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리온
1. 개요
카이사리온(Caesarion).(기원전 47 - 기원전 30년, 재위 기간: 기원전 44년 - 기원전 30년) 고대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어머니와 함께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
정식 칭호는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 본명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이며, 카이사리온은 애칭으로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도망친 정적 폼페이우스를 쫓아서 이집트를 침공하였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로마군의 힘을 빌려 이집트의 지배권을 얻기 위하여 카이사르의 애인이 되었다. 카이사리온은 이때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클레오파트라의 장남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내가 아닌 애인이었고, 카이사리온 역시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닌 사생아였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에게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공공연하게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주장하였고, 카이사르 역시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적자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클레오파트라의 행동에 대해서 특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당대에 '카이사르의 사생아'는 그리 드문 타이틀은 아니었다. 사실 카이사르는 정식 결혼관계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지만 여성관계가 난잡했던 만큼 사생아가 있다는 소문은 많이 돌았고, 그 가운데는 카이사르의 암살범 가운데 한 명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도 있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출처 불명이지만 갈리아 부족들 사이에서도 '카이사르의 사생아'를 자칭하는 사람이 후대에 적지 않게 나타났다고 언급하고 있다.[1]
2. 생애
기원전 44년에 어머니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의 공동왕이 되었다. 하지만 겨우 3세의 소년이었기 때문에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못했고, 이집트의 실권은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및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가 쥐고 있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근거로 하여,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를 공격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주장대로라면 카이사리온은 정당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2] 양 진영 간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이끌던 군대가 옥타비아누스군에 패배, 이집트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완전히 점령되자 카이사리온 역시 체포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자결하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살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이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친자'이며,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정통성에 위협이 되는 카이사리온을 살려둬서 화근을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
결국,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한 뒤,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지시로 살해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홍해의 항구 베레니케로 보내서 해외로 도피시키려 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리온을 알렉산드리아로 불러와서 살해하도록 지시했다. 일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가 보낸 부하가 카이사리온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것을 숨기고, 어머니가 부른다고 거짓말을 했고 속아넘어간 카이사리온은 순순히 알렉산드리아로 왔다가 끔살. 혹은 에티오피아에서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다.참조
카이사리온의 죽음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단절되고, 이집트 왕국은 옥타비아누스가 꿀꺽하여 이후로는 역대 황제들이 대대로 물려받는 황제 직할지로서 로마의 충실한 밀셔틀이 되었다.
3. 평가
비록 카이사리온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됐고 어린 나이이기는 했으나, 카이사르는 원하고자 했다면 충분히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인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는 기간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를 카이사르가 처음부터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없었던 탓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에는 충분히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 만일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지위를 이어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클레오파트라가 어린 아들 카이사리온을 휘어잡고 막후에서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로마는 명목상으로는 '로마 시민'들이 주권을 가진 공화정이었다.
이 당시 세계를 정복했다는 자존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이 단지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집트의 여왕이 로마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결코 좋게 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카이사리온이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인 이상, 아무리 카이사르의 친자라고 해도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될 수는 없었다. 카이사리온을 통하여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로마 시민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3]
실제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대상으로 하여 클레오파트라의 치마 폭에 놀아나서 로마의 영토를 팔아먹는다는 프로파간다를 퍼트렸고, 옥타비아누스가 퍼트린 프로파간다는 로마 시민들을 공분에 휩싸이게 하였다.[4] 반면에 안토니우스 측에서 퍼트린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친자이므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이 있다"는 프로파간다는 거의 먹혀들지 않았다. 카이사르 자신이 유언장으로 친자 카이사리온 대신에 양자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니, 카이사리온을 세우는 것이 카이사르 본인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들이 안토니우스에게 반발하는 여론이 강했던 것을 보면, 클레오파트라가 혼인이나 혈연을 통하여 로마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때로부터 상당히 오랜 세월이 흘러 공화정이 형식화되고 제정이 거의 완전히 정착된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에도 티투스 황제는 유대 왕국의 공주 베레니케를 사랑하였으나, '제2의 클레오파트라'를 우려한 로마 시민들의 반발 여론 때문에 티투스는 결혼을 하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정치적 센스가 출중하고 두뇌가 명석한[5]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러한 로마 시민들의 생각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카이사르가 특별히 카이사리온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배려를 해줄 이유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카이사리온에게 아무것도 안 해주는 것이 가장 큰 배려일 것이다.''' 카이사리온은 이미 클레오파트라의 배에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금수저를 타고난 몸이다. 카이사르 덕분에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지배권은 반석 위에 올라가 있었고[6] 카이사리온은 별일만 없다면 정당하게 이집트 왕위를 이어받아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왕으로서 통치하게 될 것이다.[7] 게다가 그는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로마인과의 관련성도 충분히 있으므로 이를 내세워 크게 이상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로마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이집트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말 그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최소한 이집트의 파라오로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카이사르가 무리하게 뻔히 예상되는 시민들의 반발을 무릅쓰면서 로마에서 자신이 차지하던 지위를 물려줄 까닭이 전혀 없다. 카이사르가 카이사리온에게 자신의 혈육으로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시시때때로 벌어지며 수도 없이 목숨을 위협받고 힘겹게 버텨내야 하는 로마 정계에서의 삶보다는 부유하고 화려한 동방 이집트 왕으로서 절대군주이자 신적인 권위를 누리면서 편안한 인생을 보내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8]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이용하여 로마를 뒤흔들려 하였고[9] 결국 카이사리온은 정치적 상징물로서 이용만 당하다가 어린 나이에 최후를 맞고 말았다.
4. 대중문화
드라마 ROME에서는 사실 카이사르의 아들이 아니라 티투스 풀로의 자식으로 나온다. 카이사르와 만나기 전 클레오파트라가 풀로와 원나잇 스탠드를 해서 낳은 자식인데, 아무래도 카이사르가 나이가 많았기에 그에게서 정상적으로 아들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보험을 들어놓은 것. 참고로 실존인물은 사망 당시 17세였지만 본작에선 11세였던 아역배우가 역할을 맡아 나이가 다소 어려졌다.
시즌 1에서 갓난아기로 나온 이후 한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시즌 2 막판에 성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역할은 세상물정 모르는 재수없는 발암덩어리 도련님 포지션(...). 상황이 위급함에도 무조건 어머니가 다 해결해 주실거라 믿다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현실부정을 하는 모습은 압권. 자신을 찾는 로마 병사들이 검문을 할 때 지휘관이 이집트어로 자신을 떠보자 곧바로 낚여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보레누스가 칼맞아 초주검이 되는데 일조했다. 결말에서는 제반사정을 어느정도 파악한 옥타비아누스의 묵인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풀로와 도피하게 된다.[10]
PS2용 리메이크판인 아르고스의 전사의 주인공인 젠이 바로 기억을 읽고 아르고스의 검투사가 된 카이사리온이다. 기억을 잃었기에 자신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후 싸워나가면서 자신이 카이사리온이라는 기억을 되찾고 적으로 마주했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와도 다시 재회하게 된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등장. 역사대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에 아무네트에게 아들을 구해달라 요청하고 아무네트가 이를 받아들여 아무네트를 따라 로마로 가서 감추어진 존재로 자라게 된다.
[1] 카이사르 사후 '''약 115년 뒤''', 네 황제의 해에 라인 강 국경의 공백을 틈타서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반란을 일으킬 때에도 반란군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카이사르의 사생아의 후손'''을 자처했을 정도이다.[2] 애시당초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분명히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반면 카이사리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것이었다.[3] 그리고 정식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이었다면 모를까 사생아에게 그렇게까지 해줄 의리도 없었고 이미 카이사리온(과 그 어미인 클레오파트라)에게 해줄 건 이미 다 해 준 상황이었다.[4] 옥타비아누스에게 더욱 유리했던 점은 이 프로파간다가 결코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다는 것이다.[5] 카이사르가 영웅이었는지 독재자였는지는 역사가들마다 다르게 보지만, 어쨌든 그가 탁월한 정치력을 가졌다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6] 이미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정적들을 죄다 숙청해놨다.[7] 당시 로마에서 수입하던 밀은 전부 이집트에 있는 나일강 하류의 삼각지대에서 나왔다.[8] 실제로 카이사르 본인도 로마 정계에서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적이 있었다. 술라의 감시를 받았던 적도 있고 카틸리나 사건에 연루될 뻔도 했다. 갈리아 원정이라는 대업적을 세웠는데도 원로원 최종권고를 받기도 했으며 결국은 암살당하기까지 했다.[9] 당시 이집트가 거의 망조가 다 들었으므로 여왕으로서 이집트가 이대로 홀라당 망해서 로마의 일부가 되느니 로마를 뒤흔들어 그 상황에 기회를 엿보는게 더 낫다고 봤을 수도 있다. 실패하고 모자가 패가망신하는 것으로 끝났만.[10] 옥타비아누스가 눈치를 챘는지 나오진 않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설정상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귀신같이 꿰뚫어보는 화술의 달인이다. 풀로가 거짓말 하는걸 모를 리 없다. 풀로가 오랜 친구이자 생명의 은인이니 묵인하고 넘어가 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