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과 태권도의 관련성

 

1. 설명
2. 역사왜곡?
3. 어떻게 다른가?
4. 역사
4.1. 왜 이런 논란이 생겼을까?
4.2. 택견을 대하는 태권도의 역사
4.3. 갈등의 내막
5. 세부적인 차이점
5.1. 시합의 규칙
5.2. 기술
5.3. 힘쓰기의 원리
7. 참고 문서
8. 관련 문서


1. 설명


택견은 역사기록과 실질적인 전수자가 존재하는 전통문화이자 놀이이고 태권도는 택견과는 역사의 궤를 달리하는 창작무술이다.
택견 측에서는 가라데 사범들이 살아남기 위한 역사왜곡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내막은 이렇게 단순하진 않고 생각보다 복잡한 내막이 숨어있다.
태권도의 역사를 보면, 광복 이후 일본에서 쇼토칸 계열의 도장인 청도관이 그 모체이다.
정확히는 청도관뿐만 아니라 같은 쇼토칸 계열 도장인 송무관, 중국권법을 가르치던 YMCA 권법부, 국적불명의 무술을 가르치던 무덕관[1] 등등 완전히 다른 무술을 가르치던 5대관을 통합한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의사가 아닌, 한국인에게 맞는 군용무술을 간들고자 최홍희가 욕심을 부려 강압한 결과이다. 자세한 건 태권도/역사 문서를 참고하자.
'''의외로 초창기 원로들은 공수도라는 자신들의 무술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즉 가라테라는 자신들이 수련한 무술과 자기들이 구축한 유파(관-조직)에 대해서 자부심 강한 양반들이라 태권도로 통합하려는 최홍희와 알력다툼도 있었고 명칭도 태권도와 공수,당수의 절충이던 태수도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었다. 그 와중에 택견은 안중에도 없었다. 심지어 무덕관의 황기 사범은 택견은 형(품새)가 없으니 무술이라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나마 태권도 원로 중 박철희 사범만큼은 택견에 진지하게 관심하고 애착하였다.
알아둬야 할 것은 같은 무술이라도 도장마다 성향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이다. 일본에 있는 가라데 도장들도 그러할진데 조선 땅에 있던 가라데 도장들은 오죽할까?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출나게 특이한 도장이 청도관이었다. 청도관의 가라데 스타일은 발 기술 연구수준이 높았던 쇼토칸 가라테 계열 중에서도 발 기술이 독보적이었다. '''이것은 가라데 스타일과도 완전히 달랐지만 택견 스타일과도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청도관 소속이던 최홍희가 이끌던 산하 도장인 오도관에선 뒤돌려차기를 개발할 정도였다. '''뒤돌려차기가 다른 무술에도 흔하다 하는 주장이 많으나 이 당시에는 거의 오도관(창헌류의 전신)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던 기술이다.''' 청도관의 관장이던 이원국이 택견을 배웠다는 설이 청도관 제자들 사이에서 퍼져 있었는데, 이원국은 가라데에 자부심이 강했기에 한낱 마을 쌈질에 불과하던 택견을 흑역사로 생각한 듯 스스로 부정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 말이 진실이던 거짓이던 황기 사범도 그렇고 태권도 원로들이 택견을 천시했다 정도로 보면 될 듯하다.
그리고, 거의 본토식 가라데와 다른 무술 수준으로 독창적으로 변한 청도관식 가라데를 베이스로 최홍희가 나머지 4대관을 강제로 통합하여 만든 무술이 태권도이다. 태권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한자 뜻도 뜻이거니와 택견이 민족의 무예라는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는 뜻이다. 최홍희는 민족무술을 만들고 싶어했고, 그 이름은 민족의 무술인 택견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상술했듯 5대관 관장들은 택견에 관심이 없던 인물도 있었으나 박철희나 최홍희처럼 분명히 택견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다.
왜 하필 택견인가? 의외로 택견이란 무술은 단일 무술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과거엔 물을 차서 멀리 보내는 놀이를 '물택견'이라 불렀다. 그리고 택견이라는 단어가 차기'라는 뜻을 가진 한자 척(踢)의 중국 발음인 티크(tik)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되는 등, 한민족은 '발을 이용한 격투기'를 통틀어서 택견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그 수많은 택견 중 살아남은 택견이 송덕기가 배웠던 한양식 택견일 뿐,'''[2] 의외로 택견이란 단어는 특정 무술을 가리킨다기보단 주먹을 이용한 격투기를 boxing이라 통칭하듯, kicking 계통의 한민족의 무예를 통칭하는 명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최홍희가 태권도에 택견에서 이름을 딴 이유는 한민족이 발차기를 사용하는 무술을 일컫는 명칭인 택견을 딴 것이라는 것. 한민족에게 맞는 무예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의 발로였던 것이다. 즉, 태권도라는 명칭이 만들어진 계기는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일부 택견계 인물들이 퍼트리는 '초기 태권도 원로들이 친일부역자' 라는 주장은 진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택견 내부에서 태권도의 세력에 억눌려온 억울함을 토로하며 옹호를 받던 호소가 팩트 노팩트 거르고 인터넷에 팩트처럼 퍼진 것으로, '''오히려 해방 직후 가라테 사범들은 독립운동가가 상당히 많았다.'''[3] 대표적으로 최영의의 가라데 스승인 김거령이 있고[4], 가라데 사범이라기엔 애매하지만 최홍희도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5]
하지만, 70년대부터 올림픽 태권도(WTF)는 70년대 세계적으로 붐이 일어난 오리엔탈리즘, 민족주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전통무술로 역사왜곡을 하면서 홍보했다. 이때 제일 만만했고 인지도도 낮은 '태껸'이 '태권도'라는 이름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 때문에 불필요한 정통성 논란이 생겼다.
주짓수가 유도에서 왔음을 깨끗하게 인정하는데 세계적으로 일본 무술 짝퉁이라는 소리를 듣는가? 가라데를 베이스로 한 무술인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WTF 측에서 역사를 순순히 인정하는 것에 왜 두려운 것인지 의문이다. 아마 이 점을 이용해 식민지근대화론을 펼치는 무리들이 많기 때문인듯 하다.
식민지근대화론 운운해봐야, 일본무술 가져다가 한국 전통무술로 둔갑한 태권도의 사기극이 면죄부를 받을 순 없다. 거기다가 냉대했던 택견을 자기들 역사팔이에 가져다 쓰고 아직도 그 행태를 버리지 않는 뻔뻔함은 덤. 한국의 무술판에 사기꾼과 정신병자가 난리합게 된 근본 배경에는 태권도의 이런 원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무술 베이스로 현대 창작된 많은 한국 무술들과, 일본 무술이 뻔한 유도 검도까지 한민족 전통타령하는 한심한 작태의 시발점은 태권도의 역사왜곡과 그 성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권도측에서는 이제라도 본인들의 죄를 고하고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것에 대해 사과해야한다.

2. 역사왜곡?


'''논쟁이 생기는 절대적인 이유는 국내 태권도(WTF) 쪽에서 가라테로부터 재창작된 역사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고, 택견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깔끔하게 가라테로 부터 재창작된 역사를 인정하고 있다면 이런 논쟁 자체가 생길 여지가 없다. 문제의 근원은 WTF의 역사왜곡인 셈이다.
초기 태권도인들은 대체로 본 바탕이 가라데에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또한 ITF의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자신들이 가라데를 기반으로 창작한 신무술임을 밝힌다. 당장 태권도의 기본적인 품새는 가라데의 카타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6] 택견 측에서는 이 점을 공격하며 사실상 도배질에 가까운 수정시위를 벌이는데, 근본형태를 가라데에서 가져온 데다 품새개혁을 전면중단하여 나태해진 태권도 측 책임이 명확하다.
택견과 태권도는 이름이 비슷하지만 무술 자체는 서로 연관성이 별로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 당수도, 공수도라 불리던 일본무술에 민족성과 전통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택견과 비슷한 발음의 명칭으로 작명하려 했고 그 결과 태권도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다만 최초로 태권도를 발전시킨 5대관장 중 일부는 실제로 택견을 배웠다고 주장하며[7], 발기술 위주의 택견[8]에서 크게 영감을 받아 손기술 위주였던 일본 가라테와 달리 태권도의 발기술을 집중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이후 태권도는 발기술 위주로 발전하면서 가라테와 차이가 커졌다.
간단하게 동영상으로 비교해 보는 택견과 태권도의 실제 대련 영상
스탠딩 유술기라고 불리는 택견은 하기 영상과 같이 상대방의 다리를 걸어 넘어 뜨리거나 발차기 공격을 잡아서 역으로 쓰러트리는 기술을 많이 사용한다. 물론 현대 택견은 상대의 머리를 발로 차면 이기는 룰이 추가 되어 있기 때문에 머리를 노리는 발공격도 상당히 빈도 높게 사용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택견은 단판제 룰을 택하고 있다. 상대를 넘어뜨리거나 얼굴을 발로 차면 한판승으로 승패가 갈린다.

입식 타격기인 태권도는 점수제이며 3회전 동안 가장 많은 득점을 한 선수가 이긴다. 물론 K.O를 시키면 한판승으로 이길 수 있다. 점수를 얻을 수 있는 타격 부위는 얼굴과 몸통이며 주먹은 정권을 통한 몸통 공격만 인정된다. 절대 상대 선수를 잡아서 넘어뜨릴 수 없으며 이 경우 반칙이 된다. 또한 공격을 시도하다 넘어지거나 상대방의 방어나 고의가 아닌 상대방의 몸이나 발에 걸려 넘어져도 패배를 당하거나 감점을 당하지 않는다. 겨루기 하나만 봐도 넘어지면 지게 되는 택견과는 전혀 비슷한 점이 없다. 즉 어떠한 유술기도 사용할 수 없는 전형적인 타격기 무술이다.

겨루기의 룰이 다르면 기술이 달라지고 전혀 다른 무술이라 봐야 한다. 기본기 자체도 다르지만 무술의 겨루기에서 사용되는 기술 체계와 룰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택견과 태권도는 같은 무술이거나 계승되었다는 주장은 거짓과 억지라 할 수 있다. 발차기가 있다고 계승했다거나 같다고 한다면 무에타이나 킥복싱, 가라테, 사바테, 카포에라, 중국무술, 태권도는 모두 같은 무술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다만 중국무술, 가라테, 태권도는 그 전파의 과정이 명확하기 때문에 상당부분 같은 형태가 있다. 즉 인간이나 자연계의 생물이 비슷한 종과 파생된 아종의 DNA가 거의 일치함과 같은 이치이다.
결론은 태권도는 절대 택견을 계승했다거나 택견의 기술체계를 받아들였다고 할 수 없다. 태권도는 중국남권에서 파생된 오키나와 가라테->일본 본토 상륙 후 변형을 거친 쇼토칸 가라테->일제 시대 한국으로 도입된 쇼토칸 가라테의 변형임이 분명하다. 택견은 태권도로의 변화를 위한 계기 및 역사 탈색의 재료로 쓰였을 뿐 절대 태권도로 계승이 되지 않았다.
최홍희를 비롯한 ITF 태권도 관계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책에서는 '1세대 태권도인 가운데 택견을 배웠던 이원국, 황기, 최홍희 등이 택견의 크고 화려한 발차기 기술을 태권도에 적극적으로 접목시키면서 태권도가 발차기 중심의 무술로 발전하고 태권도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9]고 주장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 택견은 태권도와 품세나 기술이 전혀 다르다.[10]
태권도의 가장 기본적인 발차기 기술인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는 기본적으로 중국무술과 가라테에도 원래 있던 기술들이고, 오히려 하단 발기술들은 태권도로 개량되면서 도태되었다. 하단 발기술들이 상대방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유술기 그 자체거나 유술기와 연계되는 기술들이라 입식타격기로 변화를 꾀한 태권도에서는 해당 기술들을 생략했다. 정작 계승하거나 그 기술들을 도입했다고 주장하는 택견에는 하단 발차기(아랫발질)가 주류 기술이고, 하단 발차기 자체 또는 연계되는 손기술들과 같은 유술기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전술을 주로 구사한다. 초기 태권도인들이 택견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가라테에 접목을 했다면 오히려 태권도는 발차기 위주의 입식 타격기가 아니라 유술기가 살아 있는 종합 격투기 같은 형태로 발전했을 터이다. 그러나 입식 타격기인 태권도에서는 그러한 기술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이는 택견이 태권도의 근본적인 모태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택견은 아랫 발차기가 중심이었으나 태권도는 택견에서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던 윗 발차기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개량한다. 당연히 택견과 태권도는 동작 원리가 다른 무술이기 때문에 발차기 기술도 전혀 다르다. 황기는 택견의 발차기 기술을 그대로 태권도에 적용해 보았지만 실전 겨루기에서 효용도가 낮아 사장되었다. 현재 태권도의 기본 발차기 기술인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는 원래 중국 무술과 가라테에서도 있던 기술들이다. 이원국과 황기가 운영한 청도관과 무덕관에서 먼저 발차기 기술이 크게 발전했는데, 곧 다른 관에서 발차기 기술을 활성화했다. 1950년대 태권도에서 풀컨택트 겨루기가 도입, 활성화되면서 태권도는 손기술 위주의 가라테와는 차별화된 발기술 위주 무술로 발전했다.

3. 어떻게 다른가?


동영상 두 편부터 감상해 보자.
1. 택견의 겨루기 - 결련태견협회의 2015년도 택견배틀 하일라이트
2. 태권도의 겨루기 - 제45회 협회장기 전국단체대항 태권도대회
택견의 겨루기는 상대방을 넘어뜨리는게 승패의 기준이다. 물론 현대로 넘어오며 발로 얼굴을 차면 이기는 룰이 추가되었으나 어쨌든 상대방을 넘어뜨리거나 얼굴을 차면 이기는 단판제 한판승의 룰을 가지고 있다. 또한 상대방을 넘어뜨리기 위해 다리를 잡거나 거는 기술들을 사용할 수 있는 입식 유술기 무술이다.
태권도는 k.o 승을 제외하고는 점수를 딸 수 있는 포인트를 타격하여 최종 점수로 승패를 가르는 포인트제 룰을 가지고 있다. 또한 발과 주먹으로 정해진 포인트만을 타격할 수 있고 그외의 기술은 반칙이며 절대 상대방을 잡거나 밀어서 넘어뜨릴 수 없는 전형적인 입식 타격기 무술이다. 태권도에서 상대방을 발로 공격하려고 시도하다가 상대방이 막거나 상대의 몸에 밀려 넘어진 경우 감점이나 패배가 되지 않으나 택견에서는 상대방의 방어나 상대의 머리를 제외한 몸에 닿아 넘어지면 공격 측의 패배가 된다.
발차기를 사용하는 무술이라고 두 무술이 정말 같은 무술 또는 택견에서 태권도로 기술적인 계승이 있다고 주장할 근거는 전혀 없다. 겨루기의 룰이 다르고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다르면 그것은 100프로 다른 무술이다.
태권도는 해방 전 일본에서 가라데를 배워온 사범들로부터 가라테를 주재료로 하여 택견의 일부 겉으로 보이는 요소만을 가지고 창작한 현대무술이다. 결과적으로, 물리적인 운동원리로만 보자면 두 무술은 근본적인 토대가 다르다.[11]
1. 기본적으로, 태권도는 쇼토칸 가라테를 배운 사람들이 만든 현대무술이다.
2. 택견과 태권도는 근본원리 면에서 연관성이 없다.[12]
3. 태권도라는 이름은 ITF 총재였던 최홍희가 가라데를 베이스로 한국형 격투기를 만들 때, 그 무술 이름에 가장 적합한 것은 발을 이용한 무투의 순 우리말인 택견이라 생각하고 택견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인 지원하에 양적, 질적 팽창을 거듭한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될 정도로 성공적으로 발전했다. 또, 태권도가 한국의 무술로서 유명해진 이후로는 진짜 전통문화를 돌아볼 시간이 생기면서 진정한 전통무술인 택견도 국내에서 점차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사실 불과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태권도는 분명히 국제적으로 유명한 한국 무술이 필요하다는 대중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무술이었다. [13]
이후, 민주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문화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으로 변하며 택견은 점차로 수련생이 늘고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2011년에 유네스코에서 '''택견이 무술 최초로 인류무형 문화재로 등재'''되면서 택견이 지닌 전통문화적인 가치 또한 인정받게 되었다.[14]

4. 역사



4.1. 왜 이런 논란이 생겼을까?


위 상황에는 굉장히 복잡한 사정이 있다.
상술했듯, 쇼토칸 계열 도장인 청도관은 태권도의 모체가 된 도장이다. 그리고 그 청도관 소속의 사범[15]이었던 최홍희가 이승만 시절 허구한 날 경찰한테 쳐맞는(...) 국군을 보고 제대로 된 한국군을 위한 군용무술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래서 가라데를 베이스로 가라데에서 한국인에게 걸맞지 않은 요소는 제거하고 타 무술에서 한국인에게 걸맞는 요소를 추가했다. 이름이 태권도가 된 이유도 한국 무술에 가장 걸맞는 이름이 택견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택견의 발따귀를 참고하여 내려차기가 추가되었고, 중국권법의 침추경이나 택견의 품밟기를 참고하여 사인웨이브를 고안한다.[16] 참고로 이때 가라데와 차별화된, 한국형 카타도 고안된다. 무기술을 맨손으로 연습하던 가라테식 카타를 맨손격투와 '그 당시 현대전'식 백병전에 적합한 카타로 바꿔나간 것이다. 군사정권 이전에 군생활했던 군번들이 회상하는, 군대에서 천지형, 원효형 품새하던 시절이 이때이다. 천지형, 원효형은 지금 ITF의 천지틀, 원효틀이 된다.
그 결과 얼추 한국인에게 어울리는, 독자적인 군용무술이 완성이 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5대관 관장들은 자신들이 원한 통합도 아니었거니와 자신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던 가라데를 마개조한다고 느껴서 최홍희와 불화하였다. 결국 최홍희를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쫓아내고 국제태권도연맹으로 좌천[17]시킨다.
최홍희를 축출한 5대관은 이미 합쳐진 단체를 다시 분열시키기도 애매하고 그래서 대단히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었고, 대신 '''최홍희가 '일본식 가라데'에서 '이름만 태껸과 비슷하게 바꾼 짝퉁 가라데'로 바꿔놓은 것을 다시 일본식으로 회귀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최홍희가 고안한 독창적인 품새도 전부 삭제되고 전부 가라테와 똑같은 형태로 돌아갔다. 흔히들 아는, 이름도 태수도로 바꾸는 등 왔다갔다하던 혼란기가 이 무렵이다. 다시 말하지만 5대관 관장, 즉 (가라데를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비주류였던) 최홍희를 제외한 태권도 원로들은 자신들이 배운 정통 쇼토칸 가라데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것까진 (자기들 입장에선)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집권한 사람이 박정희였다는 것.''' 박정희는 일본이 유도를 해외에 홍보하여 크게 성공하고 올림픽 종목에도 진입시켜 문화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벌어들이는 것을 보고 한국도 일본처럼 올림픽 종목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유도와 마찬가지로 여러 도장을 통합한 무술인 태권도다. 후진국이건 선진국이건 전부 인프라 구축이 매우 쉬워야 올림픽 종목 채택이 쉽고, 인프라 구축이 쉬우려면 역시 특별한 장비가 필요없는 맨손투기가 가장 좋았다.
당시 한국의 맨손투기들 중에선 '''택견은 아예 존재감도 없었고'''[18] 그나마 씨름, 태권도 정도가 인지도가 있었는데, 당시 올림픽 종목이 레슬링에 유도까지 있었으니 똑같은 레슬링 계통인 씨름은 레드오션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태권도는 발 위주 타격기라는 특이한 색깔이 있었기에 태권도로 채택된 것.''' 사실상 이 점 하나 때문에 태권도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술로 자리잡는 데에 성공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당시는 이소룡의 영향으로 오리엔탈리즘, 동양 전통무술 붐이 일던 시기였다. 또한 해방 직후였기에 당연히 한국인들은 일본 무술인 가라테를 배우는 데에 반감이 강했다. 괜히 극진공수도랑 대한검도회가 한국에서 자기네 무술이 한국 무술이라는 둥 홍보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군사정권은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으로 만들기 위해선 우선 한국에서 태권도 인프라 구축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봤고, 반일감정이 강한 한국인들에게 태권도를 홍보하기 위해 태권도를 전통무술로 역사왜곡해서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술했듯 이름이 비슷한 택견을 태권도의 원류로 포장했으며, 택견이 지닌 민족무예로서의 정통성을 훔치는 주장을 시작했다. 당연히 5대관은 최홍희 말에는 코웃음을 쳤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최고존엄인 박정희 말은 거역하는 게 불가능했으며(...) 당연히 가라데와 다른 무술이 되어 결국 현재 우리가 아는 태권도의 모습을 갖추었다.
즉, 태권도의 역사왜곡은 최홍희와 5대관의 밥그릇 싸움, 해방 직후 한국인들의 정서, 올림픽 종목을 만들려는 군사정권의 뜻까지 복잡한 사정이 겹쳐 나온 결과물이다.
이때 올림픽 종목으로 태권도가 아니라 택견을 채택하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택견이란 무술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대중들이 아는 부드럽게 춤추는 듯한 화려한 택견은 충주택견이다. 이쪽은 전통 택견도 아니고 송덕기에게 '넌 내 제자도 아니라'며 파문당한(좀 심한 말로 하면 이단) 신한승이 만든 변형 택견이다. 어떻게 보면 현대 창작무술에 가까운 무술이다. 송덕기의 정통 택견인 결련택견과 위대택견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 멋대가리가 없다.''' 어떻게 보면 손을 자연스럽게 펴고 하는 무에타이 같은 느낌을 진하게 풍기는데, 무에타이는 택견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당시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쌓은 무술이었다. 더구나 송덕기는 제자를 받을 생각이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불친절한 스승이었던 탓에 택견을 전파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됐다. 반면 태권도는 그 특유의 화려한 발차기로 구미를 열광시켰고, 군대무술로 검은띠 딴 사람의 수가 상당수이기라도 했다. 즉, 인프라에서 비교도 안 되고 외국인들한테 어필할 무엇도 없었던 것이다.
상기 문단 편집자는 '''택견은 멋대가리 없다고 기술했는데, 과연 태권도는 '멋"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시범용 발차기와 품새는 절도와 아크로바틱한 면이 있어서 "멋"이 있어 보일지 몰라도 '''시합에서 보이는 발펜싱과 재기차기 추태, 그리고 타격 후 괴성을 지르며 손을 흐드는 것이 과연 "멋있는 태권도"인가 물어보고 싶다.''' 택견도 잘 짜여진 시범은 영화의 액션처럼 때깔이 좋다. '''시범만 가지고 멋짐을 나눈다면 세상 무술 들 중에 안 멋있을 무술이 없다.''' 태권도는 역사왜곡도 문제지만 정작 자기들이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택견에 대한 깔아뭉갬 부터 문제가 크다. 또한 '''멋대가리 없는 택견을 왜그리 팔아먹는지도 의문이다.''' 확실히 짝퉁은 진품에 대한 열등감이 기저에 깔려 있다. 태권도 측의 가라테 폄하 또한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다.
오히려 그 당시에 한국인들이 일본 무술이라고 무작정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더 크다. 사실상 역사왜곡을 하게 된 계기는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태권도가 가라데를 베이스로 했더라도 독립운동가인 최홍희가 일제시대 때 금지되었던 택견과 가라데를 섞어 만든 것이 태권도라는 것을 알렸다면, 지금처럼 택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태권도가 아닌 정말 태견을 이은 무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단,]
상단 문장도 태권도 측의 물타기 서술인데, 최홍희는 택견과 쇼토칸 가라테를 섞은 적이 없다. 섞었다면 현재 북한 태권도라고 홍보되는 ITF는 입식 유술기가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쇼토칸 가라테에도 일부 남은 유술기마저 없애버렸음은 전 태권도의 공통사항이다. 쇼토칸 가라테는 슨도메시 엎어치기 후 쓰러진 상대에 정권을 날리는 유술 기술을 자주 사용한다. 유도와 비슷한 대다수 근접 유술기는 다 배제했는데도 저 기술만큼은 공식 기술로 인정한다. 그러나 태권도는 철저히 입식타격기로 변신했다. 고로 택견하고 기술을 섞었다 운운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택견은 타격보다는 유술기 사용빈도가 훨씬 높은 입식 '유술기' 무술로 봐야 한다.
그리고 가라테에 겨루기가 없다는 식으로 물타기 하며, 태권도에 택견의 겨루는 문화가 이식되었다고 헛소리 하는 인간들이 존재하는데, 무술에서 겨루기 체계가 삭제된건 중국무술의 흔적이며, 그 중국의 남권을 전수받은 오키나와 테 역시 품새(형) 수련만 하는 형태로 일본에 전승된게 쇼토칸 가라테였다. 하지만 일본 본토의 분위기는 이미 유도와 같이 품새(형, 카타)의 불필요성을 인식하고 낱기술 수련과 겨루기로 무술이 이미 보급된 상태였고, 되려 쇼토칸 가라테 보급시 일본인들에 의해 겨루기가 없다는 지적에 의해 검도의 슨도메 형식을 받아들여 가라테에도 대련이 도입된다. 그리고 타 전통 가라테는 애초부터 슨도메보다 좀더 과격한 겨루기를 수련하던 경우도 있었다. 가라테에 겨루기에 해당하는 쿠미테 수련이 왜 있는지 보면 답이 나온다. 자세한건 가라테 유파 항목 참조. 고로 한국에 전파된 일본 가라테에 겨루기가 없었고 택견의 겨루기 문화가 이식되었다 라는건 기만이나 마찬가지인 서술이다. 즉 한국의 태권도 겨루기는 일본 쇼토칸 가라테의 쿠미테의 한국화일 뿐 택견을 계승했다거나 차용한 것이 절대 아니다.

4.2. 택견을 대하는 태권도의 역사


- ITF 시대: 오키나와 무술 카라테가 일본에서 쇼토칸 가라테가 되는 역사를 목격했던 최홍희와 태권도 원로들은 '한국인들도 전통무술(택견)을 현대화하여 현대판 국민무술(태권도)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태권도라는 개념을 창시했다. 이들은 택견과 교류를 하면서 송덕기를 무술인으로 추앙하고 택견이 민족무예라는 역사성도 발굴해냈으나, 군사정부와의 갈등으로 일부 원로들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 WTF 시대: WTF 태권도는 택견과의 접촉을 위한 노력은 오히려 사라졌음에도, 정통성을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80년대 올림픽을 앞두고 가라테와 차별화를 위해서, 택견의 콘셉트를 베끼면서 스포츠 규칙을 도입하고 발차기를 개혁하여 발펜싱이라는 독특한 운동원리를 만들었다. 또, 현대 한국무술의 규모 자체는 국제적으로 봐도 상당한 규모로 키우기도 했다.
최홍희 망명후 잔여 인프라를 통합하여 국가적 지원하에 덩치를 키운 WTF 측에서는 이틀만에 자신들만의 품새를 창작하여 탈ITF를 추구하지만 그 이틀만에 만든 품새라는게 결국은 쇼토칸 가라테 카타의 분해 후 재조립 및 변형 수준이었다. 덤으로 가라테에서 시작된 일본색을 탈색하고자 5천년 전통을 끌어오고 기어이 택견의 계승이라는 역사왜곡까지 시작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단, 택견 측에서 태권도에서 분노하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나, '''태권도 때문에 택견이 널리 퍼지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최소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태권도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최홍희 총재의 경우,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든 이유''' 중 하나로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태껸”'''이라는 어음(語音)을 연결시킬 수 있었고, 또 하나는 손보다 발을 더 많이 쓰는 이 무도의 성격자체를 나타내는데 적합한 글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9]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택견과 태권도라는 무술이 현대에 탄생하고 발전하는 계기는 되었다. 아마 태권도가 보급이 되지 않았더라면 송덕기가 사망한 이후 한민족은 택견의 존재 자체를 아예 잊어버렸을 것이다. '''택견이라는 무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손기술 위주의 가라테나 중국권법에 익숙했던 한민족에게 발기술 위주의 무술도 충분히 멋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태권도의 공로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택견에서는 아예 부정적으로 서술하지만 이때 한국 가라데에서 택견에 주목한 것이 택견이 한국 무술의 대표로서 여겨지는 계기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인터넷 여론이 택견에 우호적으로 서술되며 이런 기록이 대다수 삭제되거나, 택견이 스스로 성공하기에 충분했던 규모처럼 서술되는 현상이 있는데, 비슷한 무술이자 놀이문화 중에서 유독 1950년대의 서울 지역의 택견만이 살아남아서 한국 무술의 대표가 된 것은 이때 지원이나 역사성을 택견에게 집중한 덕분으로, 결국 초기에는 어느 정도 공생관계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었다. 택견 서술자들은 이런 기록조차 매우 싫어하는 것 같다. 초기 태권도에서는 전통문화를 흡수하네 마네 하는 여유조차 없었다. 시작부터 의도가 그랬던 것은 당시 미숙했던 한국사회의 한계일 뿐, 특별히 정부가 악의적으로 대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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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기와 상무관
택견 문화를 현대로 전수한 송덕기에게 해방 이후 처음으로 태껸을 배운 사람은 YMCA권법부[20]에서 윤병인 사범에게 사사하던 박철희 사범이었다.[21] 당시 경무대 상무관(오늘날의 청와대 경호실 무술도장)에서 무술을 가르치던 박철희는 송덕기를 경무대에 자주 초청하여 무술을 사사했다. 후일 김병수, 임창수 사범등도 택견을 배웠다. 택견을 배운 이들은 후에 태권도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과연 태권도의 발전에 택견의 어떠한 요소를 차용했는지는 증명할 사료나 자료는 없다.'''
'''이 문단의 태권도 측 서술 역시 어떻게든 택견을 엮어 볼라는 태권도 측의 피눈물 겨운 노력에 불과'''하다. 원로들이 송덕기를 찾아가서 택견을 수련하지 않고 '견학'한 것에 불과하고 택견의 기술체계를 태권도에 이식한 흔적은 전혀 없다. 만약 택견의 기술체계를 어떻게든 받아들였다면 절대로 지금과 같은 태권도의 형태가 나올 수가 없다. 만약 택견을 적극 받아들였다면 입식타격기가 아니라, 스탠딩 유술기가 있는 종합무술 성격의 무술로 발전했어야 한다.
결정적으로 택견의 알파요 오메가인 품밟기가 태권도에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태권도와 택견은 전혀 연관성이 없다. 그 대신 중국남권→오키나와테→쇼토칸카라테→태권도를 거치면서도 사라지지 않은 (기마세, 마보 등등으로 불리는) 주춤서기와 정권지르기는 정작 겨루기에서는 써먹지도 못하면서도 아직도 줄기차게 수련한다. 형태를 모방하면서 그 의미는 모른 체 아무 생각 없이 교습되다보니 주춤서기뿐만 아니라 태권도의 품새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원류인 쇼토칸 가라테의 수련체제 중 기본기와 품새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무방하다. 그런데도 계속 택견과 엮으려는 시도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
ITF 초기 태권도는 민족무술로서의 정체성에 중점을 두었고, 이 때문에 택견문화의 전승자 송덕기와 교류하고 지원을 했다. 다만 최홍희 총재 시절에는 단지 마켓팅용으로만 행해졌던 움직임이었다. 1960년 로마올림픽 당시 태권도를 소개하면서 태권도의 원형으로 태껸을 선택하였고, 이때 소개용으로 찍은 사진이 송덕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더불어 임창수 사범과의 시연사진이 1972년 발간된 태권도교본 품새편에 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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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을 처음으로 주목한 것도 해방직후의 무술인(=태권도 원로)들이었고, 송덕기를 진정한 무술인으로 추앙하며 처음으로 남긴 사진기록도 태권도 단체들이 남겼다. 송덕기김병수 사범. 경복궁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로마올림픽을 앞두고 태권도를 소개하고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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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기가 나온 태권도 잡지. 71년
이후 WTF를 주도로 태권도 통합이 이루어지는데, 가장 세력이 컸던 무덕관(武德館)의 황기 관장은 어렸을 때 태껸을 배웠다고 하였고, 자신의 기술적 근원이 태껸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실제로 황기사범이 무덕관에서 독립해서 미국에서 만든, '수박도'라는 현대 창작무술의 동작을 보면 택견이나 수벽치기 등 한국 전통무술 특유의 활개젓기를 연상시키는 동작이 특징이다. 그러나 황기 사범에게는 택견은 무술도 아니라고 말한 흑역사도 존재한다.
두번째로 컸던 청도관의 이원국 역시 안국동에서 태껸을 배웠으며 태껸의 발기술에 매력을 많이 느껴 태권도 수련 과정에 태껸의 발차기를 포함시켜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택견의 발차기가 태권도에 준 영향은 별로 없다.
하지만 택견은 발로 하는 레슬링이라 불릴 정도로, 드잡이질 하고 넘어뜨리는 무술이다. 하지만 태권도는 발로 차서 포인트를 맞추면 점수를 따는 전형적인 입식 타격기 무술일 뿐 다른 문화는 계승하지 않았다. WTF 태권도는 택견의 정통성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기 시작했으나, 기본적인 체계는 전혀 계승하지 않은 것이다.
'''즉 태권도가 택견에게 받은 영향은 ①이름의 음차, ②비각술이라는 중세기록에서 가져온 발차기 콘셉트, ③택견의 일부 형태를 제멋대로 재창작한 것에 가까우므로, 오히려 전통문화를 완전히 바꾸자는 이념이 바탕에 있었다.'''

4.3. 갈등의 내막


초기부터 태권도인들이 택견에 품은 생각은 꽤 미적지근했다. 태껸의 놀이적인 성격과 굼실거리는 움직임이 당시 무술인들에게는 절도가 없어보였으며[22], 당시 송덕기는 이미 노년이었기 때문에 일부 젊은 사범들 눈엔 낡은 문화에 집착한다는 편견도 가질 법 했다. 더불어 당시 한국사회에 퍼져있던 근대화의 열풍에서 조선문화에 대한 일종의 혐오까지 겹쳐져서, 전통문화 택견을 '''근대화''' 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 편이었다. 즉, 발차기의 화려함이나 스포츠 문화라는 외형적인 틀을 빼면, WTF 태권도인들은 택견을 계승할 생각이 딱히 없었던 것이다.[23]
심지어 일본 무술 가라테를 변형해서 태권도로 이름을 바꾸고 택견을 계승한 한민족 전통 타령을 했는데, 멀쩡히 택견이 존재하고 전혀 다른 무술임이 알려지면 자신들의 사기극이 들통나기에 택견의 존재 자체를 말소시키고 싶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택견 단체들의 과장된 주장이라는 반론도 있다. 태권도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ITF 태권도는 창제원리에서부터 가라데가 원형임을 솔직히 밝히고 있고, WTF 태권도는 택견을 특이한 시골무술(?) 정도에서 사멸할 문화라고 생각해서 방치했을 뿐이지 말살은 생각치도 않았다. 송덕기는 고종 30년(1893)생, 19세기 사람으로 1950년대엔 이미 60대 고령이었다. 게다가 전국적으로 택견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조차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은 데다 대부분 고령인 상황에서 택견 역시 그대로만 놔둬도 다른 실전된 전통문화처럼 사라질 형편이었다. 송덕기가 90세가 넘도록 장수한 덕분에 어찌보면 택견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련자가 송덕기 외 10여 명 내외였던 택견은 ITF 시절에는 그냥 시골무술이라고 볼 수 있는 수준에서 역사성을 발굴하면서 공생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이후 단순히 지방문화로서 내버려둔 것을 사멸시키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은 후대에 와서야 생겨난 관점이다. 처음에는 태권도의 탄생이든 택견의 역사성 발굴이든 서로 비난할만한 생각도 없이 그저 시대적으로 당연히 생겨난 현상이었고, 그래서 이후에 WTF 측은 정통성을 날조하고 택견계는 이때의 관계조차 부정하고 태권도의 탄생 자체를 악으로 묘사하므로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국내에 남아 국기가 된 대한태권도협회가 택견 계승 타령이나 한민족 유구한 5천 년 전통 무술 주장만 하지 않고, 가라테로부터 재창작되었다는 것만 깔끔하게 인정하고 그 역사를 70여년 정도로 소개한다면 이런 갈등이 생길 일도 없었다.
다만, 태권도의 초창기 대응은 정부와 초기 무술인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당장 한국을 홍보하기 위해 '통하는' 상품이 필요했는데, 택견은 그 시대에 당장 문화상품으로 쓰일 수 있을 만한 기반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더 자세히 쓰자면, 근대화 사상에 찌든 한국사회가 택견 같은 춤 사위 비슷한 무술을 진짜 우리의 무술이라며 납득하지 못했던 어찌보면 시대의 문제였다. 당장에 택견은 형이 없다는 이유로 태권도는커녕 가라데나 유도도 받는 무술 취급을 못 받아서 신청이 거절당했으며, 송덕기가 청년들을 모아 택견판을 벌였더니 왠 정신이상자들이 패싸움을 한다며(...) 경찰에 신고가 들어갔다는 눈물나는 일화도 있었던 시대가 그 시절이었다.
결국, WTF 태권도는 대개혁을 시도했다. 지금의 태권도는 일제시대 말기의 가라데의 가타를 기본품새로서 남겨두고, 발차기와 시합 형태만을 택견을 흉내내며 발전한 형태이다. 하지만 지금도 택견의 기본체계는 전혀 수용한 바가 없고, 1980년대 이후로는 택견을 본딴 독창적인 품새를 만드는 연구조차 중지했다. 그래서 태권도는 수련용 품새(가라데)와 겨루기(태권도)가 완전히 다른 무술이다.
결과적으로, 태권도는 택견의 일부 특징(화려한 발차기, 스포츠문화)을 '''근대화''' 하겠다는 이념으로 가라데와도 택견과도 차별화 되는 무술이론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택견을 직접적으로 수용했다거나 계승했다고 보긴 어렵다.

5. 세부적인 차이점



5.1. 시합의 규칙


- WTF태권도는 입식격투기를 기반으로 타격-포인트제 룰을 취한다.
- 태껸은 얼굴을 맞추면 이기는 하이킥과 잡아서 넘어뜨리는 레슬링의 조합으로, 단판제 룰을 취한다.
택견은 발차기와 넘어뜨리기를 병행하는 현대무술 탄생 이전의 스탠드 레슬링인데 비하여, 태권도는 순수한 입식타격룰에 기반한 발로 하는 복싱에 가깝다.
단, 신한승이 체계화한 택견 룰의 경우, 그래도 태권도 룰과 비교하면 제법 공통점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택견에는 상대의 무릎 이상이 바닥에 닿으면 승리(일종의 한판승)라는 룰이 있는데, 아테네 올림픽 시절 WTF태권도에서는 단순히 타격에 의한 득점 말고도 택견처럼 다운(중심을 잃거나 무릎 이상이 바닥에 닿을 때)되면 +1점의 추가 득점이 있었다.[24]
  • 택견에서는 자신의 양발이 둘다 상대의 무릎보다 높이 올라가게 점프해서 상대를 차서 상대가 현저히 중심을 잃었거나, 무릎 이상이 바닥에 닿거나, 3걸음 이상 물러나면 승리라는 룰이 있는데, ITF태권도에서는 두 발을 높이 도약하는 기술(뛰어 앞차기나 날아차기, 돌개차기 등)로 상대의 얼굴을 차면 3점, 상대의 복부를 차면 2점을 준다.
  • 택견에서는 상대의 얼굴을 강하게 차면 승리하는 룰이 있고, 태권도에서도 안면을 강하게 차는 기술에 가장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25]

5.2. 기술


- 태권도: 발차기를 중심으로 아웃파이팅, 에너지 파이팅을 중심으로 삼는다. 간합이 매우 넓다.
- 택견: 풀컨택트 상태에서 손질, 발차기, 유술 공방을 중심으로 삼는다. 간합이 상당히 좁다.
태껸과 태권도의 큰 차이는 바로 '''손기술'''에 있다. 태권도의 손 기술은 상중하단 정권지르기와 4가지 막기의 응용이 전부이지만 태껸은 스탠딩 그래플링-레슬링을 구사한다. 레그 스윕의 일종인 딴죽을 걸때 필수적으로 상대의 어깨나 목등을 붙잡으며, 씨름이나 레슬링에서처럼 상대를 잡아 넘는 기술이 발차기와 동등한 비율을 차지한다. 옛법택견으로 가면 더 많은 기술들이 나오는대, 중국무술들의 추수나 합기유술의 형태와 비슷한 원리를 지닌 동작이 많다.
'''상시 서술에 택견에 비슷한 개념의 품새가 있다고 써 있으나 택견은 품새 수련체제가 없는 낱기술 수련 위주의무술'''이다.[26] 권투에 품새가 없이 낱기술과 연계기 정도만 있는 것 처럼 택견에도 품새가 없다. 다만 문화제 신청을 위해 신한승이 12마당이라는 품새를 창작했을 뿐이다. 즉 원조 택견에는 품새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 무술 중 남권의 DNA를 받은 가라테와 태권도의 수련체계와는 기본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비슷한 개념이 있을 수가 없다. 유도와 권투가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헛소리이다.

5.3. 힘쓰기의 원리


'''택견'''의 기본 수련법은 품밟기인데, 이는 늬엿늬엿 독특한 박자로 춤추는 듯이 보이지만, 오래 수련하면 유도의 다리후리기처럼 상대의 발목을 잡아거는 스탠드 레슬링에 필요한 다리힘이 길러진다. 또한, '비각술'이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진 택견의 독특한 발길질에 필요한 탄력이나 다리힘도 늘어난다.
태권도는 운동원리에서 송덕기의 전통춤 같은 움직임을 '기피'하여 기계체조와 현대운동의 역학을 최대한 사용하는 무술이다. 비단 품밟기만 께름칙하게 여긴 수준이 아니라, 택견의 일부 옛법에 가라데와 비슷한 기술이 많은데도, 굳이 손기술 발기술의 원리까지 가라데보다 더 직선적으로 접어펼치는 방식으로까지 바꿀 정도로 택견의 근본 형태를 매우 부끄러워하였다.[27] 따라서, 세계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무술을 만들기 위해서 전혀 다른 움직임을 창조한 것이다.
그래서, 태권도는 그래플링과 펀치를 병용할 수 있는 실전성과는 멀어졌지만, 보편적인 현대 체조의 미학을 흡수하여 현대문화의 기반이 전혀 없었던 초라한 한국에서 세계인들이 널리 수행하는 국제문화가 되는데는 성공했다.
이런 점 덕분에 태권도는 현대의 기계체조 같은 역학에 기반을 두어, 마샬아츠 트릭킹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춤, 댄스, 아크로바트 같은 현대문화의 운동감각에 어울린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현대 스포츠 문화로서 병행할 수 있는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태권도라는 현대무술이 만들어진 목적에 가깝다.''' 그리고 택견과 태권도가 전혀 다른 무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6. 세줄요약


1. 태권도는 마치 주짓수유도에서 파생된 것처럼 가라테에서 파생되어[28] 독자적으로 발전한 현대 창작 무술이다.
2. 택견이 한국판 가라테의 발전과 변형, 즉 태권도가 탄생하는 동기부여는 되었다. 태권도란 명칭 역시 태껸의 영향을 받았다.
3. 다만 태권도는 절대 택견의 실질적인 스타일을 계승하지 않았다. 즉, 둘은 전혀 다른 무술이다.

7. 참고 문서



8. 관련 문서



[1] 이 중 황기는 훗날 독립해서 전통무술(?)을 가르치고, 남은 인원들은 그냥 가라테랑 똑같은 짝퉁무술 당수도를 미국에 전파했다.[2] 과거에는 평안도의 '날파람', 경상도의 '까기' 처럼 택견 비슷하게 발차기 및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는 무술이 타 지역에도 있었다.[3] 무술이 아닌 종교의 사례이긴 하지만 스페인 본토를 제외한 구 누에바에스파냐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고,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들은 개신교(성공회 포함) 신자들이 많았다. 다만 이들은 식민지 종주국 혈통 이민자의 후손들이 적지 않아서(특히 전자의 경우) 한국의 가라테 사범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기는 힘들며, 한국으로 치면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의 후손들신토 계열 한반도 독립운동을 이끈 것과 같다고 봐야 한다.[4] 정확히는 최영의가 어린 시절 독립운동가를 몰래 숨겨주던 아버지가 숨겨 준 독립운동가 중 한 명으로, 최영의에게 가라데를 잠깐 가르쳐 주고 이후 만주로 도망했다고 한다.[5] 가라테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였던 오키나와의 전통무술이이었고, 일제 군부가 재조명하긴 했지만 해외의 이미지와는 달리 유도나 검도에 비해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다. 부드러운 유도와 반대로 사람을 상처 입히는 깡패 싸움질이란 이미지가 2차 대전 후까지 박혀있었을 정도.[6] WTF 시대의 태권도의 실제 사용방식은 가라데와도 전혀 다른 것이 되었지만, 품새 자체는 거의 개혁을 하지 않았기에 이런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7] 그러나 정작 택견의 정수인 품밝기는 태권도 어디에도 적용되지 않았다. 백통신기비각술이라 불렸던 택견의 발차기 컨셉만 가져다 쓴 것일뿐 실제 발로 하는 유술기라 불리우는 택견의 근본은 전혀 태권도에 적용된 바가 없다.[8] 이 발기술이라는게 태권도 처럼 100% 타격을 위한 발기술이 절대 아니다. 상대방을 넘어 뜨리기 위해 무게 중심을 흐트러 트리기 위한 기술이기 때문에 발로 하는 유술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이다. 즉 택견의 발기술이 태권도에 넘어간 건 없다고 보면 된다.[9] Park, S. H. (1993): About the author. In H. H. Choi: Taekwon-Do: The Korean art of self-defence, 3rd ed. (Vol. 1, pp. 241–274). Mississauga: 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10] 상대를 넘어뜨리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굼실거리는 스텝이 특징인 택견과, 가라테에서 큰 영향을 받아 상대를 타격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직선적이고 호쾌한 스텝의 태권도는 그 차이점이 크다.[11] 최근 태권도 단체에서는 '태권도의 스포츠적인 운동역학과 파괴력'이 '택견의 놀이문화를 베끼는 과정'에서 나왔다며 개선된 주장을 한다. 이 표현 자체는 아주 거짓말은 아니지만, '태권도는 택견을 정식으로 계승했다' 라는 기존의 주장을 오용케하는 물타기인 경우가 많다.[12] 운동원리 자체가 다르다. 택견이 지닌 '콘셉트'와 '비각술'이라는 택견의 중세기록을 베끼는 과정에서 태권도만의 독창성이 창조되었지만, 태권도는 택견을 '''현대적으로 갈아엎자면서''' 택견의 전통원리를 부정해버린 무술이기에 정통성이라는 주장은 할 수가 없다.[13] 하나라도 국산상품을 수출해서 외국인들에게 익숙한 문화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불과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발전한 올림픽 태권도의 현상을 단순히 태권도 단체의 로비나 정부의 개입으로만 보는 택견측의 서술도 분명히 잘못된 점이 있다. 이는 민주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정신의 변천사를 현재의 관점으로만 수정하려고 하는 것이다.[14] 문화재로 등재되긴 했지만 순수한 택견이 인정받은 건 아니다. 마지막 태껸꾼 송덕기에게 순응하기보다 현대화에 맞추어 바꾸려 했던 신한승 계통에서 주도했기 때문이다.[15] 정작 가라데는 배운 적 없이 책으로 외형만 배운 독립운동가 출신이다.[16] 단, 사인웨이브 이론의 정립 자체는 캐나다 망명 이후이다.[17] 당시 태권도는 그냥 남한 내에서 한국인만을 위한 무술이었고, 외국에선 레알 듣보잡 수준이었다. 그냥 유배 수준이란 얘기..[18] 송덕기가 유난히 불친절한 스승이었던 탓도 있다. 송덕기 밑에서 끝까지 배운 도기현, 이준서, 고용우가 정말 대단한 것.[단,] 태권도와 가라데의 가장 큰 차이인 겨루기는 다른 사람과 겨루는 것을 당연시했던 택견에서 유래됐다는 사실이 지배적이다.[19] 『태권도지침』최홍희,1966[20] 후에 태권도 통합의 주요한 5대 도장중 하나[21] 태껸과 태권도 양측에서 모두 중요한 존재감을 지니는 인물이다. 후에 육군사관학교 무술 교관과 태수도협회(태권도협회)의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22] 초기 태권도인들의 택견에 대한 시선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당시 한국인들이 접했던 무술들은 북파 소림권 계열 혹은 가라데, 혹은 서구식 레슬링 정도로 한정되었던 환경임을 감안해야한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에 봐도 택견은 상당히 특이한데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23] 목조 초가집을 다 무너뜨리고 철근콘크리트 아파트를 짓겠다는 관점과 유사하다. 당시 한국인 무술가들에게 태껸은 그 정도 존재였다.[24] 오심 문제 때문인지 이후 베이징 올림픽 때부터는 폐지되었다.[25] 단순히 발펜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식 룰은 강하고 정확한 자세로 차야 한다. 어떻게 보면 유도의 룰이랑 비슷한데, 이 룰이 판정논란이 많아서 전자호구로 대체한 것.[26] 태껸춤이 있긴 하나 자세히 공개되진 않았기에 무엇이라 함부로 추측하진 못한다. 택견의 모든 기술을 배운 택견꾼이 전수받는 것.[27] '조선시대 말기의 노인들의 취향에 맞춘 전통은 부끄러운 것이다.'. 이것이 당시 젊은 무술가, 나아가서는 한국사회 전반의 눈높이였다.[28] 물론 이 가라데도 중국 남권을 받아들인 오키나와 전통 무술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