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가와 준
1. 개요
80년대 전반에 배우, 가수로 활동한 멀티 엔터테이너로 독특하다못해 괴기스러운 세계관과 퍼포먼스를 선보인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현재는 라디오 퍼스널리티 활동만 지속중이며 가수로는 비정기적으로만 활동하고 있다.
2. 약력
2.1. 초기
도쿄 신주쿠 구 출신이며 소학교 시절에는 통통한 체형이었는지 이지메를 당했고 살찐 야마시타 타츠로라는 놀림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의외로 아역배우 출신으로 초등학교 재학 중에 여동생인 토가와 쿄코와 함께 극단 히마와리에 입단한다. 아역 시절엔 거의 엑스트라 출연이 많았고 가끔 무대 배역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여동생에 비해 연기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평을 받거나 학업적인 문제로 인하여 퇴단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연극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애당초 본업이 가수보다는 배우인지라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당대 꽤 인기있던 TBS 테레비계열의 형사 부탁해! 라는 형사 드라마에 여경 역으로 캐스팅되어 다시 연기활동을 재개하고 1982년 9월 일본의 변기, 세면기기 회사인 토토의 비데 TV CM을 맡은 것이 전성기 브레이크의 계기가 된다. '엉덩이도 씻어 주면 좋겠다[1] '(...)라는 괴 캐치프레이즈였지만 이 CM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문제의 CM. 그 후로도 다년간 Toto의 CM을 맡게 된다.
기발한 CM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 전 토가와 준 본인은 엄격한 집안에서 일요일 외출 금지인 고교생활을 보냈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일요일 외출 금지가 풀렸다. 우연히 일요일에 영화를 보러 외출하던 중 히비야 공원에서 후일 같이 게르니카를 결성하게 되는 키보디스트 우에노 코우지의 노상 라이브를 보게 되어 팬이 된다. 팬에서 지인이 된 우에노 코우지를 따라 시부야의 록 카페에 드나들게 되는데 원래 아역배우 출신에 배우 지망이던 토가와 준은 가수활동을 할 생각이 없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토가와 준의 노래를 우에노 코우지가 맘에 들어하여 밴드를 결성해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2.2. 게르니카 시절
1979년에 시작해 3년간의 작업을 거쳐 1982년 6월, 토가와 준과 우에노 코우지의 콤비에 따로 작사담당과 아트워크, 의상담당으로 미술학도 오오타 케이이치가 합류한 게르니카가 결성되어 앨범 데뷔를 한다. 첫 앨범인 '개조에의 역동'은 일본 락계의 거물인 핫피 엔도,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호소노 하루오미가 프로듀서를 맡은 앨범이며 구식 폰트와 외계어에 준하는 가사가 들어있어 따로 오오타 케이이치가 작성한 설명집 소책자가 동봉되어 있다.
발표되자마자 구 다이쇼 시대의 다이쇼 모더니즘 컨셉의 복고풍으로 꽤 주목을 받았으나 생각보다 큰 반향은 없었는지 게르니카는 결국 활동을 중지하고 토가와 준은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하는 등 소일한다. 그 후 멤버 각각의 솔로앨범이 따로따로 발매되기에 이르는데 그 중 토가와 준의 솔로가 바로 玉姫様이다.
2.3. 야푸즈 시절
게르니카 활동 중지 이후 1983년, 玉姫様의 작사가인 사에키 코우지가 있던 밴드인 하루멘즈의 구성원들을 데리고 밴드 YAPOOS[2] 를 결성하여 다시 앨범을 작업한다. 이후로는 싱글보다는 대부분 앨범 위주의 활동을 하게 된다.
1984년 토가와 준 본인이 이오 요시후미와 공동 프로듀스로 발표한 앨범 玉姫様[3] 는 오리콘 14위까지 올라가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곧이어 출시된 라이브 앨범인 裏玉姫는 '토가와 준과 YAPOOS'명의로 발매되어 야푸즈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시절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 출연해서 행한 라이브는 한때 일본의 엽기 뮤지션(...)으로 알려져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때 즈음부터 모리타 카즈요시의 와랏테 이이토모나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테츠코의 방 같은 인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고 전반적으로는 나이 스물셋에 걸맞지 않은 동안과 퍼포먼스, 독특한 가사와 정신세계로 아이돌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디폴트 컨셉은 '이상한 여자(?)' 수준으로 대중에 인식되는 계기가 된다.
명의도 여러 번 바뀌었는데 대부분이 토가와 준 유닛이나 토가와 준, 그냥 YAPOOS 식으로 꽤 자주 바뀌었다.
1985년 3월 토가와 준 유닛 명의로 極東慰安唱歌(극동위안창가)라는 앨범을 발매한다. 역시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호소노 하루오미나 팀의 드러머인 다카하시 유키히로 등 중견급의 뮤지션들이 꽤 참여하였는데 호소노 하루오미의 곡 커버부터 중남미 민요, 동요, 오키나와 전통민요나 초등학교 교가, 오페라 파트의 일어버전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작품인데 의외로 소품집 비슷한 느낌 치고 오리콘 15위까지 올라가는 성적을 낸다.
동년 10월에는 그전까지의 소속사였던 알파 레코드에서 토가와 준의 개인 레이블인 HYS레이블을 떼어주었고 이에 힘입어 토가와 준 솔로 명의로 세번째 정규앨범인 好き好き大好き를 발표한다. 타이틀인 好き好き大好き는 경쾌하고 정신이 꽤 나가있는 가사로 후일 얀데레의 시초라는 소리도 듣게 되는 곡으로 아직까지 희자되고 있지만 의외로 수록곡 중에 싱글로 발매된 건 프랑스 곡의 리메이크인 さよならをおしえて이다. 굳이 야푸즈라고 칭해도 큰 차이가 없는 이유는 야푸즈의 메인 기타리스트인 다카에 타카오와 역시 베이시스트인 나카하라 노부오가 그대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6년 さよならをおしえて를 싱글 커트해서 활동한 다음 베스트 앨범 2장으로 한숨 돌린 토가와 준은 기존 알파 레코드에서 이적해 YAPOOS 명의로 쇼치쿠 계열인 테이치쿠 레코드에서 야푸즈 첫 앨범 ヤプーズ計画(야푸즈 계획)을 1987년 발매한다. 수록곡은 야푸즈 멤버들 5명이 2곡씩 각자 작곡해서 수록했고 작사의 대부분은 토가와 준 본인이 맡았다.
2.4. 다시 게르니카, 그리고...
이렇듯 8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야푸즈와의 활동 이후 1988년 우에노 코우지,오오타 케이이치와 함께 게르니카를 재결성한 토가와 준은 게르니카 2집 新世紀への運河(신세기로의 운하)를 발표한다. 버블시대답게 풀 오케스트라와 혼섹션의 구성으로 재시작된 게르니카 2집은 오리콘 차트 60위권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그저 숨고르기라는 듯 게르니카 2집 이후 야푸즈 명의의 2번째 앨범인 大天使のように(대천사처럼)을 발표하고 이는 오리콘 30위권에 올라가는 정도로 소소하게 히트한다. 그리고 1989년 발표한 게르니카3집과 본인 솔로 명의의 4집이 각각 오리콘 50위권, 70위권에 그치는 아쉬운 성과를 내며 토가와 준의 앨범 전성기도 끝나기 시작한다.이 시기의 토가와 준은 쇼치쿠 영화 시리즈인 낚시바보일지나 사내는 괴롭다네에 매진하게 되고 단발성으로나마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비치게 된다. 특히 낚시 바보 일지는 초기부터 90년대 중순의 시리즈까지 꾸준히 출연했다.
2.5. 다시 야푸즈. 종막
1991년, 토시바 EMI로 이적한 야푸즈의 서드 앨범인 ダイヤルYを廻せ!(다이얼 Y를 돌려라!)[4] 가 발표되지만 오리콘 60위권에 머무는 수준이었고 92년 발표한 다음 앨범인 다다이즘이나 95년의 라이브 앨범 ヤプーズの不審な行動(야푸즈의 의심스러운 행동) 모두 오리콘 40위권이나 차트 권외에 그친다. 기존 야푸즈 멤버들도 베이스의 나카하라 노부오를 제하면 거의 교체되다시피 하여 소속감도 점점 사라져가던 중 1995년 일이 터진다. 당시 레이블이었던 콜롬비아 레코드의 방향성과 개런티에 얽힌 분쟁, 서포트 멤버들의 잇따른 탈퇴와 교체에 이어 콜롬비아에서 무단으로 편집한 라이브 비디오가 발매되자 토가와 준은 자택에서 면도칼로 목을 긋는 자살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면도날이 경동맥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지라 목숨은 건졌으나 거짓으로 자살시도를 했다는 주간지나 스포츠 신문의 악평과 자해시에 나온 피로 방의 벽에 '皆憎(개증, 모두 증오한다)'이라고 써놓은 것으로 매스컴을 달군다.
2.6. 현재까지
자살시도 사건 이후 한동안 무대활동이나 뮤지컬에 집중하던 토가와 준은, 가끔 성우 미야무라 유코의 곡을 작사해준다거나 가끔씩 라이브를 하면서 소일하며 영화, 드라마 모두 활동을 금지한 채 인디즈로만 활동한다. 20th TOGAWA JUN이라는 타이틀의 커버곡으로만 구성된 데뷔 20주년 기념앨범이 2000년에 나온 것을 제외하면 거의 베스트 음반만 발매하게 된다. 20th TOGAWA JUN앨범은 인디즈 레이블에서 발매된 것 치고 굉장한 인기를 얻어 후에 재발매가 된다.
2002년에 근 7년만의 정규앨범인 霊長類ヤプーズ品目ヒト科(영장류 야푸즈 품목 인간과(...))를 발매하려 했으나 동생 토가와 쿄코가 자택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나 발매가 무기한 연기된다. 큰 충격을 받고 무대활동조차도 재개하지 않을 정도로 두문불출하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2007년의 라디오 퍼스널리티였다. 올 나이트 닛폰의 하트 온센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본인의 활동 당시 심정이나 의외로 소심한 성격, 동생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전성기 시절의 파격보다는 본연의 모습을 많이 드러냈다. 현재까지도 작가인 츠키노 코지와 함께 하트 온센을 꾸준히 진행중이며 그 외의 음악 활동이나 연기 활동은 거의 없다.
2016년에는 '''노이즈'''밴드인 비상계단(非常階段, Hijokaidan)[5] 과 합작 앨범을 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생각이 바뀌었는지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했으며 음악 방송이나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3. 음악성
본업은 배우라지만 최소한 본인의 입지를 널리 알리게 된 건 음악적인 활동이다.
싱어송라이터까지는 아니었으나 여러 작곡자에게 곡을 받았고 굉장히 다양한 컨셉을 내세웠는데, 게르니카의 쇼와시절 컨셉부터 야푸즈의 여성 락커+여고생 컨셉, 본인 솔로의 신들렸다고도 표현할 정도로 괴이한 퍼포먼스의 컨셉까지도 모두 소화해냈다. 물론 기본 컨셉은 '이상한 여자'(...)
게르니카 활동시엔 주로 다이쇼 모더니즘 컨셉의 곡을 발표했으나 생각보다 크게 인기를 끈 곡은 별로 없다.
그나마 대중적인 노선의 곡인 さよならをおしえて
토가와 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곡인 好き好き大好き
가사가 매우 가관인데 후렴구의 마무리는 '좋아한다고 해주지 않으면 죽일 거야!'라는 가사이다(...).
(50초부터)
실질적인 출세작인 玉姫様(1984)로 귀기어린 전반부 퍼포먼스와 더 맛이 간 후반부 퍼포먼스(국내에선 일명 낑꽁깡으로 통하기도..;;;)가 압권인 곡.[6]
踊れない(1984). 역시나 기이한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곡.
パンク蛹化の女(1984). 토가와 준의 열창이 돋보이는 펑크 록. 요한 파헬벨의 카논을 샘플링해서 만든 蛹化の女을 펑크로 또 다시 개조했다. 90년대 홍대의 조선 펑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バージンブルース(1989). 소설가 겸 전직 참의원이었던 노사카 아키유키(野坂昭如) 부른 동명의 곡을 리메이크한 것.#원곡 사토 히사야스 감독의 『이름 없는 여자들』의 OST로 쓰였다.
4. 여담
- 시력이 0.01로 엄청난 난시라 타인과 이야기할 때 사람의 얼굴이 아닌 벽이나 다른 곳을 쳐다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 패기발랄한 초차원 컨셉과 달리 평소 성격은 얌전한 편. 본인은 그런 이상한 사람 별로 안좋아한다고(...).
- 전혀 엉뚱한 4차원의 대답이 나오는 식의 전파 토크로 인기를 끌었으며 라디오에서도 토크력은 나쁘지 않은 편.
- 모델이자 배우로 활동하던 동생인 토가와 쿄코[7] 가 있었고 친한 자매지간이었으나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2002년 목을 매어 자살했다.
- 서브컬쳐 계열에선 얀데레의 시초라거나 전파계의 시초라거나 광녀컨셉, 로리타 패션의 선두주자 등등 여러가지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 현재 토가와 준의 리즈시절과 상당히 비슷한 행보와 컨셉을 그나마 잇는 아티스트라면 역시 시이나 링고가 가장 근접한 편이다. 그렇다고 토가와 준이 시이나 링고처럼 우익논란이 있는 건 아니지만...
- 밴드 시절엔 80년대 버블 시대와 일본의 밴드 붐에 힘입어 신디 로퍼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한 컨셉이나 무대매너를 많이 보여줬다. 의외로 본판은 예쁘다는 것 역시 따라갔다(...).
[1] おしりだって洗ってほしい..로 다쟈레.[2] 바로 가축인 야프에서 따 왔다(...).[3] 퍼포먼스나 컨셉이 꽤 괴랄하지만 이래봬도 평론가들이 뽑은 일본 100대 명반에서 20위권 이내의 순위를 차지한 명반이다. 참고로 LOUDNESS나 BOØWY, 나카지마 미유키의 앨범보다도 순위가 높다.[4] 수록곡 赤い戦車(붉은 전차)의 가사가 니혼바시 요코의 만화 G전장 헤븐즈 도어를 통해 소개되었고, 한국에도 정발판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려졌다[5] 참고로 이들은 BiS나 유루메루모같은 '''아이돌''' 그룹과 합작한 적도 있었다. BiS와 낸 앨범에는 토가와의 솔로 곡인 好き好き大好き를 노이즈 록 스타일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6] 참고로 작곡은 YMO의 호소노 하루오미 가 했는데..비슷한 시기에 그가 작곡한 다른 곡으로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금구나 마츠다 세이코의 핑크 모차르트 등이 있다(...).[7] 유리가면 드라마판에서 미즈키 씨 역으로 출연.[8] 원래 토가와가 히라사와의 팬이었다고 한다.