쵸소카베 노부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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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 ~ 1586년. 長宗我部信親(ちょうそかべのぶちか)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적남. 모친은 이시가이 미츠마사의 딸[1]. 아명은 센유마루(千雄丸), 야사부로(弥三郎). 법명은 텐보 죠슌(天甫常舜). 묘소는 셋케지에 존재한다.
부인으로 요리토키의 딸을 두었으며, 슬하에 딸 한 명을 두었다. 이 딸은 후에 셋째 동생인 쵸소카베 모리치카의 부인이 되었다.[2]
1. 소개
2. 탄생과 성장
3. 큐슈 출병
4. 헤츠기가와 전투
5. 여담
6. 참고 서적


1. 소개


모토치카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인물이다. 더도말도 완벽한 인물로 화자되는 경우가 압도적이며, 민간에서의 인기는 상상을 불허한다.[3] 죽음 또한 불명예스러운 전투의 명예로운 전사로 그려지며, 노부치카의 사망으로 부친 모토치카가 미쳐버렸다는 이야기가 생산될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있다.[4]

2. 탄생과 성장


군키모노에 의하면 1565년 오코 성하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처음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시기는 1574년으로, 모토치카가 곳곳에 장남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는지, 시라가샤(白髪社) 등에 노부치카의 아명인 센유마루가 적힌 무나후다(棟札)가 발견되었다. 모토치카가 시코쿠 평정에 열의를 쏟는 1578년이 되자 또 다른 아명인 야사부로에서 벗어나 실명을 받게 되었는데, 이름 한 자를 수여해 준 사람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다. 중개는 토시미츠와 미츠히데가 맡았고, 노부나가가 직접 아와 방면으로 출진한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이름 중 노부(信)를 야사부로에게 줄테니 실명을 노부치카(信親)으로 하는게 좋을 것 같다는 주인장을 모토치카에게 보낸 것이다. 이렇게 야사부로는 실명을 얻어 본격적으로 무사의 길에 서게 되었다.[5]
군키모노에 의하면 이후 여러곳에서 군공을 올린듯 하며, 1582년에는 아와 나카토미가와 전투에서 히사타케 치카나오와 같이 대군공을 올렸다고 한다.
정치적인 면에선 1583년의 토지급여 연서장을 필두로하는 모토치카와 함께 활동한 흔적이 어느정도 남아있다. 이렇듯 모토치카는 노부치카와 함께 이두정치를 진행하였고, 노부치카가 자신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1585년엔 하시바 히데요시시코쿠 정벌이 행해져, 토사 이외의 쵸소카베령은 코바야카와와 하시바령으로 변경되었고, 자기 자신은 오사카에 둘째 동생인 츠노 치카타다와 가로 에무라 치카요리와 함께 인질로 보내지게 되었다.

3. 큐슈 출병


시코쿠가 히데요시에게 넘어갈 때, 큐슈에서는 시마즈 요시히사오토모 소린의 세력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오토모의 열세가 결정적이 되자 소린은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히데요시는 천황의 명령이라 하며 정전을 요구하고, 1586년이 되자 큐슈의 쿠니와케(国分)도 기획하여 시마즈씨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요시히사는 이 요구를 대차게 거절해버린다. 이윽고 히데요시는 토사의 쵸소카베와 사누키의 센고쿠에게 큐슈 출병을 명하게 된다.
노부치카는 이미 오사카에서 벗어난 상태였기 때문에 바로 부친과 함께 큐슈 분고에 상륙하게 된다. 히데요시의 기본 전략은 군대를 점차 상륙시켜 시마즈 세력을 피폐하게 만든다음 일소시키는 방침이었으며, 시코쿠 2국의 군세도 2천명에 그친 상태였다.[6] 그런데 시코쿠세는 후나이에서 오토모 요시무네와 합류하여 바로 군사활동을 시작했다.
큐슈 북동부 일대를 돌며 오토모 세력을 구원하던 시코쿠세는 오토모 세력의 본거지인 분고에서 배반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이에 호응해 시마즈 이에히사가 진격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사누키세를 이끄는 히데히사는 바로 서장을 넣어 상황을 전달했고, 히데요시는 보고를 받자 시코쿠세는 분고에서 대기할 것과 아와지와 아와의 군세를 더해줄 것을 시코쿠세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이미 현장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을 뿐이었다. 후나이와 상당히 가까운 분고 츠루가 성(鶴賀城)의 토시미츠 소교(利光宗魚)가 드디어 이에히사가 이끄는 군세에게 포위당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분고에 체류하는 오토모-하시바 세력은 12월 12일에 군의를 열어 츠루가 성을 구원할 것과 시마즈세를 격퇴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들은 정보전을 게을리한 결과를 톡톡히 보게 된다. 츠루가 성이 이미 이에히사에게 함락된 것이다.'''[7]
츠루가 성의 상황을 모르는 오토모-하시바 세력과 반대로 이에히사는 오히려 오토모-하시바 세력이 츠루가 성으로 온다는 정보를 잡아냈다. 이에히사는 곧 소수의 병력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매복 시켰으며, 헤츠기가와(戸次川)[8]에 전선을 두었다. 츠루가 성을 구원하러 온 오토모-하시바세는 시마즈의 군세를 보자 도하를 시작했다. 이렇게 헤츠기가와 전투의 막이 올랐다.[9]

4. 헤츠기가와 전투


도하를 끝낸 오토모-하시바의 군세를 보자 이에히사는 즉각 복병에게 일제공격을 명했다. 이를 본 쵸소카베세는 특출난 철포 실력으로 응수하려 했으나 돌격해오는 시마즈의 군세에 의해 제대로된 사격은 커녕 전투조차 힘겨운 상황에 처했다. 결국 복병에 의한 강을 낀 포위 섬멸 작전에 의해 오토모-하시바 세력은 직격타를 맞고 와해되었다.
철포조차 두려워 않는 시마즈의 병사들의 공격에 오토모-하시바 연합군은 전면적인 후퇴를 개시했다. 먼저 지리에 밝은 요시무네의 오토모 세력이 전장에서 이탈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반면 히데히사의 센고쿠 세력과 모토치카의 쵸소카베 세력은 후퇴 끝에 상당수가 익사했으며, 2천 3백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오게 된다. 세력의 수장인 히데히사와 모토치카는 탈출에 성공했으나, 센고쿠 세력의 미요시 마사야스 등이, 쵸소카베 세력의 요리토키 등이 전사했으며, 노부치카 본인도 시마즈의 칼날에 쓰러졌다.[10]
토사 국주의 적남은, 이렇게 약 22세의 나이로 타향에서 그 운명을 끝냈다.[11]

5. 여담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서 얼마지나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2차 사료인 모토치카키(元親記)에서 노부치카의 최후를 상세히 그려내고 있다. 노부치카는 가로에게 퇴각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무시하고 1.6m의 나기나타를 휘두르며 8명의 적을 베어 넘기며 적이 근접하자 타치를 잡아 6명을 손수 베었다. 하지만 칼날은 무뎌지고 혼자서는 대군을 당해낼 수 없기에 할복을 결의하였으나, 의지가 무색하게 적군에 밀려 전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노부치카는 원래 1m 정도의 일본도를 들고다녔으나, 헤츠기가와 전투가 벌어진 날에는 노부나가에게 받은 사몬지의 일본도를 지참했다고 한다. 후에 모토치카가 죠라쿠하자 시마즈 쪽 사람이 모토치카에게 그 일본도를 건네주었는데, 모토치카는 한 번도 보지않고 돌려보냈으며, 그 눈시울엔 눈물이 그득했다고 한다. 또 후에 노부치카의 유체를 찾게하여 끝내 화장시키고 뼈를 토사로 갖고 들어오게 하였다 한다.
모토치카키에선 히데히사가 츠루가 성의 구원에 나서려하자 모토치카가 "수가 불리하니 기다리자"고 했으나 히데히사가 "혼자서라도 가겠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쵸소카베 세력이 전투에 가세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후일 히데요시가 시코쿠세의 큐슈 정벌에 관한 처분에서 히데히사만을 힐책하고 책임을 지우게 한 것으로 보아 헤츠키가와 전투의 원인과 결과가 히데히사에게서 나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12] 이외에도 니혼시에는 프로이스가 히데히사를 보고 '''시마즈 놈들이 분고까지 올리 없다고 장담했다'''고 하거나, '''병사를 자기 멋대로 사용하여 분고에 피해를 냈다'''는 등 그를 참혹하게 평가하고 있다.[13]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당시의 우키요에로 노부치카와 카토 키요마사일기토 장면이 존재한다.[14] 토쿠시마 성 박물관의 설명에 의하면 차세대를 이을 젊은이들, 모토치카의 후계자와 히데요시의 어린 직신의 구도를 의식하여 만들어진 그림이라 해석된다.
노부치카에게 실명을 주고 노부나가와의 관계를 꾀하기 위해 나카지마 베쿠노스케(中島可之助)를 사자로 보낸 모토치카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있다. "새 없는 섬의 박쥐"라는 고사를 만들어준 비중있는 이야기지만, 모토치카키에선 사자를 이치죠 가문의 가신 카구미 이나바노카미(加久見因幡守)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15]
모토치카키에 의하면 상당한 영재 교육을 받은 듯 싶다. 오코 성 밑으로 아예 아이들을 전부 모은 뒤에, 문학, 태고, 노래, 피리, 장구, 축국 등의 스승을 모셔가며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교육 정책에 사람들이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몰라도 노부치카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백로화(白鷺図)가 현존하고 있다. 본인이 착용했다는 황금빛 나는 용이 붙은 갑옷도 현존한다. 코치현립 민속자료관에서 레플리카를 볼 수 있으니 관심있음 보러가보자. 원본은 셋케지가 소장중이라 한다.
키는 185cm의 초위너, 운동 신경도 좋았고, 신토류를 배우며 나기나타, 타치, 도 익히는 등 무예의 연마에도 소질을 보였다.[16] 이국의 종교에도 관심이 있던듯, 큐슈의 수도원에서 설교를 듣고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다고 프로이스와 대화를 나눈 정황이 포착된다.[17]
본의아니게 부친 모토치카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가해자 중 한 명... 토사모노가타리 같은 당시와 200년은 지난 군키모노에 의해 노부치카의 전사로 모토치카가 치명적인 정신적 피해를 입은 것처럼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 모토치카의 캐릭터는 시바 료타로에 의해 아주 극단적으로 그려지게 되었고, 또 시간이 지나자 인터넷을 통해 "모토치카가 노부치카의 죽음 듣고 할복하려했다"란 말이나, "굉장한 명군이 순식간에 폭군으로 변했다", "노부치카가 살아있었다면 모토치카와 쵸소카베 가문은 안전했을 것이다" 등의 낭설이 정말 끝없이 유포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모토치카는 노부치카의 사망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다이묘로서 토사를 경영해나갔고, 후계자 쵸소카베 모리치카와 함께 2두 정치를 실행하였으며, 5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1국 규묘의 켄치를 완성시키고 법도를 정비하는 등, 다이묘로서의 중요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심지어 모토치카에 대한 사료는 오히려 노부치카의 사망 이후의 것이 더 많이 남아있고, 더 많이 언급되며 연구되는 추세다. 폐인이 되어서 정치를 집어 치웠다면 절대 성립될 수 없는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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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그런저런 B급 무장.
태합입지전에도 등장하지만 능력치는 어중간한 만능형에 특기도 어중간해서 그렇게 쓰기 좋은 무장은 아니다. 거기에 오직 전변의 장에만 등장하며 수명까지 짧다.

6. 참고 서적


awamiyoshi
: 長宗我部元親·盛親 - 平井上総(2016年 8月 10日, ミネルヴァ書房)

[1] 의형제로 미츠마사의 양아들인 이시가이 요리토키가 있다. 또한 요리토키의 친형은 사이토 토시미츠이며, 토시미츠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가신이었다. 모토치카는 이 루트를 이용하여 오다 정권과 관련된 수 많은 서장들을 작성하는 등 아주 잘이용해먹었다. - 長宗我部元親·盛親 p.19[2] 長宗我部元親·盛親 p.20[3] 민간 차원의 이야기지만 센고쿠 히데히사가 꼴통이라는 이미지를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 봐도 좋다.[4] 물론 후의 모토치카의 정치 행보를 보면 진짜 폐인이 됐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할만하다.[5] 長宗我部元親·盛親 p.86[6] 2천 여의 병력 상황은 루이스 프로이스니혼시에 기록되어있다. - 長宗我部元親·盛親 p.147[7] 프로이스의 니혼시에서 - 長宗我部元親·盛親 p.149[8] 현 오노가와(大野川)로 비정된다. - 일본어 위키피디아[9] 프로이스의 니혼시에서 - 長宗我部元親·盛親 p.150[10] 프로이스의 니혼시에서 - 長宗我部元親·盛親 p.150[11] 다시 분고로 도해한 모토치카가 토시미츠의 아들인 사이토 토시무네에게 노부치카와 요리토키의 전사를 알리는 서장을 보냈으므로 노부치카가 큐슈에서 전사했다는 것은 확고한 사실로 보여진다. - 이시가이케몬죠. 長宗我部元親·盛親 p.151[12] 長宗我部元親·盛親 p.149[13] 문학 박사 平井上総는 프로이스가 가톨릭 신자이며, 분고가 쿠로다 요시타카 등의 크리스찬 다이묘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니, 요시타카를 높이 평가하고자 히데히사를 깍아 내렸을 수 도 있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 長宗我部元親·盛親 p.148[14] 확대본[15] 長宗我部元親·盛親 p.94[16] 재밌는 사실은 츠카하라 보쿠덴 등의 신토류 검호들의 이름을 넣어 서명한 노부치카의 문서가 있다는 점이다. 무예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듯. - 長宗我部元親·盛親 p. 115[17] 長宗我部元親·盛親 p.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