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오보춘
1. 개요
중화민국(대만)의 군인이자 정치인. 중국-대만 정치사 격동의 중심에 있었던 산증인이다.
1981년부터 8년 동안 중화민국군 참모총장을 역임했고, 이후 국방부장과 행정원장, 그리고 집권 국민당의 부주석 등을 차례로 지내면서 중화민국 군부와 정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물이다.
2. 생애
그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
2.1. 직업군인
1935년 중국 국민당이 설립한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5] 에 12기생으로 입학했고, 중일전쟁 발발 2년째였던 1939년부터 국민혁명군에 종군하기 시작해 광저우 및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었다. 국공내전 패배로 국민당 정권이 대만으로 이동하자 참모총장 판공실의 수행 장교로 복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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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진먼 포격전 당시 제9사단장 시절의 모습)
1958년 8~10월 진먼 포격전에서는 당시 진먼다오에 배치된 제9사단의 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중국의 대규모 포격으로부터 진먼다오를 방어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당시의 전공을 인정받으면서 장제스의 총통 재임시절 총통부 특위장(1965~1970년. 한국의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 육군 제1군단장(1970~1973년)을 차례로 역임했고,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후임 총통에 오른 후에도 부참모총장(1977~1978년), 육군 총사령관(1978~1981년)을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2.2. 최장기 참모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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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총장 재임시절. 장징궈 당시 총통과 함께)
1981년 12월에는 중화민국군 참모총장[6] 에 임명되어 군인으로서 최정점에 올랐으며, 1989년 12월까지 무려 8년 동안 재임했다. 이는 중화민국군 역대 참모총장들 가운데 단연 최장기 재임 기록이다. 그의 참모총장 재임기는 대만이 1970년대 이후 UN 축출, 미국과의 단교 등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고 있던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방 부문에서의 도전이 가중되던 시절이었다.
이에 하오보춘은 비현실적인 본토수복 전략 대신, '1) 진먼다오 등 도서 지역에서의 견제, 2) 대만해협에서의 해상 및 공중 요격, 3) 대만 연안에서의 상륙 저지, 그리고 4) 대만섬 내륙에서의 저항' 등 4단계의 방어 전략을 채택했다. 아울러 전쟁 초기에는 중국의 대규모 침공으로부터 대만군 전력의 생존성을 최대한 유지,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이후 살아남은 각 군 전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중국의 침공을 결정적으로 격퇴하는 '전략지구, 전술속결'(戰略持久 戰術速決) 원칙을 강조했다. 이들 두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대만군의 기본적인 국방 전략지침으로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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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대만의 징궈 전투기 개발, 초도비행 성공 직후, 장징궈의 묘소에 참배하는 하오보춘)
또한 국산 무기 개발을 담당하는 중산과학연구원(中山科學研究院.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에 해당)의 원장까지 겸임하여 대만 최초의 자국산 전투기인 징궈,[7] 핵무기 비밀 개발 사업을 진두 지휘했다. 이들 가운데 징궈 전투기 개발은 성공했지만, 핵무기 개발은 1988년에 관련 책임자가 미국에 망명하면서 누설되어 수포로 돌아갔다.[8] 하오보춘은 2000년에 출간된 참모총장 시절 회고록에서 당시의 핵개발에 관한 비화를 공개했는데,[9] 곧바로 대만 정부가 핵개발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현재 대만의 최대 규모, 연례 군사훈련인 '한광' 연습(한국의 을지훈련에 해당)도 하오보춘이 참모총장으로 재직했던 1984년에 시작되었다. 본래 대만은 미 해군 7함대를 포함한 미군과의 연합훈련을 실시했는데, 1979년 미국과 단교하면서 그 대안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한광 연습.
2.3. 정계의 실력자에서 몰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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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덩후이 총통과의 모습 )
1988년 장징궈가 총통 임기 중에 사망하였다. 부총통인 리덩후이가 총통 대행이 되었지만 그는 국민당 내에서 권력 기반이 강하지 못했다. 당시 하오보춘은 국민당 원로들의 가장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인물로 국민당 원로들은 리덩후이를 옌자간처럼 장징궈의 잔여임기만 채우게 한 다음 하오보춘을 총통으로 추대하고 싶어 했다.
하오보춘은 1989년에 퇴역해 국방부장이 되었고, 1990년에는 행정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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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하오보춘의 행정원장 임명을 반대하는 대만 야권의 시위 모습)
하오보춘이 행정원장으로 임명될 당시 막 출범했던 민주진보당을 비롯한 대만의 야당, 재야 진영은 하오보춘을 장제스, 장징궈 시대 국민당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군부, 그것도 외성인 출신의 '구(舊)시대 인물'로 규정하며 그의 행정원장 임명을 강력히 반대, 비판했다. 그러나 국민당에서는 아이젠하워의 예를 들어 그를 옹호했고, 아직 국민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입법원에서 그에 대한 임명동의안은 별 탈없이 통과될 수 있었다.
이렇게 그는 외견상 정계에서도 실권자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리덩후이가 하오보춘을 행정원장에 임명한 것은 일시적인 타협책에 불과했다. 하오보춘은 장제스, 장징궈 부자 총통의 가신(家臣)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고, 본성인 출신인 리덩후이에게는 국민당 내의 세력 강화를 위해 언젠가는 몰아내야 할 대상이었다. 리덩후이는 하오보춘을 행정원장에 임명해 국민당 내의 권력 기반이 미약했던 과도기적 상황에서 외성인 중심의 국민당 원로 세력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군부 내에서 강한 지지를 얻었던 하오보춘을 군부에서 멀리 떨어뜨려 군부 내 영향력을 낮추며, 비주류 세력 중에서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던 리환이 하오보춘과 동맹을 맺어 자신을 몰아내려는 시도를 차단했다.
또한 하오보춘은 민주화 촉진을 계기로 활기를 나타내기 시작한 민진당, 재야의 대만 독립 주장에 대해서도 "대만 독립은 불가능하며, 자멸의 길"(台獨是不可能的,台獨不是自保是自滅), "대만의 장래는 대만 혼자만의 뜻으로 결정될 수 없다"(台灣的前途不由台灣人決定)고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는 본성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대만 재야뿐만 아니라, 내심 대만 독립을 지지했던 리덩후이 당시 총통과도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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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행정원장 재직 시절. 리덩후이(왼쪽)와 함께 )
하오보춘은 1990년대 대만에서 민주화 이행이 진전될수록 리덩후이 중심의 국민당 신진 세력, 야권으로부터 동시에 협공당하기 시작했고, 1992년에 입법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패배한 것을 구실로 1993년에 행정원장을 그만두었다. 그 뒤로 국민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역시 1995년에 물러났다. 이후 그의 빈 자리는 롄잔을 비롯한 리덩후이의 파벌 인사들이 대신했다.
궁지에 몰린 하오보춘은 국민당 14차 대표대회가 다가오자 미국에 있는 쑹메이링에게까지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쑹메이링은 이미 자신은 너무 늙었고 리덩후이와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는 일이라고 거절했지만 하오보춘에게 리덩후이를 상대로 끝까지 싸울 것을 주문했다. 이에 하오보춘은 14차 전체회의에서 모든 인맥을 총동원하여 전세를 뒤집어보려했으나 리덩후이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민당을 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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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대만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에서 린양강(林洋港) 전 행정원장의 러닝메이트(즉, 부총통 후보)로 무소속 출마를 했지만, 약 14%만을 득표하며 낙선했다. 선거 패배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으며, 군부와 정계의 원로 역할만을 하였다.
2005년에는 중국 국민당에 복당했다.
2.4.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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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이지만, 일선에 물러난 후에도 중일전쟁, 국공내전, 요직 재임시절을 다룬 다수의 회고록을 출간하여 여전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2014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 대륙을 방문했는데 방문 직전 중국 중앙 텔레비전 기자들이 대만에 와서 그를 인터뷰하던 중 그는 항일 전쟁 시기에 유행했던 노래에 대한 이야기 중 의용군 행진곡을 예로 들고 이것을 부를 줄 안다고 하면서 실제로 불러 보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대만에서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는 행위라고 비판을 받았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인) 장제스, 장징궈 시대에 그걸 부른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는 비판까지 덧붙여졌다. 아들인 당시 타이베이 시장 하오룽빈은 의용군 행진곡은 항전 시기 국민혁명군의 군가이기도 하다고 해명하긴 했지만.
2017년에는 국민당 주석 선거와 관련하여 일부 후보자들이 '대만'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대만 국민당'은 필요 없다는 발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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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모습. 90대임에도 꽤 정정한 모습이었다)
2018년 1월 55년 동안 함께했던 부인을 사별했다. 부인 사별 이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하오보춘 본인도 급격히 연로해졌다. 이 때문에 바깥 활동하기 어려워져 자택과 병원, 주변의 공원 정도에만 얼굴을 비춘다. 가끔씩 대만 방송국에서 하오보춘을 면담하러 찾아가는 경우는 있다.
2019년 8월 그의 100세 생일을 맞아 새로 회고록을 출간했다. 마잉주 전 총통 등의 귀빈들이 축하를 위해 기념식에 참석했지만, 정작 본인은 연로해진 때문인지 참석하지 못했다.
2.5. 사망
2020년 3월 30일에 타이베이 삼군총의원(三軍總醫院)[10] 에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인해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인 하오룽빈 전 국민당 부주석이 선친의 부음을 공식 발표했다.
그의 타계 직후, 대만 정/관계에서 애도를 표했다. 그가 일생을 바쳤던 대만 국방부와 국민당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경쟁 관계인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진먼 포격전 당시 그의 공헌을 기리며 애도하는 글을 올렸다. 생전에 국민당 내부의 라이벌 관계였던 리덩후이 전 총통도 조의를 표하는 등,[11] 모처럼 정파를 초월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의 최후에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타계 열흘만인 4월 10일, 중화민국군 의장대의 주관으로 장례를 치렀다. 장지는 신베이시의 우즈산(五指山)에 위치한 국립 군인묘지로, 대만의 전직 국방부장, 주요 고위장성들 다수가 안장되어 있다.
3.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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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郝總長日記中的經國先生晚年(하오보춘의 일기를 통해서 본 장징궈 전 총통의 만년): 1995년 저작.
- 教戰記(하오보춘의 병법서(임의 해석): 1998년 저작. 하오보춘이 장성 재임 시절 대만의 군사전략, 전력 발전 등에 관하여 공개석상에서 밝혔던 주장, 발표 등을 담고 있다.
- 八年參謀總長日記(하오보춘의 참모총장 8년 일기): 2000년 저작. 대만군 참모총장 재임 8년 동안의 정치, 군사 관련 사건들을 일기 형식으로 회고한 책이다. 위에 소개된 장징궈 총통 시절을 다룬, 1995년작 저서와 시기 및 내용이 상당부분 겹쳐지지만, 보다 많은 분량에 걸쳐 자세히 다루어졌다. 무려 2권이고, 둘 다 수백 페이지의 두꺼운 책이다.1988년에 폭로된 대만의 비밀 핵개발 계획에 대한 언급도 다수 등장하여 출간 당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郝柏村解讀蔣公日記一九四五~一九四九(하오보춘이 읽고 평하는 장제스 총통의 일기) : 2011년 저작.
- 郝柏村重返抗日戰場(하오보춘이 회고하는 중일전쟁) : 2015년 저작.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발간되었다.
4. 기타
이 사람의 자(字)는 이름과 발음과 한자가 비슷한 보춘(伯春)이다. 자를 짓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실제 이름을 다른 식으로 바꿔 적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柏과 유사하게 생기고(부수만 다르다) 음이 같은[12] 伯,[13] 그리고 村과 발음이 비슷한 春을 골라서 자를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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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내에서는 정통 보수의 대표격 인물로 손꼽힌다. 외성인 출신의 국민당원으로서 중화민국의 역사적, 정치적 정통성에 확고한 입장으로 본성인 진영의 대만 분리독립에 강력히 반대한다. 중국 본토와는 '같은 중화민족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통일해야 한다'는 입장이면서도, 중국과의 화해 협력이 유화적으로 변질되는 것 역시 경계한다. 지난 9월 3일 중국이 중일전쟁 70주년 전승절 행사, 열병식을 주최할 때 대만 내 인사들의 참석 반대를 주장했던 것도 같은 맥락.
2012년에는 대만은 마치 중국이 아닌 것처럼 서술한 초중고 교과서를 비판하기도 했다. 마잉주 정권 시절이지만 천수이볜 시절에 뼈대가 잡힌 교육과정에 의해 편찬된 것이라서. '중국은 대만을 포함하지 않았고 우리 나라는 중국 대륙을 포함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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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해군 장교로 복무 중이던 마잉주 전 총통과 만난 적이 있다. 마잉주는 줄곧 하오보춘을 국민당 원로로서 극진히 대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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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시장, 국민당 부주석을 역임한 하오룽빈이 그의 아들이다.
5. 주요경력
[1] 중화민국 국어 발음 기준. 중화인민공화국 보통화 기준으로는 ㄏㄠˇ ㄅㄞˇ ㄘㄨㄣ(Hǎo Bǎicūn, Hao³ Pai³-tsʻun¹).[2] 중화민국 국어 발음 기준. 중화인민공화국 보통화 기준으로는 '하오바이춘'.[3] ㄅㄛˊ ㄔㄨㄣ(Bóchūn, Po²-chʻun¹).[4] 실제 본인이 사용한 표기.[5] 1924년 쑨원의 주도로, 장제스가 초대 교장이 되어 설립한 황푸군관학교가 모체다.[6] 대만군 참모총장은 한국군의 합동참모의장에 해당한다.[7] 징궈 전투기의 개발은 단순한 국산 무기 개발의 차원을 넘어, 같은 시기에 비밀리 추진했던 핵무기의 투발 수단으로서 진행된 것이었다.[8] 당시 미국에 망명하며 대만의 핵개발을 폭로한 장본인 장셴이는 '하오보춘을 위시한 대만 군부가 장징궈 총통의 사후 권력을 장악하고, 대만의 핵무기 제조를 본격화하여 중국과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 때문에 이를 폭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셴이는 1960년대 미국 유학 시절부터 CIA에 포섭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으며, 때문에 하오보춘 등은 그를 매국노로 폄하하고 있다.[9] 대만이 1980년대에 이스라엘, 남아공 등과 핵개발에 관련하여 광범위하게 기술 협력을 추진했으며, 1986년 기준으로 단기간 내에 핵무기 생산에 돌입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했다는 내용이었다.[10] 한국의 국군수도병원과 유사[11] 그로부터 4개월 후인 같은해 7월 30일 리덩후이도 향년 9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12] 柏과 伯은 대만에서 쓰는 (중화민국) 국어 발음으로는 같은 발음이고, 중국 대륙에서 쓰이는 보통화 발음으로는 다르다.[13] 동시에 이 글자는 자에 쓰일 경우 본인이 장남임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