[image]
1961년 5월 1일
피지컬코치
레이몬드 베르하이옌
[image]
1971년 11월 23일
기술분석관
압신 고트비
[image]
1964년 2월 8일

3. 2002 월드컵 엔트리


등번호
이름
포지션
생년월일
당시 소속팀
1
이운재
GK
73.04.26
수원 삼성 블루윙즈
2
현영민
DF
79.12.25
울산 현대 호랑이
3
최성용
MF
75.12.15
수원 삼성 블루윙즈
4
최진철
DF
71.03.26
전북 현대 모터스
5
김남일
MF
77.03.14
전남 드래곤즈
6
유상철(부주장)
MF
71.10.18
가시와 레이솔(일본)
7
김태영
DF
70.11.08
전남 드래곤즈
8
최태욱
FW
81.03.13
안양 LG 치타스
9
설기현*
FW
79.01.08
RSC 안데를레흐트(벨기에)
10
이영표
DF
77.04.23
안양 LG 치타스
11
최용수
FW
73.09.10
제프 이치하라(일본)
12
김병지
GK
70.04.08
포항 스틸러스
13
이을용
MF
75.09.08
부천 SK
14
이천수
FW
81.07.09
울산 현대 호랑이
15
이민성
DF
73.06.23
부산 아이콘스
16
차두리*
FW
80.07.25
고려대
17
윤정환
MF
73.02.16
세레소 오사카(일본)
18
황선홍
FW
68.07.14
가시와 레이솔(일본)
19
안정환
MF
76.01.27
AC 페루자(이탈리아)
20
홍명보(주장)
DF
69.02.12
포항 스틸러스
21
박지성*
MF
81.02.25
교토 퍼플상가(일본)
22
송종국
MF
79.02.20
부산 아이콘스
23
최은성
GK
71.04.05
대전 시티즌
*표시는 월드컵 당시 K리그 출장경력이 없는 선수.[10]
5월 21일에 발표된 23인의 월드컵 출전 최종 엔트리. 이동국, 김도훈, 고종수, 심재원, 김용대 등이 탈락했다. 히딩크가 자사전 '마이 웨이'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이동국은 당시 경쟁 공격수가 워낙 많았기에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것이었고, 김도훈은 수비 능력이 너무 떨어졌고, 고종수는 체력이 너무 부족한 것도 모자라 부상까지 겹쳤다. 심재원 또한 베테랑 수비수 홍명보, 김태영, 최진철에 비해 피지컬로나 정신적으로나 능력이 부족했으며, 김용대는 체중 관리도 못할 정도로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김용대는 식사 때마다 많이 먹는 것은 물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챙겨먹는 것을 보고는 완전히 학을 뗄 정도로 히딩크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주전 이영표는 훈련 중 차두리와 부딪혀 부상을 입어서 히딩크 감독은 이영표를 엔트리에서 뺄까 고민했지만 회복을 믿었고, 이영표는 조별예선 3차전 포르투갈 전부터 활약을 하게 된다. 이영표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이을용이 그자리를 대체했고, 그는 맹활약을 펼치며 이영표와 함께 동반 기용이 되었다. 이영표가 부상을 입은 직후에 팀닥터는 근육 파열로 보고 월드컵 출전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그 상황에서 그렇게 심한 부상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핌 베어벡의 소개를 통해 네덜란드의 물리치료사 아노 필립을 따로 불러 재검사를 했고,[11] 근육 파열이 아니라 타박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때 팀닥터들의 말만 듣고 이영표를 엔트리에서 제외했다면 어땠을까? 팀닥터의 판단이 이렇게 팀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4. 월드컵 조 편성


그렇게 2001년 12월, 부산 BEXCO에서 치러진 조추첨에서 한국은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과 D조에 편성되었다. 그야말로 죽음의 조라 할 만한 조 편성이 이뤄지자 여론은 말 그대로 망했어요. 사실상 개최국 자격으로 톱시드를 받은 의미가 없어졌다. 여담으로, 저 3팀 모두 4강에 한번씩 들어봤다는 환장할 클래스 덕분에 한국은 2대회 연속 죽음의 조에 들어야 하는 불운을 제대로 받아버렸다. [12]
  • 포르투갈: UEFA 유로 2000 4강을 이끈 루이스 피구 등의 황금 세대가 포진한 FIFA 랭킹 4위의 우승 후보였다. 유럽예선에서는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본선에 올라왔는데,[13] 네덜란드는 바로 4년 전 월드컵에서 한국을 5:0으로 관광보낸 팀이다. 한마디로 톱시드급 팀이었다.[14] 더욱이 당시 골키퍼는 포르투갈의 레전드이자 후에 FC 포르투에서 주제 무리뉴의 방패라고 불린 비토르 바이아였다.
  • 폴란드: 당시 끗발 날리던 리버풀 FC의 주전 골키퍼 예지 두덱과 공격수인 엠마누엘 올리사데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동유럽의 다크호스였다. 사실 유럽 예선에서 폴란드가 속한 조에서 폴란드가 본선에 오를 거라 생각한 이는 드물었다. 안드리 셰브첸코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의 우크라이나가 있었고, 4년 전 월드컵에서 브라질에 1승을 거두고 16강에 올라간 올레 군나르 솔샤르의 노르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폴란드가 16년 만에 덜컥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도 모자라 유럽 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해버렸으니 한국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상대로 인식되었다.[15]
  • 미국: 그나마 해 볼 만하다고 평가됐지만, 역시 FIFA 랭킹 13위의 북중미 강호였고, 게다가 골드컵에서 맞서서 깨진 적이 있었다.[16] 골키퍼도 EPL 정규리그 최다 연속 출전 기록을 세운 레전드 브래드 프리델이었다.
어차피 월드컵에서 한국이 상대해야 하는 팀들의 전력 모두가 어지간하면 한국의 전력 이상이라는 건 모를 리가 없겠지만, 하필 D조에 편성된 팀들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더욱 심했다. 앞서 말했듯 팀들 모두가 4강에 들어본 팀이라 포르투갈은 당연 16강, 그리고 포르투갈이 같은 조에 편성되어서 그렇지 미국과 폴란드도 16강에 올라갈 전력을 갖췄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이건 뭐 개최국이고 뭐고 멘붕이요, 광탈 예약 조편성이었다. 다른 대회와 비교하자면, 전 대회인 98년 네덜란드, 벨기에, 멕시코에 버금가는 난이도의 조편성을 톱시드임에도 비슷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개최국은 못해도 16강은 들었던 것이 사실이라 조별 예선 광탈에 대한 불안감은 상당했다.
그러나...

5. 활동



5.1. 2001년




5.2. 2002년




5.2.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히딩크호








6. 영상

















7. 경기 결과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본선 출전국은 굵은 글씨(볼드체)로 표기.
날짜
장소
구분
상대
결과
스코어
비고
2001년 1월 24일
홍콩, 홍콩
홍콩 칼스버그컵
노르웨이

2:3

2001년 1월 27일
파라과이
[17]
1:1
(PSO 6:5))
대회 3위
2001년 2월 8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두바이 4개국 대회
모로코

1:1
[18]
2001년 2월 11일
아랍에미리트

4:1

2001년 2월 14일
덴마크

0:2
대회 준우승 [19]
2001년 4월 24일
이집트, 카이로
LG컵 이집트 4개국 대회
이란

1:0

2001년 4월 26일
이집트

2:1
대회 우승
2001년 5월 25일
대한민국, 수원
친선 경기
카메룬

0:0

2001년 5월 30일
대한민국, 대구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

0:5

2001년 6월 1일
대한민국, 울산
멕시코

2:1

2001년 6월 3일
대한민국, 수원
호주

1:0
조 3위(2승 1패) 탈락
2001년 8월 15일
체코, 브르노
친선 경기
체코

0:5

2001년 9월 13일
대한민국, 대전
나이지리아

2:2

2001년 9월 16일
대한민국, 부산

2:1
나이지리아 2연전 1승 1무[20]
2001년 11월 8일
대한민국, 전주
세네갈

0:1

2001년 11월 10일
대한민국, 서울
크로아티아

2:0
히딩크 호 사상 첫 유럽전 승리
2001년 11월 13일
대한민국, 광주

1:1
크로아티아 2연전 1승 1무
2001년 12월 9일
대한민국, 서귀포
미국

1:0

2002년 1월 2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CONCACAF 골드컵

1:2

2002년 1월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쿠바

0:0
조 2위(1무 1패)로 8강 진출(…)
2002년 1월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멕시코

0:0
(PSO 4:2))
8강전
2002년 1월 31일
미국, 애너하임
코스타리카

1:3
준결승전
2002년 2월 3일
미국, 샌디에이고
캐나다

1:2
3·4위전
총 전적 2무 3패로 대회 4위(…)
2002년 02월 14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친선 경기
우루과이

1:2
북중미 전지훈련
2002년 3월 13일
튀니지, 튀니스
튀니지

0:0
스페인 전지훈련
2002년 3월 20일
스페인, 카르타헤나
핀란드

2:0
2002년 3월 27일
독일, 보훔
터키

0:0
2002년 4월 20일
대한민국, 대구
코스타리카

2:0
대구 전지훈련
2002년 4월 27일
대한민국, 인천
중국

0:0
파주 훈련 센터 합숙훈련
2002년 5월 16일
대한민국, 부산
스코틀랜드

4:1
서귀포 전지훈련
2002년 5월 21일
대한민국, 서귀포
잉글랜드

1:1
2002년 5월 26일
대한민국, 수원
프랑스

2:3

2002년 6월 4일
대한민국, 부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폴란드

2:0
1라운드 D조 1차전
한국 월드컵 사상 첫 승리
2002년 6월 10일
대한민국, 대구
미국

1:1
1라운드 D조 2차전
2002년 6월 14일
대한민국, 인천
포르투갈

1:0
1라운드 D조 3차전
조 1위(2승 1무)
한국 월드컵 사상 첫 2라운드(16강) 진출
2002년 6월 18일
대한민국, 대전
이탈리아

2:1
16강전
한국 월드컵 사상 첫 8강 진출
2002년 6월 22일
대한민국, 광주
스페인

0:0
(PSO 5:3)
8강전
한국 월드컵 사상 첫 4강
아시아 국가 월드컵 사상 첫 4강
2002년 6월 25일
대한민국, 서울
독일

0:1
준결승전
2002년 6월 29일
대한민국, 대구
터키

2:3
3·4위전
역대 아시아 국가 월드컵 최고 기록(4위)
2002년 1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
친선 경기
브라질

2:3
기술고문 자격으로 참석
김호곤 감독대행이 경기 지휘
총 39전 14승 13무 12패 승률 36% (승부차기 포함시 17승 10무 12패 승률 43%)
FIFA 랭킹: 22위, 아시아 1위(2002년 7월 기준)

8. 평가


역대 최강의 제3대륙 대표팀으로 남을 수 있는 대한민국 축구의 최전성기. 대한민국 축구가 점점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한 계기를 만들고[21] , 역사상 다시는 없을 지도 모르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이 월드컵에서의 공로로 외국인 경기 지도자 최초로 대한민국 최고의 체육 대한민국 훈장인 청룡장을 받았고, 주장 홍명보는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 남미 지역을 제외한 국적 출신으로는 사상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브론즈볼 수상자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인터넷 투표로 뽑힌 본 대회 최고의 인기팀 상을 수상했다. 또한 거스 히딩크 본인은 축구 감독으로서는 2002년 AFC 올해의 감독상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축구 감독들의 최고 권위 개인상 중 하나인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상도 수상하였다. 보통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상이 당해 월드컵이나 유로 우승,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나 압도적인 리그 성적을 기록해야 받을 수 있는 상인데 히딩크 감독은 대한민국을 월드컵 4위를 기록하면서 이례적으로 이 상을 받게 되었다. 그만큼 전세계 축구 관계자들이 이 4강 신화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맡기 전까지 레알 베티스 같은 팀에서도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는 등 자신의 감독 커리어 중 가장 암울한 시기를 보내던 히딩크 감독은 대한민국의 4강 신화로 화려하게 부활한 셈. 당연히 계약 연장 얘기가 나왔지만 담담하게 감독직을 내려놓고 떠났다. 사실 축협도 재계약 이야기를 했으나, 월드컵이 끝나면 PSV 에인트호번과 가장 먼저 협상을 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고자 떠난 것이다.[22] 그리고 국가대표 감독 자리는 한동안 공석이 된다. 일각에서는 히딩크가 재계약을 원했으나 축협이 뒤늦게 움직여 PSV한테 빼앗겼다든지 말 안듣는 외국인 감독을 일부러 내쫓았다는 음모론도 꾸준히 나온다. 그러나 월드컵 이후 당분간 큰 대회라고는 아시안컵뿐이고 그 이후에는 기나긴 공백이 있는데 히딩크 입장에서도 재계약 메리트보다는 박수칠 때 다른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싶었을 것이다.

9.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출전 역사는 꽤 오래되었고 그에 따른 경험도 많으며 자국에서 개최하는 월드컵이라는 이점도 있었다. 그렇지만 번번히 1승조차 못 거두고 지난 대회에서는 5:0 안드로메다 관광까지 당해가며 탈락하는 굴욕을 겪던 승점 자판기와 같던 팀이 세계 4위에 오른 것은 당시 경기를 직관했던 관중들조차 믿을 수 없을만큼 기적에 가까운 성과이긴 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이 지역예선을 거쳤을 경우 본선 진출조차 호락호락하지 않은 전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결과는 전술하였듯 기적에 가까운 성과. 대다수의 해외 언론 및 전문가들은 축구에서 변방인 아시아 국가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이는 국내 여론도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얻어낸 결과였기에 더더욱 값졌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이긴 했으나 충분히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9.1. 동기부여


히딩크호에 승선한 대표팀 선수들의 동기 부여는 대부분 뛰어난 수준이었다.
가장 먼저 대표팀의 맏형이었던 황선홍. 컨페드컵에서 프랑스에게 5:0으로 처참하게 지고 난 뒤 히딩크 감독 앞에서 펑펑 울며 서러워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황선홍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그는 한때 월드컵 본선에서 잇달아 찬스를 날려먹었던 전적이 있고,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해 엔트리에서 탈락(정확히는 명단에는 있었지만 이미 엔트리 제출이 끝났기 때문에 교체 불가능)하기도 하는 흑역사가 있었다.[23]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입어 온 황선홍은 2002 월드컵을 앞두고 J리그 인터뷰에서 "전 다시 한국에 가야 합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기에 그 인식을 모두 바꾸고 은퇴하려고요."라며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토로할 만큼 월드컵에서의 골과 승리에 목마른 처지였다.
또한 주장이었던 홍명보 역시 장기적인 부상과, 수비를 3백에서 4백으로 바꿀 의도가 있었던 히딩크 감독의 희망사항으로 인해 엔트리에서 탈락할 위기에 몰렸고 여론 역시 홍명보가 이제는 대표팀의 짐이 될 것이며, 차세대 중앙 수비수로는 송종국이 어울린다 하는 이야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황선홍과 함께 1994/1998년 월드컵에서의 좌절을 겪었던 홍명보는 월드컵에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고 승리를 얻고 싶어했기에 최선을 다하여 재활에 집중했으며 대표팀 복귀 후에도 최선을 다해 훈련 일정을 소화해냈다.
이운재도 1994년 월드컵에서 교체 멤버로 참가하여 분전했지만 팀이 패배하여 16강에 진출하지 못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1998년 월드컵은 결핵으로 쓰러져 아예 낙마했었다. 이 당시에 받았던 좌절감은 큰 한이 되었고 더불어 선배 골키퍼 김병지와의 경쟁 속에서 지지 않겠다는 일념이 생겨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렇게 이운재는 히딩크의 신뢰와 김병지의 꾸준한 동기 부여 및 보살핌 덕분에 최고의 골키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국가대표 차원에서의 실패로 인한 분발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물론, 선수들은 선후배 순서로 치료받기보다 선배가 주전 멤버들에게 치료 순서를 자진해서 양보할 정도로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최태욱처럼 별로 축구가 좋아서 시작하지 않은 멤버도 있는 만큼 적당히 거를 부분은 있으나 2010년대 국가대표들보다는 훨씬 이 부분에서 뛰어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긴 하다.
감독인 히딩크의 경우, 베티스에서 실패한 이후 바닥을 치고 올라가겠다는 의욕이 있었다. 또 히딩크 본인이 과거 교사 생활을 통해 심리전에 능숙하다는 점도 이런 동기 부여나 선수들의 사기 진작에 도움을 주었다. 미국 전에 미스를 남발했던 설기현이 이탈리아전에서 동점골을 터트린 점이나, PK를 실축했던 이을용이나 안정환이 경기 중에 이를 만회하는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9.2. 축협의 꾸준한 지원과 리그의 희생 및 적절한 홈 어드벤티지 활용


앞서 언급했듯이, 대한축구협회는 월드컵 16강을 위해 영혼이라도 팔 기세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대한민국이 역대 홈 팀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준비했던 팀이 되었고, 유례없을 정도로 엄청난 지원과 장기 합숙 훈련을 했다. 히딩크 부임 기간에만 2001년 1월 홍콩오만, 2월에는 UAE, 4월에는 이집트, 8월에는 네덜란드, 2002년 1월에는 미국, 2월에는 우루과이, 3월에는 스페인에서 장기 전지훈련을 가졌고, 자신이 원하는 코칭 스탭을 마음껏 꾸리는 등 많은 지원을 받았다.
시도 때도 없는 차출 요구에 군소리 하나 없이 K리그 팀들도 순순히 응해줬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른 국가대표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조직력을 갖추게 되어 전력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히딩크 이전이나 이후의 대한민국 감독뿐 아니라 다른 나라 대표팀의 감독들을 봐도 이 정도의 지원을 받은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만큼 2002 월드컵이 우리나라에게 절박했던 것이라지만 사실 리그가 오직 대기업의 출자로만 이뤄지는 구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참고로 21세기는 1세대 창업주들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창업에 따르는 부산물인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기업주가 없어서 맘대로 축구에 투자 및 출자해줄 수 있는 곳이 없으므로 그런 구조로 리그를 돌리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시운도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24][25]
그리고 히딩크호부터 대한민국 대표팀은 체계적인 관리와 선수관리, 상대팀 분석이 이루어졌다. 체력관리 트레이너나[26] 비디오 분석관[27] 등의 보직이 생겨 감독을 보좌하고 선수들에게 폭넓은 정보를 줬다. 이전에는 이런 게 없었기 때문에 훈련도 주먹구구식으로 해왔고, 선수 관리나 상대 팀 분석 같은 건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28]. 히딩크가 부임해서 첫 훈련을 했을 때도 이런 문제로 어이없어했을 정도였다[29].
여기에 의무팀도 전속 계약을 맺고 선수들을 면밀히 관리했다[30]. 이후 대표팀의 팀 닥터가 흉부외과 전문[31]이라든지, 제대로 계약도 안 한 봉사 수준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현재보다 훨씬 관리가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32].
그리고 당시 경기들을 보았을 때, 현재의 국가대표보다 훨씬 빠른 선수들의 움직임이 돋보였는데 이는 홈팀의 이점이기도 했다. 히딩크 감독이 경기 전 경기장의 잔디를 짧게 손질하고 스프링클러를 가동해 달라는 주문을 넣었기 때문. 이유는 축구화의 스터드에 잔디가 길수록 빠른 볼컨트롤과 스피드에 방해가 되는 요인이라는 것이 그 이유. 이 사실을 2003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밝힌 적이 있다.[33]

9.3. 최정예 멤버


히딩크호는 전무후무할 지원을 등에 업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팀을 새로 만들다시피했다. 히딩크호는 FC 코리아라는 이름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선수들을 성장시키고 가능성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바쁜 일정들을 소화했다. 선수들의 훈련프로그램을 지시하는 한편,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을 가지고 선수의 포지션 자체를 변경하는 실험을 자주 했다. 예를 들어 송종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른쪽 윙백/미드필더는 물론, 센터백을 겸할 수 있었으며 북중미 골드컵때에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실험되었다. 이영표는 02년 3월 이전까지는 꾸준하게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되다가 김남일이 해당 위치에 자리잡은 이후에야 본래 포지션인 왼쪽 미드필더로 돌아갔으며, 박지성 역시 월드컵 직전에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윙어로 자리잡았을 뿐, 그 전까지 히딩크호 내에서 주로 중앙 미드필더를 소화했다. 이처럼 히딩크호의 장점으로 꼽히는 멀티플레이어 송종국, 이영표, 박지성, 유상철과 같은 선수들의 대거 등장은 재능있는 선수들을 다양한 포지션에 넣어져 실험한 결과의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34]
센터백으로 엔트리된 홍명보김태영, 이민성은 98월드컵 당시에도 국가대표 선수들이었으며, 98년 월드컵 네덜란드전과 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에서 0-5패배를 당할 때 당시에도 국가대표에 있었던 선수들이다. 하지만 히딩크호의 손을 거치자 이들은 결국 월드컵 4강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낸 선수들이 되었다.
그 결과 히딩크호의 멤버들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정예 멤버로 완성되었으며, 히딩크의 지도 하에 의해 완성된 한국식 토탈 사커를 제대로 수행해낼 수 있는 균형 잡힌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골키퍼인 이운재, 공격수 황선홍, 수비수 홍명보, 미드필더에 유상철 등 한국 축구사상 최고의 핵심 멤버들이 포진해 있었으며 각자의 개성이 다양해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35] 게다가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수많은 선수들을 단기간에 빡세게 실험해 본 후 추리는 유리함까지 있었다.
잘 추려냈기 때문에 굳이 선수를 하나하나 나열할 것까지도 없이 이 당시 출전한 멤버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폼도 상당히 좋았으며, 비교적 균형도 잘 맞는 편이었다. 다만 멀티플레이어를 제외하면 중앙 수비수 자원이 이민성 1명뿐이어서 30대 스리백 3명을 4강까지 내내 돌린 것은 아쉬우며, 현영민 최성용 등 윙백 교체자원의 무게감이 부족해 멀티플레이어였던 이을용만 활용되었던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아무래도 윙백이나 수비수 교체자원이 김남일이나 유상철에 준하는 수비력으로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소화할 수 있는 강력한 수비력을 지닌 자원이었거나 차두리가 일찌감치 공격수와 윙백을 소화 가능했으면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스쿼드에 선발되었으나 출전횟수가 적거나 없었던 2군 멤버인 최용수, 최태욱, 차두리, 윤정환, 최성용, 이민성, 김병지 그리고 아예 2002 월드컵 스쿼드에 선발되지도 못했던 이동국, 김도훈, 서정원 등의 능력을 2010년대 국가대표들과 비교해 보면 2002년 멤버들의 무게감이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36] 심지어 이동국은 2015년 아시안컵 주전 멤버로 예상되다 부상으로 탈락했으나 2017년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경기를 뛰기까지 했으며, 차두리는 2015년 아시안컵에서 훌륭한 활약을 하고 국가대표 경력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훗날 최진철은 월드컵 데뷔전을 떠올리며 "너무 떨려 도망가고 싶었다. 폴란드전에 애국가를 부르는데 복도 입구만이 보였다. 당장 거기로 뛰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압박감이 심했다는 뜻이다. 해당 기사
훗날 히딩크가 중국 U-23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행했을 때 "중국이 월드컵 진출하려면 개최 말고는 답이 없다"라고 할 만큼 선수들의 질이 매우 안 좋았고, 히딩크 본인이 20세 이하에서까지 선수들을 찾으려 할 정도였다. 한국 대표팀을 맡을 땐 조직력을 끌어올리면 강호들과 겨룰 수준은 될 거라고 평가한 것과는 대조적인데, 2002년 시절 기량과 잠재력이 높은 한국 선수들이 제법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37]

9.4. 탄탄한 조직력


축구는 조직력이 생명이다. 애초에 팀을 구성할 때 선수들끼리 손발을 무지하게 많이 맞춰봤다. 그 결과 손발이 잘맞는 조합인 안정환-설기현의 공격진과 송종국-박지성-김남일-이영표-이운재의 수비진을 구축했으며 그 연결고리로 유상철을 택했다. 게다가 그들을 아우를 노장으로 홍명보-황선홍 콤비를 택했다. 차두리의 경우 좀 우려가 있었다. 바로 아버지가 차범근이었기 때문에 애가 스타의식에 젖어서 뻐길까봐 걱정도 했었다. 하나 차두리는 아버지랑 자기가 별개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거스 히딩크 밑에서 움직였다. 실제로 차두리는 차범근의 후광을 이기려고 전심전력을 다했다. 차두리가 은퇴할 때, 차범근이 "이제 차붐의 아들인 거 후회 안 하지?"라고 얘기했다. 다시 말해서 차두리는 '차범근의 아들 차두리'가 아닌 '축구선수 차두리'로 남으려고 했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엄청나게 강한 그 원동력이 바로 조직력이며 히딩크 역시 조직력을 극대화해서 정작 대한민국의 자국민들은 16강까지만 원하는 결과를 4강까지 끌어올려준 것이다.

9.5. 거스 히딩크 감독의 탁월한 지도력


상기 서술한 선수들의 사기 충천 + 전폭적인 지원 요소를 등에 업은 히딩크 감독으로선 성과를 못 낼 수가 없을 노릇. 그나마 방해되는 요소는 오직 여론뿐이었고 당연히 히딩크 감독은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편한 마음으로 준비 과정에서 쏟아지는 어떠한 비판도 수용하되, 월드컵에만 철저히 올인하여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선수들을 선발했으며 전략, 전술을 짜고 고도의 체력훈련을 감행하였다. 이 결과 대한민국 선수들의 전력은 웬만한 유럽, 남미팀급으로 수직상승하였으며 이에 맞선 유럽의 강팀들을 집으로 되돌려보낼 수 있었다. 특히 체력적인 면에서의 비약적인 발전은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상대로 대등한 접전을 벌이고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을 차례로 상대하면서도 체력 방전 없이 꾸준히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던 셈. 체력과 몸싸움의 발전은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발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로 뽑히곤 한다.
그리고 히딩크는 2002년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같이 실력은 세계최정상급으로 뛰어나지만 플레이 스타일이 독불장군형인 선수는 과감히 배제했다. 얼마나 동료 선수들을 위해 희생하느냐, 얼마나 팀에 기여하느냐 오직 이거 하나만 보고 엔트리 멤버를 차출했다. 일례로 홍명보의 경우는 팀의 맏형이라 맏형으로서 팀을 장악하려들자 히딩크는 그런 홍명보를 과감하게 팀에서 내쫓았으며 이에 홍명보는 모든 것을 버리고 겸손하게 경기에 임하겠다고 해서야 겨우 히딩크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히딩크는 연습경기이든 평가전이든 실제 월드컵 경기이든 간에 골을 어시스트한 선수를 매우 크게 칭찬했다.
일각에서, 특히 한국의 몇몇 거물급 축구 지도자들은 히딩크호의 성과를 위에서 제시한 축협의 전폭적 지원 덕으로만 치부하며 자신들에게도 동일한 지원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월드컵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히딩크 이전의 한국 축구계는 상대팀 분석은 고사하고 한국 축구 자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조차 오판하고 있었다. 히딩크가 보여준 한국 축구에 대한 냉철한 평가, 한국 축구에 도입한 훈련 시스템, 선수의 선발 및 장악능력, 언론플레이가 아닌 언론 대응 능력이 없었다면 단순히 긴 시간과 예산만 가지고 성과를 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38] 특히 히딩크 이전 부임했던 데트마어 크라머, 아나톨리 비쇼베츠 두 외국인 감독에 대해 한국 축구인들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보면 한국 축구인들이 히딩크를 대신해 성과를 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리고 팀 안팎에서 히딩크를 향해 닥쳐왔던 여러 도전들을 그가 물리쳐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럽 무대에서 보여줬던 실적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야망 또한 남달라서 축협과 선수들을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16강이나 제대로 갈 수 있을까를 걱정했을 당시 히딩크 감독은 최소 4강 이상의 성과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16강으로 이끈 다음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I am still hungry)."라는 초절정 명언을 남겼는데, 이는 붉은 악마의 카드 섹션이었던 '꿈★은 이루어진다'와 함께 오랫동안 기억될 2002년의 상징적인 문구로 자리잡았다.
선수들 앞에서도 이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한국이 16강에 오른 직후 훈련장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스페인이 아일랜드를 꺾고 8강에 오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스페인의 전력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팀은 스페인과 8강전에서 붙을 각오로 이탈리아를 꺾는다."라는 의도와 함께 스페인-아일랜드전을 관전하러 가는 패기갑스런 모습을 보여줄 정도였다. 이런 감독의 행보 하에서 대표팀은 16강 진출 이후 해이해진 정신을 다 잡았고, 16강, 8강, 4강전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은 전술적으로 굉장히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수비라인에서 백3와 백4를, 공격에서는 3톱과 2톱을 모두 사용했다. 월드컵 경기 내내 선발 라인업은 3-4-3이지만 원래는 4-3-3을 사용하려 했었고, 경기 도중에는 선수교체에 따라 혹은 선수들의 위치조절 만으로 4-3-3[39]이나 4-4-2[40]로 변화시키는 변화무쌍한 전략을 사용했다. 히딩크 감독은 이러한 유연하고 뛰어난 전술로, 기존 전술적 흐름에서 사장되어 가던 리베로#s-5판타지스타를 모두 적절히 사용했다. 특히 히딩크 감독의 전술적 능력은 이탈리아전에서 돋보였는데, 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빼고 공격수만 셋을 추가로 투입하면서도 수비 밸런스를 유지, 세계 최강급 전력이던 조반니 트라파토니의 이탈리아를 침몰시켰다. 이러한 전술적 능력은 선수 육성과 더불어 히딩크 매직이라는 단어가 생기게 하였고, 이후 뛰어난 감독들의 성과를 매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로이스터 매직 등)의 원조가 되었다.

4-3-3
LW
9. 설기현
CF
18. 황선홍
RW
8. 최태욱
CM
6. 유상철
CM
21. 박지성
DM
5. 김남일
LB
10. 이영표
CB
4. 최진철
CB
[image]20. 홍명보
RB
22. 송종국
GK
1. 이운재

3-4-3
LW
9. 설기현
CF
18. 황선홍
19. 안정환
RW
21. 박지성
LWB
10. 이영표
13. 이을용
CM
6. 유상철
CM
5. 김남일
RWB
22. 송종국
CB
7. 김태영
CB
[image]20. 홍명보
CB
4. 최진철
GK
1. 이운재

4-3-3
LW
9. 설기현
CF
18. 황선홍
RW
21. 박지성
CM
6. 유상철
CM
5. 김남일
DM
[image]20. 홍명보
LB
10. 이영표
13. 이을용
CB
7. 김태영
CB
4. 최진철
RB
22. 송종국
GK
1. 이운재

4-4-2
CF
9. 설기현
SS
19. 안정환
LM
10. 이영표
CM
6. 유상철
CM
5. 김남일
RM
21. 박지성
LB
7. 김태영
CB
[image]20. 홍명보
CB
4. 최진철
RB
22. 송종국
GK
1. 이운재

10. 편파 음모론


한국의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은 대단한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히딩크호의 업적에 대해 그 전부가 심판의 편파 판정 덕으로 이루어진 거짓 성과물인 것처럼 주장하는 의견도 있는데 그 주장을 보면 2002년 월드컵 한국 대표팀 경기를 보지 않은 사람들로 추정된다.
물론 홈어드밴티지로 판정 부분에서 어느 정도 이익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선수, 코치진들의 엄청난 노력과 그에 따른 뛰어난 실력이 기반이 되었기에 4강 진출이라는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걸 알아야 한다. 즉 판정 이익 하나만으로 대표팀의 노력과 실력을 일절 깎아내리는 건 잘못됐다는 소리. 그리고 홈 이점은 앞선 월드컵들에서도 선례들이 있었다.[41]
2002년 직후엔 주로 축구 안티 사이트인 엠엘비코리아개축구폐지위원회(줄여서 개폐위)에서 이 루머를 열심히 퍼뜨리고 있었다. 그들이 주로 표적을 삼는 경기는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전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의 링크에 있다. 1 2
저 글을 쓴 국까나 밑의 댓글[42]로 한국이 부끄럽네 어쩌네 하는 자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정말로 2002 한일 월드컵 경기를 보고 쓴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왜곡한 영상만 보고 쓴것인지 상당히 의문스럽다. 포르투갈 전에서 질 것 같으니까 경고줄 걸 퇴장주었다고 했는데, 주앙 핀투가 저지른 태클은 프로레슬링에서나 나올 법한 기술로[43] 자칫 잘못했으면 그 때 박지성의 선수 생명이 끝날 뻔했다. 충분히 퇴장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반칙이다. 거기다 주앙 핀투는 전날 조국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해 기분도 안 좋은 주심을 폭행하는 미친 짓거리까지 했다.
두 번째 베투의 퇴장에 대해서는 이영표의 할리우드 액션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1998 프랑스 월드컵과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FIFA 규정에서 백태클 제재 강화 라고 명시되어 있었는데 당시 베투의 퇴장은 이영표의 할리우드 액션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경기 상황과 당시 규정에 따라 퇴장당했을 뿐이다.[44] 상단의 포르투갈 전 문서에서도 나와 있듯이 당시 주심이었던 앙헬 산체스는 자신의 조국 아르헨티나가 이틀 전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바람에 심기가 별로 좋지도 않았었고 안 그래도 예민한 사람 앞에서 대놓고 프로레슬링 기술을 시전하질 않나 거기다 주심을 폭행하기까지 해댔는데 포르투갈 팀이 주심한테 안 찍히는 게 도리어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터키전에 관한 건 정말로 2002년 대회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백한 거짓말이라고 말할 내용이다. 터키전은 FIFA에서도 가장 페어플레이하고 모범적인 경기로 선정해서 월드컵 때마다 이 경기처럼 해야 한다고 교과서처럼 반복해서 틀어줄 정도이다. 더군다나 붉은 악마들은 터키 선수들에게 야유를 퍼붓고 쓰레기를 투척하기는커녕 오히려 태극기보다 더 큰 초대형 터키 국기까지 꺼내서 응원해주었다. 오죽했으면 터키 대통령까지도 감동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터키인들도 크게 감동해서 "이런 한국인들을 위해서라면 다시 한 번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실제 하칸 수쿠르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은 "나뿐 아니라 터키 모든 선수들이 한국인에게 감동을 받았습니다."였다.
수쿠르 외에도 터키 선수들 대부분이 한국 응원단이 보내준 열렬한 응원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했지 결코 자신들이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으며 당시 경기를 뛰었던 터키 수비수 투가이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경기장 안으로 데려와 자신이 느꼈던 감동적인 순간을 아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월드컵이란 경기에서 홈 관중이 상대팀 국기를 흔들어가며 열렬히 응원해 준 사례는 어지간해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무슨 쓰레기 투척이며 야유가 나왔단 말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명백한 거짓이며 이런 말과 비슷한 말이 나왔던 건 이 때가 아니라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나온 것을 와전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기로 결정된 이후 터키에서는 형제의 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축하하기 위해 고위 관료들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현실은 그런 거 없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터키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조차 제대로 몰랐고 공식석상에서도 비즈니스 위주의 대화만 오갔을 뿐 한국전쟁 당시 터키의 은공에 대해 감사의 의사를 표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때 한국을 방문했던 터키 관료들이 매우 실망하여 귀국한 뒤 "이제 한국에 대한 짝사랑을 그만 둡시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당시에는 붉은 악마의 주축을 이루었던 대학생들이 먼저 터키가 우리에게 베풀었던 은혜에 대해 알리며 "형제의 나라를 응원하자."고 붐을 일으켰고 터키는 적어도 한국에서 경기를 치르는 동안 한국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았으면 응원을 받았지 결코 홀대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전에서 나온 심판 판정들 중 골라인 아웃판정 오심 논란[45]말고는 다른 논란이 될만한 판정은 올바른 판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전부 오심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이 매수했다는 결론을 내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판정 논란이야 스포츠에 늘 따라다니는 것이고,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판정 이익을 본 부분이 있다. 이탈리아 전에서는 카드 숫자로 따지면 경고는 4: 5로[46] 비슷했고 퇴장은 0:1, 파울 횟수는 한국이 27회, 이탈리아가 23회로 굉장히 거친 경기였다.이탈리아 선수들만 파울과 카드를 받았다는 건 근거가 없는 소리다. 그리고 김태영의 코뼈를 박살낸 크리스티안 비에리가 카드를 안 받은 건 분명 한국에게 억울한 부분이고, 토티는 몸싸움 과정에서 얼굴에 접촉이 없었음에도 얼굴을 쥐어싸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스페인전도 마찬가지다. 그 골라인 아웃판정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정으로 한국이 다소 자잘한 이익을 본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한테 마냥 유리하게 편파판정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히딩크가 재킷 벗어던지면서 주심한테 항의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스페인 쪽에서 거친 파울을 쏟아냈는데 당시 주심이었던 가말 간두르는 대부분 그냥 넘어가버렸다.
독일전 때 몇몇 관중들이 나치 운운하며 선수들의 영정 사진을 게재한 건 사실이긴 하다. 그 점은 당시 성숙하지 못했던 일부 응원단들이 자숙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후진국 운운하면서 한국을 깔아뭉개는 식으로 말할 일은 아니다. 선진국이라는 유럽도 관중들이 인종차별적인 구호를 쏟아내며 상대팀 선수를 비하하고 야유하는 짓거리가 뉴스에 나온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다음은 극히 일부의 사례들이다. 기성용 인종차별 더 심각했다…’개고기’ 비하까지 [해외축구]이탈리아 프로축구 인종차별 파문 카를로스,"프리메라리가 인종차별 심각" 스페인-잉글랜드, '축구 인종차별’ 장외설전 발로텔리, 루마니아전서 자국 팬들에게 인종차별 야유받아 독일 분데스리가, 인종차별행위에 몸살
또한 이탈리아전의 경우 판정논란에 초점이 맞춰지긴 했지만 일부 해외언론에선 이탈리아의 경기력을 패인으로 지적했을 정도로 이탈리아의 경기력이 비교적 부진했었다. 조별리그에선 비교적 만족스럽지 않았던 경기력과 오프사이드 오심으로 골이 취소되는 불운이 겹치면서 휘청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어 한국과의 16강전에서 이탈리아는 선제골을 넣은 이후 추가골을 노리기 보다는 지나치게 수비 지향적인 경기를 펼치다 경기막판에 동점골을 먹혔다. 그리고 동점이 된 이후 이탈리아에게 경기를 끝낼 수 있는 결정적인 일대일 찬스가 비에리와 가투소에게 찾아왔지만 모두 놓쳤고, 이후 안정환이 골든 골을 넣었다.
그리고, 월드컵 참가 선수들의 말이라고 나온 것을 보면 참 어이가 없는데 펠레요한 크루이프 같은 옛날 스타부터 별에 별 사람을 다 늘어놓고 근거도 없는 카더라 어록을 적어 놓았다. 참고로, 요한 크루이프는 2002년 월드컵 당시에는 오히려 히딩크와 한국팀에 호의적인 말을 했다. 요한 크루이프, "한국팀 16강 진출 희망 있다", "오렌지팀이 이겼다" 네덜란드도 환호 단순히 요한 크루이프가 히딩크와 같은 네덜란드 출신이라서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요한 크루이프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축구를 구사하면 자국 팀에게도 독설을 퍼붓는 사람이고 더구나 히딩크와는 축구관이 꽤 많이 다른 사람이다. 펠레는 일본에 우호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한국에 대해서도 덕담을 했다.
<월드컵> 펠레 "한국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월드컵 D-2] 펠레 "한국 16강 절호의 찬스"
[2002월드컵]펠레 “한국, 폴란드 잡고 16강 간다
펠레, "한국이 스페인 이긴다" - "한국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팀"이라 격찬
펠레 “한국 4강은 실력”
[월드컵] 펠레 "한국대-브라질 결승 기대"

나머지도 신빙성이 없거나, 개고기 발언 등 이 건과 별 상관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한국을 상대했던 폴란드 골키퍼 예지 두덱한국에 대해 호감을 자기 홈페이지에다가 쓰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이 오심 빨, 편파판정 빨, 홈빨 등으로 올라갔다고 하며 반대로 일본을 추켜세우는 사람도 있는데, 정작 일본도 주최국 버프와, 오심 덕을 강하게 봤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조별리그 2차전 러시아와의 경기였다. 당시 일본은 전반전 내내 러시아의 공격축구에 기가 눌려 수비 위주로 경기를 풀었는데 후반전 6분에 터진 이나모토 준이치의 결승골로 러시아를 1:0으로 제압했다. 그런데 영상[47]을 보면 알겠지만 이나모토가 야나기사와 아쓰시의 패스를 받을 때 위치는 명백히 오프사이드 위치였다. 왜냐하면 위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나모토의 왼발이 러시아 최종 수비수보다 앞에 있기 때문이다![48][49]
바로 뒤에 주심이 있었기에 주심이 휘슬을 불 줄 알고 러시아 선수들은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지만 [50][51] 당시 주심이었던 독일인 머크 마커스는 휘슬을 불지 않았고 일본의 득점을 선언해 버렸다. 이후 러시아는 닥공모드를 발동해 계속해서 일본을 몰아붙였고 일본은 지상 최대의 걸어 잠그기를 시전해 이나모토의 골을 끝까지 지키면서 1:0으로 겨우 승리했다. 이렇게 일본은 한국보다 더한 심판들의 오심으로 이득을 본 게 있었다. 그럼에도 뒷말이 나오지 않은 건 일본이 적당히 16강 쯤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위에 링크된 글은 그냥 한국의 모든 걸 까고 싶어하는 국까가 2002년 대회를 직접 보지도 않고 어디서 인터넷에서 떠도는 단편적인 사실들을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쓴 글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런 류의 글들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서 2002년 대회 때는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던 중고딩들"아, 2002년 대회는 사기였구나!"하고 느끼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참고로 다른 나라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편파판정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예를 들면, 1934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를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1934년 대회는 그야말로 무솔리니가 조작한 운동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솔리니는 군대를 풀어 상대팀 락커룸에 쳐들어가 니들이 이기면 무조건 죽음이라는 식으로 선수들을 협박하고 아르헨티나에 빨대를 꽂아 선수들을 빼앗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 주심들에게도 이탈리아한테 유리하게 판정 안하면 죽음이라고 협박하는 등 월권행위를 일삼았다. 그리고 같은 파시즘 형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도 겸사겸사 유리하게 만들어줘서 사이좋게 결승전에서 만날 것까지 설계했다.[52] 그런 식으로 대회를 치러서 당연히 이탈리아는 손쉽게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8강에서 서독 심판이 아르헨티나 주장인 안토니오 라틴을 별다른 이유없이 퇴장시켰다. 라틴은 판정에 항의하며 필드를 떠나지 않자, 대회를 진행하는 잉글랜드 협회에서는 용역들을 들여보내 라틴을 각목으로 두들겨 패서 쫓아냈다. 거기다 결승전은 그 유명한 허스트의 웸블리 골과 해트트릭을 완성시킨 골[53]이 논란이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역시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의 입김 아래 치렀던 대회였다. 특히 가장 논란이 많은 경기는 2라운드 아르헨티나 vs 페루의 경기였는데 그 때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4골 차 이상으로 꺾어야 결승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꺾었는데 그 때 승부조작 논란이 있었다. 또 결승전인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의 경기에서도 미리 아르헨티나 측에서 아르헨티나에 유리하게 편파판정을 하도록 심판을 협박했다는 논란도 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개최국 스페인은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딱 1승을 얻는데 그쳤는데, 이 경기에서 주심은 0-1로 지던 상황에서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 유도한 파울을 심판진이 페널티킥으로 판정하고, 로베르토 로페스 우파르테의 킥이 오른쪽으로 크게 빗나가자(...) 이번엔 골키퍼 파울을 선언하며 재시도 기회를 주고, 2차 시도에서 후아니토가 간신히 성공했다.문제의 그 경기 이 경기에서 이긴 스페인은 북아일랜드에게 0-1로 패한 뒤 유고슬라비아를 다득점으로 간신히 따돌리고 2라운드에 간신히 진출했고, 서독에게 패한 뒤 잉글랜드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대회를 마쳤다. 같은 대회에서 서독은 4강에서도 서독 골키퍼가 프랑스 파트릭 바티스통의 얼굴을 대놓고 걷어차고도 반칙 판정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다.
하지만 위와 같은 사례가 수두룩한데도 불구하고 트로피를 반납해야 한다든가, 제명해야 한다든가 하는 얘기가 나오지는 않는다.
정작 2002년 월드컵 때 로비 의혹을 받은 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2015년 6월 FIFA에 대한 비리가 대대적으로 적발되어 수사되는 과정에서 2000년 당시 일본 축구 협회장인 나가누마 겐 회장이 남미축구연맹에 대한 유치 사례로 로비를 했고 150만 달러를 지불한 것이 스페인 언론을 통해 폭로되기도 했다.
스페인 스포츠지인 '아스'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일본축구협회가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유치에 성공하고 나서 거액을 돌렸다고 보도했다. 아스 지에 따르면 남미연맹에서 15년간 근무한 직원으로부터 이런 정보를 입수했다고 전했으며, 150만 달러 가운데 120만 달러가 당시 FIFA 집행위원이며 남미연맹 회장이던 니콜라스 레오스의 개인계좌로 흘러들어 갔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30만 달러는 에두아르도 데 루카 남미연맹 사무총장과 소라나 다니스 남미연맹 임원이 나눠 가졌다고 한다. 다만 이 보도에 대해 당시 일본축구협회장이었던 오구라 준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참고로 니콜라스 레오스는 축구 경기 TV 중계권과 마케팅 권한을 대가로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미국에서 기소되기도 했다. 가택연금 상태로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에 머물면서 파라과이 법원이 미국으로의 신병인도를 승인하자 항소했는데,# 2019년 8월 28일에 니콜라스 레오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바람에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되고 말았다.#
한국의 4강 진출은 순전히 1년 반 동안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휘 아래 선수들의 피나는 훈련과 노력이 있었기에 이뤄진 일이다. 물론 8강전 스페인전에서는 골라인 아웃판정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정이 있었지만 이걸로 한국의 승리를 폄하할 이유가 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자신들의 승점자판기 노릇을 했던 한국에 잇달아 패배하자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심판의 판정을 물고 늘어지는 일부 유럽 팬의 치졸한 짓거리에 낚여서 저딴 글을 쓰고 믿어서는 안 된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와 그 이후 한참 동안 떠돌던 할리우드 배우들이 했다는 출처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는 한국 비하 발언들[54]이나 가짜 오노 인터뷰 같은 사례처럼 사실 여부가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발언을 진실인양 쓰는 건 문제가 크다.
하지만 이러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유튜브에서는 별다른 재반박 없이 오심으로 논란된 장면들을 짜집기한 영상이 조회수 800만회를 넘어섰고 [55] 다른 2002 월드컵 관련 영상에는 "Corruption"[56]라는 댓글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는 당시 판정에 대해 여전히 앙금이 풀리지 않은 일부 외국 축구 팬들의 4강 신화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심의 여부와 관계없이 히딩크호가 이루어낸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는 부정할 수 없으며 히딩크 감독의 훌륭한 지휘력과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은 우리 기억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11. 대진운


당시 다른 4강 팀들(브라질, 독일, 터키)과 한국의 당시 대진 난이도를 비교해보자. 현재 월드컵에서 우승해본 팀은 밑줄 표시했다.
  • 한국: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 - 이탈리아 - 스페인 - 독일[57] - 터키[A]
  • 브라질: 터키, 코스타리카, 중국 - 벨기에 - 잉글랜드 - 터키 - 독일
  • 독일: 사우디아라비아[58], 아일랜드, 카메룬 - 파라과이 - 미국 - 한국[59] - 브라질
  • 터키: 브라질, 코스타리카, 중국 - 일본 - 세네갈 - 브라질 - 한국[A]
당시 한국이 연달아 상대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은 대회 전에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던 프랑스나 아르헨티나 같은 팀들일지라도 절대 승리를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막강한 상대들이었고, 폴란드와 미국 역시 충분히 다른 조에 갔더라도 강호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다크호스로 평가받는 팀들이었다.[60] 특히 포르투갈은 2000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2001년에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그 루이스 피구가 이끌던 스타군단이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엔트리 역시 지금 봐도 입이 벌어질 수준의 엄청난 엔트리다. 만일, 터키는 물론이고[61] 브라질이나 독일[62]이라도 한국과 똑같은 대진으로 연달아 경기를 치렀다면 우승이나 준우승, 혹은 3위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을지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63] 당시는 느끼지 못했던 말도 안 되는 골키퍼 라인이 현재에 이르러 회자되고는 하는데, 간단하게 당시 맞붙었던 골키퍼 7명 중 4 빅 이어를 들었고, 2쥘 리메 컵을 들었으며, 해당하지 않는 골키퍼도 터키와 미국에서 손꼽히는 골키퍼였다.[64]
반면 이 대회 우승국이었던 브라질, 준우승국이었던 독일은 월드컵 본선 뚜껑이 열리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우승 후보로 꼽히지 않은 팀이었다.[65] 그러나 두 팀은 본선에선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브라질의 대진을 보면 조별예선에서 터키와 중국, 코스타리카를 상대했는데, 당시 터키는 상위권 팀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복병으로 평가받고 있었고, 코스타리카는 지역예선에서 조 1위로 올라왔었는데, 그것도 이번 대회에서 16강을 차지한 멕시코와 8강을 차지한 미국을 각각 조 2위와 조 3위로 밀어내버릴 정도로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가진 팀이었다. 다만 중국은 승점 자판기에 불과했다.[66] 16강 상대였던 벨기에는 당시 트루시에호의 일본과 함께 꿀대진의 수혜를 받아 16강에 올라온 팀[67]이었으며, 8강 상대였던 잉글랜드는 당시 아르헨티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브라질 등의 바로 아래급으로 우승급 전력까지는 아니고 포르투갈과 동급으로 4강까지는 바라볼 수 있는 팀이었다. 실제로도 잉글랜드는 조별리그에서 아르헨티나와 스웨덴에게 연파당한 나이지리아와 유일하게 비긴 팀이다.[68] 4강에선 조별 예선에서 만난 터키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독일은 다른 4강 팀들이었던 한국, 브라질 이 두 팀과는 달리 조별리그가 비교적 쉬웠다.[69] 당시 내분으로 지리멸렬하던 사우디아라비아[70], 지역 예선에서는 준수했지만, 대회 이전부터 실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평을 들은 카메룬[71]이라는 비교적 쉬운 상대들을 조별리그에서 만났다. 그 중에서 조별리그 2차전에서 만난 아일랜드가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가진 팀이었다.[72] 16강에서 만난 파라과이는 세계 경쟁력이 조금은 떨어진다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팀이었다. 독일은 이런 파라과이를 상대로 이 대회 최악의 졸전을 보여주었다.[73][74] 8강 상대였던 미국을 상대로 고전끝에 1-0으로 겨우 이겼고[75], 4강에서는 한국을 만나 미하엘 발락의 결승골로 1-0으로 겨우 이겼지만 당시 한국은 강력한 상대들[76]과 연달아 싸우고 오는 동안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즉, 독일은 대진운에서 어느정도 수혜를 본 것이다.
터키는 당시 우승급 전력이었던 브라질과 조별리그 1차전, 4강전에서 두 번 맞붙은 것과 조별리그 2차전에서 이 대회의 16강, 8강에 오른 멕시코와 미국을 제치고 조 1위로 지역예선을 통과한 코스타리카[77]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강력한 상대들과 싸운 적이 없다. 8강에서 만난 세네갈은 한국과 잉글랜드처럼 강력한 팀들[78]을 상대하느라 다소 힘이 빠진 상태였고, 3,4위전에서 만난 한국 역시 강력한 팀들[79]을 연달아 상대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상태였다. 16강에서 만난 일본은 사상 유례없는 쉬운 조를 만난 덕에 거저먹기로 16강에 오른 팀이었고[80], 조별리그 3차전에서 맞붙었던 중국은 아예 있으나 마나한 팀에 불과했다. 결국 터키가 상대한 팀 중 코스타리카와 세네갈, 브라질을 제외하면 터키는 한국 중국 일본이라는 아시아 3팀을 만나서 거저먹기로 승리를 거두었고, 8강까지 오는데 프랑스스웨덴, 덴마크등의 강팀을 상대하느라 지친 세네갈을 8강전에서 1:0으로 꺾고 거의 거저먹기로 4강에 오른 것이다. 세네갈과는 반대로 8강까지 오는데 터키가 만난 상대는 터키보다 강한 팀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코스타리카, 중국, 일본에 불과하다. 터키는 개최국 대한민국에 3:2의 승리를 거두고 대회 3위로서 월드컵 역사상 3위의 기록을 세웠으나 이 대회 토너먼트에서 브라질을 제외하고 터키가 상대한 5팀이 터키보다 더 전력상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는 코스타리카-중국-일본-세네갈-대한민국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거의 거저먹기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아시안컵이나 다를 바 없는 대회 수준으로 4강에 오른 것이다.
정리하자면 당시 월드컵에서 한국, 브라질, 독일, 터키가 각각 맞이한 당시 대진 난이도를 비교하면 한국 >>> 브라질 > 독일 > 터키 순으로 어려웠다. 즉, 한국은 피터지게 고생했고[81], 브라질은 8강에서 당시 4강급 전력으로 평가를 받았던 잉글랜드와 16강에서 다크호스인데다가 유럽의 복병이었던 벨기에를 만나는 불운을 겪은 팀이었지만, 한국 대진에 비하면 브라질의 대진은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브라질이 이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쉬운 대진운으로 올라갔다. 독일의 경우에는 한국 대진과 브라질 대진보다는 쉬웠지만 터키 대진보다는 좀더 난이도가 있는 대진을 맞이했다. 사우디를 8-0으로 압살한 이후에 만난 팀이 아일랜드-카메룬-파라과이-미국-한국 이런 대진운으로 결승에 올라왔으나 아일랜드와 카메룬 미국 파라과이 4팀 모두 각 대륙에서 의외의 복병으로 꼽히는 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독일의 대진운도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과 브라질의 대진운보다는 훨씬 쉬운 대진운으로 브라질의 대진운과 마찬가지로 복병으로 꼽히기도 했으나 독일이 이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쉬운 대진운으로 독일이 결승까지 올라온 반면, 터키는 위의 3팀과는 다르게 대진 난이도가 그야말로 월드컵 역사에서 다시 나오기 힘든 조작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쉬운 대진운으로 4강까지 거의 날로 먹다시피 해먹으며 올라왔다. 터키가 상대한 토너먼트에서 세네갈을 제외하고 전부다 중국 일본 대한민국 이렇게 아시아 3팀과 맞붙었다. 터키는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이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쉬운 난이도로 4강에 올라갔다.[82]
그리고 이때 한국이 본선 토너먼트에서 이긴 이탈리아가 2006년, 스페인이 2010년, 독일이 2014년에 각각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 국가들에 속하는 프로팀들 중 최소 한 팀 이상이 그 전해에 있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한 것도 공통점이고[83], 조별 리그에서 이긴 포르투갈이 자신들의 프로리그에 속한 FC 포르투가 2003 - 04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포르투갈 국가대표팀도 2006년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 월드컵 다음 가는 위상인 UEFA 유로 2016에서 우승을 차지했다.유로 2016에서 포르투갈이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최근 10년간 메이저 국가대항전인 월드컵, 유로의 우승팀은 전부 2002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경유한 셈이 되었다. 2006년 이탈리아, 2008, 2010, 2012년 스페인, 2014년 독일, 2016년 포르투갈. UEFA 유로 2004에서 포르투갈이 자국에서 그리스를 상대로 패하지 않았다면 이 기록은 2002 한일 월드컵 이후로 쭉 이어져왔을 것이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상기한 우승팀들 혹은 폴란드, 미국, 터키 중 한 팀 이 우승을 메이저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 2006년 이후로 이 기록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12. 관련 문서


[원문] "But, I'm still hungry."[1] 16강 진출 후 대표팀의 기강이 다소 흐트러진 상황이었다. 일본보다 성적이 높았고, 예술체육요원 혜택이 기정 사실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히딩크는 언론을 통해 이 말을 했고, 대표팀 선수들에게 우리 목표는 최소 4강이다. 고작 16강에 만족하지 마라!!고 일갈하여 기강을 다 잡았다. 정부는 16강전 당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병역법 시행령 개정안을 심의 의결하여 대회 중인 10명의 선수가 혜택을 받았다.[2]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는 태국 쇼크를 터뜨렸지만, 아시안컵은 1988년 대회 준우승 이후로 12년만에 4강(3위)까지 갔고, 4년 전 2:6 대패를 안겨준 이란을 8강전에서 이겨 작은 설욕을 했다는 점도 있다. 이란 감독이 한국전 패배로 스스로 사임했을 정도. 하지만 조 예선에서 중국과 비기고 쿠웨이트에게 패하는 등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가까스로 조 3위로 8강에 진출했기에 비난도 컸다. 게다가 4강 사우디전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0:2로 끌려가다가 종료 직전에 간신히 이동국의 만회골이 터지는 등 떡실신을 당하는 바람에 그나마 있던 동정여론조차 소멸했다.[3] 클럽 팀에서는 아스날 FC에서 전혀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유니폼팔이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과 풀럼에서는 밥값하는 수준은 해줬다.[4] 공교롭게도 12년 후의 한국의 월드컵 본선 조편성과 흡사하다. 러시아, 벨기에가 같고, 알제리는 튀니지와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이다. 단, 러시아와 벨기에는 2014년에 비하면 2002년의 전력은 뒤떨어졌다. 개최국 자격으로 톱시드를 받은 걸 감안하면 조편성이 이렇게 되는게 정상이지만, 위협적인 강팀을 모두 피했다는 점과 토너먼트 대진마저도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을 연달아 만난 한국에 비하면 꿀 대진이었기 때문에 행운의 조편성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5] 당시 철의 장막이 붕괴함으로 인해 동구권 축구인들의 가성비가 좋았다. 한국은 아나톨리 비쇼베츠를 국대 감독으로 선임한 적이 있었다.[6] 위에서 말한 자케의 거절 통보 직후.[7] 별명이 얍, 영어 발음으론 (Jap)이었는데 한국이 아닌 일본에 가서 싸운 줄 알고 있었다고. 별명을 보면 일본(Japan)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이야 싸이와 BTS, 삼성이랑 LG가 뜨면서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랑 문화도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 유럽에서 한국은 일본이랑 분간이 안 가는 수준의 인식이었다. 1988 서울 올림픽을 통해 그나마 예전보다는 알려졌어도, 아는 사람만 아는 수준이었던 것.[8] 이 때의 수석코치가 핌 베어백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박항서가 맞다. 핌 베어백은 히딩크가 데려온 코치들중에 최선임자였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박항서 다음 서열이었던 셈.[9] 히딩크가 정식 취임하기 직전 2000년 12월 20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평가전을 감독 대행 자격으로 지휘했다.[10] 이후 박지성은 K리그 경력 없이 은퇴하였으며, 설기현은 2010년 포항 스틸러스, 차두리는 2013년 FC 서울에서 K리그 데뷔를 했다.[11] 당시 기존 의료진 몰래 호출을 했고, 아노는 멍이 번지듯이 나타나 근육 파열로 오인한 것이라 진단을 내린다. 히딩크는 그에게 이영표의 전담 치료를 맡겼고 그 후에야 기존 의료진에게 이해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12] 단, 미국의 경우 1930년 초기 대회 때 4강에 들었는데 그때는 막 월드컵이 생긴 때라 사람들의 관심도 지금보다 매우 적었고 또 축구의 기술이며 전술 자체가 지금에 비해 많이 낙후되었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그때 4강과 지금 4강이 같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4강에 간거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게 맞긴 하다.[13]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의 천적이다.[14] 같은 2조의 아일랜드는 2위를 차지해 이란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며 E조에 배정되었다.[15] 정작 저 당시에 같은 조였던 우크라이나는 2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라갔지만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미하엘 발락이 중추가 된 독일을 만나버리며 안타깝게 탈락해버렸고, 노르웨이는 아예 같은 조 4위로 월드컵에 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노르웨이 축구의 몰락이 시작된다.[16] 다만, 조 추첨 불과 8일 후 미국과의 평가전에서 1:0으로 이겼다. 골드컵에서 또 만났을 때에는 패배했는데, 본선 상대인 미국을 속이기 위한 연막작전이었다는 것이 훗날 이용수 위원장의 회고에서 밝혀졌다.[17] 승부차기 결과와 관계없이 공식 전적은 무승부로 기록된다. 이하 모두 같음.[18] 이 경기는 모로코 리그 선발팀과의 경기였기 때문에 정식 A매치로 기록되지 않았다.[19] 이 경기는 덴마크 리그 선발팀과의 경기였기 때문에 정식 A매치로 기록되지 않았다.[20] 최은성 골키퍼의 유일한 A매치 출전 경기로 선발 출장해서 90분 풀타임을 뛰며 1실점했다.[21] 만약 히딩크가 한국 국대의 감독직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박지성이나 송종국같은 인재를 발굴하기 힘들었을테고, 이영표나안정환, 설기현같은 선수들도 이름은 어느정도 알려져 있었지만, 히딩크가 아닌 다른 감독 밑에 있었다면 그들의 능력이 빛바랬을지는 미지수. 그렇게 히딩크가 발굴한 신예들 대부분이 유럽으로 진출했고. 상당히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특히 박지성은 영국 최고의 명문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여 구단 최전성기의 퍼즐이 되었다. 이후 박지성을 필두로 국내에서는 구자철, 기성용, 손흥민, 이청용, 이강인같은 인재들이 유럽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일본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오카자키 신지, 하세베 마코토, 쿠보 유야같은 인재들이 유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크게 본다면 이 양반 한명이 동아시아 축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부분.[22] 출처: 히딩크 자서전 '마이 웨이'.[23] 특히 1994년 월드컵 볼리비아전에서 졸전으로 인해 황선홍 = 똥볼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고 축구팬 역시 엄청난 비난을 쏟아냈다. 황선홍 본인에게도 이는 상당한 트라우마가 되어 자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날 정도였고, 비난 여론을 이기지 못해 K리그가 아닌 J리그로 진출하고 만다.[24] 클럽 감독 조차도 1년은 거쳐야 팀 컬러가 정립되고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하며, 국가대표팀 감독도 1년 반~2년 이상 꾸준히 수행해야 팀이 정비된다. 게다가 당시 한국은 시스템의 전문성도 떨어졌기 때문에 최소 3년은 걸려야 성과를 드러낼만 하다. 그러나 히딩크가 약 1년 반만에 팀을 완성시키는 데 성공한 건 K리그의 과감한 희생 덕이 컸다. 선수들이 평소에는 클럽에 뛰다가 A매치 기간에만 차출되어 국가대표에 소집되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의 완성이 느린 것인데, K리그의 과감한 희생 덕분에 평소 같았으면 대표팀이 리그를 뛸 시간에 장기 합숙 훈련을 하면서 이른 시간에 조직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히딩크호를 예시로 들며 감독이 바뀌면 짧은 시간에 강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며, 당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히딩크호의 활약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K리그의 희생을 잊어선 안된다"고 괜히 말한게 아니다.[25] 후에 히딩크 감독은 이때를 회상하기를 "월드컵에 클럽팀이 끼어든격", "국가 대표라고 말할수 없는 기묘한 팀" 이라 평가했다.[26] 당시 체력관리 트레이너(피지컬 코치)를 했던 레이몬드 베르하이옌은 선수들에게 '저승사자'라고 불릴 만큼 혹독한 지옥훈련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27] 훗날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에도 오르게 된 '압신 고트비'가 담당했다.[28]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는 고지대 경기 대비를 하지 않았다. 4년 후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도 무슨 깡인지 몰라도 상대 팀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역시 현지 적응도 없이 대회가 코 앞일 때 출국해서 경기를 뛰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독일전에서 골키퍼 최인영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못 뛰겠다고 하소연했지만, 김호 감독은 출전 지시를 강행했고, 결국 전반에만 3골을 먹었는데 세번째 골은 골키퍼의 치명적 실책으로 평가된다. 후반에 독일이 지쳐서 대반격이 이루어졌던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29] 체력 강화 훈련의 경우 차범근 감독이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6개월 전에 강도 높게 시행했지만, 그 여파로 3.1절 한일전에서 패했고, 이후 월드컵 대비 훈련은 묵살되고 4월 한일전 복수에 올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 상대 팀인 멕시코, 벨기에, 네덜란드에 대한 분석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멕시코는 막연히 1승 제물, 벨기에는 노땅팀, 네덜란드는 허벌나게 강함(...)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30] 심지어 이영표가 대회 앞두고 부상 당했을 땐, 히딩크는 이들 마저 못 미덥게 여겨 인맥있는 네덜란드 의료진에 따로 문의했을 정도[31] 이점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거보다 체력 축구가 주류를 이루면서 경기 중에 심장마비나 호홉 곤란을 겪는 선수들이 종종 나타나고 심하면 사망까지 이르는 점을 생각하면 마냥 관계 없다고 몰아붙이긴 힘들다. 당장 이듬해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마르크비비앙 푀가 대표적인 예다. 다만 전공이 그러니 선수들이 부상을 잘 입는 관절이나 근육 쪽에는 신경을 못 썼던 점도 맞다.[32]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홍명보호는 말라리아 예방 주사를 늦게 맞아서 컨디션이 크게 떨어진 체 대회에 나갔다. 그리고 2019년 벤투호의 경우 의무팀이 완전히 파국을 맞으며 선수 관리에 큰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8강 탈락의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33] 마이웨이-거스 히딩크라는 자서전을 참조하면 좋다.[34] 히딩크의 일기 형식으로 구성된 자서전을 보면 이영표, 송종국, 박지성은 각각 차례로 01년 초부터 히딩크의 기준에서 합격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미 이들의 재능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검증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PSV감독을 맡게 되자 히딩크는 이영표와 박지성을 자신의 팀으로 데려간다.[35] 특히 홍명보와 황선홍은 10년에 한번 나올정도라는 평가를 받는 핵심 수비수와 공격수였다. 일명 H-H 라인. 실제로 그들이 은퇴한지 10년이 더 지났지만 홍명보나 황선홍을 대체할만한 선수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참고로 박지성의 경우는 포지션이 이들과 다르다.[36] 뭐 그렇다고 02년 2군 멤버들이나 탈락했어도 주요 자원으로 꼽히던 선수들의 대다수가 10년대에 대접받으리란 생각은 너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당장 현영민 최태욱 등은 이후 다시 월드컵에서 선발되지 않았으며 국가대표 주요 자원조차 아니었다. 이 시기의 전력은 당시 박지성, 이천수, 이영표, 송종국, 차두리, 설기현, 최태욱, 김남일과 고종수 이동국 김은중 등 뽑히지 않은 선수들 가운데에서도 이례적으로 괜찮은 젊은 선수들이 많이 나왔고 히딩크가 그들을 잘 조련시켰다는 것, 그리고 노장들의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는 시기였으며 유상철과 홍명보 황선홍 김병지 이운재 등 주전으로 뛰어줄 수 있는 핵심 멤버들이 아주 훌륭한 멤버였다는 점, 당시 약팀이던 전북에서 뛰던 최진철의 진가를 알아보고 발탁한 점 등에 있다.[37] 전임 감독인 허정무가 옥석과 같은 선수들을 발굴해놓은 공도 컸다. 허정무 감독 시절 엔트리와 히딩크호의 엔트리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 증거로, 전술했듯 히딩크가 부임 초기에 기량을 체크할 때 '합격'이라고 한 선수들 중 허정무가 발굴해놓은 인물들이 많다.[38] 당장 조광래 이후 국대 감독들의 형편없는 선수단 장악 능력과 언론 대응 능력을 비교해보자. 괜히 현재까지도 히딩크 데려오라는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다.[39] 홍명보의 오버래핑, 양쪽 윙백이 풀백 위치로 이동[40] 피지컬이 부족한 안정환 대신 설기현이 중앙으로 이동하여 포스트 플레이, 안정환은 세컨드 스트라이커 위치로 이동. 이영표는 윙백에서 윙어로, 김태영은 센터백에서 풀백으로, 박지성은 윙포워드에서 윙어로, 송종국은 윙백에서 풀백으로 이동[41] 다만 홈 이점으로 홈팀이 좋은 성적을 거둔 월드컵들이 보통 논란의 월드컵의 예시들이 되기는 한다.[42] 주로 네이버 카페 등지에서[43] 정확히는 드랍 토 홀드라는 기술이다.[44] 참고로 이 규정에 처음 걸린 사례가 다름아닌 대한민국이다. 그 유명한 하석주의 백태클 퇴장이 바로 이 규정 때문에 걸린 것이다.[45] 진짜 이건 상대팀에 최대한 양보해봐야 '심판의 역량 부족에 의한 오심'이지, 한국 측에 편파판정한 것은 절대 아니다.[46] 앞이 한국, 뒤가 이탈리아다.[47] 2분 30초 경에 이나모토 준이치의 골 장면이 나온다.[48] 잔디 색이 약간 달라서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49] 오프사이드 룰에는 분명히 "우리 편 공격수가 상대 진영에서 패스를 받을 때 상대편 골키퍼를 포함한 2번째 수비수보다 앞에 있을 때"를 오프사이드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상대편 2번째 수비수보다 코만 앞으로 나와도 오프사이드다. 단, 팔은 자책골을 제외한 득점할 수 없는 부위이므로 양팔은 제외된다.(만약 팔에 닿는다면 명백한 핸드볼 반칙이다.) 그러나 이나모토는 왼발이 러시아 수비수보다 앞에 있었고 왼발은 득점할 수 있는 부위이므로 명백히 오프사이드다.[50] 농담이 아니라 진짜 우리가 이것 때문에 2번이나 골탕을 먹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스위스 전에는 부심이 오프사이드 기를 올렸으나 주심이 휘슬을 불지 않았는데 한국 선수들은 부심의 기만 보고 적극적인 마크를 하지 않았다가 알렉산더 프라이에게 결승골을 얻어맞았다. 또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터진 케르자코프의 동점골도 수비수들이 적극적으로 마크하기보다는 먼저 손을 들어 오프사이드 어필을 하다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은 다 이긴 경기를 놓쳤고 2차전에서 알제리를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승한 나머지 결국 2:4로 완패당한다.[51] 그러나 오프사이드 때 적극적으로 마크를 하지 않을 때 나오는 이점이 있는데 일단 체력적으로 이득을 보는 점이 크다. 둘째로는, 오프사이드라고 확신한 다음 상대 공격수들을 등 뒤로 보내버릴 때 공이 빨리 전달되면 진형을 예쁘게 갖춘 채로 상대 공격수의 압박에 당하지 않는 빠른 역습과 손쉬운 빌드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52] 그러나 4강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치 독일을 꺾는 바람에 그같은 설계는 끝장났다. 히틀러는 당연히 화가 나서 그 선수들을 죄다 감방에 처넣었다. [53] 허스트가 마지막 골을 넣을 시점에 관중들이 난입했다. 케네스 월스턴홀름이 "그들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they think it's all over) 라고 해설한 그 골이다.[54]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한국인을 파충류라고 했단 내용이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돼지 냄새나는 한국인들이라고 말했다는 등의 내용의 루머. 이 중에서 멕 라이언이 토크쇼에서 한국을 비하했다는 부분은 사실이긴 하나 토 나오는 냄새나고 이상한 나라라는 내용은 부풀려진 내용이다.[55] 이는 결승전 영상 조회수와도 비슷하다[56] 부패라는 뜻[57] 이때 한국은 조별리그부터 쭈욱 수준급 팀을 만났다. 게다가 16강전과 8강전에서 주심들이 이탈리아와 스페인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관대한 모습을 보여준 탓에 한국 선수들의 체력은 더 심하게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4강에 올라왔을 당시 한국 선수들의 체력은 바닥난 상태였다. '우승 후보 3개국을 연속 상대하며 악전고투를 펼친 한국과 '만만한 상대들을 꺾어오며 충분한 휴식을 누린' 독일의 대결이라 체력적인 측면에서 상대가 안되는 경기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0:1로 선전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결과다.[A] A B 3,4위전에서 서로 맞붙었다.[58] 한 마디로 공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당시 왜 월드컵 나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중국보다 더한 최약체였다. 실제로도 독일한테 0-8로 대학살을 당할 만큼 팀 자체가 별볼일 없었다. 이 팀으로 인해 독일은 결과적으로 한 경기 덜 치르고 1승과 8득점을 공짜로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59] 보다시피 월드컵에서 우승해본 팀을 여기까지는 아예 안 만났다.[60] 당시 한국의 조는 한국을 제외한 다른 팀들은 모두 월드컵 4강을 경험해 본 경력이 있는 팀들이었다. 포르투갈은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 전설적인 스타 에우제비우를 앞세워 월드컵 4강에 올랐었고, 미국은 초대 대회였던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에서 월드컵 4강에 올랐다. 특히 폴란드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4강에 오른 바 있었는데, 1974 FIFA 월드컵 서독,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서 월드컵 4강에 진출했었다.[61] 터키는 불과 2년 전 유로 2000에서 첫 승 및 사상 첫 8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그 때도 조별예선에서 만난 이탈리아 및 8강에서 만난 포르투갈에게는 여지없이 패배했다.[62] 독일은 불과 2년 전인 유로 2000에서 1무 2패라는 망신살 뻗치는 성적으로 탈락하는 굴욕을 당한 팀이었고, 독일에게 그런 굴욕을 안긴 팀 중에는 한국이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꺾은 포르투갈이 포함되어 있었다.[63] 당시 한국 쪽 대진에 그만큼 우승 후보로 손꼽혔던 팀들이 몰려있었는데, 설령 이 라인을 통과하더라도 그만큼 체력 소모가 상당하기 때문에 당시 우승국이었던 브라질이라든지, 준우승국인 독일 그리고 3위를 기록한 터키 역시 한국처럼 이 대진을 뚫고 4강에 올랐다 할지라도 선수들의 체력은 고갈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64] 물론 월드컵 기준으로 봤을 때는 올리버 칸 밖에 없었지만.[65] 브라질은 1999 코파 아메리카 우승 이후 호나우두의 장기 부재 및 히바우두의 장기적인 컨디션 난조 문제 그리고 역대 남미 예선 중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라는 점 때문에 남미 예선에서 심하게 빌빌댔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는 아예 에르난 크레스포 혼자에게 있는대로 농락당한 브라질이었으며 심지어는 에콰도르에게마저 밀려서 3위에 랭크한 게 이 당시의 브라질이었다. 독일의 경우에는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8강전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3-0으로 완패한 이후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유로 2000에서 광탈을 맞이했고, 지역예선에서도 잉글랜드에게 홈구장에서 1-5로 패하는 망신을 당하며 플레이오프에서 우크라이나에게 하마터면 질뻔하다가 홈에서의 극적인 승리로 2002년 월드컵 본선에 올랐다. 참고로 저 1-5 대학살은 선제골은 되려 독일이 넣고도 독일 역시 마이클 오웬 혼자에게 있는대로 농락당했다.[66] 중국은 2002 한일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시드 배정에서 다소 수혜를 받았다. 그 이유는 2000 레바논 아시안컵 성적으로 시드 배정을 했기 때문이다.[67] 벨기에는 유로 2000에서 조 3위 1승 2패 성적으로 1라운드 탈락을 했었다. 이후 지역예선에서는 크로아티아에 밀려 조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결국 간신히 본선 진출을 이루어낸 팀이었다. 본선 조추첨 당시 일본과 함께 H조에 배정되었을 때, 벨기에 피파랭킹은 20위안에 들지 못한 상태였다. 이처럼 벨기에는 대회 전까지만 하더라도 빌빌댄 전력이었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생각보다 전력이 상향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특히 16강에서는 당시 아르헨티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와 함께 우승급 전력이었던 브라질을 상대로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68] 2002년 잉글랜드는 1998년 잉글랜드보다 더 강한 팀인데다가 제 3의 전성기를 맞이한 팀이었다. 유로 2000에서 독일과 함께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이후 지역예선 초반까지 빌빌댄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1년 9월 독일 뮌헨 원정에서 마이클 오웬의 활약으로 독일을 5-1로 대파했는데, 이 경기를 기점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전력이 상승했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그 조 꼴찌인 나이지리아와 힘겹게 겨루다가 비기는 등 뭔가 불안했고 아르헨티나 하나만 심판의 잘못된 판정으로 운 좋게 이겨 겨우 올라왔을 뿐이다. 16강에 올라와서는 당시 우승급 전력이었던 프랑스, 당시 돌풍의 팀이었던 세네갈이 있는 A조에서 2승 1무 조 1위로 당당하게 통과한 덴마크를 3-0으로 완파하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8강에서는 당시 초공격팀으로 명성이 높았던 브라질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졌다.[69] 당시 한국이 속한 D조는 4강급 전력으로 평가받었던 포르투갈, 이번 대회 8강팀이었던 세네갈과 함께 돌풍의 핵인 미국, 그리고 동유럽의 신흥 강자 폴란드가 있었다. 그래서 조추첨 당시 한국에서는 " 한국 죽어봐라 조 ", "본선 광탈 예약 조 "라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지배했었다. 그리고 브라질과 터키가 속한 C조의 경우에는 2강 1중 1약 수준이었는데, 당시 브라질은 우승급 전력으로 탈바꿈했고, 터키는 복병으로 꼽히는 팀 중 하나였고, 1중이었던 코스타리카는 이 대회에서 각각 16강, 8강을 차지한 멕시코와 미국을 제치고 지역예선 1위로 올라온 팀으로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에 브라질과 터키라는 양강 체제가 이미 16강 자리를 사실상 차지하고 있어서 불운을 겪은 팀이었다. 다만 중국이야 이때나 지금이나 승점자판기에 불과할 뿐이었지만.....[70] 사우디아라비아는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서 광탈한 이후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에 2000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사실 이 준우승도 아시안컵 당시 강력 우승후보였던 이란을 허정무호의 한국이 8강에서 발목 잡아준 데다가 그 한국이 이란을 잡은 탓에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난 상태로 사우디아라비아와 4강에 맞붙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71] 카메룬도 쉬운 상대라고 볼 수 없는 것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지난대회 우승팀인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이기는 최대이변을 일으켰고 1990년 월드컵에서 8강까지 올라온 강팀이었다. 8강전에서 잉글랜드에 2-3으로 석패했으나 아프리카 팀 최초로 월드컵 8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던 팀이다.[72] 이때 아일랜드는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네덜란드를 탈락시키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여 우승급 전력이었던 스페인을 상대로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독일 역시 이 네덜란드를 탈락시키고 올라온 아일랜드를 상대로 고전을 한 것이다.[73] 파라과이는 대회전에는 역사상 가장 지옥급 난이도의 남미 예선에서 조 4위로 통과했을 정도로 준수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파라과이는 지난대회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스페인을 제치고 16강에 올랐으며 16강에서 우승국이자 개최국 프랑스를 상대로 칠라베르트의 눈부신 선방을 보이며 경기를 연장전까지 끌고 갔으나 연장 후반에 프랑스의 로랑 블랑에게 실점하며 0:1로 프랑스에 석패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이다.[74] 당시 독일과 파라과이의 16강전을 중계하던 차범근이 졸전을 비난하자. 푈러감독은 '차붐이 바이엘 레버쿠젠에 있을때 (바이엘)아스피린을 많이 먹은 것 같다'며 오히려 차범근을 비난했다. 그러나 독일 언론에서는 오히려 푈러 감독은 차붐의 충고를 들어야 한다며 푈러 감독을 비판했으며, 여론이 불리해지자 푈러 감독은 결국 공식석상에서 차범근에게 '스트레스가 많아 실수 했다'며 사과를 하게 되었고, 차범근 역시 '이해한다'며 사과를 받아들인다. 이후 차범근은 독일과 브라질 결승전에서 이 일화를 꺼낸 캐스터의 질문에 자신이 독일에서 한창 활약할 때 신인으로 들어와 열심히 운동하던 루디 푈러 감독을 기억한다면서 루디 푈러 감독의 건승을 기원했다. 아무래도 독일축구에 남다른 애정이 있어 실망감도 크게 표현한 것 같다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 [75] 2002년 월드컵 이전이던 1999년 독일과 미국이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맞붙은적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미국이 마테우스옌스 레만까지 있던 독일을 2-0으로 완파하고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대이변을 일으켰다.[76] 당시 한국은 조별리그부터 불난이도였는데, 특히 조별리그 3차전에서는 포르투갈을, 16강전에서는 이탈리아를, 8강전에서는 스페인을 만나는 지옥급 난이도를 겪어야 했다. 만약 독일 보고 이 대회의 한국과 똑같은 대진을 주고 4강 올라가라고 하면 한국이 이뤄낸 것의 절반도 못 해냈을 것이다. 일단 16강에서 이탈리아한테 덜미를 잡혀 탈락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다음 대회에서 홈빨을 받았는데도 준결승에서 0:2로 져 결승 못 간 걸 생각해보자. 어웨이였으면 오죽할까...), 설령 어렵사리 8강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다다음 대회에서 스페인에게 0:1로 덜미를 잡혀 결승 진출에 실패한 것으로 볼 때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당시 독일 대표팀이 무적함대를 꺾었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77] 그나마도 코스타리카 역시 터키보다 전력상 우위에 있는 팀이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78] 당시 세네갈은 프랑스 - 덴마크 - 우루과이 - 스웨덴을 연속으로 만났다. 당시 스웨덴은 조별예선에서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역사상 최악의 지옥의 조로 평가받는 F조를 조 1위로 뚫고 16강에 올라왔던데다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그 터키를 지역예선에서 조 2위로 밀어내고 조 1위로 통과한 팀이었다.[79] 당시 한국은 폴란드 - 미국 - 포르투갈 - 이탈리아 - 스페인 - 독일을 연속으로 만났다.[80] 조추첨 당시에 일본은 벨기에 - 러시아 - 튀니지와 함께 H조에 편성되었는데, 당시 이 3팀 중에서 피파랭킹 20위안에 드는 팀이 한 팀도 없었다! 그야말로 로또급 꿀조였다. 그러나 본선 당시 일본의 전력은 2001 컨페드컵때의 전력에 비하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즉, 이때 당시 일본은 대회 전보다 더 약한 전력이었던 것이다.[81] 당시 잉글랜드와 세네갈 역시 당시 한국 못지않게 대진을 맞이한 불운을 겪었다. 다만 둘 다 실력으로 올라간 것은 아닌데 잉글랜드는 심판의 도움으로, 세네갈은 상대방의 병크로 각각 올라왔다. 특히 세네갈은 프랑스가 지네딘 지단이 부상으로 빠져 말이 아닌 상태가 된 게 컸다.[82] 당시 터키의 대진은 조별리그 2차전에서 상대한 코스타리카, 4강에서 상대한 브라질을 제외한 나머지 4팀(중국, 일본, 세네갈, 대한민국)이 세네갈을 제외하고 터키보다 죄다 약한 아시아 팀이었음을 감안하면 터키는 그 대진운이 좋다는 브라질 독일과 비교해도 제일 쉬운 난이도로 거저먹기 수준으로 4강까지 올라온 것이다.[83] 2004 - 05시즌 AC 밀란 준우승, 2008 - 09시즌 FC 바르셀로나 우승 및 트레블 달성, 2012 - 13시즌 FC 바이에른 뮌헨 우승 및 트레블 달성,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준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