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치 미츠히데
明智光秀
(1528? ~ 1582.07.02)
1. 개요
'''"敵は本能寺にあり!"'''
적은 혼노지에 있다!
일본 전국시대 무장으로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를 죽게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국시대를 잘 모르거나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꽤 지명도가 높은 전국무장이다. 어쨌든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모반자이며, 일본 현지에서는 유다처럼 "배신자"의 대명사이다.'''"仏のうそは方便と云う。侍のうそは武略と云う。士民百姓はかわゆきことなり。"'''
부처의 거짓말은 방편[2]
이라 하고, 사무라이의 거짓말은 지략이라 하는데, 사민 백성(사농공상)들이 가련할 따름이다.[3]
통칭은 쥬베에(十兵衛). 후일 큐슈의 명가인 고레토(惟人)씨로 성을 바꾸었으나 대부분의 생을 아케치씨로 보냈기 때문인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관직명인 휴가노카미(日向守)로도 알려져 있다.[4] [5]
2. 초년기
사실 생년에 대한 기록이 자료마다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서 미츠히데의 생년에는 여러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1528년 출생설은 '아케치 군기(明智軍記)'와 호소카와가 문서(細川家文書)의 기록. '호소카와 가기(細川家記)'에는 1526년 생이라고 적혀 있고, 당대기(当代記)라는 에도시대에 지어진 사서에는 아예 1516년 생이라는 설과 1540년 생이라는 크게 상충되는 기록이 적혀 있다. 어쨌든 여러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매체에서 묘사될 경우 미츠히데는 1534년생인 노부나가보다 연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경력이 상당히 독특하다. 미노의 주인인 사이토 도산의 처조카로 아명은 모모마루이다. 아케치 집안은 미노 겐지의 토키(土岐)씨 일파로 무가에선 제법 이름을 올리고 있는 가문이다. 모모마루 시절 사이토 도산의 귀여움을 받으며 그 병법, 군학, 예법, 교양 등을 전수받았다.
사이토 도산이 아들인 사이토 요시타츠의 손에 죽자, 미츠히데의 일족은 도산에 대한 의리를 지켜 모두 농성하다 죽었다. 미츠히데는 조카인 사마노스케[6] 를 데리고 탈출하여 처음에는 아사쿠라 가를 의지했다.
아사쿠라라면 토카이도의 이마가와에 버금가는 명문이지만, 당주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무능으로 영 좋지 않은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미츠히데는 이 시기에 후일에 도움이 되는 인맥을 많이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쇼군과 인연을 맺고 후일의 인척인 호소카와 후지타카와도 친우가 되었다.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미요시 3인중의 습격을 받아 죽자, 미츠히데는 중으로 출가해있던 요시테루의 동생 요시아키를 미요시의 마수로부터 탈출시키고 아사쿠라에 의탁하게 하는 큰 사업을 해낸다. 이 일은 물론 아사쿠라 가문에 엄청난 정치적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벼슬도 없던 하급 무사로서는 이례적으로 쇼군의 직신이 되었고, 요시아키의 큰 신뢰를 얻게 되었다.
미츠히데는 쇼군의 직신 신분으로 아사쿠라를 설득하여 상경할 것을 권했지만 정치적으로 대단히 무능했던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전혀 상경하려 들지를 않았고, 결국 미츠히데가 자신의 미래와 쇼군의 의지가 될 만한 상대를 찾다가 발견한 것이 당시 급속도로 성장하던 신흥세력 오다 노부나가였다.
3. 노부나가 휘하에서
미츠히데는 이 때부터 연락 장교 같은 역할로 오다가에 몸담게 되었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을 성공시키고 각종 정복 사업을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미츠히데도 오다 가문의 신하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원래 쇼군 가문의 직신인 호소카와 후지타카도 쇼군 요시아키의 무능함과 사람됨에 실망하여 오다와 연줄을 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7][8]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음흉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 항상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음모를 꾸미곤 했는데, 미츠히데도 여기엔 정나미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요시아키가 오다 포위망을 계획하자 이를 저지시키고 계획을 오다 노부나가에게 누설했다.
요시아키는 다케다 신겐의 교토 진공과 발맞춰 니죠 성에서 반 노부나가를 기치로 정식으로 거병했지만, 이것은 불운하게도 신겐의 급사로 인해 설레발이 되고 말았다. 신겐이라는 제일 큰 위협이 없어진 오다 노부나가는 곧 아사쿠라/아자이 가문의 연합군을 격파한 뒤 교토로 진격해 니죠 성을 포위했고, 요시아키는 머리를 깎고 목숨을 구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죽이지는 않고 카와치로 내쫓았으며, 이렇게 무로마치 막부는 멸망한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당시까지도 조정에서 정식으로 해임된 것이 아니라 여러 다이묘들에게는 여전히 쇼군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인지 그 이후에도 여러 계책을 내놓으면서 그와 적대했다고 한다. 또한 본래 아케치 미츠히데는 그의 신하였기 때문에 혼노지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까지도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편지로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이 후대에 밝혀졌으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편지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를 치라 명령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오다 사천왕의 일원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시카가 요시아키와의 연을 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1. 노부나가와의 관계
이렇게 미츠히데는 굉장히 유능한 외교관이자 정치가였지만,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인 데다가 자기 이외의 인간을 개무시하는 버릇까지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와 같이 고지식한데다 말귀를 한번에 못 알아듣고, 교양 많고,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데다 자존심도 강한 스타일의 인간을 대단히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능력이 있기 때문에 미츠히데를 근처에 두고 중용하면서도 기분 나쁘면 부하들 앞에서 금귤머리[9] 라고 불렀고 머리채를 잡거나 마구 구타하는 정도였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늦건 이르건 사단이 나게 되어 있는 관계였다. 이는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보면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일본 소설 번역가이자 이 작품을 번역한 이길진은 이를 기존의 교양과 관념에 집착하는 구세력과, 새로운 지식으로 기존의 질서를 타파하려는 신세력의 보혁 갈등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미츠히데와 노부나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통설로 취급되고 있다. 하루는 공식 석상에서 갑자기 광기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사소한 이유로 미츠히데를 때려죽일 만큼 두들겨 팼다고 한다. 미츠히데는 두들겨 맞으면서도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고 하며, 근처의 다른 무장들이 말리고 대피시켜서 살았다고도 하며, 아마 역심을 품었다면 이쯤이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프로이스도 <일본사>에서 "노부나가가 미츠히데를 발길로 걷어찼다는 소문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10] , 일설에는 노부나가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미츠히데가 술을 사양하자 "내가 주는 술을 마실 수 없다면 이거나 먹어라"라면서 칼을 목에 들이밀었다고도 한다.[11]
미츠히데는 오다 가문에 늦게 들어온데다, 후다이 가신도 아님에도 그 공이 혁혁하여 군단장 급의 계급에 이르렀으므로, 이에 대한 가문 내의 견제도 심하였다. 그는 본래 무로마치 막부 쇼군을 섬기던 몸이고 쇼군이 교토에서 쫓겨난 뒤에도 여전히 그와 연락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이도 좋지 않았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충성했던 것 같지는 않다. 거기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그를 치라고 여러 차례 명령했다.
뿐만 아니라 노부나가가 이미 후다이 가신이었던 사쿠마 노부모리, 하야시 히데사다 등을 내친 전력이 있을 정도로,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가신에게는, 설령 대대로 오다 가를 섬겼다 할지언정, 가차없는 일면이 있었기 때문에, 현대에 그의 심리나 그가 처한 상황을 분석한 사람들은 미츠히데가 이에 대해 공포를 느꼈다고도 한다. 현재에 비유하자면 회사의 고위 임원이 이대로 가다간 '''언제 자기가 정리해고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경영자에게 쿠데타를 일으킨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또는 노부나가의 잔인성을 이유로 삼는 이들도 있는데, 노부나가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다른 다이묘들에 비해 특별히 잔인무도한 이가 아니었고 이 설의 근거들은 대개 후세에 창작된 것이라 현재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단지 정교분리 같은 정치적인 이유를 위해 신성시되던 불교 사원 등을 마구 불태우고 도륙한 행위가 당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고, 노부나가의 부하들도 대부분 당연히 불교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미츠히데의 독실한 신앙심을 근거로 삼아 불교 신자였던 미츠히데가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도륙한 노부나가에게 격노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12]
창작물 등에서는 더욱 다양한 설을 채택하는데, 2009년에 방영된 NHK 사극 '천지인(天地人)'에서는 히데요시의 군대를 지원하러 가라고 한 노부나가의 명령에 반감을 품어 (평소 미츠히데가 죽을만큼 싫어하던 히데요시의 아래로 가서 지휘를 받으라고 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온다. 여기서 미츠히데는 요시츠네에서 무능한 지도자 다이라노 무네모리로 분한 츠루미 신고인데, 고지식한 미츠히데를 그럭저럭 잘 표현한 편이다. 물론 요리키로 파견근무를 가는 것을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간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건 현대의 고증 오류에 가깝지만. [13]
1996년작 '히데요시'에서는 적에게 인질교환으로 잡혀간 미츠히데의 어머니를 무시한 채 멋대로 인질을 살해한 무자비한 노부나가의 처사 탓에 자신의 어머니도 끔찍하게 살해당해 그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는 설을 채택했지만, 이는 에도 시대의 그림 이야기책의 창작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참고로 이 드라마의 노부나가는 그야말로 마왕이다.
사족을 덧붙이면 오다 정권하에서 노부나가와 미츠히데의 관계는 정말 독특한 관계였다. 후세에 알려지거나 창작물로 각색된 노부나가와 미츠히데의 성격이 거의 이 두 사람과 관계에서 나왔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흔히 거침없이 미츠히데를 발로 차거나 때리는 등 성격이 급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노부나가의 개혁가의 모습과 노부나가에게 맞으면서도 고개를 빳빳이 드는 미츠히데의 완고하면서도 고지식한 성격의 보수주의자 모습이 대조되고 이것이 다른면에서도 두 사람을 대표하는 성격처럼 묘사되거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노부나가는 미츠히데를 제외한 다른 수하 장수들에게는 오히려 예의 있고 잔정이 많은 편에 속했다. 당시 교토 귀족들의 문서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평판을 중시해 언행을 신중히 했으며 정복사업에 있어서도 항상 명분있는 싸움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성격이 급하다는 평판과 달리 타케다가의 싸움에선 신겐의 죽음까지 철저하게 전면전을 피하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에도 8년에 걸친 공작 후에나 타게다 토벌을 결행했을 정도로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고 요시아키를 명분으로 교토에 입성하고 이세를 점령하며 아들을 이세명문가에 양자로 보내어 지배권을 확고히 하는 등 구시대의 권위를 타파하기는 커녕 오히려 철저히 이용했다. 가신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시바타 카츠이에 등에 공적 사적으로 보낸 문서들을 살펴보면 노부나가는 가신들의 사정을 세심하게 배려함은 물론 정책이나 전략도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따르라는 식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받고 지지 받을 수 있도록 설명하고 신경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미츠히데를 걷어차고 때리기까지 한 노부나가의 행동은 그의 행동에 있어 오히려 예외적인 특수한 행동으로 봐야 한다. 노부나가의 실제 성격이 그런거였다면 미츠히데를 제외한 다른 자신들에게도 화가 나면 발길질을 하거나 거침없이 막말을 하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망신을 줬어야 하는데 당대의 신빙성 있는 기록인 오타 규이치나 프로이스 등의 기록에는 미츠히데에게만 그렇게 했다. 애초에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조차 용서해주려고 하고, 하시바 히데요시가 전장을 이탈하여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참패의 원인이 됐을 때조차 격분했으나 곧 용서해준 사례를 볼 때 명백한 가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이외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던 노부나가인데 미츠히데에 관해서는 왜 그렇게 격분해 발길질을 한 것인지 조차 제대로 장확히 알 수 없어 텐노의 대한 정책의 차이였니 도쿠가와가의 접대 문제 였니 정말 사소한 이유였으니 하며 갖가지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반면 그렇게 격분하면서도 미츠히데의 관위나 실질적 석고는 항상 오다 가문내 1,2위를 유지했고, 성격은 싫되 능력은 좋아했다면 차라리 먼방면의 전선담당을 맡겼어야 하지만 노부나가는 항상 미츠히데를 가까운 데 두었다. 혼노지의 기습이 성공할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미츠히데의 본거지가 교토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노부나가가 정말 부주의한 인물이 아니라면 미츠히데가 꿈에도 반란을 일으킬 염려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쩌면 노부나가가 미츠히데와 식견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기에 견해차이가 있을 때에는 크게 다퉜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그만한 식견이 없는 인물이면 그냥 지시만 내리거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하면 신임을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츠히데도 마찬가지인데 단순히 상사가 이유없이 자신을 싫어한다거나 아니면 천하를 잡고 싶은 야심만으로 가득찬 인물이었다면 당장 화를 피하거나 노부나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정책적으로 대립하기 보다는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맞았을 텐데 꾸준히 시코쿠 문제들의 정책을 제의하던가 밀실에서 대화중 다툰 것을 보면 노부나가에 대한 신뢰나 충성은 유지되고는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두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 미묘했던 것이 틀림없다.
미츠히데의 특수한 위치 때문에 노부나가 정권하에선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낼 수 있는 무장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시바타 카츠이에와 하야시 히데사다와 같은 가신들은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를 옹립하려 했던 전적이 있고 후다이지만 니와 나가히데나 사쿠마 노부모리의 경우에는 노부나가의 지시나 처분을 따르는 것에도 벅찬 인물이었다고 봐야 한다. 히데요시나 카즈마스의 경우도 천한 신분에서 노부나가가 특별 발탁했기에 전적으로 노부나가의 정책을 찬동하고 이행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미츠히데는 노부나가의 신하이면서도 동시에 쇼군의 직신에 조정과 쿠게와도 긴밀했으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당시로서는 가장 중앙집권적으로 움직이던 오다 가신단 사이에서도 노부나가에게 자기 목소리를 낼수 있었으며 노부나가는 이를 고깝게 생각해서 미츠히데를 공개적으로 망신주려 했다는 것이 이 의견이다.
4. 적은 혼노지에 있다!
미츠히데의 영지는 구 하타노 가의 영지였는데, 미츠히데는 이 곳을 잘 다스려서 군민이 미츠히데를 잘 따랐고, 병사의 수가 1만2천에 이르렀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시켜 시코쿠 위쪽 지역인 주고쿠를 정벌 중이었는데, 미츠히데로 하여금 현재 영지 대신에 격전이 한창인 적대 세력 쥬고쿠 모리 가의 영지로 전봉을 시키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령을 내린다. 노부나가로서는 '하루 아침에 전 재산을 잃으면 미츠히데의 군대가 죽기살기로 싸울 것이다.'라는 계산이었을지도 모르나, 미츠히데의 입장에서는 주고쿠를 차지하지 못하면 죽는 것이고, 먹어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하게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본래부터 불안정하게 오다 가문의 신하로 여겨졌고 불필요하다 느끼면 누구든 가차없이 쳐내는 그의 모습 때문에 노부나가가 다른 자들처럼 자신을 완전히 토사구팽하려 한다고 여기기에는 충분한 상황이었다. 노부나가는 전국시대를 풍미한 패웅이어지만, 사람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어서 수많은 배신을 겪었는데 아케치도 그 경우에 속했던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생존이 걸린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미츠히데는 성을 비우고 곧바로 노부나가가 있는 혼노지로 향했다. 혼노지는 단순한 사찰이나 숙소가 아니라 제대로 요새화된 군사 거점이었지만, 당연히 주변에 적군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므로 그리 많은 수비병력이 없었고, '노부나가가 주관하는 열병식이 있다.'라는 미츠히데의 거짓말이 통했기 때문에 그대로 혼노지로 진군할 수 있었고, 곧 미츠히데의 군사는 본색을 드러내어 노부나가와 장남 노부타다, 무라이 사다카츠 등의 중신을 공격하여 죽였다.
이 때 나온 미츠히데의 명대사로 알려진 것이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인데, 정작 미츠히데 본인이 정말 이 말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이 말의 출처는 에도 시대의 학자 '라이 산요'의 시 구절 중 한마디. 근데 이 시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미츠히데의 명대사처럼 굳어진 것이라고. 실제로 미츠히데 아래에 있었던 하급 무사의 수기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을 보면 수뇌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하들은 목표가 이에야스인줄 알았다고 한다.[14]
하여튼 그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은 배후세력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독범행인지, 그 동기는 무엇인지 등등이 미츠히데 본인이 죽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모리를 공격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역습이 '''마치 사전에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너무나 신속하고 전격적이었기 때문에,[15] 이래저래 일본사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혼노지의 변 항목을 참고.
5. '''삼일천하'''
노부나가를 친 것까지는 좋았으나, 너무 충동적인 거사였던지라 사후 처리가 문제였다. 교토를 장악하고 조정과 교섭하던 미츠히데는 자신이 노부나가를 치면 평소에 친한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츠츠이 준케이는 반드시 달려오리라 생각했지만, 둘 다 끝까지 눈치만 보다가 오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오다 가문에 절대충성하는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배반해 봐야 오다 가문 내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줄 만한 인물은 별로 없다는 것을 미츠히데 정도 되는 지략가가 모를 리 없는 상황에서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로 인해 미츠히데의 반란에는 믿을 만한 배후세력이 있었다는 설이 굉장히 많다.
미츠히데의 거사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용납할 수 없는 배반행위로 비친 것은 분명하다. 교토의 민심을 사기 위해 돈을 뿌리고 "노부나가는 은의 주왕과 같은 자이므로 쳤다"라고 프로파간다 공작을 하는 등의 행위를 했지만, 난세의 민심은 약삭 빠르게 대세를 파악하고, 교토의 삼척동자조차도 미츠히데를 두고 "흥, 곧 질 놈이 제가 무왕이라니..." 하고 비웃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주고쿠에서 모리와의 전쟁이 생각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아 지독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신속하게 모리와 화평을 맺고 강행군을 하여 '''3일 만에''' 순식간에 교토로 돌아와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미츠히데를 쓰러뜨렸다. 이 히데요시가 돌아오는 과정이 말도 안 되게 빨랐기 때문에[16] 사전에 함께 모의를 해놓고 히데요시가 뒤통수를 쳤다는 가설도 있으나, 미츠히데는 평소에 교양 없고 무식한 히데요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므로 어찌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히데요시의 군사가 그렇게 엄청난 대군은 아니었지만, 미츠히데 쪽은 기대했던 츠츠이나 호소카와 등의 다이묘가 전혀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아서 그것보다도 수가 더 적었고, 시작하기 전부터 반쯤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회군한 히데요시는 미츠히데가 기반을 잡기전에 신속하게 공격하였다. 일반적으로 히데요시의 압승이라는 이미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당시의 상황은 어느 쪽에게나 급박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미츠히데를 죽여 자신의 힘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서쪽으로는 직전까지 히데요시와 교전하던 모리가가 있으며 주변에는 오다가 출신의 시바타 카츠이에가 있었으며 히데요시의 군은 무리한 강행군 때문에 지쳐서 도저히 싸울 만한 여건이 안 되었다. 한 편으로 미츠히데는 주군을 배신하여 죽였다는 이유로 믿고 있던 호소카와가에서조차 버림받았으며 노부나가가 꽤 인망[17] 이 있었기 때문에 오다가의 녹을 먹던 신하들이나 병사들의 사기는 무척 낮았다.
이 때문에 양군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룬 채 전투를 계속했으나 최종적으로 수에서 이겼던 히데요시 군이 승리하게 된다.(야마자키 전투) 원래부터 사기가 낮았던 미츠히데 군은 패전으로 완전히 붕괴했으며 미츠히데는 후일을 기하기 위하여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나 병사들은 미츠히데를 따르지 않고 성에 남아서 투항했다. 도망치던 미츠히데는 부하들과 함께 낙오병 사냥에 나선 농민들의 죽창에 찔려 죽었으며 그 목은 히데요시에게 보내져 죽음이 확인되었다.
가끔 농민들에게 죽었다는 이유로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설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전국시대의 농민들은 평화롭게 땅이나 일구며 살던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이묘의 소집령이 떨어지면 제각기 집에 있는 갑옷과 칼을 들고 이에 응하였으며 전투가 끝나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은 실전 경험이 있는 사실상의 예비군, 하급 병사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전투원이었다. 이들이 패잔병의 소지품을 노리고[18] 무리를 지어 몰려가서 노략질을 하거나, 목을 베어 상대 다이묘에게 갖다 바치는 경우가 잦았다. 이를 낙오무사 사냥(落武者狩り; 오치무샤가리)이라고 한다.[19] 패잔병 처리를 쉽게 할 수 있으니 다이묘들도 현상금까지 걸면서 이를 열심히 응원(?)했다. 농민들 입장에선 운 좋게 지휘관이 낚이면 현상금도 쏠쏠하고[20] , 낙오무사의 고급 장비템(…)을 부수입으로 챙길 수 있으니 눈에 불을 켜고 낙오무사를 추적했으며, 당연히 침공전에서 패퇴하면 패잔병들은 제대로 피똥을 쌌다. 일본의 속담 중 하나인 '낙오무사는 참억새 꽃에도 겁을 먹는다(落ち武者は薄の穂にも怖ずという)'[21] 가 이런 연유에서 발생한 것이다.
우수한 군사력으로 한때 다케다 신겐과 함께 일본을 통일할 만한 인물로 여겨지던 우에스기 켄신도 농민 봉기에 애를 먹었고, 후에 히데요시도 대규모 농민 봉기를 우려하고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무기를 녹여다 농기구와 불상을 만드니 다들 덕도 쌓고 평화도 누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명목으로 칼사냥(刀狩り)정책을 벌이기도 했다. 즉, 당시에 무장한 농민과 병사의 차이는 전투를 다이묘의 명령으로 하느냐, 아니면 자발적으로 하느냐의 차이 정도 밖에 없었으니 농민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편으로 노부나가나 시마 사콘처럼 생존설도 존재하는데 미츠히데의 시체가 묻힌 사이쿄지 등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미츠히데의 목으로 추정되는 목은 3개가 있었으나 모두 부패가 심하여 확인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며 야사에서는 미츠히데가 자결하고 곁에 있던 부하가 그의 수급을 거두어 어딘가에 숨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모두 후세의 창작이나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한 생존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난코보 텐카이와 동일인물이라는 설.
조카인 아케치 히데미츠(사마노스케)는 사카모토 성을 지키다가 미츠히데가 패배했음을 알고는 성의 재보와 부하들을 내보내고 자결했다.[22] 어쨌든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에게 야마자키에서 패한 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워낙 순식간이어서 '삼일천하'라고 야유받았다. 실제로는 미츠히데가 교토를 장악한 1582년 음력 6월 2일에서 동년 동월 13일까지 약 9일 정도지만,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삼일천하 하면 미츠히데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인다.
사세구는 두 수가 전하지만, 둘 다 후세의 창작인 것 같다. 아케치 미츠히데라는 인물을 잘 요약한 시이긴 하다.[23]
'''順逆無二門 大道徹心源'''
거스름과 따름에는 두 문이 없으니, 큰 길은 오직 본마음에 철저할 뿐.
'''五十五年夢 覚来帰一元'''
오십오년의 꿈이여, 한 근본으로 돌아와 깨는구나
'''心しらぬ人は何とも言はばいへ'''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뭐라 하든
'''身をも惜まじ名をも惜まじ'''
몸도 아끼지 않고 이름도 아끼지 않았노라
6. 인물됨
미츠히데의 성실한 성격, 준수한 외모, 교양인, 철포의 달인 등과 같은 이미지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라 훔친 이야기(国取り物語)'에서 쌓인 이미지이기는 하나, 실제로 와카(和歌`일본의 전통시)와 다도를 즐기는 문화인이었고 학문과 군사적 지략까지 갖춘 지성인이었으며 철포의 달인이기도 했다. 단 '성실한 무사'였는지는 의문이 있는데, 몇 번인가 주군을 바꿨고, 당시의 기술에 미츠히데가 인격자라는 식으로 나온 게 없기 때문.
다만 전국시대의 무사들은 대부분 특정 가문을 목숨 걸고 섬기지 않고 '특정 가문 휘하에서, 특정 전투에서 용맹히 싸웠다.'는 증서인 '간죠(感状)'라는 문서를 받아서 여기저기 가문을 옮겼다. 오늘날 직장인들이 경력증명서 들고 이직하고 다닌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24] 물론 특정 가문의 고정 가신은 후다이(여러 대에 걸쳐 섬긴 가신)라고 하여 특별히 원로로 우대받았다. 그래서 미츠히데처럼 한 번에 주군을 두 명 이상 섬기는 행동은 전국시대 당시의 상식으로는 의리 없는 행동이 아니었다.[25]
루이스 프로이스는
라고 묘사했다. 프로이스가 가톨릭 선교사이기에 이교도에게 적대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히 부정적인 서술이다. 프로이스가 묘사한 미츠히데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간웅'''.그는 배신과 비밀스러운 모임을 즐겨하고 형벌을 내리는 데 잔혹하며, 독재적이기도 하였다. 자신을 위장하는 데 빈틈이 없고 전쟁에서는 모략을 주특기로 하였으며 인내심이 강하고 계략과 책모의 달인이었다. 또한 축성에 조예가 깊어 뛰어난 건축 수완을 보였으며 전투에 선발되면 숙련된 병사들을 잘 활용하였다. ...(중략)...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을 동정하는 노부나가의 앞에서 울기도 하고, 열심히 봉사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을 보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위장하기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진실된 눈물로 보였다. 또한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사람을 속이는 일흔두 가지 방법을 깊이 체득하고 학습하였다고 떠들어 대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이러한 술책과 거짓으로 그다지 모략에 정통하지 못한 노부나가를 완전히 기만하고 미혹시켰다.[26]
그런가 하면 개인적 사생활은 지극히 결벽했고,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애처가였다. 정실 히로코와 결혼하기 직전에 히로코가 천연두에 걸리는 바람에 곰보 자국이 얼굴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히로코의 집안에서는 꼭 닮은 여동생을 언니 대신 미츠히데에게 보냈으나 미츠히데는 그것을 알아채고 "나는 처라면 히로코 님을 빼고 누구도 생각할 수 없소이다."라고 잘라 말한 뒤 히로코와 혼인했다. [27] 또한 히로코는 미츠히데가 낭인 시절 여러 가문을 전전할 때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가면서 남편을 도왔다고 하며 미츠히데도 그런 아내를 매우 아껴 죽을 때까지 단 한 명의 측실도 들이지 않았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부인인 가라샤가 바로 둘 사이의 딸. 이 때문에 효우게모노나 NHK 드라마 <히데요시> 같은 픽션에서는 이 둘의 관계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가정으로 묘사되는데, 남편을 내조하는 현모양처, 그리고 가정과 아내를 지키기 위해 직장에서 분투하는 가장 같은 느낌으로 현대의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구성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
신뢰도는 낮지만 야담 중에는 각지를 유랑하다가 모리 모토나리의 모리가에 사관을 요청한 적도 있다고 한다. 모토나리는 미츠히데의 임관을 거절했는데 그 이유가 "그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관상이 '''늑대'''와 닮았다. 겉과 속이 다른 자이니 안심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고.
혼노지의 변 이전에 렌가[28] 모임을 열었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시를 지었다.
이 구절은 때(토키)라는 단어가 미츠히데의 출신 씨족인 겐지의 명문 토키씨와 연결되고, '아메'는 비라는 뜻도 되지만 '하늘'이라는 뜻도 되고, '적시다'는 단어의 '시'는 다스릴 치(治)자로도 새길 수 있다. 특히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 시의 특성상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해서 '''"토키(씨의 후손인 미츠히데가)가 지금 오월에 바야흐로 천하를 다스리려 한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또 이 사건 이전에 신사에 참배해서 운을 점치기 위해 제비를 세 번 정도 뽑았다고 한다. 보통은 거사를 앞두고 불안한 마음에 제비뽑기를 여러 번 하면서 고민해 보았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만, 실제로는 제비뽑기를 여러 번 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時は今(때는 바로 지금)/雨が下知る(비가 아래를 적시는)/五月哉(오월이로다)
미츠히데에 대해서는 배신자의 대명사이자 간웅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지만[29] 대개는 성실하거나 상식, 교양이 풍부한 인물로 그려지는 등 동정적인 평가가 많다. 노부나가 잔혹설이 여러 설화나 군담을 통해 유포되면서 자연스레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평가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지만, 혼노지의 변이 지모가 뛰어나다는 미츠히데의 소행치고는 너무나 뒷공작이 허술했기 때문. 물론 현실적으로는 쿠데타라는 것이 완벽한 준비를 거쳐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상관이 그 꼼꼼한 노부나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현재는 많은 대중과 창작물들이 미츠히데가 자신이 천하를 노려볼 수 있을 최후의 기회를 노려 모반을 결행했다는 이른바 '야망설'보다는 노부나가의 성격과 평소 소행, 미츠히데 본인에 대한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결행했다는 '원한설'에 더 가까운 결론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미츠히데의 묘사 역시 프로이스가 묘사한 것과 같은 간웅, 배신자라기보다는 성실한 인물이지만 노부나가와 성격차이가 매우 심해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식으로 흘렀다.
카메야마성 축성 당시 히토바시라를 하는 대신 인명을 귀히 여겨 돌로 만든 불상을 묻었다는 일화가 있다.
최근에 발견된 사료를 보면 전쟁중 부상을 당한 가신을 걱정하면서 안부를 묻거나 하급 병사들에게도 전사 후 공양을 베풀어주는 등 꽤 잘해줬다는 듯. #
7. 기타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이 음주 단속으로 붙잡혔을 때, 그 경관의 성씨가 '아케치'라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어이없어 했다. 적발된 곳이 혼노지 근처라 카더라가 돌았다. 경관도 이 사람의 후손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저 소문 자체가 좀 뜬소문에 가까워서 정확한 출처가 없다.
TV 도쿄 창업주[30] 인 츠노다 토모시게가 그의 후손이라는 얘기가 있다.[31]
아케치 미츠히데의 성(城)이 오늘날 교토부 가메오카시(亀岡市)에 남아 있는데, 1919년 신흥종교 오모토의 성사(聖師)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郞)가 교단의 이름으로 구입한 뒤 천은향(天恩鄕)이란 이름을 붙이고 오모토의 성지로 삼았다. 오니사부로는 가메오카 출신인데 어릴 때부터 아케치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을 구입한 뒤 그 안에 불상을 세우는 등 작업을 했다.
오늘날에도 아케치의 성은 오모토 교단 소유로 남았지만, 일본 정부는 그곳이 역사적 유적지란 이유로 더 이상 종교시설을 설치하지 못하게 막았다.
8. 기타 창작물
아케치 미츠히데/기타 창작물 참조.
[1] 아케치 미츠히데는 가몬(문양)으로 도라지꽃을 사용하였다. 키쿄몬은 토키 가문에서도 사용했다.[2] 방편은 십바라밀의 하나로 불교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쓰는 묘한 수단과 방법을 뜻함.[3] 불교세력, 무사 등 지배층의 거짓말은 온갖 미사여구로 정당화되고, 이에 휘둘리는 일반 백성이 불쌍할 따름이라는 뜻이다.[4] 이길진 번역 작품에서 히유가노카미라고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나름 역사소설 번역가로 유명한데 어째서인지 ゆ와ゅ를 구분하지 못한 것 같다.[5] 아래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에도시대에 관직명으로 피하는 대표적인 이름 중 하나가 되었다.[6] 귀무자의 주인공이기도 함[7] 호소카와는 후일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미츠히데를 배신하기도 하는 등 노련한 정치꾼이었고, 요시아키는 영 무능한데다 인간성도 음험한 편이라 뒤로는 동맹자인 노부나가를 경계하고, 통수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8] 다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요시아키 쇼군이 무능한 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형 요시테루처럼 막부 재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시대의 흐름이 그의 편이 아니었을 뿐, 쇼군 본인은 꽤나 능력있었다고 한다.[9] 대머리에 관해선 이설이 존재한다. 미츠히데(光秀)에서 빛 광의 하단부와 빼어날 수의 상단부를 결합하면 대머리 독(禿)이 되므로, 노부나가 나름의 언어유희이거나 애칭이었을 뿐 비하적 의도는 없었다고도 한다. 본래 노부나가는 자기 자식들 아명도 괴상하게 짓는 등 작명 센스가 괴랄했기 때문에 의외로 그랬을 수도 있다. 금귤이 그냥 먹으면 맛없으니까 겉만 번지르르한 꼰대라는 조롱도 있다고 한다. 라고 하지만 금귤머리 이야기는 후세의 창작이다. 자세한건 금귤 참고.[10] 해당 구절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노부나가가 밀실에서 아케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부나가가 분노에 휩싸여 벌떡 일어나 아케치의 정강이를 한두 차례 발로 찼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 까닭은 노부나가는 원래 잘 흥분하고 자기 명령에 반하는 의견을 말하는 것을 못 견디는데, 아케치가 노부나가가 좋아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말대답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야기는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어서 나중에 백성들에게 소문으로 남지도 않았다. 이 일이 벌어진 것은 아케치가 어떤 구실을 만들어 내려고 하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 아마도 이쪽이 보다 확실하다고 생각되는데 - 아케치에게 과도한 욕심과 야망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천하의 주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박수철 편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에서 발췌. 해당 서적은 프로이스 일본사의 편역본이다.[11] 현대 일본에서도 "내 술을 못 마시겠냐!"라는 대사는 술주정부릴 때 하는 소리로 통한다. 즉 유력한 부하 가신에게 다이묘가 칼을 빼들고 주폭행위를 저질렀다는 얘기인데, 하필이면 그 부하가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중세 일본의 사무라이였고, 지위도 높았는데다, 매우 소심했다. 다만, 정작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노부나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적어놓아서 노부나가가 술 강요를 했다는 것은 후대 소설에서 각색된 것이다.[12] 그렇다고는 해도 그 중놈들하고 정치적, 종교적으로 결탁한 다이묘들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다케다 신겐. 반면 오다나 도쿠가와같은 곳은 이런 불교 세력때문에 피를 많이 본 편이다.[13] 요리키는 단순히 출장 나가는 것에 불과하고, 노부나가의 아들도 요리키로 파견근무를 간 적이 있었지만 그게 현장 지휘관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4] 그래도 대사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서인지 오늘날의 창작물에서도 많이 오마쥬되는 대사다. 서브 컬처물에서 '적은 ~에 있다!'는 표현이 나오면서 원문 표현이 敵は~にあり!라고 써 있다면 100% 이 대사의 오마쥬.[15]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대망)에서는 직접적으로 단정내리지는 않지만 히데요시 집권 후 그의 아내 네네의 회상에서 츄고쿠로 출진하기 직전 히데요시의 묘한 언동을 언급하고 있다. '''"미츠히데를 화나게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라고. 히데요시가 미츠히데와 노부나가의 갈등을 악화시킨 게 아닌가고 작중에서도 의심받는 대목.[16] 이것이 역사에 남는 히데요시의 주고쿠 오가에시(大返し, 대회군)이라고 하는 사건이다.[17] 이 때문에 이에야스나 카츠이에나 히데요시나 노부나가의 자식들을 옹립하여 명분을 세우는 방식을 선택해야만 했다.[18] 무사 정도 되면 값비싼 소지품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높으니…서양에서도 전쟁 끝나면 평민들이 죽은 기사의 시체에서 갑옷 벗겨가는 경우가 있었다.[19] 낙오무사란 단어의 유래는 겐페이 전쟁 직후에 생긴 헤이케의 낙인(平家の落人)에서 비롯되었다(그래서 코에이의 게임 겐페이합전에서도 낙오무사 사냥 커맨드가 있다). 무로마치 시대 때에도 존재했었는데, 이 때의 낙오무사 사냥의 대상은 전국시대보다 더 커서 몰락하여 뒤를 봐주는 세력이 없어진 공가나 무가들도 거점이 있던 지역의 거주민들에게 약탈을 당하거나, 유형을 받고 유형지로 가던 죄인을 습격하기도 했을 정도.[20] 다이묘나 사령관 같은 거물급이 당첨되면 아예 몇 년 치 세금을 '''마을째'''로 까기까지 했다고.[21]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와 거의 비슷한 뜻이다.[22] 이는 적에게 자신의 것이 넘어가지 않도록 (그게 사람이 됐던 성채가 됐던) 철저히 파괴하던 당시의 관습에선 매우 깨끗하고 고결한 행위였다.[23]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는 죽는 순간까지 소심하게 노부나가 때문에 고뇌했다는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미츠히데를 서술하는 작가의 시점은 일관되게 '''미츠히데 불쌍''인데, 어째 미츠히데 사후에는 작중에서 미츠히데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소인배로 격하되었다.[24] 도도 다카토라는 "'''일곱 번 주군을 바꾸지 않은 자는 사무라이도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5] 기원전 3-4세기 중국의 전국시대에서도 한 인물이 한 번에 여러 나라에 몸 담고 일했던 사례는 종종 있었다. 특히 재상급 인사는 '객경(客卿)'이라고 해서 타국의 인물에게 정치나 군사자문 역을 맡기기도 했다. 소진이나 전단이 대표적인 예.[26] 박수철 편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27] 그런데 곰보자국이 난 아내를 맞은 이야기는 킷카와 모토하루의 일화로 전해지기도 하며 다른 전국무장들도 유사한 일화가 전한다.(제갈량이 외모가 부족하지만 총명한 황씨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처럼, 중세 동양에선 박색한 아내를 얻는 것이 '여색을 멀리하는 군자의 모습'으로 통했다.)[28] 참여자들이 모여서 한 사람이 첫 구절인 발구를 읇으면 거기에 맞추어서 차례대로 바톤터치를 해 가며 시를 짓는 시짓기.[29] 에도 시대에 무사의 관직명으로 기피되는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미츠히데의 관직명인 휴가노카미와 이시다 미츠나리의 관직명인 지부쇼유 등이 그렇다. 반란자나 모반자의 관직명이라 자연스레 재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30] 정확히는 전신인 도쿄12채널[31] 츠노다 토모시게는 태평양 전쟁 시절 일본군 육군소좌를 지낸 사람인데 도조 히데키와 내각을 증오해 쿠데타로 박살내려 한 용자다. 무산됐지만... 그러나 죽진 않고 헌병대장인 히라바야시 모리토가 그와 형제 같은 친한 관계여서 면직 처분 정도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