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 에이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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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 avery
1908.2.26 ~ 1980.8.26
텍사스 주 출신 미국인 애니메이터이자 성우.
에이버리가 애니메이션 경력을 시작한 때는 1928년으로, 처음엔 로스엔젤레스에서 몇달간 페인트칠, 과채상 보조 등의 여러 알바를 전전하다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윙클러 스튜디오에 입사해 오스왈드 단편의 셀 잉크 작업을 맡기 시작했고, 얼마 후 유니버셜 스튜디오 카툰즈로 이직해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활동을 시작했다. 입사한 처음엔 잉크 작업 담당으로 일했으나 이듬해(1931년)부터 5년여 간 빌 놀런(bill nolan) 휘하의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며 오스왈드 래빗 단편[2] 의 원화를 그렸다. 한창 업무를 하던 1933년 여름, 스튜디오 사무실에서 순간 페이퍼 클립이 그의 왼쪽 눈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시력을 잃었지만 다행히 활동에 지장을 주지는 못했다. 훗날 오스왈드 단편 중 두 단편의 감독을 맡은 것에 대해 끔찍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3]
a wild hare 영상.
자신에게 불만족스러운 환경에 있었던 유니버설 스튜디오 카툰즈를 1935년 4월 퇴사한 후 미리 만나던 여친과 결혼해 오리건에서 신혼생활을 즐겼지만, 자금이 떨어지자 로스엔젤레스로 복귀해 당시 워너브라더스의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였던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 구직을 요청했다. 에이버리는 리언 슐레진저에게 자신이 경험 많은 감독이라고 살짝 거짓말을 쳤지만 이내 고용되었다고 한다.[4] 감독이 2명뿐이던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서 3번째 레귤러 감독으로 배치되었고, 근무하는 직원 규모가 크게 늘어나 새 스탭이 일할 작업 공간이 협소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스튜디오 주변에 있던 5방짜리 벙갈로로 밥 크렘펫, 척 존스, 버질 로스, 시드 서덜랜드와 함께 이사했는데, 여기서 만들어진 작업실은 'termite terrace'(흰개미 테라스)란 별명을 얻었다. 첫 작품으로 텍스 에이버리는 gold diggers of `49[5] 를 비롯한 초기 단편에서 포키 피그를 디즈니 풍의 현실주의적으로 돼지스러운 묘사에서 탈피시켜 만화풍 캐릭터로 묘사하기 시작하면서 독창적인 캐릭터 연출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porky`s duck hunt에서 처음 등장한 대피 덕한테 이전까지 드물던 통제불능적 성격과 웃음소리를 질러대는 묘사를 덧입혔다. 이후 1940년의 a wild hare에서 카메오 캐릭터에 불과하던 벅스 버니와 엘머 퍼드의 디자인을 확정시킴과 더불어 캐치프레이즈를 추가해 배우적인 유머 구사를 덧대어냈다.
jerky turkey 영상.
1941년 개봉된 the heckling hare에서 결말의 개그 씬이 일부 편집당한 걸로 인해[6] 루니툰 제작자인 리언 슐레진저(leon schlesinger)와 큰 갈등을 빚었고, 에이버리는 워너브라더스를 떠나 잠시 파라마운트에서 (이전에 제작한 실사 콘셉 장면을 활용해) Speaking of Animals 시리즈 중 3편을 작업한 후[7] 같은해 가을 메트로-골드윈-메이어로 이직해 애니메이션 활동을 계속해나갔다.[8] MGM은 에이버리가 워너브라더스에서 일하던 때보다 많은 예산과 수준 높은 제작 환경을 지원했고, 보다 개성적인 개그와 캐릭터 동작 구사에 간접적인 촉매제가 되었다. 그 결과로 1942년 개봉된 선전 애니메이션 the blitz wolf는 아카데미상 단편 카툰 부문 수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기도 했고,[9] 디자인한 캐릭터들인 드루피, 스크루이 스퀴얼(screwy squirrel)[10] , 블래키(blackie the cat) 단편을 포함해 the red hot riding hood(1943)에서 빨간 두건과 늑대를 베이스로 각색한 단편 카툰은 에이버리의 대표격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1950년 작업 중 빚어진 과로를 풀기 위해 1년을 휴식했고, 그 사이 월터 란츠 스튜디오에서 이직한 애니메이터 딕 런디가 드루피 & 바니 베어 단편의 감독을 맡으면서 복귀 후엔 얼마간 런디와 공동 감독으로 단편 제작에 임했다. 몇년 전 파라마운트 케이스로 인한 카툰 제작 예산 감소로 인하여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 디자인과 배경도 UPA처럼 심플한 디자인과 그림체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53년엔 mgm을 나와 옛 일터인 유니버설 픽쳐스(의 월터 란츠 스튜디오)로 이직했지만 칠리 윌리 등의 단편 제작을 비롯해 몇 편밖에 제작하지 않았고, 1955년 유니버설을 비롯한 극장용 애니 업계에서 물러난 후엔 레이드, 브리토-반디토(brito-bandito), 쿨에이드 등의 TV 광고 단편 애니 제작에 집중했다.
이후 가정 생활은 순탄하지 못하여 http://michaelbarrier.com/Essays/JonesAveryLetter/JonesAveryLetter.html에 의하면, 1970년대 초 아들이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한 것과 더불어 이혼을 겪으면서 무척 우울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11] 말년(1980년)엔 MGM에서 활약한 메이저 감독 윌리엄 해나와 조셉 바베라의 해나-바베라 프로덕션 애니메이션 The Kwicky Koala Show[12] 의 원작자를 맡았는데, 얼마 안 지난 8월 26일 캘리포니아 주의 세인트 조셉 병원에서 악화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13]
1920년대 ~ 1930년대 초기의 극장용 단편 애니들에서 단순하고 평면적인 스토리텔링과 뮤지컬에 치중된 유머 연출에서 벗어나 인기 매체인 영화에서 활용한 슬랩스틱 개그와 유머 구사를 애니메이션에서 광범위하게 묘사한 연출을 시도해, 당시 터미트 테라스에서 함께 일했던 밥 크렘펫, 척 존스 등 동료 애니메이터들과 후대의 미국 애니메이터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고, 현대기의 미국 애니메이션에 막대한 영향력을 남긴 애니메이터이자 빠질 수 없는 감독 중 1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생전 에이버리가 1번째로 창작한 캐릭터 대피 덕의 헐벗은 모습과 민폐를 치며 광기스러운 웃음을 내지르는 모습은 동시기 월터 란츠 스튜디오에서도 비슷한 민폐형 캐릭터가 활약하는 딱따구리를 제작하는 등 당시 애니메이터들의 참고 작품이 되기도 하였고, 캐릭터들이 무척 빠르게 움직이는 씬, 그림자 캐릭터 연출, 과장된 리무진 묘사 활용 등의 과장스런 개그 및 유머들은 현대기 미국 애니메이션 코미디 & 개그 연출의 발전에 상당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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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가 아예 영화 필름의 셀을 벗어났다 들어오는 것과 관객들에게 농담을 건네는 제4의 벽을 돌파하는 연출과 더불어, 신체의 과장된 동작이 나온 개그를 애니메이션에 덧입혀 대중화시킨 연출가로 관련 역사가들한테 고평가를 받는데, 생전엔 그의 작품들과 연출이 대중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후 80년대 후기(미국 애니의 현대기)의 미국 애니메이션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고 제작된 다큐멘터리들과, 그가 제작한 단편들이 지속적으로 재방영되기 시작했다. DVD의 발매와 인터넷의 영향으로 그의 팬덤이 나타나기 시작해, 많은 업계인들이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그의 애니메이션 연출에 대해 언급하는 등 전반적인 재조명을 받았다. 2020년부턴 그의 작품들을 리마스터링한 블루레이 tex avery screwball classics가 발매되기 시작했다.
http://www.dailymotion.com/video/xkea8u_a-conversation-with-tex-avery_shortfilms
말년에 직접 인터뷰한 영상으로, 몇 안되는 생전 육성을 들을 수 있다.[16]
"In a cartoon you can do anything."[1]
1. 개요
Tex avery
1908.2.26 ~ 1980.8.26
텍사스 주 출신 미국인 애니메이터이자 성우.
2. 생애
에이버리가 애니메이션 경력을 시작한 때는 1928년으로, 처음엔 로스엔젤레스에서 몇달간 페인트칠, 과채상 보조 등의 여러 알바를 전전하다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윙클러 스튜디오에 입사해 오스왈드 단편의 셀 잉크 작업을 맡기 시작했고, 얼마 후 유니버셜 스튜디오 카툰즈로 이직해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활동을 시작했다. 입사한 처음엔 잉크 작업 담당으로 일했으나 이듬해(1931년)부터 5년여 간 빌 놀런(bill nolan) 휘하의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며 오스왈드 래빗 단편[2] 의 원화를 그렸다. 한창 업무를 하던 1933년 여름, 스튜디오 사무실에서 순간 페이퍼 클립이 그의 왼쪽 눈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시력을 잃었지만 다행히 활동에 지장을 주지는 못했다. 훗날 오스왈드 단편 중 두 단편의 감독을 맡은 것에 대해 끔찍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3]
a wild hare 영상.
자신에게 불만족스러운 환경에 있었던 유니버설 스튜디오 카툰즈를 1935년 4월 퇴사한 후 미리 만나던 여친과 결혼해 오리건에서 신혼생활을 즐겼지만, 자금이 떨어지자 로스엔젤레스로 복귀해 당시 워너브라더스의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였던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 구직을 요청했다. 에이버리는 리언 슐레진저에게 자신이 경험 많은 감독이라고 살짝 거짓말을 쳤지만 이내 고용되었다고 한다.[4] 감독이 2명뿐이던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서 3번째 레귤러 감독으로 배치되었고, 근무하는 직원 규모가 크게 늘어나 새 스탭이 일할 작업 공간이 협소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스튜디오 주변에 있던 5방짜리 벙갈로로 밥 크렘펫, 척 존스, 버질 로스, 시드 서덜랜드와 함께 이사했는데, 여기서 만들어진 작업실은 'termite terrace'(흰개미 테라스)란 별명을 얻었다. 첫 작품으로 텍스 에이버리는 gold diggers of `49[5] 를 비롯한 초기 단편에서 포키 피그를 디즈니 풍의 현실주의적으로 돼지스러운 묘사에서 탈피시켜 만화풍 캐릭터로 묘사하기 시작하면서 독창적인 캐릭터 연출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porky`s duck hunt에서 처음 등장한 대피 덕한테 이전까지 드물던 통제불능적 성격과 웃음소리를 질러대는 묘사를 덧입혔다. 이후 1940년의 a wild hare에서 카메오 캐릭터에 불과하던 벅스 버니와 엘머 퍼드의 디자인을 확정시킴과 더불어 캐치프레이즈를 추가해 배우적인 유머 구사를 덧대어냈다.
jerky turkey 영상.
1941년 개봉된 the heckling hare에서 결말의 개그 씬이 일부 편집당한 걸로 인해[6] 루니툰 제작자인 리언 슐레진저(leon schlesinger)와 큰 갈등을 빚었고, 에이버리는 워너브라더스를 떠나 잠시 파라마운트에서 (이전에 제작한 실사 콘셉 장면을 활용해) Speaking of Animals 시리즈 중 3편을 작업한 후[7] 같은해 가을 메트로-골드윈-메이어로 이직해 애니메이션 활동을 계속해나갔다.[8] MGM은 에이버리가 워너브라더스에서 일하던 때보다 많은 예산과 수준 높은 제작 환경을 지원했고, 보다 개성적인 개그와 캐릭터 동작 구사에 간접적인 촉매제가 되었다. 그 결과로 1942년 개봉된 선전 애니메이션 the blitz wolf는 아카데미상 단편 카툰 부문 수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기도 했고,[9] 디자인한 캐릭터들인 드루피, 스크루이 스퀴얼(screwy squirrel)[10] , 블래키(blackie the cat) 단편을 포함해 the red hot riding hood(1943)에서 빨간 두건과 늑대를 베이스로 각색한 단편 카툰은 에이버리의 대표격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1950년 작업 중 빚어진 과로를 풀기 위해 1년을 휴식했고, 그 사이 월터 란츠 스튜디오에서 이직한 애니메이터 딕 런디가 드루피 & 바니 베어 단편의 감독을 맡으면서 복귀 후엔 얼마간 런디와 공동 감독으로 단편 제작에 임했다. 몇년 전 파라마운트 케이스로 인한 카툰 제작 예산 감소로 인하여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 디자인과 배경도 UPA처럼 심플한 디자인과 그림체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53년엔 mgm을 나와 옛 일터인 유니버설 픽쳐스(의 월터 란츠 스튜디오)로 이직했지만 칠리 윌리 등의 단편 제작을 비롯해 몇 편밖에 제작하지 않았고, 1955년 유니버설을 비롯한 극장용 애니 업계에서 물러난 후엔 레이드, 브리토-반디토(brito-bandito), 쿨에이드 등의 TV 광고 단편 애니 제작에 집중했다.
이후 가정 생활은 순탄하지 못하여 http://michaelbarrier.com/Essays/JonesAveryLetter/JonesAveryLetter.html에 의하면, 1970년대 초 아들이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한 것과 더불어 이혼을 겪으면서 무척 우울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11] 말년(1980년)엔 MGM에서 활약한 메이저 감독 윌리엄 해나와 조셉 바베라의 해나-바베라 프로덕션 애니메이션 The Kwicky Koala Show[12] 의 원작자를 맡았는데, 얼마 안 지난 8월 26일 캘리포니아 주의 세인트 조셉 병원에서 악화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13]
3. 특징
1920년대 ~ 1930년대 초기의 극장용 단편 애니들에서 단순하고 평면적인 스토리텔링과 뮤지컬에 치중된 유머 연출에서 벗어나 인기 매체인 영화에서 활용한 슬랩스틱 개그와 유머 구사를 애니메이션에서 광범위하게 묘사한 연출을 시도해, 당시 터미트 테라스에서 함께 일했던 밥 크렘펫, 척 존스 등 동료 애니메이터들과 후대의 미국 애니메이터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고, 현대기의 미국 애니메이션에 막대한 영향력을 남긴 애니메이터이자 빠질 수 없는 감독 중 1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생전 에이버리가 1번째로 창작한 캐릭터 대피 덕의 헐벗은 모습과 민폐를 치며 광기스러운 웃음을 내지르는 모습은 동시기 월터 란츠 스튜디오에서도 비슷한 민폐형 캐릭터가 활약하는 딱따구리를 제작하는 등 당시 애니메이터들의 참고 작품이 되기도 하였고, 캐릭터들이 무척 빠르게 움직이는 씬, 그림자 캐릭터 연출, 과장된 리무진 묘사 활용 등의 과장스런 개그 및 유머들은 현대기 미국 애니메이션 코미디 & 개그 연출의 발전에 상당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image]
캐릭터가 아예 영화 필름의 셀을 벗어났다 들어오는 것과 관객들에게 농담을 건네는 제4의 벽을 돌파하는 연출과 더불어, 신체의 과장된 동작이 나온 개그를 애니메이션에 덧입혀 대중화시킨 연출가로 관련 역사가들한테 고평가를 받는데, 생전엔 그의 작품들과 연출이 대중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후 80년대 후기(미국 애니의 현대기)의 미국 애니메이션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고 제작된 다큐멘터리들과, 그가 제작한 단편들이 지속적으로 재방영되기 시작했다. DVD의 발매와 인터넷의 영향으로 그의 팬덤이 나타나기 시작해, 많은 업계인들이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그의 애니메이션 연출에 대해 언급하는 등 전반적인 재조명을 받았다. 2020년부턴 그의 작품들을 리마스터링한 블루레이 tex avery screwball classics가 발매되기 시작했다.
4. 여담
- 척 존스와는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 내부의 속칭 '터미트 테라스'라 불린 작업실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활약한 절친 사이였으며, 말년인 1975년에 서로 밥 크렘펫에 대한 견해를 응답하는 편지 #를 보낸 적도 있었다. 척 존스는 그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몇일 뒤 발행한 로스엔젤레스 트리뷰 신문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기고했다. - 기사 이미지 당시 스튜디오 내부의 애니메이터와 프리즈 프리랭(friz freleng)을 포함한 감독들과도 별다른 탈 없이 원만한 관계였지만 밥 크렘펫에 대해선 (위의 편지에서 나온 이야기로 인하여) 말년에 애매하게 생각했던 듯하다.
- 게리 모리스는 에이버리의 연출 방식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호평하였다. - 무엇보다도 에이버리는 워너 브라더스의 모태 스타일을 디즈니 스타일의 감성에서 멀어지게끔 했고, 에이버리의 속도, 풍자 및 아이러니를 높이 평가한 성인들과 논스톱 액션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동등히 어필하는 만화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지도하에 디즈니의 '귀엽고 깜찍한' 생물은 벅스 버니와 같은 끊이지 않는 지혜, 포키 피그와 같은 사랑스러운 연극 또는 대피 덕과 같은 눈부신 미치광이로 변모했습니다. 디즈니가 이끄는 시장이던 클래식 동화조차도 그에 의해 변형되었으며, 레드 라이딩 후드와 같은 무고한 여주인공을 섹시한 재즈 아가씨로 만들어냈습니다. 에이버리는 또한 끊임없이 만화의 구조물을 깨고 캐릭터가 최종 크레딧에서 도약하거나 주연했던 만화의 플롯에 격렬히 반대하거나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함으로써 인텔리적으로 열중했습니다.[14]
- 안노 히데아키는 1996년 엑스포에서 자신이 톰과 제리랑 텍스 에이버리를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유아사 마사아키도 영향을 주로 받은 작품으로 인터뷰에서 텍스 에이버리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했다.
- 1926년 텍사스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외치고 다닌 what`s up doc?이란 캐치프레이즈가 있었는데 이 말은 나중에 벅스 버니가 써먹는 대사로 자리잡았다.
- 에이버리가 (빨간 두건에서 모티브를 따와) 디자인한 캐릭터 레드는 톰과 제리 TV 스페셜에서 몇번 조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 딕 엔터테인먼트의 1990년대 말 작품 중 텍스 에이버리와 동명의 작품이 있다. 정식 제목은 The Wacky World of Tex Avery로, 에이버리 본인과는 사실상 무관한 작품.#[15]
5. 관련 영상
http://www.dailymotion.com/video/xkea8u_a-conversation-with-tex-avery_shortfilms
말년에 직접 인터뷰한 영상으로, 몇 안되는 생전 육성을 들을 수 있다.[16]
6. 관련 작품
- 워너 브라더스 - 루니 툰 단편 61편 감독 & 제작(루니 툰/에피소드 참조.)
-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 blitz wolf, the early bird dood it(1942)
- dumb-hounded, red hot riding hood, who killed who, one ham's family, what's buzzin' buzzard(1943)
- screwball squirrel, batty baseball, happy-go-nutty, big heel-wahta(1944)
- the screwy truant, the shooting of dan mcgoo, jerky turkey, swing shift cinderella, wild and woolfy(1945)
- lonesome lenny, the hick chick, northwest hounded police, henpecked hoboes(1946)
- hound hunters, red hot rangers, uncle tom's cabana, slap happy lion, king-size canary(1947)
- what price fleadom, little 'tinker, half-pint pygmy, lucky ducky, the cat that hated people(1948)
- bad luck blackie, senor droopy, the house of tomorrow, doggone tired, wags to riches, little rural riding hood, out-foxed, the counterfeit cat(1949)
- ventriloquist cat, the cuckoo clock, garden gopher, the chump champ, the peachy cobbler(1950)
- cock-a-doodle dog, daredevil droopy, droopy's good deed, symphony in slang, car of tomorrow, droopy's double trouble(1951)
- magical maestro, one cab's family, rock-a-bye bear(1952)
- little johnny jet, t.v. of tomorrow, the three little pups(1953)
- drag-a-long droopy, billy boy, homesteader droopy, the farm of tomorrow, the flea circus, dixieland droopy(1954)
- field and scream, the first bad man, deputy droopy, cellbound(1955)
- millionaire droopy(1956), cat's meow(1957)
- 월터 란츠 스튜디오(유니버셜 픽쳐스)
- i'm cold(1954), crazy mixed up pup, the legend of rockabye point, sh-h-h-h-h-h(1955)
- 해나-바베라 프로덕션 - Kwicky Koala - 원작자이자 유작으로, 1980년 방영.
- Tex avery : the king of cartoons - 애니메이션 역사가 조 아담슨(joe adamson)이 에이버리와 나눈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는 도서. 1975년 출간.
[1] 그가 제작한 단편 screwball squirrel에서 나온 대사이자, 1975년 출간된 Tex Avery: King of Cartoons에도 기재되었을 만큼 그의 연출과 영향력을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다..[2] 이 시기의 오스왈드는 디즈니가 판권을 상실한 상태였다.[3] tex avery, king of cartoons - 1975(저자 조 아담슨), 애니메이션 역사가 (michael barrier)마이클 배리어의 언급(2003)) 출처.[4] 마이클 배리어의 언급(2003)[5] 여기서 49는 골드 러쉬가 시작된 1849년을 말함.[6] https://en.wikipedia.org/wiki/The_Heckling_Hare#Original_ending 참조. 원본(감독판) 필름은 유실된 상태이다.[7] 애니메이터 martha sigall의 언급(2005년)[8] 유니버설부터 워너 브라더스까진 fred avery 명의로 표기되었고 현재의 tex avery 명의 표기는 mgm에서부터인데, 당시 mgm의 톰과 제리를 만들던 제작자 프레드 큄비(fred quimby)의 이름과 헷갈리지 않기 위해서 표기를 변경한 것이 아니냔 추측이 있다.[9] 총통각하의 낯짝에 밀려 수상받진 못함.[10] 의미상으론 나사빠진 다람쥐(과격하게 보면 엿같은 다람쥐로 볼수 있음).[11] 그나마 딸인 낸시 에이버리 어클리(nancy avery arkley)와 그녀의 자녀들은 생존해 있다.[12] 그가 작고한 뒤인 1981년에 방영했다.[13] 구글링 검색창의 흡연 사진으로 보면 이 습관이 악영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14] Above all,(Avery) steered the Warner Bros. house style away from Disney-esque sentimentality and made cartoons that appealed equally to adults, who appreciated Avery's speed, sarcasm, and irony, and to kids, who liked the nonstop action. Disney's "cute and cuddly" creatures, under Avery's guidance, were transformed into unflappable wits like Bugs Bunny, endearing buffoons like Porky Pig, or dazzling crazies like Daffy Duck. Even the classic fairy tale, a market that Disney had cornered, was appropriated by Avery, who made innocent heroines like Red Riding Hood into sexy jazz babes, more than a match for any Wolf. Avery also endeared himself to intellectuals by constantly breaking through the artifice of the cartoon, having characters leap out of the end credits, loudly object to the plot of the cartoon they were starring in, or speak directly to the audience.[15] 단, 창작자는 이 작품을 텍스 에이버리 작품에 대한 오마쥬라고 소개했으며, 텍스 에이버리의 딸이었던 낸시 에이버리가 자식들의 대학교 등록금을 부담하고자 작품에 텍스 에이버리의 이름을 쓰는 데 동의했다.#[16] 1975년 개봉된 벅스 버니 슈퍼 스타에서 인터뷰한 애니메이터 중 1명으로도 참여하였다. 원래는 로버트 맥킴슨, 멜 블랭크, 척 존스도 인터뷰할 예정이었으나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