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이 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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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이 앨버트 버크[1] Arleigh Albert Burke[2] 1901.10.19~1996.01.01
소장에서 바로 2계급 진급한 뒤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3연임의 기록[3] 을 세운 미국의 군인. 제2차 세계 대전부터 참전해온 노장이자, 현재의 크고 아름다운 미 해군을 있게 만든 장본인 중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인물이다. 또한, 미국에서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최초로 자신의 이름이 군함 클래스명에 붙은 사람이기도 하다.[4] 또한 관례적으로 해군본부에서 취임식을 갖던 미 해군의 전통을 깨고 항공모함 USS 타이콘데로가(USS Ticonderoga) 함상에서 취임식을 치르...려 했다가 폭풍우로 함정이 피항하는 바람에 미국해군사관학교에서 취임식을 치른 최초의 참모총장이라는 이색적인 기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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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해군사관학교 시절의 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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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50년에 윌리엄 홀시와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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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정부 때에는 노안 때문에 안경을 쓰고 활동했는데 묘하게 진 해크먼을 닮은 듯도...?
위 사진은 앨런 셰퍼드의 미국 최초 우주 탄도비행 당시 백악관에서 TV로 지켜보던 존 F. 케네디 부부와 린든 B. 존슨 부통령 등의 사이에서 끼어있는 모습.
알레이 버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제독의 밑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중령으로 구축함전대장을 맡아 구축함들을 지휘하던 버크에게 당시 가장 커다란 위협은 일본 해군 구축함이었다. 당시 일본 구축함들은 무시무시한 산소어뢰와 뛰어난 능력의 견시를 등에 업고 무서운 야간전투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야간전 능력을 살려 일본 육군의 야간수송 및 보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미 해군은 일본 구축함들에게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참패를 당했고, 중순양함 대신 6인치 함포의 속사성능을 살려 일본 구축함을 제압하기 위해 투입된 경순양함들도 쿨라 만 해전과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일본 구축함대에 완벽한 우세를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미 해군 구축함들은 순양함의 호위에 묶여[5] 적극적으로 작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버크 중령은 일본 해군 구축함들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신형 SG 레이더와 어뢰를 탑재한 구축함을 독립적이고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전술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버크가 고안한 구축함 전술은 우세한 전탐능력을 이용해 적 구축함을 조기에 탐지하여 적 구축함대의 정면과 측면에 구축함들을 은밀하게 전개한 뒤 동시에 어뢰를 발사, 어뢰 도달 타이밍에 맞춰 포격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술을 그대로 써먹은 TG 31.2가 벨라 만 해전에서 아무런 피해 없이 일본 구축함 네 척 중 세 척을 격파해냄으로써 마침내 미 해군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일본 구축함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으며, 전술의 창안자인 버크 또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버크 중령 본인이 지휘하는 23 구축함전대 역시 세인트 조지 곶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세인트 조지 곶 전투 당시 일본 구축함대를 발견하고 사령부가 각 구축함대에 긴급 전문을 보내 현 위치와 속도 그리고 예정된 전투 지역까지의 시간을 보고할것을 명령했다. 문제는 당시 23구축함전대 소속함 스펜서가 기관고장으로 30노트가 한계인 상황이라 "31노트로 전속항행" 하겠다고 보고 했다. 문제는 적 발견의 긴급상황에서 기관 고장에 대한 보고가 사령부에 전해지지 않았던 것. 플레처급은 34노트까지 낼수 있었기 때문에 기관고장을 몰랐던 사령부는 이에 조롱의 의미로 31노트의 버크에게라는 비아냥이 담긴 전문을 보낸다. 홀시는 이에 23구축대를 작전에서 제외시키려고 까지 하였으나 알레이 버크의 요청으로 23구축함전대는 교전에 참가하게 되었고 5척 동수의 구축함대가 맞붙은 전투에서 3척을 침몰시키고 아군은 사망자 부상자 0 이라는 기적적인 전과를 남겼다. 이 보고를 들은 홀시 제독은 크게 기뻐했다. 그리하여 본래는 비아냥의 의미에서 시작했던 "31노트 버크"는 알레이 버크의 상징과도 같은 별명이 되었다.
버크는 이렇듯 일본 해군 구축함에게 골아파하던 미해군 수뇌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덕에 주위의 동기나 상급자들을 제치고 빠르게 진급한다. 특히 마크 미처 제독의 참모장이던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홀시에게 '즈이카쿠 저거 미끼같은데 버리죠.'라고 건의해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해내기도 했다. 이때 미처 제독도 버크 대령의 의견에 동감은 했지만 홀시 제독이 고집 부리기 시작하면 남의 말을 들을 양반이 아니라면서 체념하고 자러 가 버렸다.
미처 제독의 참모장으로 근무할 때 역시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닌데, 사실 미처 제독의 참모장은 원래 다른 사람으로 내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트루먼 헤딩 대령이 그 주인공으로, 미처 제독과는 전쟁 전 항공국에서 함께 근무할 때부터 친분이 있던 항공병과 장교였다. 그러나 항공 출신 사령관에게는 수상함 출신 참모장을, 수상함 출신 사령관에는 항공 출신 참모장을 붙인다는 어니스트 킹 제독의 지침 때문에 헤딩 대령이 별안간 버크 대령으로 교체된 것이다. 자기 사람, 특히 조종사를 끔찍이 아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려 하는 의리파로 유명한 미처 제독은 이 인선에 끝까지 저항했지만 그 성격 괴팍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킹 제독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그 사이에 낀 버크 대령만 몹시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은 것은 그를 대놓고 없는 사람 취급하던 미처 제독이 끝끝내 헤딩 대령을 항공참모로 데려왔을 때였다. 결국 헤딩 대령은 부임하자마자 화가 난 버크 대령과 한바탕 충돌하고 만다. 그러나 버크 대령은 잔뜩 성이 났음에도 항공작전은 너무 중요해서 자신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헤딩 대령의 반박을 인정한 뒤 항공작전에 대한 가르침과 헤딩 대령의 협조를 구하는 솔직함을 발휘했고, 이후로도 항공작전을 열심히 공부하며 두 차례 어벤저 뇌격기 후방석에 타고 항공작전을 참관하기도 하는 등 미처 제독의 신뢰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특히 두 번째 참관에서 어벤저가 대공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할뻔 하는 위기를 겪은 뒤로는 미처 제독도 그를 인정하고 참모장으로 받아들인 덕분에 원활히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종전 이후 전시 임시준장에서 내려와 평시 계급인 대령으로 복귀한 버크는 수많은 미 해군 영관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고, 그게 전부였다면 2차대전사의 한 귀퉁이에 이름을 남기는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버크가 정말로 유명해지는 사건의 발단은 공군이 제공했다. 당시 막 미 육군에서 독립한 공군은 "폭격기가 있으면 항공모함 따윈 필요없다. 게다가 핵이 있으니까 개기는 애들이 있으면 히로시마 꼴로 만들어주면 된다."라면서 육/해군의 감축을 강력히 주장했다.[6][7] 그러자 해군의 소장파 제독들이 규합해서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고 대들었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며 대통령과 국회의 지원을 받는 공군에 밀려 해군의 주요 수뇌부가 작살났지만 어찌어찌 항모는 살릴 수 있었다.
이것이 미 해군 역사에 길이 남은 제독들의 반란(Revolt of the Admirals)이다. 이 사건으로 해군장관을 지낸 제임스 포레스탈 초대 국방장관이 자살[8] 하기도 했고 존 설리번 해군청장과 루이스 덴펠드 해군참모총장 이하 수많은 제독들이 옷을 벗거나 좌천되었다. 포레스탈 국방장관이 만들고 싶었던 항공모함은 당시 설계상 최대 항모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였는데 건조 착수 13일 만에 트루먼 대통령과 루이스 존슨 제2대 국방장관이 취소를 명령해서 철판 하나만 기공해놓은 채로 해체되었고, 나중에 니미츠급 항공모함 CVN-75에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붙일 예정이었지만 '해리 S. 트루먼'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트루먼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2번 죽였다" 라고 했다. 지못미. 한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급' 항공모함이 취소된 이후 새로 건조된 항공모함은 포레스탈 장관을 기리는 뜻에서 당시 경사갑판 등의 기술 등 현용 항모의 기초가 되는 기술을 채용하여 건조하면서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으로 명명되었다.
결국 미 해군은 항공모함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것은 엄연한 항명이었다. 제독의 반란 과정에서 OP-23 연구단을 이끌며 해군의 존립 근거를 정리하고 의회 청문회까지 출석해 공군이 밀던 B-36 폭격기의 취약성을 증언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알레이 버크 대령은 당연히 찍혔고, 격오지로 좌천당하다시피 쫓겨나게 된다. 그런데 그 격오지라는 데가 하필이면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휘하의 극동해군...[9] 이때 이후 일본 구 제국해군 출신과 굉장히 친해졌고, 이후 해상자위대 창설에 적극 협력했다. 어차피 버릴 거 항모도 몇척 주자고 했을 정도. 일본에서나 미국에서나 맥아더와 함께 대표적 친일계 장성으로 꼽힌다. 심지어 1996년 1월 1일 94세로 사망할 당시 유언에 의해 일본의 훈장인 훈 일등 아사히 대수장을 가슴에 달고 영면했을 정도. 버크 제독과 절친했던 백선엽 장군이 2000년 해상자위대의 관함식에 참가해 야마모토 야스마사(山本安正) 전 해상막료장에게 "당신들은 버크 제독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버크 제독은 한국 해군의 현대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6.25 전쟁 중에 설립된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에 다수의 도서를 기증했으며, 해군참모총장 시절 32척의 미군 함정을 한국 해군에 공여했다. 또한 퇴임 이후 한국해군에 대한 함정대여법안이 미상원 군사위에서 부결되자 스스로 로비에 앞장서 대여사업을 관철시켰다. 이러한 그의 한국 해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려 한국 해군은 해군사관학교에 버크 제독의 흉상을 제막한 바 있다.
결국 6.25 전쟁이 발발하자 버크 제독 역시 6.25 전쟁에 참전했는데 이때 밀리고 밀리던 육군을 미국 항모 2척, 영국 항모 1척으로 편성된 77기동부대가 효과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의 선견지명이 증명되었다. 물론 항모전단이 6.25 전쟁 내내 훌륭하게 임무를 소화해냈음은 물론이고, 이로 인해 6.25 전쟁 후 소장이었던 버크 제독은 92명(!)의 선임자[10] 를 제치고 단번에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아무튼 해군참모총장이 된 후에도 상관과의 충돌은 여전해서, 당시 해군의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찾아가서 직접 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해군은 모병제를 채택한다는 방침을 내렸던 대통령이 2, 3일만에 결정을 뒤집어버려서 해군의 인력난은 해소되었지만, 그 대신 다른 상급자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졌다.[11]
게다가 그는 다른 이들이 기밀을 유출한다고 생각해서 금지했던 사관학교의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우방국 장교들의 유학길을 열었다. 그러자 우방국에서는 자국의 우수한 장교들을 앞다투어 파견했고,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장교들은 고국에서 중요한 보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들은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미국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옥의 티라면, 해군을 휘어잡으려던 아이크 행정부가 해군참모총장의 작전권을 박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나 미국의 로켓 개발에 있어 해군이 버로우(...) 타는 계기가 된 뱅가드가 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이 끝끝내 능력을 검증해냈던 육군 레드스톤 팀이나 커티스 르메이가 키운 전략공군사령부는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나 해군의 로켓 개발은 지금까지도 미국에서는 흑역사에 버금가는 기억이다. 그런 점에 기인한 열폭(?) 때문인지 국가항공자문위원회(NACA)가 전군의 로켓 개발 부서를 모두 흡수한 뒤 NASA로의 확대 창설을 추진하자 공군에서 섭섭해하는 와중에도 NASA 창설을 적극 지지했다고. 하지만 뱅가드와는 별개로 바다에서 쓰일 탄도미사일, 즉 SLBM을 중시하고 폴라리스가 개발되기도 전에 탄도탄 탑재가 가능한 잠수함을 건조할 것을 지시했으며 그를 위해 하이먼 리코버 제독이 부르짖던 핵추진 잠수함 개발 계획에 힘을 실어준 공로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미 해군이 그의 이름을 이지스 구축함 클래스명으로 붙인 것은 그네들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다.
아래는 버크 제독이 태평양 전쟁 당시 제5함대 소속 58 항모기동부대의 참모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화 중 하나이다.
6.25 전쟁에 참전했을 때는 백선엽 장군의 요청을 혼쾌히 받아들여 국군 1군단에게 함포사격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해군 함대가 육군의 포병대 노릇을 해 준 셈인데, 그 덕분에 백 장군은 전쟁 막바지에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에게 '''"본관의 포병 사령관입니다"'''하고 소개할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14]오키나와 근해에서 작전중이던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전함 야마토가 출항한 사실을 보고받았다. 이에 58 기동부대 사령관 마크 미처 중장은 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대장에게 "특별한 명령이 없으면 공격을 개시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하도록했다.
은 훨씬 더 직설적으로 "그쪽에서 할거요? 우리가 할까요?" 라고 전문을 날렸다.그리고 그 전문을 받은 스프루언스 대장은 "자네가 처리하게"라는 전문과 함께 공격명령을 내렸다.
단, 버크 제독 자신은 이런 백 장군의 요청을 탐탁치 않아 했다는데, 백 장군이 나중에 알아보니 당시 미 해군 수병들은 "저기 캐딜락 날아간다!"(...)면서 함포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그 비싼 포탄을 수시로 날려달래니 버크 제독이 영 마뜩찮아 하던 것도 당연한 일. 그래도 포격 지원을 꼬박꼬박 해줬으며, 선술했듯 백 장군과는 개인적으로 친한 관계를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해군참모총장 말년 시절에 한 항공 대위를 손수 갈궜던 적이 있다. 테스트 파일럿이었던 당사자 Y모 대위의 회고록에 따르면, 자기가 '''씐나게 F-4 비행하면서 간지폭풍을 일으켰는데''' 해군 F-4 프로그램 매니저도 거치지 않고 본인한테 직접 전보를 보내와서[15] 축하인 줄 알았더니 '''"네가 F-4로 소닉붐 작렬해서 동네 창문 다 박살냈는데 어쩔 거냐?"''' 하는 내용이었다.(...)[16]
[1] 실제 발음은 알리 버크에 가깝다.[2] 스웨덴계 혈통이라서 스웨덴 구스타프 6세 국왕의 장례식에 미국 특사로서 파견되기도 했다.[3] 그나마도 존 F. 케네디가 4연임 해달라고 하는 거를 은퇴한다고 고집해서 일찍(?) 퇴역한 것이다! 6년간 재임한 이 기록은 역대 해군참모총장 중 최장기간 재임기록이며 현재는 3~4년 임기로 정해진 규정상 다시 깨지기 힘든 기록으로 평가받는다.[4] 네임쉽 USS 알레이 버크의 명명식에 참석해서는 '이 배의 이름은 알레이 버크,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배다'''(built to fight)'라는 간지폭풍이 휘몰아치는 말을 남겼고, 'Built to fight'는 그대로 DDG-51 알레이 버크의 캐치프레이즈로 새겨졌다.[5] 야간전에서 뇌격 중심의 일 해군과 달리 미 해군은 포격 중심으로 전술 교리상 구축함은 순양함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6] 공군은 아니지만 당시 해군과 해병대의 감축을 주장했던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의 말이 압권이다. "솔직히 해군이랑 해병대 필요 있냐? 오마 브래들리 장군 말 들어보니 상륙작전은 이제 구닥다리가 됐다던데? 앞으로 상륙작전이 없을테니 해병대 필요 없잖아? 그리고, 공군이 해군이 하던 일들 대신 하면 되는거 아냐? 해군도 필요 없네?"(There's no reason for having a Navy and Marine Corps. General Bradley tells me that amphibious operations are a thing of the past. We'll never have any more amphibious operations. That does away with the Marine Corps. And the Air Force can do anything the Navy can do nowadays, so that does away with the Navy.) 참고로 이 말이 나온지 아홉 달 만에 인천 상륙작전이 펼쳐졌고 성공했다.[7] 지금에 보면은 정말 멍청한 말이지만, 핵의 위력에 압도당한 전통적인 군종(육군, 해군, 해병대)들이 가진 무력감과 박탈감, 그리고 세계 최초로 핵투발에 성공한 공군의 자부심이 결합된 일이였다.[8] 트루먼 대통령이 공군 키운다고 해군을 줄여버리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토머스 듀이 후보와 모종의 결탁을 했던게 선거 직전 드러났고 사퇴 압력을 받다가 이듬해 3월 말 잘렸으며, 잘린 후 오랫동안 갖고 있던 우울증이 스트레스 때문에 악화되었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정신과에 보냈지만 경질 50여 일 만에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투신자살을 선택했다.[9] 당시 극동 해군의 작전지역에는 한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10] 버크제독보다 먼저 소장계급으로 진급한 선임 2성제독들과 3,4성제독들[11] 당시만 해도 미군 역시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군만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육군과 공군은 물론 해군 장관까지 해군이 모병제를 시행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12] Rear Admiral (Lower Half)가 아닌 코모도어(Commodore) 계급으로서, 임시로 받은 계급이었기 때문에 2차대전 이후 버크는 다시 대령으로 복귀한다. 어쨌든 1949년에 다시 준장 건너뛰고 소장을 다니까 상관은 없지만.[13] 6.25에는 투입되지 않았지만, 당시 기준으로 미 해군의 최신 중순양함이던 디모인급 중순양함은 8인치(=203mm)포를 9문을 장비했고, 이 8인치 포는 분당 최대 ''''"10발"''''을 쏠수 있었다. 명심하자, PzH2000 자주포의 155mm 포의 분당 발사속도가 8발이다.[14] 당시 육군 포병전력이라고 해봤자 155mm는 고사하고 105mm, 90mm가 한국전쟁에 투입된 최대구경 화포였다. 그에 비해 미 해군 함대는 '''아이오와급 전함의 '"406mm'" 주포를 필두로 200mm가 넘어가는 함포들이 즐비했으니'''[13] , 그 화력은 육군 입장에선 대만족이었을 것이다.[15] 사실 내리갈굼을 방지한다는 차원에서는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배려해준 것이라 볼 수도 있다?[16] 동부 체사피크 만 근해에서 초음속 비행하다가 해안가 근처의 동네 창문을 그대로 와장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