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광(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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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대표적인 별명은 리틀 칸과 이름에서 유래된 '''글로리 킴'''[4] .
2. 클럽 경력
2.1. 전남 드래곤즈 (2002~06)
2003년 U-20 대표팀 주전 골키퍼로 이름을 알린 이래 김병지와 이운재의 후계자로 낙점받아왔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 2006 FIFA 월드컵 독일, 2007년 AFC 아시안컵,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등 꾸준히 대표팀에 승선했다.
리그에서도 2002년 전남 드래곤즈에서 데뷔한 이후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전후해서 당시 주전 경쟁을 펼쳤던 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2.2. 울산 현대 (2007~14)
2007년 '''22억'''이라는 엄청난 이적료로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했다.[5] 이적 이후 좋은 활약을 보이며 주전 자리를 확고히 했으며,[6] 2011년에는 K리그 베스트11 골키퍼 부문을 수상하였다.
2012년까지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국가대표 NO.2 골키퍼로써 정성룡의 최대 경쟁자 자리를 굳게 지켰으나 2013년의 부상이 그의 전환점이 되어버린다. 김영광이 부상 중이던 기간에 그의 그림자에 가려 만년 2인자였던 김승규가 펄펄 날아다니기 시작한 것. 부상에서 회복하였으나 복귀전이었던 대구 FC와의 경기에서 5실점을 하는 최악의 부진으로 완전히 주전에서 밀려버렸다. 결국 6경기 출장에 그치며 후보 GK 신세가 되었다.
2.3. 경남 FC (2014 임대)
2014 시즌 전 출전을 보장받는 다른 팀으로의 이적을 요청했고, 올 여름 김승규를 장기간 국가대표로 보내야 했던 울산이었기에 최종적으로는 임대료를 지불한 경남으로 임대 이적하게 되었다.
당연히 주전 출장했지만, 팀의 성적이 매우 안습하여 승강 플레이오프로 밀려났다. 게다가 승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는 아예 출전하지도 못했고 2차전에 출전했지만 아예 팀이 강등이 되어버렸다. 강등이 되든 안 되든 울산에 돌아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고, 결국 시즌 종료 후 울산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주전 출전 여부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울산으로 돌아갔지만 김승규가 여전히 확고하게 주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2.4. 서울 이랜드 FC (2015~19)
결국 2015년 신생팀 서울 이랜드로 이적했으며, 서울 이랜드 FC의 부동의 주전 골키퍼류 자리를 잡아 공격력은 쓸만하지만 수비력이 엉성한 서울 이랜드에서 여러차례 선방을 해가며 대량실점 위기서 팀을 구해냈다.
김재성, 조원희 등 창단년도에 영입된 3인방 중 2명이 팀을 떠나고서 유일하게 서울E에 남았다. 이후 2017년에 2022년까지 5년 장기 계약을 맺었다.
2017년 5월 6일 FC 안양전에서 통산 4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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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업이 완전히 투자의지를 잃어버려 형식상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랜드에서 혼자서 고생 중. 창단시즌에 같이 들어온 김재성과 조원희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갔다.
2018 시즌엔 이랜드의 마지막으로 남은 스타 플레이어로[7]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팬들에게 미안하다며 사과까지했다.
전 경기, 전 시간 출전상과 K리그2 베스트11 GK상을 받았다. 전 경기, 전 시간 출전상은 2017년에 이어 2년 연속. 여러 팀에서 영입요청은 많았지만 이랜드의 K리그1 승격까지 이랜드에 남겠다고 인터뷰했다.
2019 시즌엔 그나마 해주던 전민광과 최오백도 나가버렸고 공격의 핵심 주민규도 이적하면서 정말 허허벌판이 된 팀에서 홀로 고생하고 있다. 안산전에서 패널티킥을 2번이나 막아냈는데도[8] 수비진이 추가시간 1분을 못 버티고 실점하며 무승부를 당하는 경기도 있었다.
2019시즌을 끝으로 서울 이랜드를 떠났는데; 여러모로 '''왜 팀을 안 나가는 지 모르겠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리고 2020시즌 결별 이후로는 '''왜 팀에서 쫓겨났는 지 모르겠다'''는 평을 들은 안타까운 골키퍼. 노쇠화로 실력이 형편없어졌다거나 한 건 아니고, 이랜드는 창단 초창기부터 유입되어 버티던 팬들조차 대부분 이탈했을 정도로 미래가 없는 팀이었다가 2019시즌 종료 후 겨우 전설적인 감독을 모셔왔건만 그 감독님은 대대적인 리빌딩을 천명하며 어린 선수 육성에 집중하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량은 이랜드에 있기가 아깝다는 평가를 많이 듣던 선수였기 때문에 1부, 2부 리그 어디든 금방 길을 찾을 듯 하다.
2020년 3월 19일 성남 FC 구단은 김영광 영입을 공식발표했다.
2.5. 성남 FC (2020~)
2020년 4월 입단테스트를 통과하여 자유계약(FA)로 성남 FC에 입단, 6년만에 K리그1에 복귀하였다.
2.5.1. 성남 FC/2020년
1라운드 광주 FC전에서 성남 데뷔전을 치렀다. 여러 번 슈퍼 세이브를 보여 주며 무실점 승리에 기여했고,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2라운드 인천 유나이티드전에서도 공격이 부실한 인천을 상대로 무난하게 2경기 연속 클린시트를 기록하였다.
3라운드 강원 FC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줬지만 전반전 고무열의 니어포스트로 빨려 들어가는 슈팅에 선제골을 내주며 시즌 첫 실점을 허용했다.
4라운드 FC 서울전에서 결정적인 슈퍼 세이브 3회를 기록하며 무실점 승리를 이끌었고, 4라운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4경기 1실점으로 올 시즌 K리그 골키퍼들 중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 노쇠화 우려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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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라운드 대구 FC전에 선발출장하였다 이날 김영광은 프로 500번째 경기를 치러 번호를 500번으로 하였다
16라운드부산아이파크전도 선발출장 전후반내내 안정적인 선방쇼를 펼첬다 후반45+1분에 부산의 코너킥을 멋지게 펀칭한 이후에 맨바닥에 그대로 떨어지면서 부상위험이 있었으나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고 팀은 후반45+5분에 도스톤백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먹히면서 승리를 지키진 못했다.
21라운드 대구 FC전에 선발 출전했다. 전반 시작10분만에 데얀에게 실점하면서 끌려가기 시작했고 이후 37분에는 세징야의 추가골에 실점하였고 다행히 전반.종료직전 이창용의 골로 2대1로 전반을 마첬고 후반14분에 나상호의 동점골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으나 이후 데얀에게 한번 더 실점하면서 2대3으로 패했다.
23라운드 인천 유나이티드전에서는 뜻하지 않은 상황이 펼처졌다. 전반 시작 2분 만에 연제운의 퇴장으로 성남은 시작하자마자 수적 열세에 놓이게 되었는데 전반 11분 김준범에게 실점한 것을 시작으로 7분 뒤 무고사에게 실점하면서 전반을 마쳤다. 하지만 후반에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져가며 후반 시작 9분 만에 김도혁에게, 22분에 김도혁에게 또 한 번 실점하였고 이후 6분 뒤 무고사에게 실점, 추가시간 1분에 무고사에게 해트 트릭을 허용하는 실점을 하면서 6대0 대패를 하였다.
24라운드와 25라운드도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으나 팀은 패배했다. 시즌 최종전까지 주전으로 나서서 팀의 잔류에 기여했으며 시즌 종료 후 1년 재계약이 발표됐다.
2.5.2. 성남 FC/2021년
김영광의 프로 데뷔 20주년이 되는 시즌이다.
3. 국가대표 경력
3.1. 연령별 대표팀
1998년 5월 16일 AFC U-17 챔피언십 예선 경기에 출장하면서, U-17 대표팀으로 첫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2002년 AFC 청소년 선수권대회, 2003년 U-20 월드컵 모두 전경기 출장하며, U-20 대표팀에서도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였다.
U-23 대표팀에서도 부동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본선에서 8강까지 4경기 모두 출장하였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본선에서 4위를 차지할 때까지 6경기 모두 출장하였다.
'''U-23 대표팀: 31경기 출전, 19실점 허용'''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은성, 김용대와 함께 실력은 있지만 '''국대에서 빛나지 못한 선수'''.
이는 굉장히 안타까운 부분인데, 이미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엄청난 기량을 보여주며 높은 잠재력을 보여준 선수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그리스전에서 김영광은 엄청난 선방을 보이며 사실상 무승부를 이끌었다고 봐도 될 정도의 슈퍼세이브를 했었다. 대중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킨 것도 바로 이 시기이며, 리틀 칸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도 2004년 올림픽에서였다.
이후 능력도 인정받아 2006 FIFA 월드컵 독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였으나, 하필 주전 골키퍼는 대선배 이운재였다. 당시 이운재는 체력 평가 성적과 노쇠화 및 체중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기량면에서 말이 많았으나, 결과적으로 봤을때 엄청난 슈퍼세이브를 보여주며 프랑스전을 하드캐리했으니 김영광이 서브였던 것은 납득할 만한 상황이었다.
2006년 월드컵 직후 출범한 핌 베어벡호에서 주전으로 낙점되면서 꾸준히 경기에 기용되었으나... 핌 베어벡 감독의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의 최우선 과제는 세대교체#s-1였고, 특히 수비진 세대교체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또한 히딩크호에서부터 시작한 4백 전술을 한국 축구는 아직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고, 지역 수비가 기반인 4백을 대인마크 기반의 4백으로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던 상황이기 때문에 지역 수비 기반의 4백 수비 전술로 바꾸는게 최우선시되었다.
선수 발굴을 위해 매 경기가 상당히 신예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고 실험적인 전술을 테스트하는 등 과도기적인 시기였는데, 여전히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환상에 빠져 있던 당시 국민들의 기대에 못 미치고 2006년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국가대표팀을 겨냥한 기레기들의 공격에 주요 타겟이 되고 만다.
골키퍼 김영광의 경우 특히 그 정도가 심했는데, 수비진과의 사인 미스로 인한 실점이 나왔던 2006년 9월의 이란전[9] 을 계기로 실체가 없는 안정성 논란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2006년 이란전-4분 10초. 한달 후 시리아전에서는 롱패스 한방에 어처구니 없이 뚫린 수비진이 만들어낸 1:1 상황을 차단하려고 오버래핑을 시도해서 성공하는 듯 했으나 수비 복귀가 굉장히 늦어 이후 처리가 안 되어 실점하게 된다. 당시 김영광의 판단은 매우 정확했으나... 언론의 보도 참조.
축구협회는 감독을 보호하지 않았고, 언론의 비난은 선수단이고 코칭스태프고 모두에게 쏟아졌다. 결국 이후 경기들은 실험적인 건 하나도 없이 지지 않으려는 지루한 경기가 되는 최악의 사태를 낳게 되고, 김영광은 당시 소속팀이었던 전남 드래곤즈의 프런트 및 당시 감독 허정무와의 불화로 인해 이후 울산으로 이적하는 등 영 좋지 못한 해를 보내게 되고, 결국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이후 부동의 주전에서 밀려나게 된다.
주된 장점은 환상적인 반사신경과 위치선정으로, 가끔 먹힐 골도 막아낸다. 이운재와 김병지 이후 최고의 반사신경을 가진 골리로 불린다. 이 당시 올리버 칸의 도플갱어로 불린 까닭에 별명이 '리틀 칸'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6 독일 월드컵[10] , 2010 남아공 월드컵 참가[11] '''
'''2004년~2012년까지 성인대표팀 17경기 출전, 15실점'''
4. 플레이 스타일
5. 우승
- 전남 드래곤즈 (2002 ~ 2006)
- FA컵 : 2006
- 울산 현대 (2007 ~ 2013)
- K리그 리그컵 : 2007 , 2011
- AFC 챔피언스리그 : 2012
- 국가대표 (2003 ~)
- 2007 AFC 아시안컵 : 3위
6.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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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1일 대전 시티즌과의 K리그 플레이오프 경기서 대전 관중이 던진 물병을 다시 주어서 대전 관중을 향해 던지면서 논란이 일었고, 이에 흥분한 대전 팬들은 물병을 계속 그라운드로 던져졌고, 일부 팬은 그라운드로 진입하려고 했으며, 경호원들의 제지로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5분여동안 경기는 중단됐으며, 결국 김영광은 이날 경기에서 퇴장을 당하는 것은 물론 6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600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물론 먼저 대전팬이 물병을 던져서 시비를 건 것은 정말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병을 다시 관중석에다 대고 던진 김영광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한편 이 사건으로 김영광은 대전팬들에게 완전히 찍혀버렸고, 대전과의 경기 때마다 강한 야유를 듣고 있다.
7. 기타
킥 패스가 꽤나 정확하다. 특히나 골 킥과 펀트 킥, 수비수나 자기 진영에서 내려오는 백패스를 다시 센터 아크 넘어 상대진영에 우군에게 넘겨주는 정확도가 꽤 쓸만한데 비록 리그의 차이가 있지만 현 대표팀에서 골키퍼들의 롱킥 빌드업이 안습인 걸 생각한다면 슈틸리케 감독이 원하던 골키퍼부터 시작되는 전체적인 빌드업이 중시되는 대표팀에 재합류할 가능성이 있어보였으나 실제로 발탁된 적은 없다.
프리커버리라는 회사에서 김영광을 위한 전용 골키퍼장갑이 제작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나이키 베이퍼그립 RS와 매우 유사하다.
기업도 논란이 있고 구단주도 AFC 진출 가능성이 없어지자 관심을 버려 사실상 해체만 안 하고 운영 중인 서울 이랜드 FC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스타선수였으나 정정용 감독의 리빌딩 과정에서 팀을 떠났고, 성남 FC로 이적했다.
팬 서비스가 매우 좋은 선수이기도 하다. 경기가 끝나고 팬들에게 일일이 사진과 사인을 해준다. 네이버 뉴스에서 '가자매아빠'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팬들에게 일일이 댓글을 달아준다. 그 외에 SNS나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팬들과 친근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국축팬들 대다수가 좋아하는 호감형 선수이다. 서울 이랜드 소속이던 2018년 5월,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인 보배드림에 직접 글을 올려 직관을 부탁하였고, 이는 많은 유저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었다.
[1] 성남fc 프로필[2] 키에 비해 팔이 긴 편이며, 본인이 직접 인증한 적 있다. [3] 2008년 오른쪽 무릎 후방 십자인대 파열 [4] 2015 시즌부터 서울 이랜드 FC 에서 그의 별명을 딴 GLORY로 배번 마킹을 했다(...).[5] 하지만 이로 인해 당시 K리그 몸값 거품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표주자 중 한 명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6] 이런 까닭에 울산의 골키퍼 기대주였던 은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게 되었다.[7] 주민규는 상무에서 시즌 막바지에 복귀했고, 그마저도 부상을 이유로 거의 출전하지 못하다가 다음 해 울산 현대로 이적했다[8] 두번째 킥은 정규시간 종료 30초전에 준 킥[9] 김상식 - 김영광 사이의 콜 미스로 인해 김상식이 공을 받으러 나오던 김영광에게 패스를 하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공을 뺏기고 어처구니 없이 로빙슛에 무너진 경기.[10] '''이운재''', 김용대, 김영광[11] '''정성룡''', 이운재, 김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