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잉주

 



'''마잉주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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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12-13대 총통
마잉주[1]
馬英九 | Ma Ying-jeou
[2]'''
<colbgcolor=#000095><colcolor=#ffffff> '''출생'''
1950년 7월 13일(74세)
[image] 영국령 홍콩 까우룽
(現 [image] 홍콩 야우짐웡 구 유마디 궝와병원)
'''재임기간'''
제12대 총통
2008년 5월 20일 ~ 2012년 5월 20일
제13대 총통
2012년 5월 20일 ~ 2016년 5월 20일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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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95><colcolor=#ffffff> '''본관'''
호전(湖田) 마씨#
'''배우자'''
주미청
'''학력'''
타이페이 젠궈 고등학교 (졸업)
국립타이완대학 (법학 / B.L.)
뉴욕 대학교 법학대학원 (법학 / M.L.)
하버드 대학교 법학대학원 (법학 / S.J.D.)
'''종교'''
가톨릭(세례명 : 요셉)[27]
'''소속 정당'''


1. 개요
2. 정치 경력
2.1. 2008년 이전
2.2. 2008년 ~ 2012년 제 12대 총통 재임
2.3. 2012년 ~ 2016년 제 13대 총통 재임
2.4. 퇴임 이후
3. 저서
4. 기타
5. 선거 이력
6. 주요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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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중화민국의 정치인. 전임(제12/13대) 총통. 당적은 중국 국민당. 장징궈 사후 기준으로는 유일한 외성인 총통이다. 한족의 한 갈래인 객가인 출신이며, 후난성에 외가 쪽 친척이 아직도 살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한족 기독교인으로 역대 중화민국, 특히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들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본래 국민당은 출범 당시부터 기독교인들이 주축이었고, 대만에서 국민당의 강력한 지지층이었던 외성인들도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 중화민국 건국자인 쑨원이나 국부천대의 1세대 지도자인 장제스 등도 기독교인이었다.[3] 반면 본성인들은 기독교를 기득권 종교라며 외면하고 전통 도교에 대한 신심을 더 강하게 해서 기독교인이 적다. 상대적으로 비한족인 원주민은 기독교 신자가 많다.
1950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특이하게 출생지가 '''홍콩'''이다. 부모님이 모두 국민당원 출신으로 후난성 출신이다. 부모님이 고향을 떠나 타이베이로 옮기는 과정에서 임시로 머물렀던 홍콩에서 태어났던 것[4] 아버지는 2차 대전 직후, 국부천대 전에 근무지가 잠시 대만였던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국적은 당연히 태어났을 때부터 대만이다. 현재 그의 누이들은 모두 대만과 미국 이중국적자다. 자신만 유일하게 미국 국적이 없다. 본인은 미국 영주권이 있었으나 포기했다. 한편 출생지가 영국령 홍콩이라는 점 때문에 선거 당시에는 반대파들의 공세에 시달렸다. 영국 국적이 있는지 확인을 요청받기도 하였고, 잉주라는 이름이 영국(英國) 까우룽(주룽, 九龍)에서 태어나서 지어진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5]
마잉주 총통의 아버지는 마잉주를 중화민국 총통으로 만들겠다며 어렸을 때부터 경전을 읽게하는 등 엄격한 훈육을 하였고 이후 국립대만대학 법학과[6]를 졸업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학부 과정을 마치고 소위중화민국 해군에 입대해 육전대 병참 기지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1년 10개월 복무 후에 소위 계급으로 전역했다고 한다.1974년에 소위 전역 후에 1988년에 예비역 중위로, 1992년에 상위, 1997년에 소교, 2007년에 중교로 진급한다. [7] [8]
[image][사진]
1970년대의 중화민국 해군 군관 복무 시절. 사진 3번에서 마잉주와 악수하는 중화민국 육군 장성은 이후 중화민국 국방부 참모총장, 국방부장, 행정원장 등을 역임한 하오보춘이다. 하오보춘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고.
제대 후 뉴욕대학교 법학대학원 법학 석사, 하버드대학교 법학대학원 법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80년대에 정치에 입문하기 시작해서 총통부 제1부 국장으로 있었고, 중국 국민당 중앙 위원회 부비서로 있었으며 법무부 부장으로도 있었다. 하버드 박사 출신인만큼 영어를 매우 잘해서 장징궈 총통의 통역 비서로도 활동했다.
[image]
198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의 캐서린 그레이엄 회장과 인터뷰하는 장징궈 당시 총통. 가운데 통역하는 이가 마잉주다. 이 자리에서 장징궈는 "조만간 계엄령 해제를 포함하여 헌정 질서 복귀를 단행할 것"이라고 밝혔고, 마잉주는 당시의 심정을 "전율적이었다"고 회고했다.[9] 대만 현대사에서 꽤 의미있는 순간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치 경력을 부각시키기에도 유리한 사진이어서 마잉주가 홍보용으로 자주 활용하기도 했다.

2015년 취임 7주년 연설.
중화민국 총통 중에서 표준중국어 발음과 문법 구조를 제일 유창하게 잘 하는 사람이다. 마잉주는 객가인으로, 후난성 출신 부모에게서 광동어를 쓰는 지역에서 태어났고 대만어를 쓰는 지역에서 자라났다. 즉, 관화권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표준중국어 교육을 체계적으로 잘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제스, 장징궈, 리덩후이, 천수이볜, 차이잉원 모두 중국어(...)를 마잉주만큼 유창하게 하지 못한다.[10]
다만 마잉주 총리는 객가어나 후난 방언은 못 하는 모양이다.[11] 2012년 대선 당시 범람은 '차이잉원은 객가인이라고 하는데 객가어도 못한다.'고 그랬고[12] 범록은 '대만 교육 정책 때문에 배울 기회가 제대로 없었다'고 하면서 '그러는 마잉주는 후난 말도 못한다.'고 맞받아쳤다. 다만 그의 큰누나는 후난 방언을 할 줄 아는 모양이다. 마잉주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큰 누나가 제문을 후난 방언으로 읽었다.[13]
2011년 경선 홍보 영상. 객가어대만어로 되어있다. 노래는 환취가(歡聚歌)라는 노래로 1995년에 나온 대중 가요이며, 마잉주는 타이베이 시장으로 출마하던 1998년부터 이 노래를 사용한 광고를 하나씩 만들고 있다. 참고로 1998년부터 2008년 까지의 원주민 대상 광고는 계속 같았다.(...)


2012년 총통 선거에서 마잉주가 연임에 도전하여 민진당 차이잉원과 대결할 때의 선거 광고로, 역시 중화민국 국기가와 국기를 활용하여 애국심 마케팅을 시전하여 연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마잉주는 재임 당시 중국과의 양안 관련 행사에서 중화민국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경찰을 동원하여 국기를 철거하거나 압수해서 '중국 눈치보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마잉주가 타이베이 시장 재임 시절, 2001년 중국이 참가한 아시아 여자 축구 경기가 있었을 때 경찰을 동원하여 관중들이 들고 있던 국기를 압수[14] 한 적이 있었다. 선거 광고와 국기 몰수 사건을 다룬 뉴스를 합성하여 만든 패러디한 영상

2. 정치 경력



2.1. 2008년 이전


1994년 당선되어 현직이던 천수이볜 총통을 1998년 선거에서 이기고 타이베이 시장이 되었다. 2002년에 재선되어 2006년까지 타이베이 시장직에 있었다. 시장 재직중 자매도시 시장 자격으로 서울을 두 차례 방문해서 고건, 이명박 당시 시장과 회동한 바 있다. 당시 이미 차기 총통 후보 물망에 오르던 거물 정치인이다보니 2005년의 방한 계획은 중국의 입김 때문에 무산되기도 했다. 타이베이 시장 재직 중이던 2005년 중국 국민당 주석 선거에 출마해 왕진핑 입법원장을 누르고 당선됐다. 3불 정책(양안통일, 대만독립, 무력사용 모두를 하지 않겠다)을 내걸고 당선되어 민주진보당 지지층도 상당수 흡수해 급진적 타이완 독립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대륙과 마찰을 빚던 천수이볜 총통을 압박했다.
마잉주 - 셰창팅 텔레비전토론.
2008년 대만 총통 선거에서 전직 가오슝 시장인 민주진보당 셰창팅 후보에게 7,658,724표 대 5,445,239표로 당선되었다. 공교롭게도 셰창팅도 1998년2002년에 가오슝 시장으로 당선되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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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첫 총통 당선 직후, 환호하는 모습

2.2. 2008년 ~ 2012년 제 12대 총통 재임


선거 4개월 전에 대한민국에서 이명박이 당선되자 마잉주는 이명박의 747 공약을 벤치마킹하여 633정책(연 경제 성장률 6%, 1인당 국민 소득 3만 달러, 실업률 3% 이하 달성)을 내세워서 인기를 얻었다. 이에 질세라 셰창팅가오슝시장 시절 환경 오염이 극심하던 아이허(愛河)를 환경친화적인 관광 명소로 만든 것을 주지시키며 선거 운동에 이명박의 청계천을 적극 활용하며 서로 자신이 바로 '''대만의 이명박'''이라며 선거 운동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2008년 촛불시위 등 정부 정책의 반작용과 지지율 폭락이 일어나고 대만에서도 마잉주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하자 갑자기 이명박 정부와의 선긋기에 들어갔으며, 이명박 정부가 747 공약을 포기한 시기와 비슷하게 2008년 9월에 마잉주 정부는 633 정책을 포기했다. 참고자료
총통에 당선되고 나서 중국대륙과의 양안관계를 개선시키고 있다. 중국과의 양안경제협력구조협의(ECFA)를 발효시키고, 중국과의 평화 협정도 검토하는 등 여러가지 양안 개선책을 내놓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와중에서 대만 경제가 중국 경제에 의존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 이런 상황을 해소해 보고자 일본자유무역협정을 시도하고 TPP 가입도 시도하려 하고 있다.
마잉주 1기에는 천수이볜 정부에서 시행[16]된 소삼통(小三通)[17]을 확대하여 '''대삼통(大三通) 시대'''[18]가 열렸다. 양안간에 아예 이민을 가서 살 수 있게 됨에 따라 대만 기업가들이 중국으로 더 많이 뛰어들고 중국 노동자와 중산층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만에 유입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대만 부동산 가격이 이전에도 상당히 오르고 있었지만(연 7 ~ 8% 수준), 갑자기 폭등(연 20% 이상)하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대만의 폭등하는 부동산으로 2010년 대만 경제 성장률이 '''10.6%'''를 찍기도 하고 대만의 정부와 지자체들의 세수가 급증하여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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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화민국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천수이볜과 마잉주는 이런 면에서 대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통치는 못하고 있다. 천수이볜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없고 오로지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반대로 마잉주는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다. 하지만 대만 독립 찬성파와 반대파의 눈치를 보느라 서로 자신의 정체성을 통치 중 대놓고 언급은 못하는 것. 천수이볜은 집권기에 독립을 선언하거나 타이완 섬과 관련 없는 중화민국의 공휴일을 평일로 바꿔놓지도 못했다. 마잉주 역시 지금은 '중국'이 아닌 '대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한창 대만 독립론 때문에 양안간 긴장이 심했던 2006년 국민당 주석이었던 마잉주는 '''"하나의 중국이란 바로 중화민국이다. (대륙 정부는) 중화민국이 필요한가, 아니면 대만 공화국이 필요한가?"'''라는 발언을 하면서, 그나마 하나의 중국 정책을 놓고 국민당과 협력을 강화하려던 중국 정부의 뒤통수를 제대로 쳤다.

2.3. 2012년 ~ 2016년 제 13대 총통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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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결과 파란색이 마잉주 총통의 중국국민당 우세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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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선거에서 재선된 후, 환호하는 모습[19]
이래저래 실정도 있고 해서 2012년 1월 14일에 실시된 총통 선거에서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후보와 친민당 쑹추위 후보가 급속도로 쫓아오면서 재선 여부가 불투명해 진 상황이었으나 선거 막판 양안 관계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상당한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언론의 예측 조사에서는 차이잉원이 접전우세로 이길것이라는 예측이 대다수였지만, 이를 뒤집고 당선된것. 국회의원 의석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입법의원 선거에서도 과반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20]
총통 선거 이후에는 대한민국에 별로 보도되지 않다가,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 사법 재판소에 제소하겠다며 날뛰자 느닷없이 '''그럼 댜오위다오 문제도 같이 국제 사법 재판소로 가져가는게 어때?'''라고 일본에 역습을 날려버린 사실이 보도된 바 있다! 진짜 제소하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럴수도 있다는 식의 발언이었지만.
마잉주 2기는 마잉주 1기 때 시행한 대삼통의 후폭풍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안간 이민이 무제한 허용[21]되어버림으로써 대만의 부동산 가격이 버티기 힘든 수준으로 뛰어버린 것. 중국인들의 급속한 대만 부동산 잠식으로 대만의 부동산 가격(아파트 평당가)은 한국의 그것보다 30% 넘게 비싸져버렸다. 이에 대만 국민 소득 대비 집값이 15배 이상으로 뛰면서(홍콩은 18배 수준)[22] 대만인들 사이에서는 마잉주 총통의 지나친 양안 친화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강해지기 시작한다. 중국과의 관계만 신경 쓰다가 대만 내부의 경제, 그것도 부동산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대만의 부동산 가격을 띄워주는 중국인들로 인해 정부랑 지자체는 여전히 늘어나는 세수에 즐거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이 즐거운 비명 뒤에는 바로 대만인들의 좌절의 비명이 있던 것. 그래서 이 부동산 문제가 이슈가 된 2013년부터 마잉주 총통의 지지율은 수직낙하하기 시작한다.
2014년 들어서 대만 검찰의 국회 도청 파문으로 지지율이 하락했다. 특히 마잉주의 친중(親中) 정책에 반발하는 대학생들이 입법원을 점거하는 해바라기 운동도 벌어졌다. 3월에는 야당인 민진당에서 탄핵을 거론하는 등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5월에 정작 민진당 천어우포(陳歐珀) 입법 위원이 이를 기회랍시고 마잉주 상중(2014년 초반 마잉주의 모친이 세상을 뜸)에 깽판을 치는 바람에(...) 오히려 민진당이 역풍을 맞아버렸다.
2014년 6월 무렵부터는 미국을 비롯해서 엘살바도르 등의 중남미 국가를 순방하면서 외교에 집중하는 중.
한편으로는 시진핑 중국 주석과 서로 정상 회담을 할 의향이 있어보이지만, 실제 이행될 지는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중화 인민 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하여 마잉주와 시진핑이 각각 국민당 주석, 공산당 총서기 자격으로 회담할 것을 제안했지만, 마잉주는 '''중화민국 총통 대 중화 인민 공화국 주석간의 회담'''을 원하고 있기 때문. 앞서 언급했다시피 야당 주석 시절에도 중화민국이 독립된 주권 국가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중국 쪽에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
2014년 11월 지방 선거에서 국민당이 참패한 직후, 국민당 주석에서 물러났다. 후임 주석에는 신베이(新北) 시장인 주리룬이 당선되었다. 이로써 국민당 주석 자격으로라도 시진핑 중국 주석과 양안 정상 회담을 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 2015년 2월에는 대륙 위원회(한국의 통일부에 해당) 전임 부주임 위원이 "2014년에 마잉주 총통과 시진핑이 진먼다오에서 정상 회담을 하기로 거의 합의할 뻔 했다"고 주장했는데, 대만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홍콩에서 센트럴 점령 시위가 발생하자 홍콩 시민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 이 부분에서는 정적 민진당과도 의견을 같이 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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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28 유혈 사태 추모식에 참석하여 커원저(柯文哲) 타이베이 시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커원저는 유명 외과 의사 출신 시민 운동가로 지난해 11월의 전국 지방 선거에서 민진당을 포함한 야권의 단일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롄성원(국민당 명예 주석 롄잔의 아들)을 이기고 당선된 인물이다. 이 자리에서 커원저는 마잉주의 악수 요청을 대놓고 거절했다. 커 시장도 자신의 조부가 2.28 사건 당시 체포당해 국민당군에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3년만에 별세하여 국민당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다는 것으로 전해진다.
2014년 말 지방 선거 패배 이후부터 임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자 지지율이 10% ~ 20%로 난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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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는 레임덕에 시달리면서, 경제 악화로 지지율은 9%까지 떨어져서 이름 끝자(九)를 이용한 "'''9'''총통"이라고 불리는 굴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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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 4월의 해바라기 운동에도 등장한 "9총통" 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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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양안 정상회담의 현장을 담은 동영상.
2015년 11월 7일 싱가포르에서 시진핑 국가 주석과 역사적인 양안 정상 회담을 가졌다. 국공 내전으로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 대만의 중화민국이 서로 분단된 지 66년 만에 "중화민국 총통"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이 한자리에서 회동한 것이어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기사
이 자리에서 마잉주와 시진핑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는 다음 집권이 유력한 민진당차이잉원이 쉽게 대만 독립을 선언하지 못하도록 국공합작으로(...) 마련한 일종의 안전판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중국 측은 대만 측의 여러 요구에도 '''양국''' 지도자 자격으로 만나는 것을 거부해왔으나, 결국에는 대만의 요구를 전격 수용해서 만날 수 있었는데 이로써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다시금 인정받는 대신 대만의 지위를 중국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려주는 양보를 하게 되었다.
다만 마잉주는 국민당 내부에서 논하는 92공식은 하나의 중국이 중화민국이라고 각자 주장하는 거라고 시진핑 앞에서 입도 벙긋하지 못하였고, 중국 사람들 다 내보내고 나서 대만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행한 기자회견에서야 하나의 중국을 각자 주장하자고 했다가 범록연맹 기자들로부터 사기꾼 소리를 들었다. 퇴임 이후에도 마잉주는 나름대로의 업적인 정상회담 얘기가 나오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범록연대 측에서는 중국 - 대만 정상 회담을 부적절하다고 논평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이 대만을 국가로 인정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하며, "대만 총통"이 아니라 "중화민국 총통" 자격으로 참석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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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7일 기준 마잉주 총통 지지율은 19.9%로 나타났다. 레임덕이 심각한 걸로 보이지만 그래도 2014년 말의 9총통 소리 듣던 시절보다는 나아졌다. 링크
2016년 1월 16일 치러진 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승리로 인해 정권이 교체되었다. 어차피 마잉주 총통은 3선이 불가능하기도 하고. 2016년 5월 12일, 마잉주 총통 내각이 총사퇴했다. 기사 총사퇴의 발효일은 차이잉원이 취임하는 5월 20일이다. 정권 인수 인계도 거의 끝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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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총통'으로서의 마지막 퇴근 모습)
임기 마지막날인 5월 19일, 페이스북을 통해 "약 3000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매일 대만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국민들의 생활을 더욱 좋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했다. 내가 총통이라는 직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대만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이 토지(대만), 이 국가에 대해 복무를 하는 마음은 영원히 은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퇴임 소감을 밝혔다. 이보다 앞선 5월 16일에는 언론과의 마지막 회견에서 자신의 8년 재임 기간 동안 거둔 실적들(예 : 중국과의 관계 개선, 무비자 입국 증가를 통한 실질적 외교 활로 확대)을 강조하며 "과거의 어느 총통들도 거두지 못했던 일들"이라고 역설했다. 정권 교체로 떠나면서도 자신에 대한 낮은 지지도, 정책 실패를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못내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2.4. 퇴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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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0일, 후임 총통 차이잉원의 취임식에 전임 총통 자격으로 참석했다.
임기 막판 횡령 의혹이 불거졌다. 타이베이 시정부에서, 타이베이 시장을 역임할 때부터 총통 재임 시까지 여러번 횡령을 한 혐의가 있으며 검찰이 이를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만 언론 보도,한국 외교부 보도자료 하지만 총통에서 퇴임하자마자 출국 금지가 걸려서 곧바로 체포 영장이 발부된 천수이볜과 달리 마잉주는 퇴임한 지 1주일이 되었는데도 출국 금지는커녕 검찰 용의선상에 올랐다는 보도조차도 없다. 커원저 타이베이 시장의 블러핑(뻥카)으로 보는 듯하다.

6월 15일 홍콩 아시아 출판업 협회(SOPA)의 개회식에서 동영상을 통한 대리 기조 연설을 했다. 본래는 직접 참석하여 연설할 계획이었지만, 차이잉원 정부의 총통부에서 <국가 기밀 보호법>에 의거하여 "퇴임 1개월만에 출국은 부적절하다"며 거부된 것. 대만의 현행 <국가 기밀 보호법>은 전임 총통에 대해, 퇴임 후 3년 동안의 출국은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23]이에 마잉주 측은 "리덩후이 전 총통도 퇴임 후 1개월만에 일본에 잘만 다녀왔는데, 지나친 규제"라고 반발했다. 이에 대만 정부는 "현행 규정이 2003년에 정해졌으며, 때문에 리덩후이 전 총통이 퇴임한 2000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영상을 들어보면 영어 문법이나 단어 선택 등이 굉장히 좋은 편임을 알 수 있다. 미국 유학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으니, 그럴만도 하겠지만... 후임 총통인 차이잉원도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서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
퇴임 이후에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현안에 대한 제한적인 입장만 전달하며 언론 노출은 극히 삼가고 있다. 2016년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대만 여러 곳을 자유롭게 여행했다고 한다.
2016년 9월부터 타이베이 둥우대학 석좌교수로 취임하여 # 2017년까지 국제법을 강의했다.
2017년 3월 '신보장 및 감찰법’상의 ‘공무원의 국방 이외의 기밀 누설’ 혐의로 기소되었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최고 3년형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 하지만 5개월 후 1심 판결에서 도청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만 검찰이 항소하여 2018년 5월 16일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이번에는 일부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4개월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12만 대만달러(432만원)의 벌금으로 대체할 수 있는 사실상의 벌금형 선고. 징역형이라면서 법정구속도 시키지 않았으니 벌금형이 맞다.(...) 그러나 마잉주 전 총통은 전부 무죄라며 판결에 불복, 상고의사를 분명히 했다. 기사 중화민국의 사법원은 아주 가끔 중요한 법률심(사형판결+군사법원토지분쟁+행정소송)만을 다루고, 사법원 직속의 최고법원이 한국의 대법원처럼 일반적인 3심 사건을 처리하고 있어 한국에서 입법이 추진되었던 상고법원과 비슷하다.[24]
일부 유죄 판결이 나온 직후인 2018년 5월 19일에도 TVBS 방송에 잘만 출연하고 있다. 중국 국민당 당적은 유지하고 있고. 아예 방송인으로 전업한 모양이다. 대만의 예능방송에 나와서 의외의 예능감을 터뜨리고 있다. 총통 재직 시절 민진당계 방송이라 사이가 안 좋았던 FTV에도 출연하고 있다.
2018년 7월 본인의 이름을 딴 '마잉주 기금회(재단)'을 설립했다. 리덩후이에 이어 대만에서 전직 총통이 민간 재단을 세우는 2번째 사례다.
2018년 8월 대만의 첫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해 '''“일본 정부가 위안부에게 반드시 정식 사과를 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1 #2 #3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진핑과의 양안 정상회담 3주년을 맞아 마잉주재단이 대만대학교에서 개최한 정책세미나에서 92공식 수용을 주장하며 "통일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자칫 중국 방식의 통일을 수용하자는 해석이 가능해서 논란이 커진 상황이다. 특히 본인이 총통 재임 시절에는 독립, 통일을 모두 반대했는데, 이제 와서 중국과의 통일 가능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나타낸 것이라는 점에서도 논란 거리가 된다. # 중국 국민당은 이에 대해 선을 그은 상태이다.
지방선거 기간 동안 주요 후보들의 유세를 열심히 지원했고, 선거 결과 국민당이 22개 단체장 가운데 과반인 15개(직할시급 6개 주요 단체장 중의 3개 포함)에서 당선되는 승리를 거두면서 오랫만에 정치적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국민당 당 주석 도전 가능성까지 거론할 정도.
국민당의 지방선거 승리 한달 후인 2018년 12월, 총통 재임시절 8년을 포함한 회고록을 출간했다. 여전히 92공식을 포함한 중국과의 화해협력 정책을 옹호하면서 대만 독립 반대를 강조했고, 그의 전임인 리덩후이와 천수이볜 그리고 후임인 차이잉원에 대한 평을 썼다. 리덩후이에 대해선 용맹스럽고 임기응변에 능하지만 권력을 사리사욕에 활용한다고 비판했으며, 천수이볜도 재물을 중시한다고 디스하긴 했어도 일을 처리하는 데 유연성이 있고 의외로 지혜롭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남겼다. 가장 평가가 안 좋은 건 차이잉원인데 국정을 인정과 도리에 맞게 차근하게 진행하지 못하는, 같은 당의 천수이볜만도 못하다고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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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제15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를 앞두고 한궈위 가오슝 시장을 지지하여 선거 유세를 지원[25]했으나, 차이잉원의 재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덤으로 자신이 2008년에 세운 총통 선거 최다 득표 기록이 차이잉원에 의해 경신되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다.
총통선거 패배 이후 국민당 내에서 복귀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졸지에 정치인이 아니라 방송인으로서의 입지가 올라가버려서(...) 복귀는 어려울 듯. 예능프로그램에서 배달부로 변장해 시민들을 놀래키기도 했다. 이 이전에도 토끼모자를 쓰거나 일일알바 몰래카메라를 찍기도 했다(...).
2020년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갑자기 닥친 전쟁은 동아시아 정세에 변화를 가져왔을뿐만 아니라 중화민국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며 "한국전쟁으로 중국 공산당은 대만 공격을 할 수 없게 됐다"고 밝혔다.#
2020년 7월 30일 리덩후이 전 총통이 사망하자 애도의 뜻을 표하고, 국가를 위해 노력한 리 전 총통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마잉주는 리덩후이의 총통 재임 시절인 1990년대 초 대륙위원회(한국의 통일부에 해당) 대변인, 부위원장 등으로 재직하며 양안관계 관련 업무에서 활동했다.
8월 10일에 있었던 강연에서 양안 전쟁시 미국이 개입 전에 끝난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를 두고 전직 총통이 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해친다는 비판을 받았다.# 22일에는 차이잉원 총통의 친미 노선이 대만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며 비판하였다.#
71번째 생일을 앞두고 눈 수술을 받아서 요즘에는 주로 공식 석상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고, 선글라스를 벗었을 때의 인상이 이전과 비교해서 많이 달라졌다. 대만 언론들은 마 전 총통이 성형수술을 받고 회춘한 것 같다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전임자 천수이볜에 비해 무난하고 평화로운 퇴임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후임자 차이잉원의 대만 정부가 백신 선정 후보에 안정성과 들쭉날쭉한 물백신으로 악명높은 시노백을 언급하며 "중국산 백신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며 주장했다가 천스중 위생복리부 장관으로부터 기술적 자료가 완벽하지 않아서 후보에 못 넣는다고 단칼에 거절당했다.

3.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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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국 : 대만의 번영을 위한 새로운 책략>(治國:台灣贏的新策略) : 총통 선거를 앞둔 2007년, 러닝메이트로 1기 정부의 부총통을 지내게 되는 샤오완창과의 공저 형식으로 발간한 정책 대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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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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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저우메이칭(周美青. 영어이름 Christine Chow Ma) 여사도 같은 홍콩 태생의 외성인으로 마잉주의 여동생과 중학교 동창이었고, 둘 다 미국 유학생활을 하던 중에 뉴욕에서 결혼했다. 서민적 이미지가 강한 덕분에 남편의 정치 활동에도 제법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슬하에는 두명의 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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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10일 생방송으로 진행된 신해 혁명 100주년 기념식에서 마잉주가 미모의 여성 행사 요원에게 미묘한 눈길을 준 것이 저우메이칭에게 딱 걸렸고, 이후 두 사람의 불편한 모습이 방송에 그대로 노출되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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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원하고 닮았다는 중화권의 의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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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만화 5도쟁패에서는 '''마앵구'''로 모에화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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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레임덕이 심한지 공공기관 공식 캐릭터(이카통 교통카드 샤오파)한테도 까이는 공식 만화가 존재할 정도다.(...)[26]

2014년 3월 마잉주는 기자회견에서 뉴질랜드에서는 녹용이 유명하다고 했는데, 녹용을 사슴 귀에 난 털로 설명해서 구설에 올랐다. 그러면 마잉주 귀에 난 털은 마카롱이냐고 네티즌들이 비아냥거렸다. 이후 퇴임 직전에 한 페이스북 라이브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셀프 디스하였다.

한자와 언어에도 관심이 있어서 양안 간에 사전을 만드는 데에도 관여하고, 2009년 정체자를 알면 간체자를 쓸 수 있다고 인쇄체에서는 되도록 정체자를 쓰자고 했는데, 친중 정권이 될 것을 우려한 범록연맹이나 대만 독립파 측에서 간체자를 쓰자는 말만 단장취의(斷章取義)하고 강력하게 항의한 적이 있다. 사실 마잉주는 타이베이 시장 시절 마이크로소프트를 찾아가서 번체자가 아니라 정체자라고 적어달라고 했던 적도 있다.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8
중화민국 지방공직인원 선거 (타이베이시장)
중국국민당
'''766,377 (51.13%)'''
'''당선 (1위)'''
'''초선'''
2002
중화민국 지방공직인원 선거 (타이베이시장)
중국국민당
'''873,102 (64.11%)'''
'''당선 (1위)'''
'''재선'''
2008
제12대 정부총통 선거
중국국민당
'''7,659,014 (58.45%)'''
'''당선 (1위)'''
'''초선'''
2012
제13대 정부총통 선거
중국국민당
'''6,891,139 (51.60%)'''
'''당선 (1위)'''
'''재선'''

6.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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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12대

13대
천수이볜

마잉주
(2008년 5월 20일 ~ 2012년 5월 20일)

마잉주

12대

13대

14대
마잉주

마잉주
(2012년 5월 20일 ~ 2016년 5월 20일)

차이잉원
'''타이베이 역대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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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11대

12대
천수이볜

마잉주
(1998년 12월 25일 ~ 2002년 12월 25일)

마잉주

11대

12대

13대
마잉주

마잉주
(2002년 12월 25일 ~ 2006년 12월 25일)

하오룽빈

[1] 한국식 독음으로는 마영구라 부른다.[2] 마잉주 본인은 자기 이름을 로마자 사용 언어로 표기할 때 한어병음식인 "Mǎ Yīngjiǔ"나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식인 "Ma Ying-chiu"가 아닌 위의 표기대로 쓰는데, 여기서 "Ying-jeou"는 국어 로마자에 의한 표기이다. 다만 Ma는 아니다. (국어 로마자로 馬는 "Maa"이다.)[3] 외성인 중 대표적인 대만인 그리스도인이 등려군으로 산둥성이 본적이다.[4] 마잉주의 부모는 이미 타이베이에서 기반을 잡았고, 고향에 있는 마잉주의 할머니를 타이베이로 데려가려는 게 홍콩 거주의 주된 목적였다. 2차 대전부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까지 이 집안은 자주 옮겨다녔고, 마잉주는 아기 때인 1952년에 가족과 함께 타이베이에 와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마잉주와 그의 누이들의 출생지는 가지각색. 큰누나는 충칭, 둘째 누나는 타이베이, 셋째 누나는 창사. 넷째인 본인은 홍콩, 막내인 여동생은 타이베이 출생. 형제 자매 중 후난성에서 태어난 건 하나다. [5] 터무니없는 소문이다. 실제로 마영구가 이름을 그렇게 지은 까닭은 항렬에 맞춰서 지은 것이다. 참고 이에 따르면 마영구의 족보에 상존대인영재계기(上尊大人英才繼起)라는 좌우명 비슷한 글이 있는데 이것을 항렬로 쓴 것이다. 실제로 마영구의 아버지 이름은 족보상에서 마인송(馬人松)이다.[6] 대한민국 내에서의 위상을 따지자면 서울대학교 법대와 비슷하다.[7] 이를 보면 군에 꽤나 애착을 갖았다고 보여진다. 대만군은 예비역으로 계속해서 진급이 가능한 모양이다. 4차례 진급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http://rocmc.freebbs.tw/viewthread.php?action=printable&tid=6499 [8]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도널드 럼스펠드도 예비역진급으로 해군 소위부터 대령까지 진급했다.[사진] 1번은 소위, 3번은 중위, 4번은 소교, 5번은 중교로 보인다. [9] 이듬해인 1987년 7월에 실제로 대만의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국공 내전 직후인 1949년 이후 무려 38년만의 일이었다.[10] 장제스, 장징궈 부자는 저장 성 출신이라 오어를 모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표준 중국어 발음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리고 천수이볜차이잉원표준중국어 실력은 그럭저럭 무난한 편이지만 중간에 대만어 억양이 섞여서 조금 어색하다.[11] 기본적인 객가어는 할 줄 알리라고 추측된다. 그는 대국민 연설에서 인사말을 4개 언어로 한다. 표준어, 대만어, 객가어, 원주민어.[12] 그런데 사실 마잉주도 객가인이다...[13] 객가인 중에는 객가어를 못하고 표준중국어나 출신지 방언만 할 줄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단적으로 리덩후이도 객가 출신이지만 객가어를 못하고 대만어와 표준 중국어, 외국어로 배운 일본어(물론 당시는 '외국어'가 아니었겠지만), 영어만 할 줄 안다.[14] 다만 이건 당시 천수이볜 정권의 경정서가 한 짓이다.[15] 7,658,724표라는 역대 최다 득표수 기록은 2020년 차이잉원이 817만 표를 득표하면서 깨졌다. 공교롭게도 2008년 낙선한 셰창팅과 2020년 낙선한 한궈위 모두 가오슝 시장 출신이다. 다만, 셰창팅은 전직이었고, 한궈위는 현직 시장이다.[16] 사실 소삼통의 아웃라인 자체는 리덩후이 시절에 이미 다 짜여져 있었다.[17] 중화민국푸젠 성중화인민공화국푸젠 성 간에 항공, 우편, 해운 자유화. 이 소삼통을 성사시킨 사람이 바로 차이잉원이다.[18]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전체의 항공, 우편, 해운 자유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양안간에 이사가서 살 수도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인이 대만에 부동산을 구매하면 대만으로 이사가서 살 수 있게 된 것.[19] 이 날 타이베이에 폭우가 쏟아져서 마잉주 주변에 있는 다른 관계자들의 표정이 많이 지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20] 부총통 후보는 우둔이(오돈의)였다. 원래 현직인 샤오완창 부총통이었으나 후보등록 직전 부총통 후보를 우둔이 행정원장(총리)으로 교체했다.[21] 중국 - 대만은 형식적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이 적용되고 있기에 이에 따라 대만인이 중국에 가서 살든, 중국인이 대만에 와서 살든 서로 원 국적이 박탈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 국적만 취득하게 되는 이중국적이 범람하고 있다.[22] 2014년 기준 타이베이의 주거지 지가는 ㎡당 14000미국 달러 수준으로, 서울특별시의 주거지 지가인 ㎡당 10500달러 수준보다 30% 이상 비싸다.[23] 그래서인지 영상 초반부에 "홍콩은 자기같은 퇴임 총통의 신변에 위협을 줄 수 있는 곳이므로 여러분도 조심하십시오" 라는 드립을 친다(...)[24] 중화민국의 사법원은 중세 중국의 3심 재판(황제 재판과 대리시 재판)을 고려한 오권분립 관념을 반영하여 1946년에 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기본 구조가 완성되었다. 대만의 3심 제도(사법원+사법원 직속 최고법원)와 비슷한 서유럽의 법제는 로마 제국(황제/원로원/장관의 종심법정)과 프랑스 왕국(국왕의 친림법정+귀족들의 고등법원) 및 영국(추밀원+대법원)과 이스라엘(대법원+대법원 직속 고등법정) 뿐이다.[25]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국민당의 인기가 폭락했을 때 주리룬, 롄잔, 루슈옌같은 국민당 당권파(롄잔파)는 한궈위를 사퇴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마잉주는 꾸준히 한궈위를 지원했다.[26] 사실 이상한 건 아니다. 이카통이 민진당 세력이 강한 가오슝 지역의 카드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