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호 야스아키
1. 소개
타이완 출신의 일본프로야구 선수. 주니치 드래곤즈 등에서 강타자로 활약하며 홈런왕, 타점왕을 한 차례 수상하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였다.
2. 데뷔 이전
타이완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만 대회나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활약했고, 대만 국적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를 동경하여 일본으로 가길 희망했으나, 당시 타이완 법상 20세 미만일 경우엔 출국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후 2년간 모교에서 코치를 맡았다.
그 뒤 20세가 되자, 1984년 일본으로 가서 나고야 상과 대학에 입학하여 대학 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찍는 등 맹활약했고, 그 뒤 일본인 선수 자격으로 입단하기 위해[2] 주니치 드래곤즈에 구단 직원으로 입단하여 1년간 근무한 뒤 1988년 드래프트 2위 지명을 받고 정식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선수로써 입단하며 프로에 데뷔했다.
3. 선수 시절
입단 당시 같은 중화민국 출신의 좌타 슬러거 오 사다하루를 목표로 하여 등번호를 55번[3] 으로 정했다. 데뷔 후 첫 2년간은 준레귤러에 가깝게 뛰다가 1991년 25홈런을 치며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했고, 이듬해인 1992년엔 출장 기회가 다시 감소했지만 그해 가을 캠프에서 장훈 임시 코치의 권유로 외다리타법을 익혀 1993년부터 다시 주전을 차지했고 1994년에 38홈런과 107타점으로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했다. 선동렬이 주니치에서 나고야의 태양으로 날리던 무렵, 레오 고메스, 야마사키 타케시와 함께 팀을 대표하는 거포로 이름을 날렸다. 타이호의 외다리타법은 외다리타법 중에서도 꽤 화려했는데, 가뜩이나 덩치도 큰 타자가 다리를 높이 들고 한쪽 다리만으로 몸을 지탱하며 큰 스윙으로 폭발하는 과정은 플라밍고 타법이라 불리기도 했다.
타이호의 플라밍고 타법.
그 후로도 주니치의 강타자로서 활약했지만 1997년에 팀이 홈구장을 넓은 나고야 돔으로 옮기면서 그 영향인지 성적이 다소 하락했고,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지금까지의 공격력 중심의 야구를 버리고 넓은 나고야 돔에 맞게 수비 중심의 기동력 야구를 새로이 목표로 함에 따라, 1998년에 야노 아키히로와 함께 교환 트레이드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였다.[4] 한신에선 여전히 시즌 20홈런 이상을 칠 정도의 장타력은 남아있었지만 다소 타격부진에 시달리며 규정타석은 단 1번도 못 채우는 주니치 시절보다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거기다 구단 측과 매년 연봉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되면서 결국 2000년 시즌 종료 후 한신에서 퇴단했다.
그 뒤 2001년 다시 주니치로 복귀하였지만 주전 자리는 얻지 못한 채 대타 요원에 가깝게 뛰었고, 결국 2002년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으로 전력외 통보를 받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4. 은퇴 후
친정팀의 아시아 담당 스카우터로 일했으며, 첸웨인을 발굴하여 팀에 입단시켰다. 또한 중화요리점 경영[5] 및 야구교실 강연활동에 힘썼다. 그러나 2009년 3월에 백혈병이 발병했으며, 퇴원과 재발을 반복하다 결국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2015년 1월 18일 사망했다. 향년 50세.
5. 기타
- 현역시절 탈모로 고통받은 모양이다. 참고로 천적으로 나온 머리 긴 투수는 삼손.[6]
- 주니치 시절 벤치클리어링 도중 예능프로에도 단골소재로 나올 개그신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구심의 스트라이크존 판정에 빡쳐서 강력히 항의하는 중 당시 주니치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다른 코치들과 함께 불같이 화를 내며 심판에게 돌진하다가 타이호를 밀쳐버리고 심판한테 따지느라 이걸 못봤던 타이호는 호시노에게 세게 밀린 뒤 "어엌!" 하면서 몸이 밀려 심판을 밀치고 같이 고꾸라지는 진기명기(?)를 연출한 바 있다. 타이호나 호시노는 해당 경기 퇴장 이외에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다. 물론 타이호에게 밀린 걸로 착각한 주심은 당연히 타이호에게 번개같이 퇴장 명령을 내렸다...고 흔히 알려져있지만, 타이호는 이미 폭언으로 퇴장처분을 받았고 그 직후에 호시노가 밀쳐버렸다.
- 참고로 위의 심판은 미국과 일본의 심판진 교류 차원에서 일본에 파견된 미국의 마이너리그 심판[7] 마이크 디뮤로(Mike DiMuro)였는데, 디뮤로 심판은 심판 판정에 집단으로 항의하는 일본 야구 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시즌 도중 사표를 제출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8] 시간이 지난 뒤에는 단순 해프닝 정도로 치부되지만 당시 미국 언론에는 심판에 대한 공격도 불사하는 일본의 야구문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꽤 심각하게 보도된 사건이었다. 디뮤로 심판은 이후 2019년까지 메이저리그 심판직을 수행하다 최근 은퇴의사를 밝혔다.
- 동생인 첸타이슌(陳大順)도 프로야구 선수로 뛰었는데, 이쪽도 형처럼 나고야 상과 대학을 졸업 후 1990년 롯데 오리온즈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가 이듬해인 1991년 드래프트 번외로 정식으로 롯데에 입단하면서 일본프로야구에 데뷔했다. 포지션도 1루수(단, 형과 달리 동생은 우투우타로 3루수를 겸임)로 같았으며 이쪽도 188cm, 100kg의 덩치 큰 거포 유망주였다. 하지만 대활약한 형과는 달리 이쪽은 2년간 12시합 출장에 그친채 1992년 시즌 종료 후 롯데를 퇴단하면서 일본 야구계를 떠났고, 그 뒤 대만으로 돌아가 대만프로야구 웨이취안 드래곤스에서 7년간 뛰었으나 1999년 시즌 종료 후 웨이취안 드래곤스가 해산되면서 그대로 은퇴했다. 은퇴 후엔 스포츠 용품점을 경영함과 동시에 야구해설자로 일하는 중. 참고로 이쪽도 형처럼 일본에선 이름을 성씨로 쓰고 일본식 이름을 따로 만들어서 타이쥰 마사히로 라는 등록명을 사용했는데 덕분에 형제끼리 일본에선 성씨가 다른(...) 독특한 일이 벌어지기도.
6. 관련 문서
[1] 본명의 이름을 성씨로 쓰고 일본식 이름을 따로 지어서 등록명으로 쓴 다소 특이한 예라 이름이 아닌 등록명으로 기록한다.[2] 원래 일본프로야구는 외국 국적의 선수라도 일본에서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진학한 경우라면 일본인 선수와 동등하게 인정하여 드래프트 참가 자격을 주지만, 2003년까진 이것 외에도 5년간 일본에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로 있었다.[3] 당시 일본프로야구 1시즌 최다홈런이 55개로 오 사다하루가 기록했다. 후에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60개로 경신하지만.[4] 한신에서는 주전 포수와 준레귤러 외야수를 둘 다 맡고 있던 세키카와 코이치와 주전 유격수를 맡던 쿠지 테루요시가 이적했다. 이중 세키카와는 주니치에서 본격적으로 외야수로 전향한 뒤 리드오프로써 활약했고, 쿠지는 2루수와 유격수 백업 수비요원으로 뛰다가 이종범과 후쿠도메 고스케의 답이 없는 유격수 수비 탓에 결국 둘을 외야로 보내고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였다.[5] 같은 대만 출신이자 팀 선배인 카쿠 겐지(본명은 '''궈위안즈'''이나 일본으로 귀화)도 음식점을 경영한 이력이 있다.[6] 99년 9월 9일 주니치전. 삼손에게 고시엔 구장 백스크린 옆에 있는 발모제 광고판을 직격하는 사요나라 홈런을 때려내어 화제가 되었다.[7] 메이저리그 심판은 아니지만 마이너에서 경험을 쌓아 메이저리그 승격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심판을 보냈다.[8] 아래 링크된 기사에도 볼 수 있지만 단순히 팀뿐만이 아니라 판정에 거센 야유를 보내고 쓰레기를 집어던지는 팬들의 모습에도 당황했다고. 디뮤로가 일본에서 달았던 4번은 이후 일본인 심판들이 붙이지 않으면서 심판들 사이에서 거진 영구결번처럼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