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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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이자 지도자이다.
2. 선수 경력
2.1. 프로 데뷔 이전
특이하게도 학창 시절에는 스트라이커였다고 하며, 아시아 학생 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과 MVP를 수상했을 정도로 공격적인 재능을 선보였다.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것은 연세대 진학 후 주전 풀백을 보던 선수가 부상당하자 정병탁 당시 연대 감독의 권유로 풀백 자리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2.2.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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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유공 코끼리에 입단한 후 계속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발레리 니폼니시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이른바 "니포 축구"의 일원으로 영리함과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한 활약으로 팬들에게 많은 인상을 남기며 K리그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이런 활약으로 1999년과 2000년에 2년 연속으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탁월한 기량과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며 축구팬들의 많은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 뒤 2001년 최성용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LASK 린츠로 이적했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4개월만에 국내로 복귀했다. 하지만 친정 팀인 부천 SK가 아닌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해 부천 팬들의 공분을 샀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이 때 부천 팬들이 경기장에서 강철의 유니폼을 태우는 화형식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후에는 전남 드래곤즈에서 2004년에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89년에 '''만 17세 7개월'''로 국가대표팀에 입성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걸었다. 이 때 기존의 국가대표팀 선수들과 나이 차이가 제법 나서 "삼촌"이라고 불렀다고... 비록 A매치에서 활약하지는 못하고 훈련만 소화한 것이었지만 당시 같이 대학 무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홍명보도 받지 못했던 대우였다.
하지만 1990 FIFA 월드컵 직전 대표팀에서 낙마하고 그 자리에 대학 무대에서 맹활약하던 홍명보가 발탁되면서 월드컵 무대를 밟지는 못했다. 비록 월드컵에는 출전하지 못했으나 대신 1991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출전했다. 여담으로 당시 국가대표팀은 남북 단일 팀으로 구성되었는데, 북한의 최철과 윤철, 대한민국의 박철과 함께 "철 4총사"로 불렸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강철은 몸을 아끼지 않는 수비를 선사했고, 단일 팀은 첫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잡는 이변을 일으키며 8강에 진출했다.
이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으로 발탁되었지만, 대표팀은 서정원과 정재권 등 수준급의 공격 자원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2골만을 득점하는 부진 끝에 3무로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
유독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는데, 1994 FIFA 월드컵 당시에는 대회 직전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좌절되었고, 이후 1996년 상무에 입대해 1997년 전역했으나 당시 K리그 소속이 아니었던 상무에서 2년을 보낸 탓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지라 1998 FIFA 월드컵에도 나오지 못했다. 이후 거스 히딩크가 감독으로 부임해 한 때 주장 완장까지 차는 등 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지만 결국 2002 FIFA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이 탓에 선수 시절 커리어에 비해 명성이나 인지도가 매우 떨어진다.
반면 AFC 아시안컵은 1996년과 2000년에 모두 참가했으며,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도 발탁되었다. 다시 말해 국가대표팀으로 뛸 수 있는 대회에서 다 뛰었는데 결국 유독 월드컵만 못 나온 셈이다. 대표팀에서의 기록은 54경기 1골. 이외에 2000 시드니 올림픽에도 출전한 경력이 있어 선수 생활 동안 두 번이나 올림픽에 참가한 진귀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2] 당시 수비수 와일드 카드는 홍명보로 낙점 되었지만, 대회 직전에 홍명보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강철을 대신 집어넣었다. 강철 본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선발이라 허겁지겁 준비해서 시드니로 갔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홍명보 땜빵 격으로 뛰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2000 시드니 올림픽 당시 홍명보가 부상으로 와일드카드에서 낙마하자 대회 며칠을 앞두고 바로 시드니로 합류했던 사건. 허나 다른 사람도 아닌 홍명보의 땜빵이었고, 홍명보는 부상도 거의 없었기에 당시에 축구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인지도가 지극히 낮다.
4. 지도자 경력
4.1. 코치 시절 : 황선홍의 커리어 파트너
은퇴 후에는 전남 드래곤즈 코치를 거쳐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던 박성화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활약했으며, 올림픽 이후에는 부산 아이파크의 코치로 있었다가 포항 스틸러스에서 수석코치를 부임하였다.
은퇴 후 스카우트로 스탭직을 시작했기에 선수 보는 눈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황선홍 감독 부임 후 성적이 좋지 않았을 무렵에는 강철과 윤희준 코치가 '수비축구의 원흉'으로 찍혀서 퇴진 압력을 받은 적도 있다.[3]
하지만 황선홍 감독 체제에서 강철과 윤희준 두 코치가 수비전술을 만들다시피 한 점을 생각해보면 그런 평가는 좀 성급한 면이 있었으며, 2012년의 고비를 넘긴 이후에 탄탄한 수비를 바탕으로 시즌 더블을 일구어냈으니 결과적으로는 틀린 비판이 되었다.[4]
유한 성격의 황선홍 감독 대신 총대를 메고 팀의 기강을 잡는 역할을 하는 등 팀의 중심역할을 했고 황선홍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으면서 같이 수석코치직도 내려놓았다. 이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행정가로 활동했다.
2016년 6월 중국으로 떠난 최용수의 후임으로 황선홍이 FC 서울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최용수 감독을 따라 중국으로 간 김성재 코치를 대신해 FC 서울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으며, 2018시즌 중반 황선홍이 물러나면서 동반 퇴진했다.
이후 황선홍을 따라 연변의 수석 코치로 부임했지만 연변이 금방 해체되면서 연변을 떠나게 되었다.
4.2. 대전 하나 시티즌 수석 코치, 감독 대행
2020시즌을 앞두고 황선홍 감독을 따라 대전 하나 시티즌의 수석 코치에 합류했다.#
9월 6일 18R 부천전 이후 이틀 뒤인 8일에 황선홍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자진 사퇴를 발표하면서 후임 감독 선임시 까지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게 되었다.
비록 강철은 P급 라이선스를 가진만큼 시간적 부담은 없겠지만 오랜 시간 황선홍과 감독과 코치로 합을 맞춰온 사이인만큼[5] 감독 대행을 맡을 시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을 전망이다.
9월 13일 제주 유나이티드전을 통해 감독 대행 데뷔전을 치렀지만 전임 황선홍 감독과 딱히 차이점은 없었으며, 안드레가 부상으로 빠진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며 유효슈팅 하나 없이 무기력하게 2:0으로 패했다.
이후 조민국 전력강화실장이 감독 대행으로 선임되면서 감독 대행직에서 물러났다. 팀을 떠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종전 직책인 수석코치로 돌아가며 팀에 잔류해 조민국 감독 대행을 보좌했으며, 20시즌 종료 후 대전을 떠났다.
5. 여담
- 1991년 남북 단일팀으로 구성된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대표팀에 선발되어 아일랜드와의 조별리그 경기에 출전하였으며, 이 대회에서 강철은 박철, 북한의 윤철과 함께 '철트리오'로 불리우며 단일팀 쓰리백의 주축으로 활약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박철과 강철은 훗날 지도자로서 대전의 감독 대행이 되었다.
[1] 전임감독 황선홍 사퇴[2] 강철 이외에 이런 기록일 갖고 있는 한국 선수는 이천수, 최태욱, 김동진, 김정우 정도밖에 없다.[3] 황선홍 감독이 포항에서 어떤 입지를 갖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성적이 일시적으로 안 나올 때 비난이 감독 대신 코치들에게 어느 정도 갈 수밖에 없다.[4] 그러나 이후 2014시즌 15시즌을 거치면서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포항의 세트피스 수비/공격을 보면 여전히 의문부호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5] 황선홍 전 감독과 강철 감독대행이 함께 지도했던 팀만 전남 드래곤즈(여기선 2006년 한 해만 같이 있었지만, 이후 계속 황선홍 감독이 선임되는 팀으로 간 것을 보면 황 감독이 이때 눈여겨보고 항상 불러왔을 가능성도 있다.), 부산 아이파크, 포항 스틸러스, FC 서울, 연변 FC, 대전 하나 시티즌까지 6곳에 달한다. 다만 황선홍 감독이 팀에서 나간 뒤 강철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은 건 이번 대전이 처음이다. 이전 구단인 전남에서는 황선홍 당시 수석코치가 떠난 뒤에도 코치로서 남아있었고 부산, 포항, 서울에서는 황선홍 감독이 물러날 때 같이 팀에서 나갔었다. 연변에선 뭘 해보기도 전에 팀이 재정난으로 해체되는 바람에(...) 남고 말고를 결정할 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