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중

 

'''김은중 관련 틀'''


'''김은중의 역대 직책'''

'''제주 유나이티드 FC 역대 주장'''
조용형
(2009)

'''김은중'''
(2010~2011)


최원권
(2012)





'''김은중의 수상 이력'''



'''Korea Republic U-23 National Football Team'''
'''대전 하나 시티즌 No.18 '''
<colbgcolor=#cd313a> ''' 이름 '''
'''김은중'''
'''金殷中 | Kim Eun-jung'''
''' 출생 '''
1979년 4월 8일 (45세)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84cm | 체중 78kg
''' 직업 '''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 별명 '''
'''샤프''', 독안룡
''' 등번호'''
'''18'''
''' 소속 '''
<colbgcolor=#cd313a> ''' 선수 '''
'''대전 시티즌(1997~2003)'''
베갈타 센다이(2003 / 임대)[1]
FC 서울(2004~2008)
창사 진더(2009)
제주 유나이티드(2010~2011)
강원 FC(2012~2013)
포항 스틸러스(2013 / 임대)
'''대전 시티즌(2014)'''
''' 지도자 '''
대전 시티즌(2014 / 플레잉 코치)
AFC 튀비즈(2015~2017 / 코치)
AFC 튀비즈(2017 / 감독 대행)
대한민국 U-23 대표팀(2017~2020 / 코치)
대한민국 U-23 대표팀(2021~ / 수석 코치)
''' 국가대표 '''
15경기 5골 (대한민국 / 1998~2007)
''' 종교 '''
불교[2]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은퇴식
5. 지도자 경력
6. 플레이 스타일
7. 수상 경력
8. 대전 시티즌 감독 부임설
9. 논란
9.1. 김은중 신의손 사건
10. 여담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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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대전은 첫사랑이자 끝사랑"'''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이자 현재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를 맡고 있다.
대전 시티즌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레전드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고 이후 계속해서 공격수로 뛰고 있다. 중학교 시절 공에 맞아 왼쪽 눈이 실명 상태에 이르렀으나 본인의 노력과 의지로 축구선수에게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좁은 시야를 극복해 낸 인간 승리의 주인공. 이태호부터 시작해 유상철-김은중-곽희주-곽태휘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외눈 축구선수의 계보에 들어간다.
언제나 다른 선수의 그늘에 눌려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팀과 동료를 위해 헌신하는 플레이로 성실하게 축구 인생을 살아왔다. 대전 시티즌에서 데뷔해 팀의 전성기를 이끌며 팀의 레전드 반열에 올랐고, 주목 받기 시작했으며, 2010년에는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쳐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2010년 K리그 MVP를 수상하였다. 그리고 이때 놓친 우승 트로피는 2013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들어올리게 되었으며, 2014년 대략 11년만에 대전 시티즌으로 돌아와 대전에게 두번째 우승 트로피를 선물하며 선수로서 유일하게 대전의 모든 우승을 경험한 선수가 되었으며, 대전 시티즌에서 선수로서 시작과 끝을 보내며 팬들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은퇴하며 대전의 위대한 전설로 남았다.

2. 클럽 경력



2.1. 대전 시티즌


[image]
1997년, 고졸[3] 신분으로 대전 시티즌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며 K리그에 데뷔했다.
원래 당시 수원 삼성 감독을 맡고 있던 김호 감독이 김은중을 데려오려 했었지만 실패하면서 김호의 아이들이 되지는 못했다.
첫 시즌 컵대회와 리그를 합쳐 14경기에서 무득점에 그쳤지만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그 다음해인 1998년에는 팀의 주전 공격수로 도약하게 된다.[4]
비록 1998년에도 29경기 3골 1도움으로 부진했고, 심지어 3골 1도움도 모두 조별컵에서 기록한 것이고 리그에서는 공격 포인트가 아예 없었지만 아직 어린 나이었던데다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보여준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김은중이라는 이름을 당대 최고의 유망주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해 불어닥친 IMF의 광풍 속에 팀의 스폰서였던 계룡건설, 동아건설, 동양백화점, 충청은행 중 계룡건설을 제외한 세 개의 기업이 파산해버리며 팀의 재정은 최악을 달리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김은중은 지원도 열악하고 선수층도 얇은 대전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뛰게 된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리그와 컵경기를 합쳐 24경기 4골 1도움으로 전년에 비해 약간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김은중의 공격 포인트가 적은 것을 두고 김은중의 능력에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가 뛰고 있던 팀이 대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의 대전은 그야말로 리그 최약체이자 최악의 선수층을 가진 팀이었다.
2000년에는 부상이 겹치며 20경기 4골 2도움에 그친다. 그리고 대전 시티즌에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2001년 시즌이 다가온다. 대전은 이태호 감독을 새로 선임하며 팀을 재정비했고, 비록 리그에서는 최하위에 그쳤지만 대전 시티즌은 이 해 클럽 창단 최초로 FA컵에 우승하며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때 포항 스틸러스와의 결승에서 당시 한국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던 김병지를 뚫었고 결승골을 기록하며 대전의 대회 우승에 큰 공헌을 해주었다.
김은중은 50경기에 출전, 12골 5도움을 기록하며 그전 시즌에 팀에 합류한 이관우와 함께 팀을 이끌었고, FA컵 결승전에서 포항 스틸러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그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는 대전 시티즌에게 있어 최악의 해로 기억되는 2002년이었다. 대전 시티즌은 이 해 리그에서 단지 1승을 거두는데 그쳤고, 이태호 감독은 자진 사임했다. 마지막 남은 스폰서였던 계룡건설도 스폰서를 취소하며, 대전은 창단 이래 최악의 위기를 겪으며 팀의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전에는 김은중이 있었다'''. 김은중은 이 시즌 27경기에 나서 7골 1도움을 기록하며 이관우와 더불어 팀의 마지막 보루로 남았다.
너무나도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새로운 시즌이 다가왔다. 최윤겸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대전 시티즌은 대전시청을 새로운 스폰서로 삼고 리그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전에 기적이 일어났다'''. 2003년 대전은 말 그대로 경이로운 성적을 냈다. 전년도 최하위 팀이 6위로 올라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바로 김은중과 이관우였다'''. 두 선수는 "은우"라 불리는 콤비로 활약하며 대전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단일 리그로 진행된 이 시즌, 김은중은 22경기에 출전해 '''11골''' 2도움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을 마크했다. 대전 시티즌의 홈구장 퍼플 아레나에는 연일 관중이 가득 찼다. 평균 관중 19092명을 찍었고, '''주중''' 최다 관중 43770명을 기록했다. 대전에게도, 김은중에게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2.2. 베갈타 센다이


하지만 돈 없는 구단 대전에게 김은중이라는 스타를 붙잡기에는 다른 구단의 유혹이 너무나 컸다. 결국 2003년 시즌 끝무렵 김은중은 J리그의 베갈타 센다이로 임대 이적하게 된다. 이 때 김은중을 비롯한 그 누구도 그가 팀에 복귀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image]
하지만 2004년. 김은중은 구단 간의 협약에 의해 돌연 FC 서울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대전의 서포터 퍼플크루는 김은중 유니폼 화형식을 가졌을 정도로 당시의 충격은 대단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대전 시티즌으로 돌아온 김은중이지만, 이적 직후를 술회하는 과정에서는 퍼플크루에 대해 서운한 감정 역시 컸다고 말한 바 있다. 프로선수인 김은중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이해 가능하지만, 시티즌 팬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구단 최고의 선수를 내보내는 일이 처음이었던 지라...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대전 팬들은 이후 그밖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이때처럼 단순 과잉 분노로만 현실을 대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김은중도 돌아와 팀의 첫 승격에 일조하며 명예롭게 은퇴했고...

2.3. FC 서울


FC 서울에서도 김은중은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2004년 8골 2도움을 기록했고, 2005년에는 7골 7도움을 기록했다. 박주영이 부상과 슬럼프로 인해 제 몫을 다하지 못했던 2006년에는 14골 5도움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4골 2도움에 그쳤지만, 2008년에는 5골 4도움을 기록하며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 해냈다. 젊은 선수들이 많았던 서울에서 그의 노련함은 큰 자산이었는데 특히 2008년 시즌 당시 플레이 오프에서 골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 FC 서울의 준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2.4. 창사 진더


그리고 2008년 시즌 이후, 김은중은 FC 서울과의 주전 출장과 연봉에 대한 의견 차이로 재계약에 실패한다. FC 서울은 김은중을 FA로 시장에 내놓았고 당초 강원 FC로 이적할것이 유력해 보였으나, 2004년 이전 선수는 FA 이적시에도 이적료가 발생한다는 조항이 발목을 잡아 K리그 내에서의 이적에는 실패하게 된다. 후에 전북과 선수간의 합의가 끝난 상황에서 서울이 전북에 보내는걸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MLS 등으로 진로를 찾아보던 김은중은 중국 창샤 진더로 진출하며 안정환과 더불어 중국 리그에서 뛰게 된다. 창샤 진더에서는 열악한 팀 환경에도 불구하고 28경기에 나서 7골을 기록(컵 대회 1골 및 리그 도움 10개를 기록하면서 통합 8골 10도움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창샤의 왕"이라는 팬들의 찬사도 받았다. 우습게도 한국에서 당시에는 중국 슈퍼 리그듣보잡으로 여겨서인지 1시즌만에 나온 김은중이 못해서 나온 걸로 아는 이들이 많다. 오죽하면 김은중 본인조차도 베스트 일레븐 지와 인터뷰에서 인터넷에서 내가 못해서 방출된지 알더라~라고 비웃듯이 이야기했을까?


2.5. 제주 유나이티드


2009 시즌, 1년간의 창샤와의 계약이 끝나고 끈질기게 추가계약을 원하던 창샤를 거부하고 김은중은 다시 K-리그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한창 선수 영입에 열을 올리던 제주 유나이티드가 그를 영입했고, 많은 기대를 받으며 주장 완장을 차게 되었다.
그리고 32살에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맞이하며 K리그 역사상 10번째로 40-40 클럽에 가입했다. 공격 포인트 뿐 아니라 주장으로서의 역할도 성실하게 수행하며 어린 선수들을 잘 이끌어 박경훈 제주 감독의 신임이 대단하다고. 김은중을 비롯한 이적생들의 맹활약에 힘입어 제주는 시즌 내내 선두권을 지켰고 분전끝에 준우승을 차지했다.[5]
10월 31일 대구전에서 1골을 추가하며 통산 97골째를 기록했으며, 시즌 최종 성적은 13골 10도움으로 커리어 하이. 공격 포인트 23개로 리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12월 20일, K리그 베스트 11 공격수 부분과 시즌 MVP를 수상하며 자기 인생 최고의 해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2011년 7월 2일 드디어 K리그 100골 달성했지만 2011년 제주에서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미진했고, 팀 개편을 시도한 제주의 의도와 주축 선수들의 은퇴 및 군 입대로 인해 팀의 구심점이 필요했던 강원의 사정이 맞아떨어지며, 서동현과 맞트레이드로 강원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2.6. 강원 FC


강원 FC 이적후 K리그 대표 약체였던 강원의 12시즌 초반 선전을 이끌고 있다. 대구와의 2차전, 인천과의 6차전에서 두 골씩 넣으며 강원의 2승을 얻어냈다. 그러나 초반 활약도 무색하게 스플릿의 과밀일정과 백업 공격수의 부상과 용병 방출 등등으로 30대 중반 노장이 극심하게 더웠던 2012년 여름, 1주일 2경기 풀타임을 계속 뛰었다. 강원은 체력 부족 - 경기력 악화 - 실점 - 강원 특유의 유리멘탈 파손 - 패배 - 경기력 악화 - 멘탈...의 끝없는 수렁 속에서 유리멘탈의 1차 저지선 김은중을 빼지 못했고 김은중의 체력은 지금 걸어다니는 게 좀비여 김은중이여 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급기야 팀에 공헌하는 바라곤 그저 멘탈 파손 방지제 혹은 pk나 차는 기계에 불과하게 되었다... 결국 김학범이 등장해서 어느 정도 안정시켜 놓은 후반기에는 몇 경기 쉬다 조커로 역할을 바꾸고 경기력을 되찾았다.
결국 그 와중에도 34살 노장이 41경기 16골 2도움으로 팀내 최다 득점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 중에 8골이 pk. 8번의 시도 중에 8번을 성공시킨 PK 기계였다. 오오 김은중 오오 PK 기계...
하지만 2013 시즌 들어서 전반기 13경기 1골이라는 최악의 부진을 겪었고 계약 만료가 다가오고 있었던지라 결국 7월 28일, 포항 스틸러스로 5개월 임대 이적을 했다. 계약 만료가 2013년 12월 31일인걸 생각하면 사실상 완전 이적.[6]

2.7. 포항 스틸러스


포항 스틸러스로 임대된 이후 강원과의 경기에는 나오지 못하고, 대구와의 경기 부터 출전하기 시작했다. 포항팬들로서는 나름 K리그 레전드 중의 한 명인 김은중의 활약을 기대했으나 스플릿 1라운드 마지막 경기인 부산전에서 동점골을 넣은 것 외에 뚜렷한 활약은 펼치지 못했다. 포항의 전술 자체가 원톱을 놓지 않는 제로톱 or 장신 공격수 박성호나 배천석을 놓는 원톱으로 갈리다 보니 김은중이 활약할 기회가 적었던 것. 그래도 꾸준히 교체멤버로 활약하면서 부족한 포항의 공격자원에 보탬이 되었으며 절친 노병준과 함께 유스 출신의 어린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포항에서 고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리고 2013 시즌 포항이 K리그 최초의 시즌 더블(리그 우승 + FA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그토록 고대하던 K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었다. 대전, 서울, 제주, 강원을 거치면서 리그 MVP는 차지했어도 유독 우승컵과 인연이 없었는데 그래도 은퇴 직전에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어서 오랫동안 그를 응원해 온 팬들로서도 정말 다행스러운 일.
포항과의 임대 계약 종료와 동시에 원소속팀인 강원과의 계약도 종료되는데 나이도 나이인지라 은퇴설도 나오는 중이다. 하지만 김은중 본인은 우승도 기쁘지만 자신이 만족할때 유종의 미를 거두며 은퇴하겠다고 밝혀 현역 생활을 계속 이어갈 의지를 보여줬다.

2.8. 대전 시티즌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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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드리블로 그라운드를 지배한다! 그가 돌아왔다!'''[7]

2014년 02월 27일 친정팀 대전 시티즌으로 이적하였다. 원래는 가족과 함께 미국의 MLS로 이적할 예정이었지만 #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대전을 위해 돌아왔다고 한다. 다만 선수가 아닌 플레잉코치로 활동하며 등번호는 18번을 받았다.
2014년 03월 30일 홈개막전에서 4:0으로 앞 선 후반 15분여를 남기고 10년 7개월만에 대전 소속으로 교체출전! 하였지만 동계훈련에 늦게 합류해서인지 다소 무거운 움직임을 보였다. 10년 7개월 만의 복귀에 한국 축구 프로 연맹에서 복귀 특별영상까지 제작하여 경기 시작전과 하프타임때 상영하고 하프타임때 후배들에게 축구화를 후원하고 홈팬들에게 싸인볼을 나눠주는 등 팀의 레전드로서 대접받고 팬들에게도 즐거운 추억을 선물했다.
3886일만의 대전 복귀전 기다리는 샤프 김은중

조진호 감독대행은 김은중 플레잉 코치가 동계훈련 참가가 늦어 몸상태가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며 몸상태가 올라오면 많은 경기에 출전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홈개막전 이후에도 팀이 안정을 필요로 할때 그리고 공격진들의 체력안배를 위해 간간히 교체출전하였다.
2014년 05월 21일 하나은행 FA컵에서 포천시민축구단을 상대로 홈에서 선발출장 동점골을 넣으며 대전 복귀골을 신고했지만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그러나 3일뒤 2014년 05월 24잉 수원 FC와 홈경기에서 1:0으로 앞선 후반 종료 직전 아드리아노가 골키퍼를 제친상황에서 밀어준 패스를 받아서 빈 골대에 골을 넣으며 드디어 자신의 정규시즌 첫 골을 기록하고 팀의 승리를 이끌며 지난경기에대한 아쉬움을 덜어냈으며, 특히 시즌 막판 아드리아노가 충전 정지 징계를 받으면서 주전으로 출전하였고, 부천 FC와의 경기에서 정석민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대전의 조기 승격을 확정지었으며, 수원 FC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의 5:2 대승을 이끌며 2014시즌 대전의 1부 리그 승격에 기여하였는데, 특히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후 대전의 응원단석 앞까지 뛰어 가서 팬들과 함께 환호하던 장면은 대전팬들에게 있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되었으며. 강한 여운을 남겼다.

2014년 대전 시티즌이 우승을 차지하자 플레잉 코치로서 묵묵히 팀을 도운 그의 헌신도 조명되었다. # 대전 시티즌 항목의 2014년 클럽하우스 개관식에서 골키퍼 박주원 선수가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선수들에게 큰 형님 노릇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제대로 함을 보였다.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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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태용과 함께 대표팀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비운의 선수였다.
김은중이 자신의 대표팀에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던 것은 1998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였다. 당시 이동국과 위력적인 투 톱을 이루어 공격진을 이끌었고, 이는 결국 대한민국에게 8번째 우승을 선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수많은 축구팬들이 이동국-김은중 투톱의 재현을 염원했지만 현실에서는 기회 자체가 거의 없었다. 양 선수의 소속팀과 대표팀 활약시기가 계속 엇갈린 탓. 그나마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호흡을 맞춘 정도이고 성인연령대 국가대표팀에서는 2004년도 바레인과의 평가전에서 함께 선발출장해서 2:0승리를 이끌기는 했지만 이게 국대에서도 마지막... 참고로 이 경기는 대한민국 감독으로서의 본프레레의 데뷔전이었다. 대한민국판 꿈의 투톱이자 영혼의 투톱.[8][9][10]
A대표팀으로 올라오면서 왼쪽 눈의 실명으로 인해 대표팀에 차출되는 기회가 적어지게 된다. 히딩크 감독의 후임으로 대표팀을 맡았던 움베르트 쿠엘류 감독은 김은중을 대표팀에 자주 뽑았지만, 그 이후에는 김은중이 대표팀에서 얼굴을 비치는 일은 없었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 및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대표팀 참가, A매치 15경기 5골이 그의 국가대표팀 경력이다.
2010년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대표팀에 다시 합류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손흥민 등 여러 신예 선수에게 밀려 아시안컵 출전이 좌절됐다.

4. 은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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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은중이 은퇴를 하면서 대전 시티즌 구단은 2015년 김은중이 코치로 부임한 AFC 튀비즈를 초청해 It's Daejeon 축구대회를 개최하면서 김은중의 은퇴식을 개최하려했지만 메르스 여파로 취소되면서 1년 연기되어 2016년 6월 24일 개최되었다.
이날 경기에서 김은중은 전반전에는 튀비즈의 코치 신분으로 튀비즈의 벤치에 앉아있었으며, 전반 종료 후 쉬는 시간에는 김은중의 영구 결번 제막식이 이어졌으며, 김은중의 등번호 18번은 18년 동안 영구결번으로 남게 됐고, 팬들은 그의 영구 결번에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11]
또한 은퇴의 심경을 밝히면서 김은중은 참아왔던 눈물을 보였고, 이를 지켜보던 대전팬들 역시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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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들어서 대전 시티즌의 선수 신분으로 교체출전하였는데, 교체로 그라운드에 드러설 때 갑자기 그라운드의 모든 조명이 다 꺼졌고, 잠시후 대전팬들이 홍염을 통해 NO.18 김은중의 글씨가 보이도록 퍼포먼스를 펼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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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 41분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을 성공시키면서 축구 선수로써 마지막골을 성공시켰고, 골을 성공시킨 뒤 선수단 전원과 같이 단체사진을 찍은 세레머니를 펼쳤다. 이후 임준식과 교체로 아웃되면서 자신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였다.



5. 지도자 경력



5.1. AFC 튀비즈 코치, 감독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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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즌을 끝내고 현역 생활을 지속할 것인지 은퇴할 것인지에 대해 대전 팬들의 관심이 쏠렸으며, 일본 전지훈련에 불참하자 대전 팬들이 사비를 모아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사서 김은중에 보낼 만큼 대전 팬들은 김은중이 대전에 남아서 좀 더 뛰어주기를 바랬으나, 결국 은퇴를 선언, 벨기에의 AFC 튀비즈[13]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전의 팬들에게는 '언젠가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써 또 다른 기쁨을 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KBS 2TV 청춘FC 헝그리 일레븐에서 벨기에 전지훈련 특별 코치로 합류해 잘 지내는 모습을 비추고 있다.[14]
2016-17 시즌 막판 레지 트루아 감독이 경질되면서 감독대행을 맡게 되었고, 팀 분위기를 잘 추스리며 가까스로 3부 리그 강등을 막았다.

5.2.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2017년 10월 김봉길 감독의 부름을 받고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부임하며 대전 시티즌 감독 부임은 다음으로 기약하게 되었다.
한편 과거 대전 시절 팀 동료였던 공오균 과는 코치로서 다시 한 번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이후 김학범 감독 부임 이후에도 코치직을 유지한 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였으며,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하였다.
아쉬운 점으로는 연장 전반 13분여째 일본의 TATSUTA선수의 부상으로 장내가 어수선할 즈음 황희찬 의 두 번째 득점 리플레이 장면에서 이민성 코치과 함께 선수를 독려해주는 샷이 나왔으나 도쿄 대첩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뤄서인지 배성재 캐스터에게 호명이 되질 못 했다.
연장 후반 시작 전 대표단 단합샷에선 김학범 감독을 필두로 이민성 코치와 함께 중계화면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2020년 P급 강습회에 참가한 것이 확인됐다. #
2021년 이민성 수석 코치가 대전 하나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수석 코치로 승진하였다.

6. 플레이 스타일


프로의식이 뛰어나다. 성실한 플레이를 하고 동료를 잘 이끌며 투지가 좋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PK 기계'라는 별명답게 페널티킥도 무척 잘 찬다. 활동량은 남부럽지 않고, 스트라이커로서 근거리에서 위치선정도 좋고, 중거리슛도 뛰어나다. 허나 결정력이 아주 뛰어난 편은 아니다. 대신 동료를 이용하는 노련한 플레이에 능하다.[15] 최전방에서 활약할 수도 있고, 약간 내려온 위치에서 연결하는 역할도 충분히 소화 가능하다. 노련해서 그런지 헤딩 경합과 같은 사항에서 자잘한 반칙유도라든가 라인 부근에서 상대편 맞고 나가서 공격권 얻어내는 것 등등에도 능하다. 피지컬이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꼼수나 기술적 능력을 바탕으로 타겟 플레이도 훌륭하게 소화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원톱으로서의 박주영의 대두 이전까지는 00년대 중반 조재진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현대적인 원톱형 스트라이커였다.
다만 내려온 위치에서 연결하는 역할을 할 경우 외눈인 게 아쉽다. 박스에서 멀리 떨어져서 공간감이 필요한 정교한 패스를 할 경우 타이밍은 환상적이지만 동료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강 감으로 찍어서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박스 근처의 약한 패스는 경험도 있고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지만 넓은 공간을 정교하게 이용하는 패스를 할 때는 정확하게 연결하기 어려워한다. 그리고 무릎 부상 이후 상당히 신체적 능력이 저하된 바 있다. 이 부상 때문에 서울에서 한참 잘 나가다가 침체기를 겪으며 중국으로 이적하고 만다.
외눈이라는 장애를 극복한 것은 대단하고 존경할 만한 점이지만 아무래도 두 눈이 멀쩡했다면 국가대표 공격수로서도 크게 활약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이 많다.

7. 수상 경력


  • 2001년 서울은행 FA컵 전국축구선수권대회 FA컵 득점왕 & MVP
  • 2002년 체육훈장 맹호장
  • 2004년 K-리그 올스타전 MVP
  • 2004년 18회 올해의 프로축구 연간 데일리 베스트
  • 2006년 삼성 하우젠 K-리그 베스트 11
  • 2010년 쏘나타 K리그 베스트 11 & MVP

8. 대전 시티즌 감독 부임설


은퇴 이후 김은중은 대전 시티즌의 감독이 바뀔 때마다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는 하는데, 특히 2017 시즌 내내 대전 시티즌이 심각한 부진을 면치 못해 이영익 감독이 사임한 이후 차기 감독 후보로 급부상하였고, 이를 가지고 대전 팬들 사이에서는 찬반 논쟁이 오가기도 하였다.
찬성하는 측의 의견은 김은중의 경우 시즌 중반 AFC 투비즈 감독 대행직을 잘 수행했을 뿐더러 대전 구단의 레전드로서 누구보다 대전 구단의 현실과 상황을 잘 파악하고 이해할 것이며 그만큼 대전 구단에 헌신할 것이라는 의견이지만 반대하는 측은 김은중은 아직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감독으로서의 선임은 아직 시기상조이며, 자칫 (선동열이나 최순호처럼) 과거 선수 시절 대전 구단에서 쌓았던 명성과 커리어를 잃을 수도 있으며, 가뜩이나 어려운 대전 구단의 현재 상황에서 김은중에 그러한 부담을 안기고 대전 감독을 시키는 것은 레전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등을 주장하였고, 전적으로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았으며, 설령 김은중을 감독으로 선임할 거면 지네딘 지단처럼 대전의 코치나 유소년 지도자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쌓은 후 시켜야 한다는 평이다.
이후 2019년 고종수 감독이 경질되면서 또다시 후임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다.#
2020년 대전 하나 시티즌 감독으로 내정된 이민성과 함께 김은중도 수석코치로 데려오는 방안이 이야기 됐으나, 본인이 고사하면서 대전 벤치에 앉는 모습은 다음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9. 논란



9.1. 김은중 신의손 사건


2005년 5월 29일 서울의 홈경기로 열린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서울이 0-1로 끌려가던 전반 10분 김은중이 대전 골키퍼 최은성과의 일대일 찬스에서 골키퍼를 제치고자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최은성이 김은중을 몸으로 걸어 넘어뜨리며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문제는 김은중이 최은성을 제치는 과정에서 '''손으로 공을 툭 쳤고, 최은성과의 접촉은 그 이후에 일어났던''' 것. 명백한 핸드볼 상황이 페널티킥으로 둔갑된 것이다. 대전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은 강력히 항의했으나 가장 억울해야 할 최은성은 오히려 '''껄껄 웃으면서 항의하는 동료들을 말리더니, 곧이어 히칼도의 페널티킥을 멋지게 선방해냈다!!!'''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지만 이 장면을 통해 대전의 수호신 최은성의 멘탈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고, 김은중은 그와 대비되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한동안 까임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


10. 여담


[image]

'''기억하다

돌아오다'''

  • 김은중이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대전을 떠난 후 대전팬들은 '기억하다, 기다리다'라는 현수막을 만들어 내걸었는데, 2014년 김은중이 대전에 복귀하면서 기다리다를 지우고 '기억하다, 돌아오다'라는 현수막으로 다시 만들어 내걸었다.
[image]
  • 2011년 5월 11일에는 AFC 챔피언스리그 멜버른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후 경기 도중 쓰러져 의식을 잃은 후배 신영록을 위해 골 세레머니를 펼쳤다.
  • 동북중학교 3학년에 재학 시절 왼쪽 눈을 다친 후 시력이 서서히 악화돼 결국 1998년 실명하였다. 그로 인해 병역면제되었다.

11. 관련 문서



[1] 독안룡이란 별명도 여기서 활동하던 시절에 붙은 것. 다테 마사무네미야기 현이 거점이었다. 단, 다테 마사무네와는 먼 눈 방향이 다르다(김은중 - 왼쪽, 다테 마사무네 - 오른쪽).[2] 선수 시절 경기를 할 때도 단주를 찰 정도였다고 한다.[3] 서울 동북고. 정확히는 중퇴.[4] 당시 대전 시티즌의 감독이었던 이태호 감독 역시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고 공격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욱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전망된다.[5] 다만 FA컵 준결승전에서 잔디가 발에 달라붙어 승부차기 실축하면서 팀은 결국 패배했다.[6] 사실 올드팬들 중에서는, 신임 단장이 된 임은주가 여성 심판으로서 주가를 올리고 있을 시절 김은중이 선수로서 판정 시비가 붙은 나머지 너무 심한 욕설을 내뱉었던 탓에 오래 못 갈 거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단 임은주가 단장 취임한 이후에는 표면적으로는 두 사람이 옛날 일이라고 웃으면서 영사이 찍힌 적도 있지만... 진실이나 속마음은 당사자들만 알 것이다.[7] 장내 아나운서 소개 멘트였다.[8] 그나마도 당시 대표팀이 3-4-3포메이션을 주로 사용, 원톱자원들인 이동국 김은중이 같이 뛴 일은 드물었다. 주로 이동국이 선발로 투입되고 경기 양상에 따라 김은중이 교체 투입되는 수순. 거기에 서로 교체된 경우도 있어 아시안게임 6경기 중 두 사람이 같이 뛴 시간은 146분에 불과하다.[9] 꿈의 투톱이 꿈의 투톱인 이유는 역시 AFC u-19 대회 한일전일 것이다. 예선에서 한 판, 결승에서 한 판 붙었는데 이동국과 김은중이 두 경기에서 서로 한 골씩 사이좋게 뽑으며 연거푸 2:1 승리를 거뒀다. 특히 마지막 결승전 김은중 패스 후 이동국 터닝슛으로 일본이 가라앉았는데, 꿈의 투톱이 아니랄 순 없잖은가. 정말로 꿈의 투톱인 것이다.[10] 세간의 평가만이 아니라 이동국, 김은중 두 사람 모두 종종 인터뷰에서 다시 한 번 서로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고는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프로팀에서 모두 이 둘의 재결합은 이뤄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춘 바레인전도 이동국이 골을 넣으며 승리는 했지만 뭔가 두 사람끼리 호흡으로 탁! 하고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없어서 아쉬웠던 경기였다.[11] 창단 당시 제작 되었던 레트로 유니폼과 함께 새겨졌기에 의미는 컸다.[12] 리그나 FA컵 경기에서는 홍염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이날 경기는 친선 경기였기 때문에 홍염을 사용해도 상관이 없었다.[13] 심찬구 스포티즌 대표가 구단주로 있다.[14] 이을용이 청주대 축구부의 대회를 이끄느라 도중 귀국했던 탓으로 보인다. 청춘 FC와 AFC 튀비즈 간 두 번의 연습 경기에서도 굳건히(?) 청춘 FC의 벤치를 지켰다. 이후 방송에서 나오는 설명용 자막으로는 소위 '은코치'. [15] 공간을 잘 활용하는데 동료의 센스가 나쁘면 다 쓸데없는 짓이 된다는 단점도 있다. 본인이 공간을 잡고 흔들며 동료가 침투할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는데 만들어 줄 공간으로 공을 몰고 침투해야할 놈이 상대 수비를 몰고 있는 김은중에게 패스를 뿌려준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