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존스

 

'''Chuck Jones'''
[image]
'''본명'''
찰스 마틴 존스 (Charles Martin Jones)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12년 9월 21일, 미국 워싱턴 스포케인
'''사망'''
2002년 2월 22일 (향년 90세)
'''학력'''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직업'''
애니메이터, 작가, 영화제작자, 각본가, 만화가, 화가
'''활동'''
1933 ~ 2000
'''배우자'''
도로시 웹스터 (1935~1978)
마리안 던 (1981~2002)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image]
'''이름'''
'''척 존스
CHUCK JONES
'''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95년 2월 13일'''
'''위치'''
'''7007 Hollywood Blvd.'''
[image]
애니메이터 프리즈 프리랭(friz freleng)과 함께.[1]
1. 생애
2. 특징
3. 여담
4. 관련 영상
5. 주요 작품


1. 생애


척 존스가 태어난 지 몇년 후 가족들은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를 갔는데, 자서전 duck amuck에 의하면 자기 미술 재능은 캘리포니아에서 실패한 사업가였던 아버지가 종종 쓸모없어진 연필, 문구들을 나눠줬는데 이때 그림들을 그리게 된 영향으로 축적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미술 학교의 수업에서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가치있는 것을 그리기 전에 10만장의 졸작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에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Chouinard Art Institute[2]를 졸업한 후엔 어브 아이웍스의 스튜디오에서 셀화 세탁을 맡으며 일했는데, 여기서 첫번째 부인인 도로시 웹스터를 만났다. 얼마 뒤(1933년), 루니 툰 단편을 제작하던 워너 브라더스 내부의 스튜디오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서 보조 애니메이터로 활동해 1935년엔 애니메이터로 승진했고, 이때 텍스 에이버리 의 '에이버리 유닛' 중 1명이 되었는데 당시 워너브라더스 내부 스튜디오엔 새 애니메이터들이 일할 작업 공간이 협소한 상태라 스튜디오 근처의 소규모 작업소로 밥 크렘펫, 버질 로스, 시드 서덜랜드와 이사하였다. 이 작업소는 터미트 테라스(Termite terrace)란 별명으로도 불렸다.

초창기(1940년)에 감독한 단편 중 하나로 https://tvtropes.org/pmwiki/pmwiki.php/WesternAnimation/ElmersCandidCamera 생전 흑역사로 여겼다. (elmer`s candid camera)
1937년엔 감독으로 승진한 밥 크렘펫 휘하의 '크렘펫 유닛'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1938년) 감독에 등단함으로써 루니 툰의 정규 감독 직위에 올랐다. 1940년대 초엔 스튜디오 내부의 애니메이터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당시 프로듀서이던 리언 슐레진저와 짐시 마찰을 빚은 경력도 있었으며, 자신은 메인 감독으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정작 노조 가입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3] 진주만 공습 직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영향으로 닥터 수스와 협력해 워너브라더스의 선전 애니메이션 이등병 스나푸(private snafu)의 감독진 중 1명으로도 일했고, 1940년대 후기부터 50년대까지 화성인 마빈, 페페 르퓨, 로드 러너, 미시건 프록, 클로드 캣 등 자신이 창작한 다양한 루니 툰 캐릭터들의 디자인과 감독을 맡았다. 같은 시기 텍스 에이버리의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연출의 슬랩스틱과 월트 디즈니, 톰과 제리의 자연스럽고 평균적인 슬랩스틱과는 프레임 동작과 연출에서부터 상반된 스타일을 보이기 시작했다.[4]
워너 브라더스가 1953년에 잠시 애니메이션 부서를 폐쇄하자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으로 이직해 4개월간 잠자는 숲속의 미녀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었다.[5] 그 뒤 1950년대의 대부분을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에서 일했으며, 1962년 부인 도로시와 UPA에서 제작한 영화 gay purr-ee의 시나리오를 작성한 것이 독점 계약 위반으로 워너브라더스에 들켜 해고당했다. 이듬해(1963년)엔 레스 골드만(les goldman)과 함께 시브 타워 12 프로덕션을 설립해 4년간 톰과 제리 단편 제작에 임하기도 했다.[6] 시브 타워 12 프로덕션은 1년도 안 지나 mgm에 인수되어 명칭이 바뀌었고, 톰과 제리 단편을 제작 중이던 1966년엔 TV 스페셜 How the Grinch Stole Christmas!의 감독을 맡았으며, MGM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2편을 제작하기도 했다.
1970년 mgm의 카툰 스튜디오 폐쇄로 제작하던 the cat in the hat의 작업을 중단하였고, 척 존스 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하여 몇 년간 tv 스페셜 애니 제작에 집중했다. 1976년 워너 브라더스에 복귀해 90년대까지 루니 툰 일부 단편들과 벅스 버니/로드 러너 무비[7]의 감독을 맡았다. 이듬해엔 시카고-트리뷴 ny 뉴스 신디케이트에서 1년간 만화를 연재했는데, 연재가 끝난 1978년 도로시가 세상을 떠나자 1981년 만화 '릭 오 셰이'의 작가인 마리안 던과 결혼하였다.
1980, 90년대엔 딸 린다 존스가 설립한 린다 존스 엔터프라이즈에 자신이 제작한 카툰과 그를 패러디한 그림을 그리는 등의 활동 참여와 그렘린 2를 비롯한 몇몇 영화의 애니메이션 시퀀스 감독을 맡는 등 말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8] 2002년 2월 22일, 캘리포니아의 뉴 포트 비치에서 심장 마비가 발생해 세상을 떠났고 유골은 화장되어 바다에 흩뿌려졌다.

2. 특징


초창기 단편은 디즈니적인 영향이 많았지만 1940년대 초중반부터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는 등으로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해 40년대 후반부턴 애니메이션 단편에 시각적 구조[9]의 개그를 도입해 당시의 무작위, 연속적인 슬랩스틱 개그 구조와 차이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감상적인 개그 슬랩스틱[10]을 활용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1940년대 해나-바베라 콤비의 톰과 제리로 애니 업계에서 추격물 신드롬이 일어나던 무렵, 패러디이면서도 내부적 설정을 매우 단순화시킨 추격물 로드 러너를 제작했고, 동시기의 카툰 캐릭터가 대중의 이목을 얻기 위해 대부분 행동이 단순하게 연출되거나 평면적인 성격으로 묘사되는 경향에 반하여 자신이 창작한 와일리 코요테, 페페 르퓨, 찰리 독, 미시건 프록 등에선 시도하지만 결코 동정받지 못하는 결과와 캐릭터의 표정, 행동의 묘사를 섬세히 그려내 내면적인 목적[11]을 적절하게 캐릭터로 드러냄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블랙 코미디)를 덧입히는 시도를 하였다.
일부 캐릭터 디자인에선 입과 코가 없는 캐릭터로 화성인 마빈을 창작하거나 아예 얼굴 전체가 없는 캐릭터를 디자인하는 등 초현실적인 단순화도 드러나는데, 애니메이션 연출에선 1940년대 당시 애니 업계에서 주목받은 UPA의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에 영향받은 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출을 업계를 넘어서 아카데미 관계자도 눈여겨봤는지, 애니메이션 단편 영화 부문에 8번이나 노미네이트되어 2차례 수상하였으며(for centi-mental reasons, the dot and the line) 1996년 공로상을 수여하기에 이른다.[12],1993년 오글소프 대학의 명예 학위 수여와 1988년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일생 공로상 수여,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 선정 인물에 포함되는 등 20세기 애니메이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권위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척 존스가 확립한 캐릭터 구조(대피와 벅스의 대립, 일이 터지면 자기 이익에 앞장서는 대피, 대피와 포키의 파트너쉽)도 유명해져 1960년 방영된 벅스 버니 쇼부터 시작해 2015년 뉴 루니툰 쇼가 방영되기 전까지 루니 툰 프로그램에서 공식으로 활용되었었다.

3. 여담


  • 1940~50년대 당시 제작된 루니 툰 단편들을 그림체로 잘 살펴보면 감독한 작품들을 쉽게 구분해낼 수 있다.이미지 이미지 이는 프리즈 프리랭, 로버트 매킴슨 등이 감독한 작품들과도 확연히 표정이 차이가 나 있다.
  • 1942년 감독한 the dover boys 단편은 워너브라더스가 첫번째로 일부 씬에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한 애니메이션으로 이후 루니 툰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자서전 duck amuck에 따르면 카툰 제작자 리언 슐레진저와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 임원들은 이 만화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디즈니와 같은 애니메이션을 버리길 원해 해고하려 했으나 그를 대체할 감독을 쉽사리 찾아내지 못해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 미국의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도서 Chuck Amuck: The Life and Times of an Animated Cartoonist에서 척 존스에 대해 "월트 디즈니가 내게 꿈꾸는 법을 알려준 최초의 애니메이터였다면, 척 존스는 그 꿈을 비웃게 만들어준 최초의 애니메이터"란 평가를 내렸다. 척 존스도 그에 못지 않게 월트 디즈니를 존경하였다고 하며, 1997년 자신의 85번째 생일 기념회에서 수년 간 여러 번 편지를 써가면서 디즈니와 상시적인 교류를 유지했고, 어느날 디즈니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편지를 쓰는 애니메이터("Well, of course, you're the only animator that ever wrote to me!")라 칭찬했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 황금기에서 활약한 미국인 애니메이터 중에서 장수한 몇 안되는 디렉터 중 1명으로, 월트 디즈니, 텍스 에이버리가 각각 60대와 70대에 세상을 떠난 걸로 보면 상대적으로 오래 생존한 셈.[13] 또한 루니 툰을 만들던 워너 브라더스 애니메이터 중 유일하게 아카데미상을 수여받은 애니메이터이다.(1996년 수상)
  • 텍스 에이버리와는 1935년 워너 브라더스 내부의 카툰 스튜디오에서 만나 '터미트 테라스 유닛'으로 활동해나가며 인연을 쌓은 절친 관계였다. 1941년 텍스가 mgm으로 이직하면서 헤어졌지만 이후 1975년에 애니메이션 감독 밥 크렘펫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1980년 나온 에이버리의 사망 소식에 로스엔젤레스 트리뷰 신문지에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기사 이미지 게재했다.
  • 프리즈 프리랭, 로버트 매킴슨 등의 감독과 애니메이터들과도 별다른 이야기 없이 서로 원만한 관계였지만, 밥 크렘펫에 대해선 1970년대에 워너를 떠난 이후로 잡지와 bugs bunny the superstar(1975년 영화)에서 동료 감독들의 기여를 포함하지 않고 자신이 벅스 버니와 포키 피그의 창시자라 지속적으로 말한 것을 두고 자기중심적이라고 비난했으며[14], 1975년부터 자신을 만난 모든 팬들한테 위의 (텍스 에이버리한테 보낸) 편지를 복사해 배포하기도 했다. 이에 밥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애니메이션 역사가 밀턴 그레이는 에세이에서(애니메이션 역사가 마이클 배리어 홈페이지 참조) 업계의 라이벌 중 1명에 의한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비방 캠페인이라고 반박했으며, 당시 에이버리의 비극적인 가정 생활로 인해 쉽게 그의 편이 되게끔 만들었고, 밥이 척의 비난을 알아챘지만 그에 대처하지 않고 오히려 깊게 슬퍼하였으며 척에 대해서도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척이 라이벌인 밥에게 위협을 느끼고 행동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척과 밥의 작품에 대해서 계속 찬사받기를 바란다고 말미에 언급하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고 모든 관계자들이 사망하면서 이 논란은 많이 사그라들었으며, 루니 툰 팬들도 척과 밥의 작품에 대해 호평하는 사람들이 각각 늘어나면서 논란이 재발할 여지도 사라진 상황이다. 프랭크 태쉬린은 척이 감독한 the beat that wasn't에 대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요점을 완전히 놓쳤다고 보았고, 곰이 담배를 무는 것에 대해 심리적인 성인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여 크레딧에 이름을 없앨 소송을 하려 했으나 원하는 것보다 문제가 더 많단 이유로 보류하였다고 할 만큼 말년엔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 생전 닥터 수스와도 친분이 있었는데,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선전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만나 인연을 쌓은 것으로 시작하여 훗날 그린치 TV 스페셜(1966년)과 호튼 TV 스페셜(1970년)을 같이 제작하기도 했다. 전자의 스페셜은 21년간 CBS에서 크리스마스 스페셜로 재방송될 만큼 TV 스페셜의 고전으로 유명해졌으나, 척의 예술 스타일에 대해선 공감하지 않았단 언급을 인터뷰에서 하기도 했었다.
  • 195~60년대 당시 태동하던 미국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에 대해 훗날 인터뷰에서 'illustrated radio'(편집된 라디오)라 말하며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chuck jones conversation 64페이지 사실 척 존스가 작업해왔던 극장용 애니메이션들에 비하면 동화수도 적고 작붕도 심하며 퀄리티가 떨어지는지라 어쩔 수 없긴 하다.
  • 척 존스에 대한 정보를 수록한 공식 사이트가 존재한다.홈페이지
  • 1984년 개봉된 그렘린 1편에서 카메오로 출연했다.

4. 관련 영상



1996년 아카데미상 시상식 영상 중 일부. 로빈 윌리엄스가 사회자를 맡았다.

유튜버 Every Frame a Painting의 영상. 한글자막이 지원된다.

5. 주요 작품


  • 루니 툰 단편 카툰 209편(루니 툰/에피소드 문서 참조.)
  • 톰과 제리 단편 카툰 34편(톰과 제리/에피소드 문서 참조.)
  • UPA 제작 카툰 Hell-Bent for Election(1944), Gay Purr-ee(1962) - 후자는 척 존스가 해고된 원인을 제공함(원래는 UPA의 오랜 배급사인 콜럼비아 픽쳐스가 배급할 예정이었으나 1001 Arabian Nights의 흥행 실패로 워너브라더스가 배급을 맡았다.).
  • Bugs Bunny/Road Runner movie(1979) - 최초로 감독한 총집편 장편 영화.
  • The Dot and the Line(1965), The Bear That Wasn't(1967) - MGM에서 일할 때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후자는 루니 툰 스태프였던 프랭크 태쉬린의 작품이 원작.
  • How the Grinch Stole Christmas!(1966) - 최초로 감독, 제작을 맡은 닥터 수스 원작의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 The Pogo Special Birthday Special(1969) - 감독, 제작자, 성우
  • The Phantom Tollbooth(1970) - 애니메이션 피쳐 감독, 제작
  • Horton Hears a Who!(1970) - 두 번째로 닥터 수스 원작을 제작한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 The Cat in the Hat(1971) - 본래는 MGM 내부 스튜디오에서 제작 예정이었지만 폐업으로 인해 데파티-프리랭이 제작, 스토리보드만 담당.
  • A Cricket in Times Square(1973), A Very Merry Cricket(1973), Yankee Doodle Cricket(1975) - 크리캣 시리즈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 Rikki-Tikki-Tavi(1975), The White Seal(1975), Mowgli's Brothers(1976) - 키플링 원작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 The Great Santa Claus Caper(1978), The Pumpkin Who Couldn't Smile(1979) - Raggedy Ann and Andy 시리즈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 Daffy Duck for President(1997) - 당초 애니메이션은 2000년 공개 예정이었지만 2004년으로 연기되었다.
  • For Centi-mental Reasons, The Dot and The Line, So much for So little - 아카데미 상 애니메이션 단편 영화 부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영화 부문 수상작들
  • Bugs and Daffy's Carnival of the Animals(1976) - 워너브라더스 복귀 후 처음으로 제작한 루니 툰 애니메이션.
  • A Connecticut Rabbit in King Arthur's Court(1978)
  • Freeze Frame(1979)
  • Duck Dodgers and the Return of the 24½th Century(1980) - duck dodgers and the 24 1/2th century(1953)의 속편.
  • Bugs Bunny's Bustin' Out All Over(1980) - tv 스페셜 (Spaced Out Bunny, Soup or Sonic,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Bunny 제작.)
  • Chariots of Fur(1994), Another Froggy Evening(1995), Superior Duck(1996), From Hare to Eternity(1997) - 감독, 제작자, 작가
  • Father of the Bird(1997), Pullet Surprise(1997) - 제작자
  • Peter and the Wolf(1995)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동명의 곡이 원작인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등등
[1] 1906~1995. 애니메이터 경력 초창기엔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다 1930년 워너브라더스로 이직해 활동하기 시작, 1933년 감독으로 승진하여 1938년 잠시 mgm으로 이직했으나 2년 후 복귀해 1962년까지 루니 툰 단편 제작에 참여했다. 이듬해 데파티-프리랭 설립자 중 1명으로 참여해 애니메이션 제작자로 활동했으며 1986년까지 현역으로 일했다.[2] 훗날 칼아츠의 모티브가 되는 대학.[3] 애니메이터 martha sigall의 언급(2005년).[4] 이 기간 동안 카툰 제작에 참여한 주요 애니메이터들은 모리스 노블, 아베 르비튜, 켄 헤리스, 벤 와샴으로, 모두 시브 타워 12 프로덕션으로 이직해 훗날 톰과 제리 단편 제작에 참여했다.[5] https://www.mouseplanet.com/8944/Chuck_Jones__Four_Months_At_Disney 링크 참조.[6] 시브 타워 12 프로덕션을 설립한 이듬해에 워너 브라더스의 카툰 스튜디오는 폐쇄되어 이후 1969년까지 루니 툰 제작은 외주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맡았다.[7] 척 존스 본인의 일부 작품들을 모은 총집편 영화.[8] 1996년 개봉된 루니 툰 단편 From Hare to Eternity에선 1995년 사망한 동료 감독 프리즈 프리랭의 이름이 배 갑판에 새겨져 있다.[9] 캐릭터가 무슨 행동을 할것을 추측하는 장면이 나오고 나서 그와 결과가 다른 개그, 묘사가 나오는 방식.[10] 이런 구분은 해나-바베라, 텍스 에이버리, 월트 디즈니, 월터 란츠 등이 제작한 작품과 척 존스가 제작한 루니 툰, 톰과 제리의 슬랩스틱을 비교하면 간단히 드러나는데, 전자가 돌발적인 연출에 이어지는 작화로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는 반면 후자는 프레임이 느릿한 경향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돌발적이게 느껴지지 않다는 차이점이 있다.[11] 페페 르퓨의 애정 행각, 와일리 코요테의 로드러너 잡기, 미시건 프록의 노래 부르기 등등.[12] 당시 사회를 진행하던 로빈 윌리엄스는 존스를 카툰의 오슨 웰스로 지칭하며 칭찬하기도 했다.[13] 다른 감독들은 윌리엄 해나조셉 바베라로, 각각 90대에 세상을 떠났다.[14] 밥의 모친이 당시 제작자 리언 슐레진저와 친분이 있던 사이라 다소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여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10년간 같은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성우 멜 블랭크도 자서전에서 함께 일해야 했던 최악의 감독이자 이기주의자라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