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사파롱가 해전

 

'''타사파롱가 해전'''
[image]
큰 피해를 본 중순양함 미니애폴리스
'''날짜'''
1942년 11월 30일
'''장소'''
타사파롱가
'''교전국'''
<^|1> [image] 미국
<^|1> [image] 일본 제국
'''지휘관'''
<^|1> [image] 칼튼 라이트

<^|1> [image] 다나카 라이조

'''결과'''
일본군은 전술적 승리를 했으나, 수송 작전이 저지됨.
'''전력'''
중순양함 4척[1]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구축함 8척
'''피해규모'''
중순양함 1척 침몰
중순양함 3척 대파
395명 전사
구축함 1척 침몰
197명 전사
1. 개요
2. 배경
3. 미군의 준비
4. 교전
5. 양측의 피해
6. 그 후
7. 미디어


1. 개요


Battle of Tassafaronga
1942년 11월 30일에 벌인 미국 해군일본 제국 해군 함정 간의 해전으로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역인 과달카날 전투를 구성하는 전투이다. 타사파롱가 해전은 미국측 기록이고 일본측에서는 룽가곶 야전(ルンガ沖夜戰)이라 칭한다. 그 외에 제4차 사보섬 전투라 부르기도 하는데, 실제 미군이 '''사보섬 해전 못지 않게 망신당한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1942년 7월 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하여 일본군이 건설중이던 비행장을 탈취하면서 시작된 과달카날 전투는 초기 일본군이 우세를 지닌 전장이었다. 게다가 초창기 일본 연합함대의 선전으로 미군이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잡지 못하고 빌빌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수뇌부의 삽질 대행진 끝에 자멸하고, 10월에는 과달카날 근해에서 전함 히에이기리시마가 격침당하는 참패 끝에 제해권마저 내준 시기였다. 이 무렵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거 글러먹었다고 판단하고 과달카날에 투입한 병력을 빼자는 제안을 했지만, 대본영은 오히려 병력 증강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본영의 의지처럼 과달카날에서 작전을 수행하려면 기존에 투입한 병력에 식량과 물자 같은 보급품을 공급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제공권을 장악당한 시점부터 수송선을 이용한 양륙은 포기한 상태였고, 구축함을 바탕으로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는 소위 '도쿄 익스프레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해권마저 내준 상황에서 도쿄 익스프레스 역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에는 섬의 그늘이나 후미진 곳에 숨어 미군의 눈을 피하고, 에 미친 듯이 달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한 다음 보급품을 넣은 드럼통을 내려주고 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간단히 느긋하게 양륙할 시간이 없어서 고안해낸 방법인데 이런 식으로라도 보급품이 공급된다는 것은 미군 입장에서도 성가신 일이었다.
이에 어차피 대규모 해전이 벌어질 낌새는 없고, 10척 이내의 구축함이 왔다갔다하면서 깔짝대는 상황이라 미군에서도 중순양함 위주의 수상함 세력을 투입하여 이 수송 시도를 요격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3. 미군의 준비


윌리엄 홀시 제독의 함대 재편으로 그간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했던 토머스 킨케이드 해군소장은 수상함 전대를 지휘하게 됐다. 더불어 수송 저격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야간전술을 고안해냈다. 일단 함대 전방에 대한 감시는 순양함에서 발진시킨 수상기들이 맡게 했고, 만약 적 함대를 발견하면 이를 신호탄으로 알려주도록 했다. 여기에 구축함은 순양함 보다 전방에 배치하여 어뢰 공격을 가하고, 이후 순양함의 주포 사격에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회피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순양함은 구축함의 조기경보망을 이용하여 최소 10 km 이상 원거리에서만 포격을 가하도록 하여 소위 혼란에 빠져서 추태를 부리다가 자멸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또한 쓸데없이 적의 포격을 유발하는 탐조등 사용은 엄금했다. 게다가 팀킬을 당한다고 판단할 경우 즉시 발광 신호를 발산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그동안 벌어졌던 해전 양상을 연구하고 분석한 결과로 난전 속에서 피아가 섞여있다가 서로 팀킬하고, 적을 찾는답시고 탐조등 켰다가 오히려 신나게 얻어터지는 상황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이 작전은 킨케이트 제독이 심혈을 기울여 고안한 것으로 일본군 수송 작전을 저격함으로써 그 효용 가치를 테스트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킨케이트 제독이 애투와 키스카섬 탈환 작전을 위해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그 후임으로 칼튼 라이트 해군소장이 오게 됐다.
문제는 이 부임이 급박하게 이뤄졌다는 점이다. 라이트 제독은 11월 28일날 킨케이트 제독으로부터 지휘권을 이어받았고, 11월 29일에 작전 수행을 위한 출항을 해야 됐다는 점이다. 게다가 라이트 제독은 과달카날 해역에서 처음으로 작전 지휘를 하게 되어 전장 상황도 어두운데다가 익숙하지도 않은 킨케이드 제독의 작전안대로 함대를 지휘할 판이 된 셈이었다.

4. 교전


과달카날 증원 임무를 맡고 있던 다나카 라이조 제독은 구축함 나가나미에 사령기를 달고, 타카나미와 함께 호위 임무를 맡도록 했다. 그 외에 구축함 6척에 보급품을 넣은 드럼통을 각 200개씩 총 1,200개를 싣고 수송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 선단은 11월 30일 쇼틀랜드에서 출항하여 과달카날로 향하기 시작했고, 이를 발견한 호주 출신의 해안감시원 폴 메이슨이 즉각 사령부에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받은 사령부는 이를 라이트 제독에게 전달했다. 한편 일본군 정찰기도 비슷한 시간 라이트 제독의 수상함 전대를 발견해 다나카 제독에게 보고를 올렸다.
오후 9시 40분, 다나카 제독의 선단이 사보섬 서쪽으로 접근하여 과달카날로 남하했고 보급품을 넣은 드럼통 하역작업을 개시했다. 한편 호위 임무를 맡은 타카나미는 감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떨어져 나왔다. 한편 라이트 제독이 지휘하는 제67기동부대는 일본군 함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향해 항진중이었고, 교전 돌입을 위해 미리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함열 선두에 위치한 구축함 플레처는 신형 레이더를 장착하고 있어 미군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타카나미의 견시가 먼저 미군 함대를 발견했다.''' 당시 레이더 기술이 초창기였다는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일본군 견시의 능력은 그야말로 초인에 가깝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 조기발견이 미군의 이점을 날려버리는 한 가지 요소가 됐다. 다나카 제독은 즉시 하역작업 중지와 미군 함대 요격을 지시했다.
한편 플레처의 레이더는 3분 늦게 타카나미를 발견하고, 구축함 전대장 윌리엄 콜 중령은 어뢰 발사 허가를 요청했다. 이는 당초 작전계획에서 상호 거리가 5 km 미만일 경우 즉각 공격이 가능하고, 그 이상일 경우 보고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보고를 받은 라이트 제독이 거리 판단을 잘못하여 '''4분간 주저했다!''' 뒤늦게 라이트 제독이 콜 중령에게 어뢰 발사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 결과 일본군은 미군의 발견이 늦은 3분간 전투기동에 들어간 상태였고, 라이트 제독이 주저하는 동안 어뢰 발사가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하고 말았다.
콜 중령 휘하의 구축함 전대가 어뢰 공격을 실시했지만 죄다 빗나갔고, 순양함열에서 전방에 돌출된 타카나미에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이는 타카나미가 레이더에 또렷하게 잡힌 까닭인데 그 결과 타카나미는 명중탄 70발을 맞고 전투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타카나미가 본의 아니게 탱킹을 하느라 다른 일본 해군 구축함들이 무사했다. 그 결과 수뢰전 경험치 만렙 찍은 다나카 제독과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오며 절묘한 팀워크를 과시하던 일본 해군 구축함들에게 그야말로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해군 구축함 전대는 손쉽게 미 해군 순양함들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는데 주포 발사 때마다 발생하는 섬광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일본 해군 구축함 전대는 산소어뢰 47발을 발사, 어뢰는 정확히 순양함을 향해 파고 들었다. 결국 CA-36 미니애폴리스는 함수와 함미 보일러실을 피탄당했고, CA- 32 뉴올리언스는 전방 탄약고에, CA-24 펜사콜라는 후방 기관실에 각각 어뢰가 명중했고, CA-26 노샘프턴은 후방기관실에 어뢰 2발을 얻어맞았다. CL-48 호놀룰루만이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일본군 함대는 노샘프턴에 공격을 가한 직후 완전히 철수했고, 라이트 제독은 피해를 본 순양함들에 개별적인 조치를 지시했고 잔존 미군 함대는 호놀룰루의 지휘 아래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끝났다.

5. 양측의 피해


미 해군은 중순양함 4척 중 1척이 침몰하고, 3척이 전열 복귀에 반년이 걸릴 정도의 심한 손상을 입었으며 전사자 395명을 냈고 세부적으로는 이렇다.
미니애폴리스는 함수가 너덜거리고, 여러 구획이 침수되고, 기관이 정지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보일러실 하나를 끝까지 지켜내 간신히 항해가 가능한 수준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툴라기항에 들러 대충 조치를 취하고, 에스피리투산토에서 임시함수를 붙인 다음 제대로 수리를 받기 위해 진주만으로 향했다.
뉴올리언스는 탄약고에 명중당하고 함수가 36 m나 날아가버려 침수 상태가 심각하여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었으나, 역시 후방 보일러실과 기관실이 작동하고 있어 간신히 복구하고 툴라기항에 기항할 수 있었다. 미니애폴리스와 함께 임시조치를 마친 뉴올리언스는 호주 시드니에서 임시함수를 부착하고 역시 제대로 수리를 받으려고 미국 본토로 떠났다.
펜사콜라는 다른 배에 비해 침수 상태는 양호했으나 화재가 심각하여 상당히 고전했다. 게다가 탄약고에서 포탄들이 유폭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황천길에 오를 뻔했는데 재빨리 탄약고를 침수시키는 것으로 대응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툴라기항에 도착한 펜사콜라는 화재를 완전히 정리하고 대충 조치를 취한 다음, 에스피리투산토에서 역시 임시조치를 받은 다음 제대로 수리를 받기 위해 진주만으로 향했다.
노샘프턴은 화재로 인해 침수구역으로 접근할 수가 없어 결국 침수방지를 하지 못했고 승조원들이 모두 퇴함한 후에 침몰했다.
일본 해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은 구축함 타카나미가 침몰했고 전사자 197명을 냈다.

6. 그 후


타사파롱가 해전은 미 해군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날카롭게 찔린 패배(Sharp defeat)였다. 무엇보다 미 해군은 순양함을 5척이나 동원한 상황에서 일본 해군은 고작 구축함 8척에 그중에서 6척은 보급품 수송을 이유로 일부 무장을 포기한[2] 상대에게 당했다는 점에서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전투 직후 구축함전대장 콜 중령은 너무 일찍 어뢰를 발사했고 순양함열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 사태에 대한 대책으로 훈련, 훈련, 그리고 더 많은 훈련(training, training, and more training)이란 표현을 보고서에 기재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 해군 어뢰의 위력을 간과한 시각이었다. 이 시점에서 미 해군은 일본 해군 어뢰의 위력을 여전히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후 연구에서는 콜 중령보다는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 하고, 일본 해군 어뢰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은 라이트 제독에게 비난의 화살이 날아간다.
실제 미 해군 순양함들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미니애폴리스 피격 이후, 멈춰선 순양함들과 충돌을 피하려고 하필 일본 해군 함대가 있던 좌측으로 선회한 시점이었다. 결국 단체 회식거리행. 그나마 모두가 좌회전 할 때 혼자 우회전한 호놀룰루만이 한 방도 안맞고 살아남았다.
이 전투를 통해 미 해군은 단순히 체급이 큰 중순양함이 구축함 상대로 우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배웠다. 무엇보다 8인치 함포의 연사속도가 느려 빠른 구축함을 상대로는 효율이 떨어졌고, 이에 일본 구축함은 5인치나 6인치 함포를 장착한 경순양함이 상대하도록 전술을 수정했다. 여기에 순양함의 포격섬광이 일본 해군에 위치를 알려주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즉각 무섬광 포탄으로 교체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일본 해군은 진작 무섬광 포탄을 사용했음을 감안하면 뒤늦은 조치였다.
더불어 본의 아니게 사보섬 해전 이후 많은 비중을 할애한 응급수리능력을 입증했다. 실제 사보섬에서 순양함들이 입은 피해는 타사파롱가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고, 어떤 면에서는 더 박살났다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순양함들 대부분이 가라앉은 사보섬과는 달리 타사파롱가에서는 1척만 상실하고 2척은 함수가 날아가고, 1척은 아예 옆구리에 큰 구멍이 뚫렸음에도 무사히 응급수리를 하여 제대로 된 복구시설까지 갈 수 있게 했주었다.
한편 미 해군이 일본 해군의 목적인 보급품 수송을 저지함으로써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하기에는 피해가 너무나 컸다. 오히려 미 해군은 타사파롱가 해전의 결과로 위축되어 이후 과달카날 근해에서 강력한 수상함대를 이용하여 일본 해군 구축함들의 수송 작전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과달카날 일대에서 일본 해군의 쥐 수송을 저지하는 방법으로 수상함대 대신 PT보트잠수함, PBY 카탈리나 비행정을 동원했다. 그리고 구축함을 이용한 일본 해군의 수송 작전을 어떻게 저지해야 할지에 한동안 미 해군에겐 골칫거리이자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훗날 뉴조지아 전역에서 경순양함과 구축함으로 구성된 기동부대가 블랙켓 해협 해전에서는 약간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일본 해군의 수송 작전을 저지하려고 치른 쿨라만 해전콜롬방가라 해전에서는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항공기와 어뢰정만으로 일본 해군의 수송 작전을 저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해상전에서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구축함이 카운터 파트가 되어야 했다. 이들 구축함이 일본 해군 구축함에 대한 대응 카드가 된 것은 1943년에 들어서서 개별 구축함에까지 신형 SG 레이더가 속속 장비되기 시작한 것과 당시 해군중령이던 알레이 버크 제독이 고안한 새로운 구축함 전술이 벨라만 해전에서 선보이고 나서부터이다.

7. 미디어


2차 세계대전의 마이너(?)한 전투가 그렇듯이 미디어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1980년대 미니시리즈 전쟁과 추억에서 타사파롱가 해전이 나왔다(!) 작중 주인공 빅터 헨리(로버트 미첨)이 바로 중순양함 노샘프턴의 함장으로 나온 것.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야간전투중에 어뢰를 맞았고 산소어뢰인지라 자신이 무엇에 맞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완벽한 기습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생존자들과 퇴함하면서 침몰하는 배를 보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앞부분부터 주인공의 행적을 본 시청자들은 그의 표정에서 묘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일종의 제포대로서 퇴역을 준비하던 주인공이 전쟁 직전 외교적인 임무 달성으로 승진해서 전함 함장으로 임명되지만 배에 타기도 전에 진주만에서 배가 침몰, 이후 겨우 얻어 걸린 자리가 바로 순양함 노샘프턴의 함장직이었는데 망했어요가 됐다는 이야기다.

[1] 펜사콜라, 노스햄프턴, 뉴올리언스, 미니에폴리스 [2] 통상적으로 일본군의 갑형 구축함은 어뢰관에 장전된 4연장 어뢰 2세트와 차탄장전장치의 4연장 2세트까지 산소어뢰 총 16발을 장비하지만, 타사파롱가에서는 수송 임무 때문에 기함인 나가나미와 정찰역인 타카나미를 제외한 6척이 차탄장전장치에 어뢰를 미탑재한 반쪽짜리 무장이었다. 그 탓에 딱 한 번 일제 뇌격 종료 시점에서 기함 나가나미를 제외한 나머지 함선들은 보유한 어뢰 8발을 전부 소진해 추가 공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곧바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