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벳푸 마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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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키타벳푸 마나부 (北別府 学)
'''생년월일'''
1957년 7월 12일
'''국적'''
일본
'''출신지'''
가고시마 현 소오시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75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6~1994)
'''지도자 경력'''
히로시마 도요 카프 투수 코치 (2001~2004)
'''링크'''
블로그
'''198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마쿠라 카즈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2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니시모토 다카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엔도 카즈히코
(다이요 훼일즈)
'''1986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고마츠 다츠오
(주니치 드래곤즈)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1. 소개
2. 선수시절
3. 은퇴 후


1. 소개


''''20세기 일본 프로야구 최후의 200승 투수''''

일본프로야구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활약한 투수. 야구 지도자와 야구 해설가·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현역 선수 시절에 발군의 제구력을 무기로 삼아 '''마운드의 정밀기계'''(マウンドの精密機械)라는 별명을 얻었다.

2. 선수시절


1975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고졸 투수로는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프로 2년차부터 선발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3년차인 1978년 시즌에 첫 시즌 10승을 시작으로 1988년까지 11년 연속 한 시즌 10승 이상을 기록했다.
1982년 시즌에는 자신의 한 시즌 최다승인 20승을 거두면서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했고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1986년에는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사와무라상과 센트럴리그 MVP를 수상했고,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프로 입단 당시 선배들의 구속과 구위에 압도되어 제구력을 가다듬는데 노력하였고, 그 결과 '정밀 기계’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의 뛰어난 제구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핀포인트 제구력을 바탕으로 1980년대 붉은 헬멧 군단과 센트럴리그의 간판 투수로서 맹활약했다.
제구력을 알 수 있는 일화로, 홈플레이트에 3개의 빈 깡통을 두고 3개의 공만으로 모두 넘어뜨렸다고 한다. 그의 공을 받았던 당시 히로시마의 주전 포수 타츠카와 미츠오[1]는 키타벳푸의 투구에 대해 “미트를 움직이지 않고 잡을 수 있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렇게 자신에 제구력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어, 현역 시절에는 심판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많은 투수이기도 했다.[2] 스트라이크/볼 판정에 의구심이 들 때는, 같은 코스에 공을 연속으로 던져 주심을 시험하는 톰 글래빈스러운 투구를 하기도 했다고. 당시 센트럴리그 심판부장이었던 다나카 토시유키 씨는 키타벳푸에 대해 "다른 투수가 선발로 나온 경기에 비해 두 배는 피곤했다"고 말했다.
1992년 7월 16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히로시마 구단 역사상 최초로 200승 고지를 밟았으며, 1994년에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통산 213승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승 18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이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최다승 기록이기도 하다. 선발승 200승은 역대 10위이다. 주니치에게 유독 강해 승수의 1/4 가량인 52승을 거두었다. 현역 시절 단 2개의 보크만을 허용했으며, 첫 등판 경기부터 2,420 1/3 이닝을 던질 동안 보크를 기록하지 않았다.
흑역사(?)로는 통산 380개의 피홈런으로 가네다 마사이치의 379개를 뛰어넘어 센트럴리그 최다 피홈런 신기록[3]을 세웠다는 것인데, 본인이 구위로 압도하는 파워피처가 아니었고, 그라운드 사이즈가 유독 작았던 히로시마 시민 구장을 홈으로 두고 있었던 점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다른 흑역사로는 일본시리즈에 5회 진출하여 선발로 6경기에 등판했음에도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5패만을 기록했다는 것. 세번째 흑역사로는 호코다테에 나와서 플라스틱 공을 목표물에 제대로 못 맞힌 적이 있었다는 것(...). 현역 19년동안 탈삼진 1위를 단 1차례도 기록하지 못했다.
키타벳푸에게도 천적이 있었다. 바로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의 오치아이 히로미츠. 키타벳푸는 주니치 전에 강했지만 유독 오치아이에게만 약했다. "키타벳푸의 공은 기다리면 반드시 온다"고 말한 오치아이는 배트의 중심에 공을 맞히는 정교한 타격기술로 유명했다. 정교함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는 키타벳푸와의 대전은 '투구명인과 타격명인의 대결', '센티미터의 싸움'이었다. 더더욱이 오치아이가 주니치 감독을 맡고 있었던 내내 히로시마는 아예 주니치의 오나홀이었다.
2019년 10월 일본프로야구 최다승(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의 부음 소식을 듣고 그와의 일화를 술회했다. 현역 시절 반팔을 입고 다니다가 가네다에게 투수는 어깨와 팔꿈치를 따뜻하게 해 보호해야 한다는 충고를 듣고 이를 충실히 실행했다고 한다.
19시즌 통산, 515경기 등판, 460 선발, 135 완투, 28 완봉, 3,113 투구이닝, 3,255 피안타, 1,757 탈삼진, 213승 141패, 통산방어율 3.67이다.

3. 은퇴 후


야구 해설자 및 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친정팀의 투수코치도 역임하였다. 2010년부터는 사와무라상의 선정 위원이며, 2012년 1월 13일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후 히로시마의 대저택에 거주하면서 "야채 만들기의 재미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면서 텃밭 가꾸기에 몰두하고 있으며 키타벳푸 농장 프로젝트에 힘쓰고 있다.# 부인은 前 미스 일본이었으며 맞선으로 만났다. 1982 시즌 시작 전 "올해 내가 20승을 하면 결혼하자"고 청혼했고 그 해 20승을 올리며 결혼했다고 한다. 의사인 딸과 두 아들이 있다. 큰아들은 메이지대학 출신으로 노무라 유스케와 동급생이라고 한다. 한편 유튜브 채널을 열어 현역시절 썰을 풀거나 원포인트 레슨 영상을 올리곤 한다.
소속팀 히로시마는 등번호 영구 보관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 제도는 등번호 전임자가 추천하는 선수가 나타날 때까지 그 번호를 임시로 궐번시키는 것이다. 노무라 겐지로(7번), 오가타 고이치(9번), 키타벳푸의 20번은 모두 후배들에게 양보했다. 200승 투수임에도 왜 영구결번이 아닌가에 대해 게시판에서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키타벳푸는 블로그에서 후배 구로다 히로키의 등번호 15번이 영구결번된 것에 대해 "현역 은퇴 후 내 등번호가 영구결번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속마음을 밝혔다.
완투 수가 현저히 감소한 현대 야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
팀 선배 키누가사 사치오의 부음 소식을 접하고 "내가 완투했을 때에는 제일 먼저 악수를 청하셨다""내가 타자들에게 맞고 있으면 늘 말을 걸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키누 선배가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고 회상했다.
히로시마 팀 후배인 마루 요시히로가 2018년 시즌 후 FA권을 행사한다는 발표[4]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선수의 권리인것 맞지만 마루를 키운 것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다!"고 말했다.

[1] 센트럴리그의 명포수로 수비력이 특히 뛰어나 1978~1992년 카프의 안방을 지켰다. 2017년 현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코치로 활동중이다.[2] 야구 중계 해설에서 “최근의 투수는 얌전하네요. 나는 심판과도 싸우고 있었어요”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3] 일본프로야구 기록이자 퍼시픽리그 최다 기록자는 스즈키 케이시(560개)다.[4] 리그 내 라이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관심을 보였고 결국 이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