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사키 타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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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현재는 야구해설가/평론가, 때때로 카레이서나 배우로 일하고 있다.
무려 27년이나 현역으로 뛰면서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일본프로야구 사상 3번째[2] 의 양대리그 홈런왕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두 차례의 홈런왕 기록 사이에 무려 11년의 간격(1996, 2007)이 있다는 것도 특이한 점. 신생팀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극적인 재기를 이루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별명은 '''쟈이안, 근육맨, 쟈만, 야마''' 등이 있다.[3]
2. 프로 입단 이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해 초6, 중3때 주장을 맡을 정도로 활약했으며, 아이치공대 메이덴 고등학교[4] 때에도 '''통산 56홈런'''을 때려내는 등 어릴 때부터 강타자의 면모를 보였다. 다만, 이러한 활약에도 한신 고시엔 구장 그라운드를 고등학교 시절 밟아본 적은 1번도 없다(...) 중학생때 스모를 한 적을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인데, 야구를 좋아하는 집안이어서 스모 입문 제안은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1986년, 드래프트 2위 지명으로 호시노 센이치가 막 감독으로 취임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한다.
3. 주니치 드래곤즈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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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후 2년 간은 2군에서 지냈지만, 1989년부터 1군에 올라오면서 조금씩 기회를 잡아갔다. 이후 1992, 1993년 처음으로 100타석 이상 출장하면서 서서히 활약하게 되었고 1994년은 히코노 토시카츠의 복귀 등으로 출장 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지만, 1995년 '''66시합 233타석 59안타 16홈런 39타점 타율 .291''' 로 존재감을 드러내더니, 1996년 호시노 센이치가 2기 감독으로 돌아온 해 본격적으로 포텐이 폭발하면서 '''127시합 502타석 146안타 39홈런 107타점 타율 .322''' 을 기록. 생애 처음으로 홈런왕 타이틀과 베스트나인을 획득하면서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이후 홈구장을 타자친화적인 나고야 구장에서 극도로 투수친화적인 나고야 돔으로 옮기고 알론조 파웰, 타이호 야스아키 등 주니치의 베테랑 강타자들[5][6] 이 정리된 뒤에도 계속 중심타자로 활약하며 1998년 최다승리타점 타이틀을 얻기도 했고, 1999년에는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의 한국인 삼총사와 함께 주니치 드래곤즈의 5번째 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시즌오프, 그를 프로의 길에 들게 하고 전성기를 열어준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물러나고, 2002년 새로 부임한 야마다 히사시 감독과 갈등을 겪으면서 26시합밖에 출장을 못하는 등 제대로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불만을 품은 야마사키는 그 해 시즌오프 때 구단에 스스로 트레이드를 요청. 투수 히라이 마사후미[7] 와의 맞트레이드로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하게 된다.
4.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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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드로 이적한 첫 해인 2003년, 야마사키는 '''110시합 401타석 83안타 22홈런[8] 68타점 .232''' 로 나름 활약하면서 그 해 통산 200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9]
그러나 2년차인 2004년, 주니치 말기와 마찬가지로 새로 부임한 이하라 하루키 감독과 갈등을 겪으면서 62시합밖에 출장하지 못하는 부진을 겪었고, 결국 시즌오프 때 전력외 통보를 받게 되었다.[10] 트레이드 대가로 주니치로 간 히라이는 오릭스 시절의 투수코치였던 야마다 히사시 감독과 재회한 뒤 2003년에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12승 6패 ERA 3.06의 빼어난 성적을 거둬 컴백상을 수상했으며, 이후에도 10년 가까이 주니치 중간계투진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 시대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도 함께하게 된다. 오릭스 입장에서는 완벽하게 실패한 트레이드.
그러나 오릭스-긴테츠와의 합병문제로 인한 프로야구 재편 과정에서 신설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 타오 야스시[11] 감독의 구애를 받고, 그해 12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입단하게 된다.
5.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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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라쿠텐 문서에 서술된 신생구단 창단 과정에서 알 수 있듯, 초창기 라쿠텐은 불공평한 선수 분배 드래프트 방식 때문에 당시 퍼시픽리그 최하위인 킨테츠와 오릭스 두 팀의 선수단 중에서도 기대치가 낮은 선수들과, 인원수 구색 맞추기용으로 다른 팀들로부터 무상으로 양도받은 노장 선수들 위주로 로스터가 구성되어 있어 전력이 굉장히 약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이 곳에서 야마사키의 커리어 2막이 개막하게 된다.
얇은 로스터 속에서 출장기회를 부여받게 된 야마사키는 창단 첫 해인 2005년 '''118경기 439타석 102안타 25홈런 65타점 타율 .266''' 을 기록하며 재기에 성공했고, 급기야 2007년엔 39세의 나이로 '''141시합 594타석 132안타 43홈런 108타점 타율. 261''' 을 기록해 홈런왕, 타점왕, 지명타자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면서 '''역대 3번째 양대리그 홈런왕'''[12] 이 됨과 동시에 개인 커리어 최다 홈런, 최다 타점 기록을 갱신했다.
야마사키는 이후에도 40대의 나이로 계속 두 자릿 수 홈런을 찍으면서 신생 약체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중심타자, 정신적 지주로써 맹활약했다.[13] 특히 만 41세였던 2009년에는 39홈런을 치며 여전히 노익장을 보여줬고, 라쿠텐의 창단 첫 A클래스에 공헌해, 커리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베스트나인(지명타자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엔 '''102경기 402타수 83안타 11홈런 48타점 .229''' 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그 해 취임한 은사 호시노 센이치의 젊은 선수진을 주축으로 하는 팀 방침에 의해[14] 전력외 통보를 받게 된다.
라쿠텐에서 방출된 이후 친정팀 주니치 드래곤즈로의 복귀를 결정. 10년만에 고향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6. 주니치 드래곤즈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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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로 다시 돌아온 야마사키는 2012년 90시합에 출장하는 등의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이 해 홈런은 단 1개 치는 등 노쇠화를 가리기는 힘들었고, 결국 2013년 51시합 13안타 0홈런 7타점 타율 .210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그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된다. 이후 2014년 3월 공식적으로 은퇴식을 치르며 기나긴 현역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통산성적은 '''2249시합 8102타석 1834안타 403홈런 1205타점 14도루 타율 .257''' 이다.
7. 기타
불같은 성질로 유명해서 현역 시절 6차례나 퇴장을 당하는 등의 일을 겪었다. 그것도 '''현역으로 재직한 3구단에서 전부 시합 도중 퇴장당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야마사키와 마찬가지로 노익장으로 유명한 터피 로즈와 같이 가지고 있다. 다만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악동 중 한 명인 발비노 갈베스에게 빈볼을 맞고 덤벼들었다가 래리어트와 주먹연타를 얻어맞는 굴욕을 당한 경험도 있다.(...) 야마사키도 덩치나 완력으로 따지면 일본에서는 어디가도 꿀리는 선수가 아니었기에 호기를 부린 감이 있었지만, 하필 상대가 현피실력이 엄청나기로 유명한 갈베스였기에 그대로 당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치아가 3대 부러졌다고 한다.(...)
은퇴 후 한때 팀메이트였던 가네무라 요시아키[15] 와 게스트로 출연했던 야구 토크쇼에서 본인이 노력파보다는 천재형 타자에 가깝다는 발언을 한 적 있다. 일화로는 2000년 시즌 전 스프링캠프 연습때 야구화를 깜빡하고 두고 와서 스파이크가 없는 연습화를 신고 타격하던 도중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게 적발되었는데, 당시 선수들의 조그마한 실수에도 벌금을 엄격하게 물리기로 유명한 감독이 무서워서 '올 시즌은 스파이크 없이 치는 타법으로 정했습니다(...)' 라고 임기응변으로 어찌저찌 넘어가고 결국 시즌 내내 스파이크 없이 연습화로 경기를 했는데[16] 놀랍게도 타율이 직전 시즌보다 7푼 가까이 오르는 현상이 벌어졌다. 디딤발이 잘 미끄러져서 힘없는 우익수 앞 안타가 많이 나왔다고. 그 대신 강타자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지난 시즌보다 홈런이 10개 줄어드는 댓가를 치르고 다음 시즌부터는 야구화를 신었다고 한다. 또 장비에 민감하지 않은 타입이라, 홈런왕을 기록했던 96년 시즌 전 스프링캠프에서는 이전 시즌까지 쓰던 배트보다 조금 긴 배트[17] 를 썼던 것을 스프링캠프 종료 직전에야 알아차리고 원래대로 바꾸기 귀찮아서(...) 별 생각 없이 시즌 내내 사용했는데, 시즌 후 결과는 홈런왕과 베스트 나인이었다.
상술했듯 라쿠텐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타자로 여겨져서 별다른 기대를 받지 못했는데, 그 흔적으로 라쿠텐 시절의 응원가가 주니치 시절의 2번째 응원가와 완전히 같다. 라쿠텐의 초창기 야수진 전력구성은 오릭스+긴테츠에서 분배 드래프트로 온 선수들이 주축이 되고 거기에 타 구단의 방출선수와 무상으로 양도받은 잉여 전력들이 더해진 형태였는데, 이들 중 주축 선수로 활약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좀 미래가 있다 싶은 선수들은 막 만들어진 라쿠텐 응원단이 응원곡을 작곡했지만 퇴물(...)들은 과거 전성기를 보낸 구단의 응원가를 그대로 연주했다. 야마사키도 이 부류로 여겨졌기에 분명 도호쿠에서 뛰고 있는데도 '나고야의 의지' 같은 가사가 들어간 응원가를 불렀지만 야마사키가 회춘에 성공한 뒤에도 왠지 이 응원가는 바뀌지 않고 계속 불렸다. 그래서인지 현역 끝물에 주니치로 복귀했을 때에는 프로 데뷔 초창기에 불렀던 응원가를 다시 받았다.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한국인 3인방이 주니치에서 뛰던 시절 팀의 중심타자였기에 한국의 야구 팬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이름을 알렸던 선수였지만, 나무위키 항목 작성은 다소 늦은 편이다. 원래 이 항목은 야마자키 타케시의 리다이렉트 항목이었다(...).
3살 위인 야마모토 마사와 절친한 친구 사이. 이 둘은 나고야 지역에서 함께 RC카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 愛工大名電, 과거에는 나고야 전기 고등학교였다. 이 학교 출신 유명 선수로는 '우승 청부사'로 유명한 '''쿠도 키미야스'''와 메이저리거 '''스즈키 이치로'''가 있다.[2] 첫째는 오치아이 히로미츠(롯데->주니치), 두 번째는 터피 로즈(킨테츠->요미우리).[3] 이 중 '쟈만'이란 별명은 원래 야마사키가 나이만 먹고 성깔만 남은 퇴물 타자로 여겨지던 시절, 팀에 '쟈마'(방해)가 된다는 의미로 경멸조로 '쟈마사키' 등으로 불리던 것이 회춘한 듯한 활약을 펼치면서 변형되며 인터넷 상에서 불리게 된 별명이다.[4] 선배로 쿠도 키미야스. 후배로 스즈키 이치로나 아즈마 카츠키 등이 있다.[5] 파웰은 주니치에서 수위타자 3회(1994~96)를 차지한 오른손 강타자, 타이호(대만인으로 타이호 야스아키는 NPB 등록명, 본명은 천타펑)는 홈런왕 1회(1994)를 차지한 외다리타법의 왼손 거포였다. 하지만 나고야 돔 원년인 97년에 둘 모두 성적이 대폭 하락했고 그 해 오프시즌에 파웰은 방출, 타이호는 야노 아키히로와 묶여 한신의 세키카와 코이치 + 쿠지 테루요시와 트레이드되는 식으로 강타자 부재에 시달리던 한신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파웰은 1년차에 방출되었고, 타이호는 2000년까지 한신에서 파트타임 1루수로 뛰다가 2001~2002년 친정팀 주니치로 돌아와 현역생활을 마감했다.[6] 타이호 트레이드로 주니치로 간 세키카와 코이치는 빠른 발을 살리기 위해 포수에서 외야수로 전환된 뒤 주전 중견수로 출장하며 고감도 타격을 보여주었고, 쿠지 테루요시도 안정된 내야수비로 1998년 수비불안을 노출한 이종범을 대신해 유격수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거물 유망주 후쿠도메 코스케가 입단한 뒤엔 내야 유틸리티, 대수비로 뛰며 팀에 쏠쏠히 공헌했다. 한신으로 간 야노 아키히로는 주니치에서는 나카무라 타케시에 밀려 외야와 포수 자리를 오가던 애매한 입지의 선수였지만, 한신에서는 10년간 부동의 주전 포수로 공수에서 맹활약하며 2000년대 한신의 침체기 탈출에 크게 공헌해 한신 팬들에게는 사실상 프랜차이즈 스타 대접을 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두 팀 모두의 리그 우승(1999 주니치, 2003, 05 한신)에 공헌한 윈-윈 트레이드가 되었다.[7] 고졸 3년차인 1995년 마무리 투수로 혜성같이 등장해 '''15승 5패 27세이브 ERA 2.32'''의 빼어난 성적으로 구원왕 + 신인왕을 차지하며 오릭스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던 투수. 하지만 95년의 무리한 기용으로 이후 줄곧 부상에 시달리며 부진한 성적만 거두고 있었다.[8] 그 해 팀 내 일본인 타자 최다 홈런.[9] 그러나 규정타석 만족엔 실패했다.[10] 다만 이하라와는 퇴단 후 화해했다고 한다.[11] 주니치의 대선배이다. 3년 연속 최다안타를 기록한 왼손 교타자로 소년 시절 스즈키 이치로가 동경하던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 정작 다오 야스시는 간사이출신답게 고향팀인 한신으로 트레이드 당할때 기쁜표정을 숨기지 못했을 정도로 한신빠돌이였다.[12] 오치아이 히로미츠, 터피 로즈가 야마사키보다 먼저 달성.[13] KBO리그로 치면 딱 NC 다이노스의 이호준 포지션이다.[14] 사실 호시노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선수들을 상당히 껄끄럽게 생각했나 본지, 또는 아무래도 자신의 과거를 아는 선수들이 섞여 있으면 선수들 사이에서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나 본지 감독 취임 때 그 팀의 기존의 고참급 선수들을 중심으로 방출 내지는 트레이드의 소용돌이가 한번 지나가던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호시노의 취임과 함께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고 일본 복귀를 택한 마쓰이 가즈오와 이와무라 아키노리가 라쿠텐에 합류했고, 야마사키가 나간 뒤 등번호 '7'을 다시 달고 주장직을 맡은 마쓰이가 팀 야수진의 리더격 역할을 맡는다.[15] 재일 한국인 3세 야구선수로 한국명은 김의명이다. 고교 시절 투수로 활약하며 팀을 고시엔 대회정상으로 이끌었다.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에서 중심타자로 활약했다.[16]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 도중 상대 포수 후루타 아츠야가 야마사키가 스파이크를 신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스파이크 없이 어떻게 타격을 하느냐' 라고 걱정한 나머지 시합이 잠시 중단될 뻔 해서 곤란했다고 한다. [17] 이 배트를 두고 전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였던 오치아이 에이지와의 일화가 있다. 오치아이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